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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은 영화의 면류관 (잠 16:31-33)

오늘 잠언서의 세 구절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잠언서 16장 31절 말씀을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누가 하얀 머리 가지고 있습니까? 연세는 저보다 다 많으신 것 같은데, 저만 하얗고 우리 이용임 권사님이 반백이시고, 그렇군요.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다.”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왜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니까, 염색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그러니까 제가 염색 안 한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염색을 안 한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안 하는 겁니다. 게으르고 귀찮아서 안 하는 것이고요. 그저 돈이 허비되는 것 같아서 안 하는 것뿐인 것이고, 사실 염색하는 것이 좋습니다. 염색하는 것이 괜찮습니다. 뭐 좋다고 말하기까지는 좀 그렇다고 할지라도, 염색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괜찮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단정하게 가꾸고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잘 가꾸어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예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이죠. 종종 신앙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 가운데, 좀 극단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냥 꾸미지 말고 자연인처럼, 그냥 원시적인 삶을 사는 게, 그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이 아니겠는가? 그냥 나 자신을 이렇게 가짜로 꾸미는 것은 나쁜 것이고, 원시인처럼 자연인처럼 사는 게, 그게 바람직 하나님 앞에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곤 하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셨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단정하게 꾸밀 수 있는 그러한 능력도 주셨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물론 우리가 우리의 외모를 우상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과도하게 꾸미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나 적절하게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정하게 꾸미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잠언서 16장 31절 말씀에서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을 때, 도대체 왜 하얀 머리를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 하얀 머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하얀 머리가 무엇이냐 하면, 소위 제유법적 표현으로 표현된 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하면서 제유법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요. 제유법,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인데 일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죠.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말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나타내는 그런 표현이죠. 탄생의, 탄생을 나타내는 어떤 한 일부인 요람으로, 죽음을 나타내는 일부인 어떤 무덤을 사용해서 탄생 죽음까지를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는 말도 역시 펜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물건을 통해서, 문학 또는 언론 이런 것을 나타내는, 칼은 무력 전쟁을 나타내는 그런 표현법이 바로 제유법이라고 하는 표현법이고, 이런 제유법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하얀 머리는 영화의 면류관이다”라고 했을 때, 하얀 머리는 우리들의 하얀 머리라고 하는 일부를 이용해서 무엇을 나타내는 표현일까요? 노년, 노인, 어르신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하얀 머리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겠습니다. 제가 젊습니까? 나이가 많습니까? 젊어요. 젊은 사람이 하얀 머리 가지고 있어 봤자, 영화의 면류관은 아닌 거예요. 나이가 많으신 분을 하얀 머리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제유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는 게 아니라, 노인이어야 영화로운 면류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 주변에 우리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이분들이 바로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세 드신 분 있으면, 한번 얘기해 봅시다. “영화의 면료관이시군요.” 그렇군요. 예, 감사합니다.

노인이 누구입니까? 젊은이에 비해서 여러 가지로 신체 기능이 많이 쇠약해져 버린 시기를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힘이 예전보다 약해졌고, 재정적인 능력도 예전보다 못하며, 병을 많이 달고 살고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지각 능력도 많이 떨어져서, 그래서 참 답답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인이 돼버리면, 빨리 죽어야 될 존재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어떤 사람이 했던 그런 말처럼, 빨리 죽어버려야 될 그런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운 존재이며 고귀한 존재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젊은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분들께서는 나보다 힘이 약하고, 또 재정적인 능력도 많이 떨어지고, 병을 달고 살기도 하고, 지각 능력도 많이 떨어져서, 그래서 많이 모든 장점들이 이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무시하거나 그래서 깔볼 것이 아니라, 우리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되는가? 그동안 수고하며 애쓴 그 최선의 인생을 살아오신 우리 어르신들을 보면서, 존중하고 인정하며, 그리고 적절하게 대우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노년층이 가지고 있는 그런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씀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함부로 무시할 것이 아니고, 아직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아니한 젊은 세대가 노년층의 그런 좋은 경험들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노년들을 대할 때 이분들을 존중해 주고, 그분들이 하는 그 지혜의 말씀들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그래서 존중하고 아주 인정하며, 그래서 적절하게 대우도 하는 등, 그렇게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백발이 영화로운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것만 말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반부에 또 다른 말씀을 붙이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잠언서 16장 31절 후반부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인데, 백발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해 놓고서, 그런데 그 영화의 면류관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공의로운 길에서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모든 노인들이 영화의 면류관이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노인만 되면 무조건 들어야 하고, 노인만 되면 무조건 존중받아야 하고, 노인만 되면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길을 걷는 노인이 영화의 면류관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노인이 영화의 면류관이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노년이 되는 것은, 그리고 그 노년이 영화로운 것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을 때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도 성급해버려서 실수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어요. 젊었을 때는 그냥 혈기에 무엇인가를 해버리고, 젊었을 때는 그냥 내가 마음에 닥치는 대로 해버리다가 실패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젊은 시절에 그렇게 실패의 경험들이 자산이 되어서, 그래서 연륜이 깊어가면서, 이제는 그 실패를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게 되는 것이죠. 