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설 (잠 11:16-31)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

오늘은 상당히 긴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들을 한 절씩 한 절씩 축조해 가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또 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지금은 좀 치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는다고 했는데요. 유덕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덕이 있다.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설명을 해드린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자비롭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자애롭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자를 말하게 되는데요.

종종 갑질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하고, 또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그런 깐깐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 앞에서는 상당히 조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기도 하고 조심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만족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벌벌 떨 수는 있겠지만, 뒤에서는 다 욕을 한다고 하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앞에서 갑질하고 있고 호통을 치고 있고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앞에서는 어떻게 항거하지 못하고 그 말에 이렇게 숙이는 것처럼 그렇게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지만, 사실은 뒤로 돌아가서 그 사람에 대해서 욕을 한다고 하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

+

그런데 누가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는가? 누가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누가 존영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깐깐하게, 그리고 아주 호통을 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자애로운 마음으로, 정말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해주는 사람들을 뒤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높게 여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악마가 되기가 쉽습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돈을 내고 음식을 주문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내 돈을 받아서 음식을 제공해야 되는 그 상황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우리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조그마한 허물, 조그마한 잘못 앞에서 화를 내기도 하고, 그 식당의 주인을 향해서 혹은 종업원을 향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나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조금만 실수를 하고, 무언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고 갑질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하면, 그런 꼬마 아이들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그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유덕한 사람이 되어야 자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조금만 유하면, 이 세상에서 조금만 내가 까다롭게 하지 아니하면, 무시를 당하고, 나에 대해서 존중을 해주지 않고, 나를 깔보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우리가 유하게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그러면 결국 손해를 당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학습한 것이죠. 그게 이 세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부드러우면 무시를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실수를 봐주고, 용납해 주고 정말 너그럽게 대하면, 나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계속 당하면서 여러 가지 피해를 겪으면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냐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화내는 것이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화를 내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것 같고, 내가 분노하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 같고, 내가 화를 내면, 빨리빨리 서비스를 해주는 것 같고, 내가 뭐라고 다그치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와서 서비스를 더 잘해주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몸에 익숙해져 버렸어요. 너그러움이 아니라 분노와 갑질과 깐깐함과 호통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자주 우리의 몸에 익숙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가 존영을 받게 될 것이다. 여자만이 아니라 유덕한 여자라고 했다고 해서 여자들만 유덕해지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그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16절 말씀에서. 그런데 이 근면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이 번역은 아무래도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한번 16절 도표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어가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라고 했을 때, “왜아리침 이트메쿠 오쉐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아리침”이라고 하는 것에 제가 색깔을 입혀놨는데요. 그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violent men, 그러니까 폭력적인 남자들, ruthless men, 무자비한 남자들이 부를 얻고, 부유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영어 성경에서는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번역과는 좀 다르게 번역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근면하게 되면”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히브리어 원문 “아리침”이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 원어는 성경 대부분의 경우에서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입니다. 그렇게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를 안타깝게도, 이상하게도 잠언서 11장 16절에서만큼은 “근면한” 남자라고 그렇게 번역을 해버려서 아쉽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이유가 아마 아쉬운 번역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잠언서를 번역하면서, 유덕한 여자 정말 nice하고, 부드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존영을 얻게 되지만,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이 번역자의 마음 가운데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으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포악한 사람이 재물을 얻으니까, “우리가, 모두가 다 포악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서, 아마 그렇게 “근면한”으로 바꾸어서 번역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말은 무엇이냐면,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도 포악한 방법을 써야 된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너그럽게 (하면) 영광을 얻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공을 못하는 길이고, 포악해져야, 갑질을 해대야, 그래야 재물도 얻고, 성공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려야, 그래야 성공해 버릴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그런 재물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밑에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서는 이 번역을 16절을 번역하면서, ruthless men gain only wealth, 그러니까 부를, 부 정도만 얻을 수 있겠지, 부를 얻을 수는 있겠지 정도로 번역을 한 거죠. 겨우 얻는다고 하는 것이 부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영생을 얻는다거나,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재물 썩어질 부에 대해서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얻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뉘앙스를 심어주면서, NIV의 성경은 번역을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6절과 연관되어서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인데요.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유덕한 여자가, 자애롭고 너그러운 여자가 존영을 얻는다고 한 그 말을, 다시 한 번 17절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인자한 자는 결국 자기의 영혼이 이롭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러나 잔인한 자는, 아까 조금 전에 16절 말씀에서 강포한 남자, 아주 포악한 남자는 재물을 얻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 잔인한 자는 결국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에, 16절에서 잔인한 자가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는다 한들, 사실은 그 재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잔인한 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해로운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17절 말씀 가운데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을 가만히 읽다 보면,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데, 잔인한 자는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하는 표현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겠습니다. 왜 인자한 자는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한 자는 왜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했을까? 왜 영과. 인자하면 왜 “몸”에는 도움이 안 되고, 잔인한 것은 왜 “영혼”에는 해롭게 안 되고, “몸”에만 해롭게 된다고 했을까? 그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나프쇼”라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나프쇼” 하는 것은 자신의 “나프쇼”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고, “쉐에로”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왜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왜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냐? 그것은 영혼과 몸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하는데요. synecdoche라고 하죠. 영어로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영혼만 이롭게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무슨 뜻이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에요.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얘기는 잔인한 자가 자신의 몸만 해롭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영혼 영혼이라든지 몸이라든지 이런 단어들이 많이 사용될 때가 있는데요. 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몸만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이 다 포함된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 시편의 말씀은 영혼만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왜? 네가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 “네가 왜 그렇게 낙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몸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든지, 영혼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조금만 배우신 분들은 몸과 영혼을 막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하고, 이것은 영혼만 얘기했으니까 영혼만 가르키는 것이고, 몸을 이야기했으니까 몸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마는, 제유법으로 사용됐다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이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인자한 사람은 친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잔인한 사람은 누구를 해롭게 합니까?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결론은 잔인하게 할 것이 아니라, 인자하게 대하며 살라. 그것이 16절 17절의 결론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악인이 받아 가지는 것은 허무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것이고, 결국은 의미 없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겠죠. 그러나 공의를 뿌린 자, 다시 말하자면 의를 추구하는 자는 확실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보상이 확실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아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요. 의를 행하면 생명에 이르는 것이고, 악을 따르면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까? 조금 이해가 안 되죠. 왜냐하면 공의를 지키든, 악을 따르든 다 살고, 다 죽잖아요. 그죠? 사는 게 의인만 삽니까? 악인도 삽니까? 의인도 살고 악인도 살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또 다 죽잖아요? 악인만 죽습니까? 의인도 죽습니까? 의인도 죽잖아요?

그런데 왜 오늘 19절의 말씀에서는 공의를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를 것이고, 악을 따르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를 거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공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계속 살 것이라고 하는 말인가요? 공의를 지키는 사람은 지금 당장 악을 따르는 자는 지금 당장 죽을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기서 생명에 이른다.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의미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은 장수하고, 악인은 단명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망하고 흥한다고 하는 표현을 “생명에 이르고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표현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흥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생명과 사망이라고 하는 단어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0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마음이 굽은 자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행위가 온전한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 영적인 것인데, 어떻게 굽죠? 물건이라고 하면, 구부릴 수 있고, 철사라면 구부릴 수 있지만, 마음은 어떻게 굽어졌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 행에 있는 말을 대조해 보면 됩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말은, 그런 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르키는 것이죠.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굳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을 얻으리라.” 악인은 결국 지금은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이야기고, 의인의 경우에는 결국 구원을 받고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니까, 그러니까 의를 행하며 살라고 하는 말씀이겠습니다.

22절 말씀이죠.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의 금고이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그것은 우리가 외모를 멋있게 꾸미는 것보다도, 예쁘게 치장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삼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 삼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죠? 진중하게, 사려 깊게, 예의 바르게, 모든 일들을 잘 생각해서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그러한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멋지게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습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씀일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 말씀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의인이 소망을 품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 의인의 소원은 결국 선한 일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가 선한 일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겠지만, 악인이 그 악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24절에서부터 26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구제하면서 너그러운 삶을 살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비를 베풀고 자산을 베풀며 살리는 것이 그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부유해지는 길이고, 과도히 아끼고 구두쇠처럼 살고 나만을 위해서 살면 아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살면, 그러면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곡식을 판다고 하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것 곡식을 파는 것이 무엇입니까? 독점을 말하는 거겠죠. 독점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도, 그냥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것을 이야기할 텐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힘든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여유롭게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여유로운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풍족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선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고, 악을 행하게 되면 결국은 악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죠.

28절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는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내가 재물을 의지하게 되면,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이 우리들에게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재물을 의지해서 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이고, 의인이 누군가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정말 해로운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국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지만, 그리고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의 종 종밖에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고요.

