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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저항 (눅 22:47-53)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을 때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한밤중에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해 가는 그런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예수님을 체포하는 그 현장 가운데서 안내를 했던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였습니다.

가롯 유다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런 예수님을 배반하는 길로 걸어가게 됐을까요? 가롯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처음에는 주님을 보고 믿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따르던 사람이었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가롯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이 열렸던 사람이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일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과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겠다고 따랐던, 그런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였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처럼 헌신하고 우리처럼 새벽 기도에도 나오고, 우리처럼 봉사도 하고 열심히 했던 사람 가운데, 그런데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는데, 씨를 뿌릴 새 어떤 것은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가시밭에 떨어지기도 할 때,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너무나도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으나,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과 환란 가운데 그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제물의 유혹에 이끌려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하게 되겠는데, 바로 가롯 유다는 제물의 유혹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던 그 가롯 유다도 배신하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은 더더욱 그럴 위험성이 많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늘 항상 깨어 기도하며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난 주간 우리가 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그 과정들을 묵상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도 마귀의 시험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시험에 들게 된다고 한다면, 정말 조그만 것 하나 때문에, 정말 작은 것 하나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시험에 들기도 하고, 재물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주를 위하여 헌신했던 사람인데 조그마한 재물 하나에 시험 들기도 하고, 죄악으로 빠져버리기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항상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도 작은 것 하나에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죄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완벽하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도 없었고,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흔들리기 쉽고, 언제나 넘어지기 쉬운 우리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지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롯 유다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게 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보면, 유대인들이 인사하는 방식이었던 입맞춤을 통해서, 평화의 모습을 하면서 기호를 삼습니다. 가롯 유다는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서로 신호를 주고받기를 내가 가서 인사하는 그 사람이, 내가 입맞춤을 하면서 문안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이니까 체포하라고 그렇게 알려준 것이죠. 오늘처럼 이렇게 핸드폰도 있어서 불을 밝힐 수도 있고, 야간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는 그런 그 당시가 아니라, 정말 깜깜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그런 밤에, 누가 누군지도 잘 알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동요도 일어날 수 있고 여러 가지 민란도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바로 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었는데,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해서 제사장들은 가롯 유다를 매수한 것이고,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이렇게 구호를 짜서 기호를 짜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악을 행하는 일에 정말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모든 거 하나 어디 하나 잘못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악을 행하는 것은 얼마나 이렇게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가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자고 하고 주의 일을 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열정을 내지 않고, 나태한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고 계시고, 내 심령이 죽을 것 같다 말씀하시면서,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그냥 피곤하니까 잠만 자고, 정말 주를 위한 선한 일에는 열정을 내지 아니하고, 그냥 쿨쿨 잠만 자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악을 행할 때는 얼마나 그렇게 열정적으로 자기 돈 들여가면서, 남을 해하고 악을 행하는 데는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정말 열정을 내고 있을 때, 과연 나는 악을 위해서 열정을 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열정을 내고 있는가? 선한 일에 열정을 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선한 일에 뒤로 물러서고 있는가? 주를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불러주시는 것이, 할 일이 많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추수할 곡식이 많다고 말씀하시고, 주를 위해서 해야 될 일들이 많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 다른 사람들이 열정을 내겠지 하면서, 뒤로 물러서고만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이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주여 선한 일에 열정을 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몰려드는 그 순간,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나서서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누구냐면, 베드로라고 하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 들고, 그리고 저항하기 시작했는데요. 칼을 빼어 들어서 내려쳤다고 하는 것이 사람을 찌르지는 못하고 귀가 잘려 나갔는데, 그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제자들은 미적거리고 있고, 뒤로 빠져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래도 한 사람만큼은 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이 상황 가운데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종의 귀를 만지고 그 귀를 붙여주시며 치유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오늘 하루 지내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하신 이 말씀 묵상하며 하루 종일 주 앞에 설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생활하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은 못 참겠다 하면서, 열을 내면서 분노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 분노하고, 언제 화를 내는가? 우리는 나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죠.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옳고,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되면, 칼을 빼어 들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격이 나빠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요. 정당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고, 내가 옳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칼을 휘두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옳고 정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 가운데서, 칼을 빼어 들고 있는 것인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래 베드로야. 네가 잘했다.”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 그리고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고 계셨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그래야만 선이 이길 수 있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때로는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악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래도 선을 보호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목적이 선하면 방법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그런 관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왜 그런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까?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부터 20절의 말씀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악한 것을 보면 화를 내고 분노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처럼 보이는데, 잘못하는 것을 보면 분노하고 화를 내서 책망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 같은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이 성내는 방법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를 잃을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칼을 빼어 흔드는 것은 베드로가 분노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사람이 성내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칼을 빼어드는 것은 악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귀에게 사탄에게 우리가 지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고, 칼을 빼어드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우리가 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싸움은 어떤 싸움인가?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영적인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기를,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실력으로 무찔러버리고, 우리가 칼을 사용해서 무찔러 버리고, 돈을 사용해서 무찔러 버리고, 어떤 힘을 통해서 무찔러버리면, 우리가 승리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승리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칼을 쓴다면 화를 낸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탄에게 지는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싸움은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화를 부추기고 있는 그 사탄의 권세에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죠. 우리로 하여금 “그래. 화를 내라. 칼을 빼어 들어라. 네가 화를 내고, 싸워야 된다.”라고 우리를 충동질하고 있는, 그 사탄 마귀와 싸워서, 적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 안에 적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싸움에서 이겨야 영적으로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그냥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혈과 육이라고 하는 것은 피를 가지고 있고 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씨름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씨름의 대상이 무엇이냐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네 가지 종류를 다 각각 다른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악의 영들이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고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고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바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고 영적인 사탄 마귀 권세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폭력을 쓰게 만들고 있고, 칼을 빼어 들게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사탄의 권세와 싸워서 이기는 게, 그게 진정한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그 싸움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항상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악한 일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누군가 나를 괴롭히면 그 사람을 향해서 복수하게 만들고 싶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고, 누군가 우리를 향해서 때리면 나도 그 사람을 때려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 사탄의 시험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요.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을 향해서 원수를 갖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을 눌러 이기고,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이겨서 오히려 우리가 사랑으로 대하고, 나를 향해서 잘못하는 사람을 향해서 오히려 은혜를 베풀고 기도해 주고 영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싸움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데, 그 싸움에서 우리 모두가 승리해 나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 군인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검을 가지고 체포하러 오는 이 순간에 우리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보복하지도 못하고 칼을 빼어 들지도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끌려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순간에 그러면 당하고만 있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지금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선이 승리하게 만드실 하나님이며, 지금은 포악한 사람들이 활개치고 나쁜 사람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승리케 하실 거라고 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싸워 이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결국 승리케 해 주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의 말씀 가운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44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도를 많이 닦는다고 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내가 원수를 갚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시며, 내가 억울함을 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 손으로 갚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정의롭게 인도해 주실 것이고, 결국에는 믿음이 승리하게 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내가 성을 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분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우리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이건 참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 가운데 생겨날 때,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말씀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잡히시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나약하게 잡히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군병들이 와서 예수님을 잡아갈 때,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이 없이 힘없이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채찍질할 때 우리들을 위하여 그 채찍질을 다 맞으셨습니다. 침배 들 때 우리의 수치를 대신하여, 그 침을 그대로 다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할 때 그 멸시와 천대를 주님께서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심지어 마지막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고 완전히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키셔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미래를 위한 신앙이 아니라, 바로 오늘 고난당하는 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믿음으로 지키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신앙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결국 부활하시고 만류의 주 만왕의 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으로 서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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