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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 (잠 14:17-19)

17절 말씀에 보면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한다고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사람, 화를 내고 분노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가? 지혜로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현명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죠. 분노 가운데 있는 자는 좋은 결정, 멋있는 결정,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 잘못된 결정, 어리석은 결정, 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 잠언서 14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 분노 가운데 어떤 판단을 하고, 화가 나 있을 때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러한 결정과 행동들은 거의 대부분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분노 가운데 내린 결정, 분노 가운데 했던 행동, 분노 가운데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어느 것도 선한 결과,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며,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그런 구렁텅이로 우리를 몰아넣게 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분노 가운데 하는 모든 판단과 분노 가운데 하는 모든 행동, 분노 가운데 하는 모든 언행들은 결국 나중에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일들 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 가운데 어떠한 판단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왜 잘못된 결론으로 빚어지게 될까요?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내린 판단과 그 모든 행동과 결정과 언행들이 왜 늘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는 분노는 우리의 시야를 가려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떠한 것을 잘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다 고려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다 고려해서, 충분히 다 심사숙고해서, 그래서 가장 좋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인데, 분노하게 되면, 우리가 화가 나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가려져 버리게 되는 것이죠. 모든 것을 다 보아야 바른 판단을 하고, 그래서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데, 분노 가운데 있으면, 시야가 가려져서 다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고, 화나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분노 가운데 있으면 단점만 보이게 되고 나쁜 것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노 가운데 하는 모든 행동, 모든 언행 모든 판단 결정들은 전부 다 잘못된 결과, 잘못된 것으로 파국에 이끌게 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종종 맹목적이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눈에 무엇이 쓰인다고 하죠? 콩깍지가 씌운다고 그래요. 그래서 단점을 못 보고, 결혼해버리고 말았어요. 사랑을 하게 되면, 단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좋은 것만 보고,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전체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 그래서 일부만을 보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만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도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죠. 사랑이든 증오든,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 될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든지 분노하게 되든지, 어떤 것을 하게 되든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을 바라보게 되는, 시야가 가려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사랑 때문에 눈이 멀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사랑 때문에 눈이 멀면, 단점이 보이지 않고 좋은 것이 보이고, 긍정적인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인데요.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래도 좋은 것이라도 봐야 하고, 전체를 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긍정적인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나마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장점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아주 대단히 소중합니다.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사랑에 의해서 맹목적이 되고, 그래서 그 장점만을 바라보게 되는, 그래서 시야가 가려진다고 한다면,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가 나타나곤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증오, 분노에 차 있을 때도, 역시 우리의 눈이 멀게 되는데요. 시각이 가려지게 되는데, 이때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분노 가운데 있으면, 장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온갖 나쁜 것만 보이게 됩니다. 싫은 것만 보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분노 가운데 내린 결정들은 결국 어리석은 결정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게 될 때, 분노 가운데서, 화가 나있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그렇게 내린 결정들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자기 자신에게 해롭다고 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 채, 분노 가운데, 감정에 이끌려서, 너무나도 쉽게 결정을 내려버리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대부분 분노 가운데 내리는 결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걸 노리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로 나쁜 정치인들이죠. 바로 나쁜 사이비 언론인들일 겁니다. 수많은 가짜 뉴스를 통해서, 반대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일들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이익을 편취하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사회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증오 가운데, 우리가 듣게 되는 그 수많은 가짜 뉴스로 분노가 일어나고, 증오가 일어나고, 어떠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집단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그 분노 가운데 결정을 하게 되는데, 결국 그 결정이 우리 자신들에게 유익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가장 사악한 예를 든다고 한다면 나치의 히틀러를 들 수 있겠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아주 우렁찬 연설을 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일깨웠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해서 저 유대인들을 죽여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오심에 가득 찬 나치 군인들은 유대인들 600만 명을 학살하게 되는 그런 끔찍한 일이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런 일들이 사실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역사 가운데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그래서 그런 분노를 통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분노를 통해서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나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분노 가운데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분노 가운데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잘못된 결정들을 할 때가 있었는데요.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내렸던 잘못된 결정들은 대부분 제가 화가 나 있을 때 내렸던 결정들입니다. 