30절 말씀.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의롭게 사는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고,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니까,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것이 아니라, 정말 의롭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3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오.” 결국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생을 얻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31절의 교훈입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 쭉 살펴봤는데 이 말씀 전체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결론. 결론이 생각이 안 납니까? 선을 베풀며 살자.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자. 베푸는 삶을 살자. 인자하게 대하며 살자.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결론인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요? 왜 우리는 인자할 수 없고, 왜 우리는 너그러울 수 없고, 왜 우리는 옹졸하고, 화를 내고, 갑질을 해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면, 재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져서, 그 재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갑질하고 폭력을 쓰고 무자비한 그런 일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재물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아닌 제물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 속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어떤, 자신의 힘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결국 그 행동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갑질로 나오고, 화내는 것으로 나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물의 우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말씀에서 전체적으로 해 주시는 말씀이 그런 사람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재물을 숭배하면 망하게 됩니까? 왜냐하면 우상은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합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약속은, 이 재물을 섬기면 너에게 행복을 줄 것이고, 너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하면서 온갖 좋은 약속들을 다 해야 됩니다. 하지만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이 그 약속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느냐? 행복을 주지 않아요. 제물이 약속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느냐?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 않아요.

마치 사악한 정치인처럼, 선거 전에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언제 공약을 했는 듯이 다 잊어버리는 사악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우상이라고 하는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온갖 좋은 약속을 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고, 나에게 절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을 하지만, 그 사탄의 말대로 행했다가는 정말 그 사탄이 약속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자하게 대하고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게 되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게 손해 보는 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너그럽게 대하자.” 누구에게요? 누구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될까요? 실수한 사람들에게, 내가 돈을 냈는데 그 돈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해주지 못하고 실수한 사람들에게, 그 돈만큼 가치를 해내라고 윽박지르고 갑질을 해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너그럽게. 지금 섬기고 있는 그 웨이터가,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공무원이,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직원이, 나의 아들 나의 딸이 거기 서 있다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세요.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차 앞에 끼어드는 그 초보 운전자들에게 자유롭게 대보세요.

물론 법과 질서를 교란하고 이러한 자애로움을 악용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레리 버켓(Larry Burkett)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쓴 <성경 속의 경영학>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크리스찬 사업가가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챕터(chapter)에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레리 버켓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비즈니스를 경영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책을 써내려가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크리스찬 사업가라고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적절하게 지시하고 적절하게 안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손해만을 끼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해고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징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포악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그래서 조그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악랄한 방식으로 갑질을 해대는 것은 전혀 크리스천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정말 정말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양극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극단은 무엇이냐면 금욕주의라고 하는 극단이에요. 그래서 그 금욕주의를 따라서 돈을 버려야만 하고,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고 고통을 자초하면서 살아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금욕주의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적인 접근은 성경 전체의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금욕주와는 정반대의 다른 방향이 다른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탐욕주의의 생각들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삼기면서 그 돈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소득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정말 그 우상을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사는 삶과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양극단이 아니라 성경적인 균형 잡힌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말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먼저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받은 종이라고 한다면,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그 돈을 나에게 빌려간 사람에게 모질게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엄청난 은혜를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으며, 용서하지 못할 실수가 어디 있겠고, 우리가 너그럽지 못할 일들이 허물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을 베풀고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복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세상에 세뇌 작업과는 반대로 선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잘 되고 과도히 아끼는 자는 오히려 망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우리가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에 이런 복음성가가 있었어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하네.” 진리예요.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884 total views,  133 views today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배려와 멸시 (잠 11:12-13) +++ 사랑의 역설 (잠 11:16-31)

우리는 두절을 읽었는데요. 14절의 말씀 그리고 15절의 말씀이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의 말씀의 경우에는 보증을 서는 것에 관한 교훈을 해주고 있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보증을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증 서지 마라. 보증을 서게 된다면, 해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러니까 함부로 보증을 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증 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작년이었던가요? 작년이죠! 작년 9월에 잠언서 6장 1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근거해서,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보증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을 아주 깊게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보증을 안 서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힘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이웃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말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보증을 서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 보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벌써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다 잊으셨다고 한다면, 예전에 제가 했던 그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설교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이번 주 이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리게 될 텐데요. 이 설교 홈페이지에 링크를 걸어 놓을 테니까 , 예전에 우매한 보증에 대해서 설교했던 내용을 링크해 놓을 테니까, 보증에 관해서 다시 한번 듣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하는 것으로 15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

+

그래서 오늘 두 절을 읽었지만 한 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 한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대요.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된대요. 그러니까 지략이 있는 게 좋겠죠? 지략이 있어야 됩니다. 끝!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지략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죠.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말 사전을 살펴보니까, “어떤 일이나 문제를 명철하게 포착하고 분석 및 평가하여 해결 대책을 능숙하게 세우는 뛰어난 슬기 그리고 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 어떤 사건, 어떠한 난처한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빨리 분석 평가하고, 그 해결책을 빨리 해결해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지혜, 슬기, 계책, 계략,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지략들이 많으면 평안하겠지만, 이런 지략이 없다고 한다면,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고, 정말 힘들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지략이 많아야 된다. 지략이 있어야 된다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근데 지략이 많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지략이 많아집니까? 아니잖아요.

지략이 있고 싶어요. 근데 지략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떤 문제를 만났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습니다. 정말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완전히 잘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슬기로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뭐 노력한다고 됩니까? 어떻게 그런 지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지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지략이 없는 지혜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좀 머리 좀 써라. 좀 생각 좀 해봐라. 좀 지략을 세워서, 좀 대처를 해라. 백날 이야기한다고 해서 됩니까? 안돼요. 그렇게 태어났는데, 아무리 지략이 있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들, 지략이 생겨나겠습니까? 생겨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략이 없으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지략을 많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어도, 내게서는 그런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머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 같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나 혼자 생각하면 해결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인들에게 가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런 일들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어머니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는 것이죠. 전문가에게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나는 의학 지식이 없어요. 나는 아무런 건강에 대한 상식이 없어요. 하지만 의사에게 가서 물어보는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오은영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고, 이런저런 전문가들에게, 아니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비록 우둔해서,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없지만, 지략이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귀를 기울이면 지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아서,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그리고 그 조언을 듣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얻느니라.” 평안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략이 “뛰어나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략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저 사람의 지략을 듣고,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많은 지략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실수를 줄이게 되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줄이게 되면서, 그래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의 경우에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기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왕이 여러 사람들의 신하들의 이야기들과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무슨 불평이 있고, 어떠한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결정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왕이 아닌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사람들의 지혜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 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보면, 이것은 네모나요. 이런 컵이 있으면, 이 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 네모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이 컵을 바라보면서, “아, 이것은 네모나구나”라고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네모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습니다. 한 사람은 네모나다고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동그랗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것만을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 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열어야, 지략이 많아지는 것이고,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한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서,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나무둥치와 같다. 나무둥치처럼, 커다란 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코끼리가 나무둥치 같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 흐물흐물하고, 이렇게 길쭉하게 생겨서 움직이는데, 마치 뱀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나뭇잎과 같이 생겼다고, 그 넓은 나뭇잎과 같아서, 그래서 그 나뭇잎과 같은 것으로 내에게 부채질을 하면 시원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3명의 소경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한 소경은 코끼리에 배를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코끼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에 그 뿔을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어떤 창과 같은 것이라고 아주 뾰족한 창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소경들이 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각 조그마한 부분을 만져놓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왜? 내가 만졌으니까,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코끼리에 대해서 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투는 겁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 앞에서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조그마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진리라고 하는 그 엄청나게 큰 진리를 우리들의 알량한 머릿속으로 다 집어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 일부분만 보고 있는 우리가 내가 진리를 다 보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조금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지하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귀를 기울여야 되는,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하면서, 저 사람이 틀렸다가 아니라, 나랑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가 본 부분과 저 사람이 본 부분이 다른 부분을 보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있고,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의 나의 의견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의견을 그냥 내 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마주 앉아서 나는 이것을 보았는데, 너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맞추어 보면서, 코끼리 코끼리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고, 더 나은 그런 파악을 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가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략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해결책을 얻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100%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말 완벽하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지 아니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와의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략이 많아야 돼요! 지략을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게 아니라, 다양한 지략을 같이 모아서, 들어야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해결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고, 내가 이해한 성경 말씀, 내가 알고 있는 신앙, 내가 알고 있는 그 교리,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죽여야 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국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내가 이 컵에 한쪽 면만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둔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데요.

그런 우리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똑같이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거 원인데, 왜 네모라고만 이야기하느냐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이 교조주의에 빠져서, 도무지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망하게 될 것이다.