젊었을 때는 혈기를 부리기도 했었고, 젊었을 때는 욕심을 부리기도 했었고, 그래서 방탕하게 삶을 살기도 했었고, 그래서 많은 실패를 해왔으나, 이러한 젊었을 때의 그런 실패들이 잘못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의 경험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연륜이 쌓이면서, 이제는 내가 함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되겠구나. 내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되겠구나, 내가 의의 길을 걸어가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가장 가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앞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영화의 면류관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젊었을 때 신앙생활 잘해요? 노년이 되면 신앙생활 잘해요? 노년이 되면 신앙생활을 잘해요. 젊었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활동을 하면서, 늘 실패하고 그리고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겪다 보니까 내가 이 길로 가는 것이 잘못이었구나 내가 이 길로 가는 것은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구나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들을 선택해 왔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의의 길로 걸어왔기 때문에, 이제 노년이 영화의 면류관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노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떠나 있고, 그리고 계속해서 혈기를 부리고 욕심을 부리고, 죄악의 길로 걸어간다고 한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부름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전히 악한 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노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영화의 면류관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 의의 길에 서 있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하고 있는지, 순종하며 영화의 면류관을 취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젊어서도 하나님의 의의 길로 걸어간다고 하면 그 사람도 뭐겠어요? 영화의 면류관이 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잠언서 16장 32절 말씀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아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구절과 뒤에 있는 구절이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요. 성을 빼앗는 자보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훨씬 더 낫다 더 좋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성을 빼앗는다고 했을 때, 성이라고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은 무엇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을 빼앗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목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루어야 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지는 그런 골(goal)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성이라고 하는 표현도 일종의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성을 빼앗는 것, 다시 말하자면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것,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그 일을, 그렇게 목적을 이루는 것은 정말 우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목적을 이루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려워요. 어려워요. 정말 어려워요. 성경 일독 하자 그랬는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읽자 이겁니다. 같이 서로 격려하면서 읽자. 이런 의미인 것이죠. 이룰 수 없고, 정말 우리가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을 얻으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목적을 얻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얻는 것이죠. 전쟁을 통해서 성을 뺏고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하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전쟁이 아닌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있겠는데,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떤 방법이 더 좋다는 이야기입니까? 전쟁을 하지 않는 방법이 훨씬 더 낫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면서, 우리가 화를 내면서 쟁취한다고 하면 쟁취할 수 있겠지만, 분을 내면서 화를 내면서 그리고 자기의 그 감정을 다 쏟아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이룰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분노하면서 전쟁과 같은 일을 해가면서, 내가 목표를 이룬다고 한다면, 그것은 괜찮다는 거예요? 별로라는 얘기예요? 별로다 이 말이에요. 별로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분노하지 아니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평화의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내야,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분노하는 방법을 더 잘 사용합니까? 인내하는 방법을 더 잘 사용합니까? 전쟁을 더 잘 씁니까? 평화의 방법을 더 잘 씁니까? 전쟁의 방법을 더 잘 쓰는 것이죠. 왜 우리는 전쟁의 방법을 사용하기를 원할까요? 그것은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죠? 물로 보는 거죠. 아무것도 아니네. 무시해도 되겠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시해 버려요. 하지만 화를 내고 역정을 내면, 그러면 사람들이 긴장을 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화가 나는 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바로바로 대응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화점에 가서 갑질을 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갑질도 해야 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소리부터 크게 지르고, 교통사고가 나면 누가 이겨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소리부터 지르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화의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가득 치미로 솟아오를 때,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화를 내는 것은 사탄의 방법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화를 내는 것이 사탄의 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화를 내는 방법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폭력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 사람이 의인인가, 악인인가를 먼저 규정하는 거죠.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를 먼저 판단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만일 이 사람이 불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만일 이 사람이 정말 악한 편에 있다고 판단이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분명히 나누게 된다고 한다면, 이 악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세뇌시켜 버립니다. 왜냐하면 악을 향해서 악을 이기기 위해서 폭력을 쓰면 그건 괜찮아요. 악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괜찮아요. 왜냐하면 악을 물리치기 위한 것은 의가 되기 때문에, 의인을 대적하게 되면 내가 나쁜 놈이 되지만, 악한 사람과 내가 싸우거나 악한 사람을 물리치기 위해서 내가 그 어떤 방법을 쓴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자기 세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당당한 거죠.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칼로 찔러놓고도, 내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찔렀으니까, 나는 정당하고 죽이지 못해서 오히려 더 원통하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인생들의 어리석은 마음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들이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나고, 심지어 목사님들에게서도 너무나도 쉽게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왜? 내가 지금 악과 싸우고 있어요. 