마음속에 섭섭함이 있고,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고,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와 여러 가지 분노가 가득 차 있을 때 내렸던 그 모든 결정들은 잘못된 결정이고, 나로 하여금 더 나쁘게 만들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안타까운 결정들을 해왔었던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있었던 수많은 잘못된 결정들이 대부분은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 분노 가운데 내렸던 그런 잘못된 결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어떠한 일을 할 때, 내가 지금 말을 하려고 할 때, 혹은 어떤 결정을 하려고 할 때,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은 분노 가운데서 하고 있는 말인가? 지금 내가 내리는 이 결정은 내가 분노 가운데에서 내리는 결정인가?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 행동은 내가 분노 가운데에서 하려고 하는 행동인가?”를 질문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 일을 하기 전에 멈추어 서서, 우리 스스로를 향해서 물어보아야 됩니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는가? 나는 지금 중오 가운데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고, 만일 내가 지금 어떤 사람에 대한 분노, 증오, 미움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분노 가운데서 어떠한 말을 하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노 가운데서 내뱉은 말, 분노 가운데서 행한 행동, 분노 가운데서 결정한 그 모든 결정들이 결국에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머지않아서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음에 분노 가득할 때, 기도 했나요? 기도해야 돼요.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조그만 부당한 일을 만날 때마다, 조그만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마음에서부터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었어요. 화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정말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 분노 가운데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선하고 좋은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게 만드는 어리석은 결정이오. 어리석은 말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가득 차 있고 화가 솟아오르고 있다고 한다면, 잠시 그 자리에서 모든 것들을 멈추어 두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제 마음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제 마음 가운데 쏟아부어 주셔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은혜의 단비를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부어주셔서, 제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시고, 감사가 넘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분노 가운데 결정하거나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이 없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는 분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분노하는 것을 “속히” 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노하기를 속히 한다고 하는 말은 빠른 분노라고 하는 것을 의미할 텐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느린 분노도 있을까요? 빠른 분노는 무엇이고, 과연 느린 분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빠른 분노라고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감정에 이끌리어, 분노 가운데 즉흥적으로 나오는 그러한 행동, 그렇게 나오는 말 결정들을 가리켜서 속히 분노하는 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느린 분노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분노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죠. 화가 나 있을 때, 즉흥적으로 화가 나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화가 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 분노를 가라앉힌 다음에, 모든 내 마음을 차분하게 평정심을 찾은 다음에, 그리고 과연 이 일이 화를 내야 될 일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때로는 의분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고, 때로는 바르게 화를 내야 될 일들도 필요한 것이니까, 내가 감정에 이끌려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시각이 가려진 채, 그냥 감정에 이끌려서 분노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해서, 그래서 의로운 분노를 하고 있는지, 고민해 본 다음에, 그래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서로 구분해 볼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늘 이 점에서 늘 넘어지는 거죠. 화가 나면 소리부터 지르고, 화가 나면 내 던지기부터 하고, 화가 나면 발로 차기부터 하고, 화가 나면 쫓아버리기 먼저 하고, 화가 나면 그냥 즉흥적으로 다 때려치워 버리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늘 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래서 부부 사이에 그 소중한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사랑한다고 늘 말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한 것이 부부 사이의 관계인데,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는 분노 가운데서 함부로 내뱉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가까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냉랭한 관계로 우리를 만들어 와 버렸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소망은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소망은 행복하게 같이 살았으면 좋겠고, 우리의 소망은 행복하게 같이 인생을 즐겼으면 좋겠는 것이 그게 우리의 소망인데, 그런데 조그마한 불편함 때문에 소리 질러버리고, 조그만 불편함 가운데서 했던 내 행동들 그 하나하나가 더 관계를 끊어버리고, 차갑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들의 소망은 우리 자녀들과 함께 따뜻하게 좋은 관계 가운데서 지내고 싶은 게 우리들의 마음인 거죠. 그런데 조그마한, 어떠한 제대로 된 판단이 없이, 분노 가운데 내뱉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녀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만들고,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버리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심각한 관계로 끌어 인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겠고, 친구 관계에서든 성도들 사이에서의 관계에서든, 모든 관계에서든 우리가 분노하기를 속히 함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행동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았다고 하는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늘 넘어지고 또 쓰러지기에, 우리가 완벽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실수를 싸매어 주시고, 그리고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서, 주님, 제가 이렇게 연약한 자입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힘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며, 주여 나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늘 넘어졌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번 일어서고, 다시 한번 믿음으로 세워져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뜻이죠? 이해가 좀 되십니까? 우리가 먼저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말 성경에 자주자주 표현되고 있는 기업이라고 하는 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죠? 기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현대물산이나 삼성물산이나 현대자동차나 이런 것처럼,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인 그런 기업들, 사업체들을 기업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업은 그런 기업이 아닙니다. 