망하게 되는 길로 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눈을 닫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려서,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부분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그 부분적인 진실 속에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지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놔야 해요. 우리들이 진리 앞에서 겸손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일부만 볼 수 있구나! 내가 전체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모습만을 보고 바라보고 있고 저 뒤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보지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극히 일부분이며,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지략이 많아지는 길이고, 그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신앙생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 엉터리고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이 얄팍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해는 우리들의 지략은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지략에 의해서 교정받아야 되고 수정받아야 되고 보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해 나가는 가운데, 영적으로 같이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믿습니까? 한 사람이면 어떻게 된다고요? 패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면 어떻게 돼요? 망하는 거예요. 내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면, 내가 맞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 가운데 있으면, 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고,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렇게 깨달은 것이 내가 잘못 깨달을 수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교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면을 내가 보지 못했었구나! 우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아서, 서로 보완해 주고, 그리고 함께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해석 공동체로 우리들을 불러주신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잘못 이해했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 공동체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은 똑같은 본문을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전혀 잘못된 길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해석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을 할 때,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가?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고민하고, 혼자 나 홀로 있다가, 그렇게 해서 내가 결정해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혼자 결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같이 의논하고, 같이 대화하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만드셨어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 가운데 하나가, 세 가지 규례 가운데 하나가 결혼의 규례입니다. 하나는 노동의 규례이고, 또 하나는 안식의 규례이고, 또 하나가 이 결혼의 규례라고 하는 것인데, 태초에 만드신 이 세 가지 법칙이, 이 규례가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을 이 부부로 짝 지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남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여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같이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서로 보완하고 도우라고 하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같던가요? 생각하는 것이 완전 정반대던가요? 완전 반대예요! 왜 그렇게 반대인지 모르겠어요. 꼭 반대로 생각해요. 왜 반대로 생각할까요? 그래야 온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면 망하는데,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보완하고 완충하고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보아서, 실수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인 것이죠.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아내의 말을 잘 듣자!” 이런 얘기하면, “목사님, 왜 남편 말을 잘 듣자는 얘기는 안 합니까?”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보니까, 아내분들은 말 안 해도 잘 들어요. 남자들이 문제지!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그냥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그런 게 문제란 말이에요.

서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야기하면서 같이 의논해야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야 돼요? 부부가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더 들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도, 그 아이가 3살짜리 꼬마 애든지, 다섯 살짜리 꼬마애든지,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아빠 생각에는 이렇고, 엄마 생각에는 이런데,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그 아이에게 물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 꼬마 아이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꼬마 아이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꼬마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되고, 또한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실수를 적게 하고, 우리가 평안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 가보니까요. 정말 그래요.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애들은 가라”가 아니라, 아이들도 같이 앉혀놓고, 처음부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빠가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내가 이 직장을 옮겼으면 좋겠니? 안 옮겼으면 좋겠니? 아내랑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데 부부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꼬마 아이를 앉혀놓고 같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아이에게 아빠가 직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고생이 많고, 이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서 직장을 어떻게 옮기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네 생각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논어의 술이편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 선생님이 계시는데, 착한 사람이, 착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따르면 되는 것이고,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든, 다 선생님이라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긍정적인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사람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지략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지략을 듣되, 그 지략들을 겸손하게 들으면서, 그리고 무엇이 가장 바른 선택인지, 스스로 그리고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나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 당나귀가 있는데, 왜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을 태우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또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젊은이는 나귀를 타고 가고, 어른은, 노인은 걷게 하다니,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서로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타고, 아들은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까, 또 옆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나쁜 부모가 있나, 어른은 자기가 편하자고 나귀를 타고 가고, 아들은 저렇게 걸어가게 만들다니, 부모가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위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니까,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나귀가 얼마나 불쌍하냐? 저 나귀에게 두 사람이 타서, 저렇게 나귀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두 사람이 나귀를 매달고, 시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아빠와 아들이 나를 막대기에 매달고 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 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강에 빠졌다고 하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수많은 지략들, 수많은 지혜들,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러면 누구의 말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의 말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요? 내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내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모님이 말한 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까? 자녀가 말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목사님이 말한 걸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다 의견이 다르면, 누구의 뜻을 따라가는 게 제일 현명한 일이죠?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정답은) 옳은 걸 따라가야 됩니다. 누가 이야기를 했든,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 옳은 것은 때때로 우리 꼬마 아이가 말할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이웃집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모님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입을 통해서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죠. 지략을 다 듣고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아, 그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떠한 것을 따라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경배하라고 하는 말을 했는데, 그러한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략이 아니라, 잘못된 유혹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여기 있자고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략을 듣는 것은 듣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할 것은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욕심에 따른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들의 탐욕의 마음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고, 때로는 내 자존심 때문에 이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시의 판단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가면서, 그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나갔던 것과는 달리, 우리들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보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신앙적으로 포장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포장하고, 정말 정당한 것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교만함에 근거해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담력의 마음 가운데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어리석음이고, 지략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략을 없게 만드는 결정이어서, 결국은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약점이고 그게 우리들의 허물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 우리들의 더러운 죄성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서, 수많은 지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하여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에 맞는 바른 판단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14,911 total views,  83 views today

배려와 멸시 (잠 11:12-13)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들의 이웃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더라도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며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 까발리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며 숨겨주는 그런 자가 지혜로운 자요. 신실한 자라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고요. 그렇지 않고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그 잘못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잘못을 또 이야기하고, 또 비난하고 이야깃거리 삼고 가십거리로 삼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이니까,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실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허물이 많고 실수 투성이고, 뿐만 아니라 모순 투성이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고,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은 이율배반적이고, 그리고 뒤로는 여러 가지 악하고 잘못된 일들을 많이 저지르는, 허물많은 그런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연약한 자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허물이 많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

+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고, 악한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러한 허물들을 쉽게 알아채지만, 내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별로 보지 못하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만 분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너무나도 크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너무나 심각한 실수인 것처럼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실수들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는, 정말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 말씀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형제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잘못, 우리 이웃에게 있는 너무나도 작은 실수, 허물들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한 것처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그렇게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정작 내 자신에게 있는 들보와 같은 커다란 허물들, 너무나도 큰 악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허물과 실수들이, 그리고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고 또 여러 사회 관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그러한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물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며, 그리고 그 잘못을 자꾸만 드러내고 말하고 다니고, 그 사람을 모욕 주려고 하는 그런 태도는 아주 어리석은 자의 태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볼 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덮어두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여야, 그게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리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고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고 잘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냐면,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 옆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의 영적인 거울입니다.

한번 옆사람을 한번 바라보세요. 거울처럼 보입니까? 거울처럼 안 보입니까? 거울이에요. 거울 한번 보세요. 내 얼굴이 보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울로 봐야 하는 겁니다. 저 악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내 더러운 모습을 그냥 드러내주는, 나의 영적인 더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영적인 거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수많은 허물과 단점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사람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 사람의 죄악을 떠들고 다닐 게 아니라, 내가, 나도 그러한 상황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나도 저 사람의 형편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잘못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내 모습이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니, 더 더 심각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들의 남편과 우리들의 아내와 우리 부모님과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상사와 직원들이 우리가 관계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내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내게도 그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분노하는 모습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실수하는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무책임한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어떠한 모습을 보이냐면, 그런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왜 멸시합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멸시하게 되면 멸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는 그 순간, 나는 그런 죄에서부터 자유롭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꿰뚫어보고 계셔요. “너도 똑같은 죄인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옆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이웃의 잘못을 바라보게 될 때,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의 죄악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잘못한 사람을 보면서 숨겨주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다른 곳을 살펴보면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15편 4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편 15편 4절의 말씀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으로 나온 구절이 바로 1편 15편 4절의 말씀인데요.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이런 자격과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그 항목 가운데 하나가 어떤 항목이 있냐면,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라고 시편 15편 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 11장의 말씀과 시편 15편의 말씀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멸시하지 않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멸시하지 않는 자가 신실한 자라고 잠언서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말하기를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누가 경건한 사람인가?”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합니까? 시편을 썼던 다윗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야 됩니까? 잠언을 쓴 솔로몬의 말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됩니까? 누구 말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까? 어느 게 맞죠? 시편을 따라야 한다? 잠언을 따라야 한다? 다윗을 따라야 한다? 솔로몬을 따라야 된다? 애라, 모르겠다?

