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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분노(삼상 22:6-10)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9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다윗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라 4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아마 이때 즈음이면 이들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용사들로 훈련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혈혈단신으로 도망하던 모습이 아닌,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상당한 위협으로 등장한 다윗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사울의 분노는 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다윗이 세력을 규합해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울이 분노를 터트릴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울 왕에게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에돔 사람 도엑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7에서는 그가 사울의 목자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성스러운 빵을 받아먹고 또한 골리앗의 칼을 들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놉에서 있었던 일을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분노를 표출할 희생양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도엑은 마치 아히멜렉을 다윗의 협력자로 몰아버렸습니다.

도엑은 왜 성전에 있었을까요? 그는 왜 그 순간에 성전에 있었을까요?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은 죄를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며 영적인 필요를 채우며, 영적인 능력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도엑은 그 성전에 갔지만, 죄를 씻은 것도 아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거나 영적인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21:7에서 그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다고 표현하는데, 아마도 속죄의식이나 정결의식을 위해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씻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종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규정된 율법을 준수해버리고, 해치움으로써, 다시 세상에 나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면죄부만을 목적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면죄부는 중세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도엑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도 아니었고, 죄를 씻는 곳도 아니었고, 거룩한 모습을 회복하는 장소가 되지도 못했습니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더러움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그랬습니다. 가인도 아벨처럼 제사를 드렸지만, 믿음으로 드린 제사는 아벨 뿐이었습니다. 가인의 마음은 하나님께 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제사 이후의 행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통해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건 제사가 아니라고 거부하였습니다. 예배자로 섰던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생각으로 접근하는 예배의 가공할만한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배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세상 속에서 잘 살기 위해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한다면 결국 도엑이나 가인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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