내가 악을 물리쳐야 될 선한 입장에 서 있어요. 그런데 저 악한 사람을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해도 되고, 사기를 쳐도 되고, 죽여도 되고, 아니면 빼앗아도 되고, 폭력을 저질러도 되고 무조건 저 악을 이길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행위도 정당하다고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해버려서, 그런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하는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가 악에게 진 겁니다. 사탄에게 우리가 놀아난 겁니다. 사탄의 종이 되어서,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악을 저지르는가? 우리는 나쁜 짓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아, 내가 나쁜 짓을 해야 되겠다. 내가 악한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심어주신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양심이 우리가 만일 악을 행하려고 하면, 우리들의 그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기 때문에, “이런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할 수가 없어요.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게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악을 어떻게 행할 수 있느냐? 그것은 그 양심을 속이는 거예요. 뭐라고 속이느냐 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나쁜 일이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은 나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한 일이야. 내가 지금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목적은 선한 거야.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있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켜야, 비로소 악을 행할 수가 있어요.


도둑질을 하면서도 도둑이 “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야 되겠다. 내가 많이 훔쳐서 내가 도둑질을 정말 많이 하는 나쁜 놈이 돼야 되겠다.” 하면서 도둑질하는 게 아니에요.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것을 훔치는 이유는, 내가 우리 회사에서 내가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사장님이 지금 나쁘고, 저 사장님이 나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수고하며 애쓴 그 모든 이득을 사장님이 다 가져가 버리고, 나는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장님을 응징하고, 그리고 내가 받지 못한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정당하게 가져야 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 정의감으로 훔치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어떻게 알아요? 훔쳐봤어요?

부자의 집에 들어가서 저 사람의 돈을 훔치는데, 그냥 훔치는 것이 아니라, 저 부자는 정말 악한 짓을 하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면서 부를 모았으니까, 저만큼의 부를 모았을 것이고, 내가 이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그 사람이 악한 짓을 해서 벌은 그 재산에 대해서 내가 응징하는 것이고, 나는 로빈훗처럼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켰기 때문에 들어가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도둑질할 때 어떻게 도둑질합니까? 내가 지금 이 악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일을 하지 아니하면 우리 자식이 굶어 죽어. 우리 아이들을 먹인다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가치인데,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합리화해야 그때서야 발이 움직이고 손이 움직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악을 행하는가? 의를 위해서 악을 한다고 생각할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나는 폭력을 쓰는 것이고, 심지어 나는 칼을 들이밀 수도 있고, 내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주를 위해서 이런 나쁜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쟁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전쟁의 방법을 사용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을 뺏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성을 차지하려고 한다면, 전쟁을 통해서 노하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차지할 게 아니라, 정말 평화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그 성을 차지하고 목적을 이루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 이것이 정말 의로운 일인가? 의를 가장한 악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내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 핑계로 악을 행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늘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서 16장 33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제비를 뽑는 것은 사람이 뽑는 것이지만,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요,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데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제비를 뽑아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제비를 뽑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반영이 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대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야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참 안타까운 크리스천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자를 뽑을 때도 투표하지 않고 제비를 뽑아서, 제비에 뽑힌 사람을 집사로 세우고 장로로 세우고 권세로 세워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담임 목사님을 청빙 하게 될 때, 수많은 청빙 지원 서류가 오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교회에 좋은 분인지 좋지 못한 분인지, 우리 정말 우리를 이끌 좋은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판단하지 않은 채, 그저 제비 뽑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사님을 그냥 우리가 받자 하면서, 제비 뽑기를 해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니까 제비를 뽑아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투표하고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수고하면,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제비를 뽑든 아니면 우리가 투표를 하든, 아니면 우리가 수고하며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력하든,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우리가 계획하고 다 작전을 짜고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해서 거기에 심각하게 고민해 가면서 계획들을 세우면,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27편 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셨죠.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첫째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우리가 똑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그 어떤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수고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나가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선한 길로 온전한 길로 그리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계획했을지라도 우리가 제비를 뽑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4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초반부터 온 세상이 난리 법석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전주는 그래도 안전한 것 같아서 감사하긴 한데, 참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금년을 어떻게 지내게 될까? 금년은 과연 어떤 결론을 맞이하게 될까? 상당히 불안하기도 하고 마음속에 걱정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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