성경이 모순되는 표현을 하고 있을 때에는,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실 때는 어떤 의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시편에서는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멸시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묵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시편 15편에서 의로운 자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 말은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저런 나쁜 놈” “저런 악한 사람” “저런 정말 의롭지 못한 사람” 하면서 비난하고 욕해도 괜찮다고 하는 의미에서 멸시하는 자가 의롭고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가는 자라고 말씀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시편에서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망령된 자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정말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거짓말을 슬쩍슬쩍 하면서, 남의 것을 훔쳐가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압제해가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잘 나가는 그런 모순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의롭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봤자, 성공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어봤자, 아무런 이 세상에서 낙이 없고, 오히려 악한 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이 하나님의 믿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믿음을 저버리고 저렇게 저 악한 사람들처럼, 저 사람들처럼 그냥 마음대로 살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부러운 마음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이게 뭐지? 도대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게 뭐지? 이렇게 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야 된단 말인가?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솟아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편 15편에서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그런 망령된 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고, 그들이 성공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박수를 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어도,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시편 15편에서 말씀해 주시는 그들의 성공을 멸시해야 되는 것이지,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들을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의로운 자요. 경건한 자요. 주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15편의 말씀은, 그러니까 그렇게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비판하고 욕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는 말들을 막 내 뱉어도,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잠언서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겸손하게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했을 때,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을 범하고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잘못들을 사람들에게 소문 내며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고, 두루 다니며 “너, 이런 얘기 들어봤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가십거리를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아주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흔히 죄책감을 안 느끼면서, 마음껏 죄를 짓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게 남의 일을 험담하며 다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니요! 그거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다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 가운데 그 누구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누군가 죄를 범했다고 한다면, 누가 누군가 큰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멸시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한담하며 그러한 비밀들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그냥 아 덮어두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냥 모른 척 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무조건 쉬쉬 하면서, 덮어두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의 중직자가 혹은 목사님이 혹은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이 잘못을 하면, 그냥 쉬쉬하고 덮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 하는 것이 그게 은혜스러운 것이라고 굳건하게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말씀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3절 말씀에서 신실한 자는 그러한 것들을 숨긴다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악이 있어도,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어도, 그냥 방관하며 방치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지, 그리고 숨겨두라고 하는 것,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욕하고 그렇게 모욕을 주고 멸시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런 의미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정말 그냥 방치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가운데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게 만들고, 그래서 회복시켜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가족입니다. 영적인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영적인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형제님” “자매님”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영적인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개념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 집안에 우리 큰아들이 잘못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모른 척합니까?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한 것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죠. 다루어서 그 잘못을 교정하고, 회개하게 만들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제는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족의 의무요. 가족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역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가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굳이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굳이 공동체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다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낙망하기도 하고, 쉽게 믿음이 떨어지기도 하고, 우리는 죄와 허물들이 많을 범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인데요. 그러한 우리들이 서로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잘못한 사람이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들고, 그리고 회개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회 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 안에 목사님들이 계시고 장로님들이 계시고 권사님들이 계시고 우리 집사님들이 계시고, 또 교사들이 있고, 그렇게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거룩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근데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허물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건 내 일 아니야”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할 것도 아니고, 잠언서의 말씀에, 멸시하지도 말라고 했고, 드러내지도 말라고 했고,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숨긴다고 했으니까,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우리 가운데 아픔이 있으면, 잘못이 있으면, 그것이 새 살이 돋아나도록, 암이 있으면 잘라버리고, 상처가 있으면 잘 약을 발라서 온전한 새살이 도달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그래서 영적으로 함께 성숙해져 가도록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게 했는데, 왜 만났는가? 왜냐하면 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서로 약점을 가지고 있고,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단점과 약점들을 보완해주고, 그리고 이제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부부가 만들어진 거죠.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서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허점과 단점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워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을 더욱더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자녀들이 약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을 내칠 이유가 아니라, 그 아이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부모님이 더욱더 어떤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미워할 이유가 아니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목회자가 성도들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에 의해서 목회자도 우리가 영적인 가족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되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내가 내 형제를 얻은 것이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소문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만 만나서, 이런 잘못을 저지를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해야 되는 것이죠.

조용히 권면해야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해줘야 할 것이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교회의 말해서, 교회가 권고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가족으로 참여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가짜로 들어와 있는 외부인일 수밖에 없어서, 결국에는 출교시키는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영적으로 권면을 해 줘야 되는 것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가서, “너, 이런 잘못했지?” 하면서 그렇게 얘기하라는 게 아니고, 죄를 지적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접근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죄는 당신만 짓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그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우리의 그 완고함이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회개의 길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처럼 지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해야 되는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무슨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바리새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은 크게 보면서, 마치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인 양,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정죄함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회개의 기회를 갖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고 그리고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에 우리들이 얼마나 자꾸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는지 몰라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도 바리새인처럼 접근을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어요. “이 나쁜 놈들. 회개하라. 그런 사악한 나쁜 놈들.” 교회가 바리새인처럼 세상을 향해서 정죄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교회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너나 잘하시오”라고 하는 반응만 일으키게 만들어, 이 세상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들을 지금 하고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잠언서의 말씀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바리새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우리의 이웃을 망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나도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러기에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며 연약한 자들은 그들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교만한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멸시와 비난의 길로 나갈 게 아니라, 사랑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며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허물들과 실수들과 잘못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실수들과 허물들과 잘못들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고,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고 사랑으로 회복시켜주는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188 total views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 (잠 11:3) +++ 배려와 멸시 (잠 11:12-13)

이 세상은 참 엉망징창입니다. 비교적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의롭게 산 만큼의 보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정말 사악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정말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참 엉망진창처럼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것들이 참 절실하게 느껴졌던 때가 언제였냐면 왜정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왜정시대에 승승장구하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잡히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온 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아주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고 그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합니다. “안 되는구나!” 예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뒤에서 후원했던 뒤에서 돕던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변절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다 소용없다고, 그렇게 해봤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변절이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어쩌면 우리 왜정시대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둘씩 변절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볼 수가 있는데요. 그렇게 변절하게 된 것은 조선이 다시 독립할 것을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조선의 독립은 오지 않는 겁니다.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힘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다시 저 막강한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우리나라가 다시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가망성은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결국 일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 체념과 푸념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전향을 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자식들이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전향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

왜정시대 때 그러한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러한 일들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르고, 악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그런 참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면서, 사람들은 영적인 변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양심에 따라서 살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다 소용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변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변절이 자꾸만 일어나는 한 가운데 그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들을 향해서도 계속해서 이 세상은 계속해서 유혹하는 겁니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의롭게 살아봤자 쓸모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봤자 너만 손해 보는 것이다고 하는 그런 유혹의 소리들을 자꾸만 들으면서 전향을 하라고 하는 그 목소리 앞에 우리는 흔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살려면 전향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이 세상에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의로움은 다 내버리고 이 세상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번민 고민들이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그렇게 영적인 변절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요. 그렇게 영적인 변절을 할 게 아니라, 의롭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고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11장 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언서는 오늘 분명하게 우리를 향해서 선언하고 있는데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재물이 최고고 재물이 있어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의롭게 살면서 가난하게 살 것이 아니라, 정의를 지키면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고 악과 타협을 하면서 그래서 제물을 많이 쌓아서 그렇게 제물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장땡이라고 우리를 향해서 유혹하고 있는데, 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은 우리를 건질 능력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물이 우리를 건져낼 능력이 없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크리스찬들은 재물을 멀리하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제물이 우리를 건질 수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있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은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유익합니다. 재물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고, 조금 가지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진다면 훨씬 더 더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이 우리를 건질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이 본문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재물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없는 것이고, 재물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살릴 능력이 재물에게는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재물의 유용성을 알기 때문에, 그 재물의 유용성을 너무나도 좋게 평가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재물이 유용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넘어서서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용성이 있는 겁니다. 재물이 있으면 아주 편리하고 도움이 되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모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유용한 것이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재물의 유용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데요. 여기에도 유용하고, 저기에도 유용하고, 여기에도 유용하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유용한 것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재물의 유용 정도가 아니라 재물은 전능하다고까지 착각하게 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재물이 전능한 게 아닐까?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돈이라고 하면 못할 것이 없고, 결국은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부터 해결해낼 수 있는 재물의 전능성이 있다고 믿게 되는 그런 결과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재물은 유익할 수는 있지만 전능하지는 않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이 유용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재물을 수단으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불을 잘 사용해서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듯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그 유용성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유용성을 이용해서 많은 이득을 유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물을 우리가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재물의 유용성을 넘어서서 전능성에게까지 우리가 기대를 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그 재물이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가 섬기는 신의 위치에까지 올라가 버리게 되는 겁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전능하신 그 재물 앞에서 내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그 재물이 시키는 대로 재물이 자신이 내가 그 유용성을 줄 테니까 전능성을 줄 테니까, 내 말에 복종하라고 그 재물이 우리를 시키는 대로 재물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대로 그 재물에 복종하면서 사는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분명하게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는 있지만, 오늘 4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를 살릴 수 없다. 궁극적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예일 뿐이요.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재물은 전능성이 없기 때문에, 결국 진노의 날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재물이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우상을 섬길 때, 당하게 되는 피해를 우리가 고스란히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되고 기쁨이 넘치고, 우리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풍성함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게 되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 우상이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채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착취해 가듯이, 우리가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결국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 그 전능하신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 결국 우리가 피해를 당하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그 점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재물은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없고 전능성을 갖지 못한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가? 4절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공의가 우리를 살린다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의가 우리를 살린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살 길이지, 재물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살 길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의를 따라 살게 되면 성경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 성경 말씀대로 우리들의 현실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느냐? 이것이 우리들에게 문제인데요. 우리가 의를 따라 살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고, 재물을 따라 살게 되면 망하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야, 그래야 좋은 것인데, 성경 말씀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가 있고 망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러한 일들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보디발의 집에서 정말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 것이죠. 주인을 섬기되 정말 주께 하듯이 섬겼고, 거룩하고 의롭게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디발의 집 안에서 얻게 된 결과가 무엇이냐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악을 행한 사람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아무런 죄가 없이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나게 된 거예요.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구나라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요. 또 하나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믿으며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을 것인데, 놀랍게도 요셉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신원해 주시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높여주시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환난에서 무엇을 얻으나?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의인은 어떻게 된다고요? 구원을 받는다. 요셉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요셉이 역전이 된 것처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고, 악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악인은 어떻게 된다고요? 자기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길은 무슨 길입니까? 악인이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죠.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번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의인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의인은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도대체 의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1번.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죄가 하나도 없이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 2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사람. 1번일까요. 2번일까요? 2번처럼 생각되시죠? 틀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단어의 의미가 어느 한 곳에서 정의된 그 의미를 다른 곳에도 무작정 대입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성경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신X지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데요. 단어의 의미는 모든 것의 의미는 그 문맥 안에서 살펴보아야 제대로 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도, 똑같은 말도, 똑같은 표현도 이 상황에서 하는 말과, 이 상황에서 하는 말과, 이 상황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코미디언이 농담을 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상황에서 했던 그 말과, 그리고 재판정에서 나오는 그 말과, 그리고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나오는 말이 문자적으로는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단어 그 표현이 어느 세팅해서 전해졌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번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 단어의 의미를 모든 성경 구절에 천편 일률적으로 대입해서, 그래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예요.

