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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더 큰 어려움을 낳는다 (잠 15:18)

오늘 잠언서 15장 18절 1절 말씀을 읽었는데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딱 한 절이니까, 히브리어 원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한번 히브리어 원문을 한번 살펴보기 위해 적어보았습니다. 히브리어는 꼭 한자 말과 비슷해요. 동사, 명사, 형용사 이런 것들이 큰 구분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되어 있느냐? 히브리어 원문 어떻게 되어 있느냐? “분노의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분노가 길거나 분노가 느린 사람은 다툼을 조용하게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이 히브리어인데, 그 히브리어는 몰라도, 그 밑에 해석을 다 달아놓았으니까, 그러니까, “분노의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분노가 느리면, 분노가 길면, 그러면 다툼을 조용하게 한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한국말 성경에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라고 되어 있는데, “쉽게”라고 하는 말이 원문에는 없네요. 그렇죠? 한국말 번역을 할 때는 “분을 쉽게 내는 자가 다툼을 일으킨다”라고 그렇게 번역을 했지만, 원문에는 “분노의 사람이 다툼을 일으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노의 사람, 분노를 내는 사람은 무엇을 일으키는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게 되면, “다툼만 나타나게 될 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이죠.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화를 내면, 그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물러서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용히 이야기하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데,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또 집중하기도 해서, 그래서 분노를 내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해결된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고, 지금은 내가 힘이 없는 것 같으니까 뒤로 물러서고 잠잠한 것뿐이지, 진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히려 더 속의 분노가 일어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분노를 성급하게 내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분노가 길게 되는 사람, 분노가 느리게 되는 사람, “에레크 아파임”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요? 분노가 길다, 분노가 느리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분노를 쉽게 내지 않고, 분노를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뒷부분에 분노를 빨리 안 내고 좀 천천히 참고 인내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낸다고 하는 말을 그 앞에 집어넣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분노의 사람의 반대말이 분노를 빨리 안 내는 사람, 분노를 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분노를 쉽게 내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아무튼 분노를 내지 않으면, 분노하지 아니하면, 그러면 다툼을 그치게 하고, 시비를 그치게 한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잠언서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과는 정반대 되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경에 있는 대부분의 말씀이 우리들의 본성과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분노해야 속이 좀 시원하고, 화를 내야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분노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속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분노도 더 커지고 더 상승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하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있냐면, 화를 참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죠? 화를 참으면 화병에 걸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화를 참게 되면 화병에 걸리고, 스트레스로 인해서 우울증에 걸릴 수 있으니까, 화를 참지 말고 화를 쏟아내 버려야, 화를 쏟아내 부어버려야, 그래야 화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종종 우리 주변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미국 정신의학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병명 중에 하나가 한국말 화병(hwabyung)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화병이라고 하는 것이 의학계에 보고가 돼서 아예 한국말 자체가 의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화를 참으면 화병이 생기고, 우울증이 생기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에, 화를 내버리고 화를 분출해 버리면, 그러면 스트레스도 줄어들고 화병도 걸리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시원해지는 그런 것을,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잘못된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화를 내지 않고 참고 또 참으면, 화병에 걸릴 수는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가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내가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를 겪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화를 내버리면 되느냐? 나의 화를 분출해 버리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화를 참으면 화병을 얻는 것은 당연하지만, 화를 내버리면 스트레스가 풀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더 화가 나게 만드는 거죠. 화병에 걸리지 않는 비결은 화를 분출해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화병에 걸리지 않는 비결은 화가 나게 만든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때 화병에 걸리지 않는 겁니다. 분노해 버리고 화를 내버리고, 그러면 치유가 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사실상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고, 우리가 화를 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기분이 나빠지게 되어 있고, 더 스트레스받게 되어 있고, 더 화병에 걸릴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화내면서 기분 좋으신 분 계셔요? 화를 한 번 실컷 내봤더니 더 기분이 좋아집니까? 아니요. 우리는 화를 내면 낼수록, 더 화가 나는 거예요.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화를 참지 않아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화를 분출해 낼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들었던 그 이유를, 그 원인을 지혜롭게 아주 잘 해결해 내야, 문제를 없애야, 그래야 화병이 안 걸리는 것이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화를 내버리고, 그 화를 분출해 버리면, 화병에 안 걸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툼만 일으킬 뿐이고 아무런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말은 화가 나는 감정조차도 생기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화가 나는 그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에요. 화라고 하는 것은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자동적으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발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 화입니다. 누군가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누가 나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여러 가지 나로 하여금 짜증 나는 일들을 하게 만든다고 하면, 그런 일들이 외부에서부터 우리에게 들어오게 될 때, 자동적으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죄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화나는 감정 자체가 아예 없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겁니다. 화나는 일들이 여러분들 있습니까? 화가 전혀 안 나십니까? 화나는 일 있으세요? 화나는 일 없으세요? 없으면 그게 비정상이에요. 화가 나는 일이 있어야 그게 정상이에요. 우리 옆에 사람 보고 한번 얘기 한번 해줍시다. “정상이시군요.” 만일 우리들에게 외부로부터 나쁜 일들이 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는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는 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우리가 더우면 덥다고 느끼고, 추우면 춥다고 느끼고 하는 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우리에게 불편한 일들이 생기고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우리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생기게 되면 자동 반사적으로, 더우면 덥게 느끼고 추우면 춥게 느끼는 것처럼, 불편한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화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화나는 감정이 죄로 바뀌는 지점이 있습니다. 죄로 바뀌는 순간이 있는 것이죠. 분노라고 하는 그 감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분노라고 하는 그 감정이 죄로 넘어가는 단계가 분명하게 있는 것인데요. 그게 언제입니까? 그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분노를 밖으로 분출해 낼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부터 27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야기는 무슨 얘기냐면 분을 내는 상황이 아직 죄가 아닌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분이 나는 그것이 죄로 바뀌는 그런 지점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언제 우리의 분노가 죄로 바뀌게 됩니까? 첫 번째는 그 분노의 감정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될 때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는 생각이 들어올 수가 있어요. 화가 나는 그런 감정이 생길 수가 있어요. 그것까지는 아직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핸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화가 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무리 수련을 많이 닦는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 분노하는 감정이 생겼는데, 그 분노하는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어. 계속 가지고 분노를 하는 마음을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계속 그 분노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겁니다. 저 인간이 나에게 이렇게 나쁜 짓을 했지 하면서, 계속 그 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을 계속 품고 버리지 않고 그 분노의 감정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은 죄라 이 말이에요.