한자(漢字)가 그런 기업이 아니고, 기초 기(基) 자에다가 업 업(業) 자, 그 위에 있는 기업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대대로 전해져 오는 사업과 재산을 의미하는 것이고, 조상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의미하는 것이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업 유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성경을 다시 제대로 번역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기업이라고 하는 말을 쓰면, 이런 유산, 유업이라고 하는 의미로 우리 한국 성도들이 읽지를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라고 하는 말을 여기다 쓰는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전에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기업이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써도 이해가 됐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업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면, 유산으로 받는 것, 유산으로 얻는 것,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성경에 나오는 기업이라고 하는 단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18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고 하는 말을 좀 더 쉽게 번역을 한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결국 어리석음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받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이다. 어리석음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어리석음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이죠.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이고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 밖에 못 받는 것이고,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관을 삼는다는 얘기는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씌움을 받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태어난 게 좀 어리석게 생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태어날 때부터 아이큐가 좀 떨어지고, 좀 미련하고 지식 지혜가 좀 별로 없는 그런 사람들은 그러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만,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지혜는 무엇인가를 기발하게 잘 해내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누가 할 수 있어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누구나 초등학생도 할 수 있어요. 박사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자무식인 사람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리석게 아이큐가 둔하게 태어난 사람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유산으로 받고, 슬기로운 자가 지식을 면류관으로 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그러니까 아이큐가 떨어진 사람은 그 인생이 참 참 불쌍하게 됐다고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고,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놀라운 것을 받게 될 것인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는 결국에는 어리석은 것만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8절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자 하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아까 17절 하반절에서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라고 하는 말씀도 있었는데요. 악인과 선인, 잠언서를 통틀어서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주제가 악인과 선인에 대한 대조입니다. 악인과 선인에 대한 대조인데, 끊임없이 잠언서에서 해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악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결국에는 망한다. 선인은 어떻게 돼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이게 잠언서의 주제입니다. 오늘 19절에서도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악한 자는 누구 앞에 엎드려요? “선인 앞에 엎드린다.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린다.”라고 하는 것인데요. 결국 악한 자가 지금 판치고 있고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 같고, 자 악한 자의 그 앞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그 악한 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그리고 온갖 나쁜 짓을 해가면서, 아무도 그 제지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에 있어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잠언서의 말씀을 통해서 아니 성경 전체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확신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악인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선인 앞에 엎드려지게 되는 것이고,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고, 누가 승리하게 돼요? 의인이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악인의 대열에 참여하지 마라. 변절하지 마라. 의롭게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의롭게 살면서 힘들고, 의롭게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는 모습을 겪을 때,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떵떵거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잘 나가고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슬슬 잘 풀리는 것 같은, 그런 모순적인 상황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내가 이거 하나님 말씀 지켜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하나님 말씀 지키며 살아봤자 나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네? 의인으로 살아가봤자 나는 늘 고난만 당하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으니,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변절하고 싶은 마음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변절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충성하라.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악한 자는 의인 앞에 선인 앞에 엎드려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말씀을 시편 37편의 말씀 가운데서 분명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37편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아멘. 믿습니까? 믿어야 돼요. 믿어야 돼요.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은 악이 판치고 있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악한 대열에 우리도 동참해야 살 것만 같아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노래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생생한 예들을 수없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대표적인 예가 있다고 한다면, 요셉의 예가 아니겠습니까? 요셉의 앞에 형들이 와서 엎드리는 거예요.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있던 요셉 앞에 그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이 와서 엎드리게 되는 것인데, 그게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하게 될 놀라운 장면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믿음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잘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늘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나아가 엎드리며 은혜를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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