성경에 사용되는 의인의 개념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개념도 있어요.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느 구절에서 그런 의미로 의인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할 때는 그런 의미의 의인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그 의인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살아서 죄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그런 의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의인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선언받은 그런 의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법정적인 의미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의의는 무슨 의미일까요? 1번도 아니고 2번도,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닌데, 그럼 뭐냐? 3번입니다. 3번을 제가 얘기를 안 해줬어요. 죄송합니다. 3번은 뭐냐하면, 완벽하게 의로운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하게 살고 싶은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애쓰고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의인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럼 반대적으로 어떤 사람이 여기서 악인입니까? 악인도 성경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각각 다를 수가 있겠는데요. 그 악인은 어떤 악인, 여기서는 어떤 악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아니 구약 대부분의 문맥에서는, 신약이 아닌 구약의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3번의 의미로 의인이 주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9절 말씀에서는 노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표현하고 있고, 완전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면 노아가 지금까지 죄를 하나도 지은 것 없고 한 번도 미워한 적도 없고 한 번도 화낸 적이 없고 한 번도 교만한 적이 없고 한 번도 시기와 질투도 없이 정말 예수님같이 똑같이 완벽한 그런 의인이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에요. 노아가 당대 의인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대의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노아만큼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했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면서 살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그런 노아가 실수가 있었겠어요? 없겠어요? 있었을 거예요. 어떤 때는 잠자고 있는데 누가 괴롭히면 신경질도 낼 수도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 조그마한 잘못들을 많이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당대의 모든 악인들에 비하자면, 그는 의로운 사람임에 분명하고, 그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완전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욥기 1장 1절에서도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스 땅의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욥에게 가서 욥을 먼지를 털어보니 먼지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한, 하나님께서 그 욥을 보면 “너는 죄를 하나도 안 졌네. 그냥 천국에 와.”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인생을 욥이 살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요. 그런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나중에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욥을, 욥을 책망하실 때에, 그 욥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거예요.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은 어땠을까요? 마태복음 1장 19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요셉이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서 예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한 인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그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경건한 유대인이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사용되는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대체로 3번의 의미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고요. 여기서 잠언서에서 의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어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체로 악을 지으며 악의 길로 가려는 사람과는 반대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살려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완벽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는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 말씀이 진짜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이예요.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 말씀은 정말 가슴이 뛰는 말씀인데, 하나님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진짜입니까?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여러 가지 환란과 아픔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이 던지고 싶은 질문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정말 구원해 주실 겁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 주실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인데요.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 망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고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해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지 멋대로 살고 악을 행하며 살고 속이면서 살아도 잘 먹고 잘 살고 아프지도 않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런데 정말 이 잠언서의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의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 거죠. 실감되지 않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 왜 안 구원해 줘요? 근데 왜 하나님 내 문제는 해결 안 해줘요? 근데 하나님 괴로워 죽겠는데, 왜 그냥 이 상태로 방치해둬요? 왜 응답을 안 해줘요?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에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이 큰 괴리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니엘의 새 친구들처럼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더라.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까 건져주신다고 믿었어요.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를 풀물불 가운데 던져 넣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건져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풀무불에 던졌는데, 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아, 순 가짜였구나. 뻥이었구나.” 하면서 낙망할 게 아니라, 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믿음을 변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은 의인을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 성도를 건져주시는 것이죠. 의인을 건져주신다고 하는 말은 우리 성도를 건져주신다고 하는 말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그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이며 보편적인 약속입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약속을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틀에 가두어 놓고 하나의 법칙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어떠한 법칙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고, 둘에서 하나 빼면 하나고 그렇게 정답이 딱딱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까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연히 건져주셔야 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당연히 이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셔야만 된다고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우리가 그런 우리의 틀에 맞출 수가 없고, 하나님의 하나님을 그 틀에 가두어 둘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천편 일률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져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뜻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허락해 주실지는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래서 정말 우리가 기도한 대로 될지 기도한 대로는 정반대로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겠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건져주실 수도 있겠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실 때도 있는데, 그 뜻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앞에서 겸손하게 순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고,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자세이며,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머리로 이 자연의 이치조차도 제대로 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머리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그 계획과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오묘하신 섭리 앞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는 겁니다. 욥처럼 욥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이렇게 결국 고백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여기서 그는 누구예요? 하나님이 아시나니, 내가 가는 길을 내가 몰라요. 도대체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가서 이쪽으로 가서 이 길로 가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아오리라. 풀무를 통과하면서 나를 하나님께서 단련하시는 그 고통이 너무나도 크지만, 그러나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신 목적이기에,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목적이 아니라, 나를 순금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뜻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야 될 것이라고 믿을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잠언서의 말씀이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의인을 성도를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신다는 말이 거짓말이에요? 참말이에요? 안 이루어지는데도, 안 이루어지는 일이 있어도 참말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은 보편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봄이 되면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결국 열매가 맺힐 거라고 하는 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저도 옥상에 심었어요. 왜 심었을까요? 땅이 비록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으면 뭐가 날 거라고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심었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면 모든 씨가 다 나나요? 아니요.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수고하고 애썼으나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씨를 뿌리면 열매를 얻게 될 거라고 하는 말이 틀렸죠? 틀렸습니까? 열매가 안 맺혀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는다. 진리예요?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예요. 안 믿는 씨가 있어도 진리예요.

기도의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듣겠고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셔요. 그런데 안 들어주는 것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거짓말한 건가요? 아니요. 부모님의 마음과 같아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너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게 말해. 너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게 말해. 내가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줄게.” 그래요. “아빠, 나 자동차 하나만 사주세요.” “아니 그건 내가 능력이 안돼서 못 사주는데.”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가요? 아니요? 사랑의 말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걸어가다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만 같아요.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은 승승장구하는 이 황당한 세상을 살아가야 해요. 도대체 이런 황당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엉터리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세요. 믿을 수 있어요? 없어요?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데,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환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길로, 선하신 길로, 푸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데, 도중에 가는 길에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 앞에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50대 초반에 늦둥이를 하나 나신 분이 계신데요. 그분의 페이스북을 보면 그 늦둥이하고 얼마나 재밌게 지내는지 참 샘이 날 정도입니다. 근데 그 늦둥이 아들이 이번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코로나에 걸려서 아기가 괴로워하는 그 모습을 본 그분이 그 아이의 코를 코에 입을 대고 쭉쭉 빨아서 콧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빨아서 그렇게 몇 번 했더니, 이 아이가 다 낳은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기분 좋게 막 돌아다니고 있는 영상을 찍어서 올렸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기분 좋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적어 놓으면서, 그런데 덕분에 아빠는, 기저질환이 있는 아빠는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면서, 나는 이렇게 아픈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는 글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도들을 환난에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인생의 길 가운데 때로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무리 기도에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아무리 엎드려도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도, 내가 가는 길을 나는 모르지만 오직 그분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달련하신 후에는 순금 같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4 total views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 (잠 11:3)

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잠언서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11장 3절 한 절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겠지만,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성실한 사람이 어떻게 된다고요? 성실한 사람은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고요? “자기를 인도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자기를 인도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자기를 인도하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은 채, 그냥 흘러버리기가 쉬운데요. “자기를 인도한다” 도대체 “자기를 인도한다”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인도하는 게 도대체 뭘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다음 행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면, 그 의미가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그 다음 행이 무슨 내용이냐면, “사악한 자의 패역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인도한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의 반대 말인가요?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의 반대말로, 자기를 인도한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 성실한 성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인도한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어떤 뜻이냐면, 망하지 않게 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망할 리가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고,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성공한다는 얘기겠죠.

+

+

사악한 사람 폐업한 사람은 망하게 되겠지만, 성실한 사람은 망하지 않을 것이고,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서 11장 3절에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잠언서 11장 3절의 말씀은 누가 성공하는 것이고 누 망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누가 성공하는 것인가? 성실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들 가운데 성공하고 싶지 않으신 분 계십니까? 여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 망하고 싶은분 분 계십니까? 아닐 거예요. 모두가 다 망하고 싶지 않고, 모두가 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데요. 우리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런데 이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누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인가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건 바로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얘기입니다.

성실하지 않고, 편법을 쓰고,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을 쓰고, 여러 가지 잘못된, 이런 잘못된 일들을 통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망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성공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서 11장 3절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는데요. 첫 번째 던지고 싶은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다면 과연 성공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패역한 사람은 망하게 되고, 성실한 사람은 망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게를 인도하게 될 것이고, 성공할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도대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이죠.

성공이 무엇입니까? 성공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에,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높은 지위에 올라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엄청난 부를 이루거나, 아니면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체로 맞는 이야기이죠.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서 탁월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 탁월한 성과를 드러낸 사람들,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성공을 정의한다고 하면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공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우리의 성공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을 묵상해 본다고 한다면,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성공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으로 이해해야 되겠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목적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공이 무엇이냐?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높은 지위에 올라가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어떤 뛰어난 업적을 이루는 그런 것들이 성공이 아니라,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성공한 사람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사람이 소수인 것이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역시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고, 어떤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도 역시 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의에 의해서는 대부분은 다 실패자일 수밖에 없고, 대부분은 다 성공자일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성공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나를 만드시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살게 만드신 그 목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과 목적대로 따라 살아가는 삶, 그 삶이 성공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마다 주어진 사명, 그리고 사람들마다 주어진 목적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선 사람들을 만드실 때 똑같이 찍어내신 것이 아니라, 마치 비누 공장에서 비누를 찍어내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찍어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각각 다르게 아주 독특하게 창조하셨어요. 우리 옆에 사람 한번 쳐다볼까요? 한번 쳐다보세요. 독특해요? 독특하지 않아요? 정말 독특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죠. 따라서 성공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다 다른 겁니다.

사람마다 다 성공이 성공의 기준이 다 달라요. 그래서 이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느냐 하면 오케스트라에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안에는 여러 악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이올린이 있고 비올라가 있고 첼로가 있고, 트럼펫이 있고 트럼펫이 있나요? 아무튼 클라리넷이 있고, 오보에도 있고, 그리고 percussion 심벌도 있고,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있는데요. 그 악기들이 성공한다고 하면, 어떤 게 성공입니까? 바이올린은 어떤 소리를 내야 성공이에요. 바이올린의 소리를 내야 성공이에요. 첼로는 첼로의 소리를 내야 성공해요. 심벌은 심벌의 소리를 내야 성공이에요. 그 악보에 맞추어서, 지휘자가 요구하는 그 순간에 뻥뻥 치면서, 그때 그 소리를 정확하게 내야 성공이 되는 것이죠. 모든 악기가 다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소리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그 순간에, 그 음색에 따라서 정확하게 지휘자의 컨덕팅에 따라서 소리를 아름답게 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게 성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우리가 합창을 하다 보면, 소프라노 엘토 테너 베이스가 있는데, 4부로 쫙 맞춰서 찬양을 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제가 테너를 막 하면, 옆에 베이스 하겠다고 서 있는 분이 제 목소리를 따라서 막 부르는 분이 계신데, 그럼 성공이에요? 성공이 아니에요? 성공이 아니에요. 베이스는 베이스를 노래 불러야지, 테너는 테너를 불러야 되고, 엘토는 엘토를 불러야 되고, 소프라는 소프라을 불러야, 그게 성공인 것이지 옆에 사람을 그대로 따라서 부르면 성공이 아니라 망하게 되는 겁니다.

각각 다른 소리를, 각각 다른 시간에 내야만 하는 오케스트라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각각 다르게 창조해 주셔서 그 사람에게 맞는 성공의 기준이 있는 것이죠. 이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는 것이고, 이 사람에게 주어진 목적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주셨는데, 거기에 맞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에 따라 산다고 하면, 그게 바로 성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드러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높은 직책을 얻게 되거나, 많은 돈을 벌게 되거나, 아니면 뛰어난 업적을 누려야만 그게 성공인 것이고, 나처럼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많이 번 게 아니라 내게는 조그마한 정도의 돈밖에 없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나는 우리 가정생활만 잘 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았고, 나는 실패한 삶을 산 것이라고 그렇게 자조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대통령이 된 사람이 성공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이번에 대통령을 누가 당선될 것 같습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많이 하지만, 저쪽 동네 가면 다르게 얘기하더라고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살던 사람이 그래서 대통령의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공했다라고 평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건 그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고, 우리들에게는 또 다른 몫이 있는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신앙생활의 분야에 있어서도 성공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목사가 되면 성공한 겁니까? 장로가 되면 성공한 겁니까? 권사가 되면 성공한 겁니까? 그것이 성공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대하고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누가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성실한 자가 성공한다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실은 속임수가 없이 아주 신실하게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있었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두 종들은 주인이 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주인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기게 된 것이죠. 그 사람은 전혀 누가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쉬고 놀아라고 이야기해도,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주인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사역했는가를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처럼, 성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박수 쳐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환호해 주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꾸준하게 해나가는 자가 신실한 자 성실한 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 성실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노예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실할 수가 없죠. 일을 하는데, 일을 하는데, 내 마음의 자세가 노예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성실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없어요. 노예들은 기쁨이 없는 겁니다. 그냥 쉬고 싶고, 마지 못해 일하고, 자기를 억압하기 때문에, 자기가 일하지 아니하면 혼나기 때문에, 맞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노예의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노예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실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면, 주인이 보면 일을 하지만, 보지 않으면 쉬게 되는 거죠.

그러면 누가 성실할 수 있는가? 노예의 멘탈리티가 아니라, 그 일 자체에서 사명의식을 가지고,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기쁘고, 그리고 그 일 자체가 내가 내게 주어진 그 사명 자체가 참 내게 주어진 그 기쁨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일하는 자라야 그래야 성실할 수가 있는 것이죠.

주인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하는 자마다 성실하게 할 수가 있는데요. 예를 들자면 어떤 분들을 말할 수 있냐면, 어머니와 같은 분들이에요. 어머니가 자녀들을 양육하고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때, 누가 시켜서 합니까? 법이 하라고 하니까 하나요? 그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걸 줄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줄까? 이 아이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일까?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정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서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우리 어머니들에게 있는 것이 보여지게 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정말 성실하게 정말 신실하게 일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교회도 보면 그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특별히 그런 교회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누가 시키기 때문에, 혹은 박수 쳐주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냥 자발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난 기쁨이 되고 감동이 됩니다. 어떤 때는 그냥 교회 와서 청소를 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청소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또 주차장을 쓰는 분도 계시고 또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나가면서 정말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위해서 내가 헌신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까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제가 얼마나 고개가 숙여지고 얼마나 참 감동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교회들의 교회 보배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전혀 애정이 없이 일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특별히 그렇게 애정이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냐면, 교역자들 가운데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교역자 팀으로서 사역을 해 나가는데, 그 옆에서 바라볼 때 제 마음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왜 저 사람은 목회자의 길로 간다고 결심을 했을까? 왜 주를 위해서 하는 일들을 짜증 내고 일을 하기를 싫어하고, 일이 더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고, 일이 많아지는 것을 힘들어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교역자를 볼 때 제 마음 가운데 엄청나게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랬을까? 처음 목회자의 길로 가려고 했을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에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했지만, 도중에 그 마음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정말 애정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노예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교역자를 보게 될 때 제 마음이 굉장히 혼란스럽고, 어떻게 하면 이분의 그 첫사랑을 회복시켜줄 수 있을까? 담임 목회자로서 엄청난 고민이 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그런 교역자와 함께 사역하는 것을 중단해야만 하는 그런 안타까운 결정을 내려야 할 될 때도 있었는데요. 그런 일이 있다 보면 성도님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목사님, 왜 그분 그만뒀습니까? 그분 괜찮은 분 같았었는데요. 그분 설교를 꽤 잘 하시는 것 같았는데요? 내가 은혜 많이 받았는데요. 왜 그분 그만뒀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어요.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가능하면 그분이 가지고 있었던 첫 사랑을 회복시켜주고 싶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게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될 때는 너무나도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요.

오늘 잠언서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면 성실한 자가 성공할 수 있다. 성실한 자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 어떤 사역이든지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사역이든지 가정에서 남편으로서의 사명이든지 아내로서의 사명이든지 아니면 회사에서 회사의 직원으로서의 사명이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그 사명이든지 어떠한 것이 내게 주어져 있든지 간에, 성실한 마음으로 사역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서의 말씀을 보니까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가 성실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겠죠. 그래서 제가 이 잠언서 11장 3절 말씀을 읽고 그래서 설교 제목을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라고 하는 제목을 잡았어요. 잡아놓고 오늘 잠언서 11장 3절을 연구를, 설교 제목은 미리 잡아놓지 않습니까? 미리 잡아놓고 그러고 나서 잠언서 11장 3절을 연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아이고 성경 말씀을 연구하다 보니까 번역이 좀 애매하게 돼 있습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정직. 정직이라고 하는 것은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직이잖아요.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직의 의미죠. 숨기지 않고, 속이지 않고,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하는 그걸 가르쳐서 우리는 정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그런데 제가 이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니까, 이 말은 정직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올곧은 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아요. 히브리어로 보면 예샤림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임”이라고 하는 것은 “임”하는 것은 복수형인데요. 이게 예샤림 하면 곧은, 바른, 그러니까 구부러지지 않은 똑바로 된, 그런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샤림.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샤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직 “정직한 자의 성실은”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굳은 사람 바른 사람 굽어지지 않은 아주 “올곧은 사람이 가지는 그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맞은 번역 같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까 전부 다 upright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이게 솔직해야 된다 그런 의미를 여기서 표현하는 게 아니고, 아주 강직한 사람 굳은 사람 바른 사람 구부러짐이 없는 사람 그런 의미를 의미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성실과 어쩌면 같은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로운 자 성실한 자는 성공을 하게 되는 것이고, 사악한 자, 꾸부러진 자, 제대로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술수를 쓰고 제대로 하지 않고 뭔가 편법을 쓰고 하는 그런 자들은 결국 망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잠언서 11장 3절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솔직한 것, 이거 honest하고는 좀 다른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성실에는 솔직함도 포함되는 내용이기는 하겠지만, 정직의 문제는 나중에 그 정직의 문제가 나올 때 따로 다루도록 하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냥 강직하고 구부러지지 않고 그래서 아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성공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성실한 자가 성공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세 번째 우리의 질문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왜 우리는 성실할 수 없는가? 성실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 성공하고 싶은데, 그런데 왜 우리는 성실하지 못할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실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실한 것 자체의 기쁨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성실할 수가 있는 거죠. 사랑하기 때문에 성실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자녀들에 대한 성실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그건 내가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쁨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인데,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것을 끝까지 해나가기가 신실하게 해 나가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성실하게 하기보다는 어느 샛길이 없을까? 빠른 길이 없을까? 손쉽게 달성할 길이 없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학생이라고 한다면 학생이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써야 합니까?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나요? 열심히 공부하는 거죠.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쉬지 않고 기도 공부하고 그러면 그 학생은 점수를 많이 받는 겁니다. 높은 점수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이 재밌나요?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뭘 하고 싶어요? 게임도 하고 싶고, 나가 놀고 싶기도 하고, 또는 친구들하고 놀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좋은 점수를 얻고 싶은 그 마음이 있다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학생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컨닝하는 거죠. 혹은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서, 성실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성공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죠. 왜 우리는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성실 자체가 힘든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번 대학 입학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서 낙방을 하게 되면, 재수의 길을 걸어가게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데 그 재수를 결심할 때만 해도, 나는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왜 성공하지 못하죠? 그 마음이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을 때는 그런 마음이 간절한데, 조금 하루 이틀 지나면 그 마음이 약해져 버려요. 놀고 싶은 마음, 쉬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른 데 신경 써야 될 것들도 많고, 자꾸 다른 일들이 자꾸만 생각이 처음 떨어졌을 때 그 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성실하게 일년 내내 한다고 하면, 성공하겠지만, 그 마음이 그때 그 마음 첫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거죠. 그래서 성실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재수를 하면서도, 성실하지 못하니까, 자꾸만 오히려 재수하기 전보다 점수가 더 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이 나오는 거에요.

다이어트에 왜 실패합니까? 처음 충격을 받아서 내가 살 빼야 되겠다 할 때는 살 빼고 싶은 마음이 막 들어요. 그런데 먹을 거 앞에 보면, 무너지는 거죠. 맛있는 치킨을 보면서, 맛있는 야식을 보면서,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면서, 무너져 버리는 거에요. 왜 우리는 성실하지 못한가? 성실하지 못하는 것은 성실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이죠.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별로 재미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성실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손쉬운 성공을 갈망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잠시 잠깐은 성공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 잘 속여서 그래서 내가 승리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 같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그건 결국 망하는 길이다.

성실한 사람은 그것이 더딘 것 같아도 늦는 것 같아도, 성실한 자가 승리하는 거라고 말씀해 주고, 따라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성실하지 못한 채 쉬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쉽게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성실하게 인내하며 노력하는 것은 성공의 길이다. 이러한 잠언서의 교훈을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늘 우리들에게 유혹이 있어요. 그 유혹이 어떤 유혹이죠? 그 옛날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선악과의 유혹이죠. 하나님께서는 어떤 길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셨는데, 그런데 하와에게 나타난 그 유혹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방법이 아닌 선악과를 먹어버리고, 단순히 아주 짧은 순간에 하나님처럼 되는 그 길을 지름길이 있다는 거에요. 그 길로 가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승인하지 아니한 그 길로 가서 성공할 것을 유혹하는 길이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떤 유혹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기다리는 그것보다, 하갈이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되는 빠른 길, 손 쉬운 길, 성실하지 못한 길로 성공하는 그런 유혹이 주어졌던 것이죠.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유혹이 왔는데요.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그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지만, 사탄은 예수님에게 유혹하기를 돌로 떡을 만들어 버려라. 그렇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고, 내에게 절하기만 하면, 사탄에게 절하기만 하면,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아도,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내게 절하기만 하면, 이 세상 모두를 너에게 주겠다고 하는 그런 유혹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그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공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은 시험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성실하게 살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성실하지 못한 방법, 패역한 방법, 구부러진 방법,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표절을 하거나, 컨닝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일확천금을 꿈꾸고 갑작스러운 성공을 꿈꾸고 무엇인가를 확 획득하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그런 유혹들이 우리들에게 있을 텐데요. 그런 유혹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다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서 성실한 길보다는 성실하지 못한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다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만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 연약해서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다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바른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또 가고 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모습을 가진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 앞에 나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 total views

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 (잠 11:3)

교만과 겸손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오늘 잠언서 11장 2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한국말로 번역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을 보면, 그냥 밋밋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좀 더, 참 멋있게 이 표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공부를 한번 해볼까요? 한번 보겠습니다.

어떻게 읽느냐 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지금 가운데에 있는 것이 히브리어인데요. 어떻게 읽냐면 “바 자돈 봐야보 칼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바”라고 하는 것은 온다는 얘기고, “자돈”이라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하는 말이고, “봐야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온다라고 하는 말이고, “칼론”이라고 하는 것은 수치, 욕, 이런 의미입니다. 교만이 오면 수치가 온다라고 하는 말인데요. 제가 핑크빛으로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교만이라고 나타내는, 교만이라고 하는 말을 나타내는 “자돈”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수치를 의미하는 “칼론”이라고 하는 단어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죠? 운이 같아요. 운이. 우리 한시 공부하다 보면, 한시는 뒤에 운율이 같은 운으로 해서, 이렇게 한시를 만들어 가듯이, 이 히브리어 언어에서도 시를 표현할 때, 어떤 문장을 표현할 때 운율을 맞추어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 자돈 봐야보 칼론”이라고 얘기해서, “자돈” “칼론”이라고 하는 교만과 수치를 같은 운율로 해가지고, 기억에 팍팍 남도록, “자돈” “칼론” “자돈”하면 “칼론”이 생각나도록. 교만하면 수치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도록 이렇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

+

그러니까, 이제는 치워줘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하는 우리 한국말 번역보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훨씬 더 운율이 있어서, “아, 그렇구나” “자돈” 교만이 생기면, “칼론” 수치가 오는구나라고 하는 것이 생생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박히도록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겸손한 자야말로 정말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도대체 그러면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교만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이 찾아오면,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정말 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 교만인데, 우리가 그러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고 하는 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싹트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될 것인데, 도대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만이 무엇일까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한 다음에, 뭔가 열심히 수고한 다음에,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한 다음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만족감, 혹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게 되는 기쁨, 그런 것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있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특성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그대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선을 행하면 기쁘고, 악을 행하면 정말 고통스럽고 슬픈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긍휼을 베풀어주고, 용서를 베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어떠한 것이 나타나냐면, 기쁨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그 수고의 대가로 어떤 열매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기쁨과 만족감이 생겨나게 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생겨나는 것, 아,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 생겨나고,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나고, 자부심이 생겨나는 것은 교만한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기쁨이야말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그런 만족감 자부심 이런 거야말로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불교나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자꾸만 비워야 한다고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래서 우리들의 기쁨도 슬픔도 만족함도 궁핍함도 그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다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아예 그런 것 자체를 다 없애버려서, 그냥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런 평온함, 어떤 거 하나에 따라서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그냥 이 세상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냥 내 마음 가운데 잔잔한 고요함,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게 불교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기쁨도 별로 좋은 게 아니에요. 별로 그게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만족함도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아마 유교적인 관점에서도 어떤 그런 관점들이 조금씩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유교적인 배경에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불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 선을 행할 가운데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쳐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만족함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자체를 성경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정말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정죄시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다음에 수많은 수확을 거두게 될 때, 기쁨이 넘치게 되고 즐거움을 얻게 되고 성취감을 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잠언서 11장 2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교만이 오면 수치가 따라올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러므로 이것은 별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런 교만이 무엇일까? 도대체 이 교만이 무엇이고, 교만이 아닌 만족 교만이 아닌 기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못한 교만, 결국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자부심이나 정당한 기쁨 정당한 행복한 마음을 넘어서서,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는 왜곡된 기쁨, 왜곡된 만족, 왜곡된 성취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당한 기쁨 괜찮은데요. 정당한 성취감 정당한 자부심 이런 것들은 괜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금 잘못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기쁨 왜곡되어 나타나는 만족감 왜곡되어 나타나는 성취감들은 그것은 바로 교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엇이냐면, 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마음이 동반된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고 더 낫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내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무시하는 그런 악한 마음이 수반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단순한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시와 모독, 멸시가 수반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사악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어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합시다.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정말 성실하게 살아서 그리고 정말 시험 공부를 잘해가지고 그래서 전교에서 1등하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그래서 자기가 지금까지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것은 정당한 거고 괜찮은 생각입니다. 기뻐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괜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어떤 마음으로 변하게 되냐면,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과 무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아주 깔보는 그런 마음의 태도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죠. “저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놈들” 그러면서 비난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로 나타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모습, 그러니까 기쁨이 정당한 기쁨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깻잎 한 장 차이와 같아서, 김 한 장 차이와 같아서, 순식간에 그런 정당한 기쁨에서부터 교만으로 쉽게 변해버릴 수가 있겠는데요. 아무튼 그러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정당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그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내 마음에 대한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그런 단계로 나가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를 성경에서 찾는다고 하면 누가 있죠?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할 때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것이고, 내가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이 행복해지게 되는 그런 요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고, 나와 견주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쉽게 나타나는 겁니다. 아니, 목사라고 하면 이 정도는 돼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장로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아? 권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집사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앞에서 찬양 인도를 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그렇게 기준을 세워놓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요.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행한 것은 다 잘한 거예요. 못한 게 없어요. 십일조 드려야죠. 금식해야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죠. 다 해야 될 일들이에요. 그런데 그 일들을 하는 가운데,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경멸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죠.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교만함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예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헤롯 왕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왕은 연설을 하는데,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박수를 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교만함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아무인이고, 그리고 자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된 것이냥,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된 것인냥, 자신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셨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데요. 그 느브갓네살은 전 세계를 통일한 통일왕국의 군주였습니다. 어느 날 왕궁 위에 올라가서 자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밑에 굴복해버렸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이 세상을 얻어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 느브갓네살을 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참 겸손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왕 위에 오르고 난 다음에,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가운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면서 분노하면서 말을 내기 시작했는데요. 교만한 마음이 들 때는 분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을 깔보게 되는 것이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민수기 20장 10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모세와 아론은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되는데요. 도대체 모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모세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처음 사역할 때에는 늘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해서 하시는 일을 보라”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된 그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게 하고, 모세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가운데, 모세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자기가 기적을 베푸는 것인냥 착각하고, 그리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이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와 아론이 물을 내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내시는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교만해져 버린 모습이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웃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사는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 길 가운데 그 법궤가 흔들리는 그 순간에 달려가서 그 법궤를 만지고 그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을 했는데요. 어쩌면 거룩한 동기처럼 보이고,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선한 동기처럼 보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웃사를 쳐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해석하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웃사의 마음 가운데 들어있는 교만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웃사는 지금까지 이 법궤를 지키고 관리하면서, 내가 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가 이 법궤를 보존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법궤를 대했고, 그 위기의 순간 가운데 마치 자기가 무슨 신이나 된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돼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평가를 내렸는데, 아마 의미 있는 해석이 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정당한 기쁨과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까? 정당한 자부심은 무엇이고, 그 정당한 자부심을 넘어선 나쁜 교만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차이가 무엇일까라고 하는 질문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릅니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분이 써놓은 글인데, 그나마 참 많은 울림이 있는 글이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자라고 하시는 분이 쓴 <자부심과 교만>이라고 하는 그런 글입니다. 들꽃은 김형자 씨의 아마 호 같아요.

“자부심과 교만”

그대는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생각은 자부심이요

하나님은 나 만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겸손히 낮추어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요

결코 남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안정감이 있어 누구든 기댈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갈대와 같아서 아무도 그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자부심은 갖지만

하나님이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교만한 사람은 아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무척 사랑하신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우리교회 만큼 좋은 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교만한 교회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부심은 있어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 의식속에서 살고 자기 도취 속에서 살지않는 것입니다

아 정확한 신학적인 논설의 글은 아니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에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그리고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그런 시가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도대체 자부심과 교만 사이의 그 경계가 무엇일까? 이걸 깊이 좀 생각해 봤어요. 무엇보다도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계산에 넣었느냐? 넣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될 것 같습니다. 자부심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자부심이라고 한다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모든 것을 했다고 하는 그런 나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나타나는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불평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이것을 이루어냈다고 하는 그런 감사의 마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만한 사람은 내가 이것을 이루는 데 있어서 아무도 돕지 않고, 내가 자수성가했고 아무런 상황이 없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가운데 내가 이것을 해냈다고 하는 불평이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반면에, 교만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어,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적 개념이나 혹은 유교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서, 그래서 교만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다 드러내지 않아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고정관념이라고 할까요. 자꾸만 숨겨야만,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관점들이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교적인 관점이거든요. 유교적인 관점은 드러내지 않고, 아닌 척하고, 숨기고 그냥 조용히 있고 드러내지 않는, 그것이 마치 가장 겸손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보니까, 그 미국 교회 성도님들은 정말 겸손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이분들을 볼 때, 참 신앙의 연륜이 있구나! 정말 영적인 훈련이 참 잘 되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많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나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될 때, 이분들이 정말 자기를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막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성실하게 사역을 잘하는 모습을 봤는데요.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하고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이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놓으면서도 겸손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다 무명으로만 해야 되잖아요? 뭘 해도 교회에 무슨 비품 하나 바쳐도, 목사님 무명으로 해주세요. 제가 한 걸로 밝혀주지 말아주세요. 자꾸만 그렇게 많이 하는데, 대부분 다 이게 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나온 겁니다. 자꾸 제가 미국 교회 얘기해서 좀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갔던 미국 교회를 가보니까요. 교회 모든 것에 헌금자의 이름이 다 적혀 있어요. 교회에 비치해 놓은 성경책에도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교회 성경책 한권 비치용 성경책 한권 바칩니다. 적어놨어요. 의자에도 이 의자는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바친 의자입니다. 다 의자마다 다 적혀져 있습니다. 방마다 이 방은 아무개가 헌금을 한 돈으로 만든 방입니다. 다 이름이 다 붙여져 있어요. 다 이름을 다 써놨어요. 무명으로 하는 걸 거의 찾아보질 못했어요. 그러면서 기념하고, 정말 우리 어머니를 기억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해서, 기념해서, 어머니 기일 날, 내가 교회에 이거 조그마한 비품 하나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면, 어머니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적어서 그렇게 해서 기념으로 이렇게 드리고 하는데, 그런데 보면 겸손해요. 내가 이걸 했다고 그래가지고 막 자랑하고, 막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겸손하고 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고, 저런 것들은 헌금도 안 하는 사람들 저거 십일조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 하면서,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런 태도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런데 하는 일들을 다 이름을 적어놓으면서, 하는 걸 보면서 참 많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장학금을 줄 때도, 우리는 그냥 아무렇게, 그냥 두지만, 아무개 장학금, 누가 누구를 기념한 장학금, 그 사람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 모든 걸 할 때 이름을 다 밝혀서, 그렇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분들을 보면서 교만한 느낌을 받았냐면, 교만한 느낌을 하나도 받지 않았어요. 이분들이 정말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엄청나게 많이 느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 성도님들은 무명은 하는데, 안 하는 사람들 깔보기도 하고, 그럴 경우가 종종 생길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는 없어요.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성경적 관점은 자부심은 강화하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는 것처럼 겸손하게 낮아진 자세로 하면서,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만이 싹 트는 가장 위험한 지점이 어디냐면 사람을 바라볼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늘 내 옆에 사람을 신경 씁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했나? 저 사람은 어떻게 했나? 그래서 저 사람보다 적게 할 수도 없고,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할 수도 없고, 비슷하게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줬어요. 그런데 어떤 과부에게는 옆전 두닢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두닢밖에 없던 그 과부가 드렸던, 그 작은 예물을 주님께서는 보시고서 정말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어요.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고, 그 상황 가운데서 드릴 수 있는 그 여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보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많이 했기 때문에 네 그래서 교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교만함일 것이고, 내가 저 사람과 늘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교만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일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를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나 자신이 행한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1절 말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면,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을 보고서 선한 일을 행하면,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이 생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바라보며, 사역한다고 하면, 자부심이 생기게 될 겁니다.

교만에는 수치가 따른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수치가 따르나요? 거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품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그 거품은 마지막 심판날 앞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 넘어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늘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이 교만의 마음들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60 total 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