마치 새가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 막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막아요. 새가 마음대로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새가 우리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 그걸 나쁘다고 죄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새가 우리들의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어떻게 해야 돼요? 쫓아내 버려야죠. 계속 우리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분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죄가 다 마찬가지예요. 분노도 마찬가지고, 음욕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도둑질하고 싶은 그런 탐욕도 마찬가지고, 여러 가지 나쁜 마음들이 전부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의 감정이 생겼을 때, 그것을 빨리 떨쳐버리고, 이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내야 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해서 키워냅니다. 계속해서 키워내면서 분노를 또 키우고 또 키우고, 둥지를 틀게 하듯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죄로 넘어가는 지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에베소서 4장 26절의 말씀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오늘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내일까지 가지 말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오늘 밤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제 분노가 죄가 됩니까? 그 죄를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이 분노의 마음을 계속 키워서, 그래서 그것으로 하여금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으로, 화나는 모습으로 그것을 표출해 내기 시작할 때 죄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로마서 12장 19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부터 21절까지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다음 절이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의도적으로 우리들에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화가 날 겁니다. 그렇게 화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화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할 때, 어서 빨리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원수 갚으려고 하는 마음을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의 분노를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리며, 우리의 그 분노가 죄악으로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우리의 분노를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가족들, 우리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 교회 성도들도 우리들로 하여금 화나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른 원수들은 우리들을 의도적으로 악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우리의 가족들이나 동료들이나 직장 친구들이나 아무튼 교회 성도들이나 이런 분들은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게으르기 때문에,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신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성격이 달라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럴 때 분노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다툼만 나오게 되기 때문에 결국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화를 함부로 낼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해야,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을 속 썩이는 일이 많아요. 그렇죠? 이제 다 키워서 속 안 썩고, 안 썩입니까? 아니요. 지금도 썩일 거요. 지금도 많이 썩일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화나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지혜롭게 대처해야, 화를 내면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해야 되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성경 말씀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지혜로운가? 이 세상의 지식들도 많이 배우실 필요가 있어요.

여러 아주 훌륭한 심리학의 전문가들, 가족 가족 관계의 전문가들, 자녀 교육의 전문가들, 수많은 학문들이 많이 발달이 되어 있는데, 그런 분들의 의견들을 듣고 연구하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가 잘 대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그래서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족했구나. 내가 우리 자녀들한테 내가 대하는 방법이 잘못됐었구나. 내가 대화를 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분노하게 만들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화를 냈었고, 그래서 관계가 더 어그러졌고 하는 것을 깨닫고, 지혜롭게 대할 수 있는 그 방법들을 많이 배우셔야 된다 이 말이에요. 최근에 저는 초등 교육 전문가라고 하는 김선호 선생님의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아주 참 말씀을 잘하시더라고요. (이 사람 말고, 이 사람 말고, 젊은 사람이에요.) 영상이 아주 좋아요. 아주 좋아가지고. 그런데 이 세상의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냐? 아니에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예요. 수학의 진리도 하나님의 진리고, 과학적인 진리도 하나님의 진리고, 의학적인 진리도 하나님의 진리고, 심리학적인 그 어떤 진리들도 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잘못된 악한 진리가 아니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도 잘 읽어야 되지만, 우리의 실제적인 그 삶의 관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셔야 된다 이 말입니다. 부부 관계가 힘들다? 그러면 부부 관계를 어떻게 참 잘 만들 수 있는 무슨 좋은 조언이 없는지, 여러 가지 정보들을 들어야 되는 것이고, 우리 자녀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아이들을 힘들게 말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그 자녀들을 잘 지도하는 그런 좋은 선생님들의 글들 영상들 잘 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을 것인가 하면서, 잘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분노로 대하게 되면, 오히려 반발만 가져오는 것이고,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분노함으로 아이를 이겨버리고 짓밟아버리면 그 아이가 지금은 힘이 없어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교회에 나올 수 있어요. 지금은 부모님이 너무 무서우니까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해결된 줄을 착각해요. 그러나 해결된 게 전혀 아니에요. 그 아이의 마음 가운데 “내가 지금 힘이 없으니까, 내가 참는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나중에 엄마 아빠를 떠나고 내가 독립하게 되면, “내 마음대로 살겠다”라고 하는 그 마음만 심어줄 뿐이지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 화를 분노로서 화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지혜롭게 대화하면서, 그리고 이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사실은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그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지, 사실은 화가 날 일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오늘 잠언서 15장 18절의 말씀 꼭 기억하셔서 함부로 화를 내면서 문제를 더 키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렵고 그러면 긁으면 되나요? 막 몸이 가렵고 그러면 막 긁으면 문제가 해결이 되죠? 그게 안된다고 그러잖아요?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긁어 부스럼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해결이 안 돼요. 참아야지. 분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화를 낼까요? 아까 그 스님 한 번 얼굴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지금 보여주세요. 이 틱나한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교회만 다니느라고 못 들어봤군요. 베트남의 승려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인지도를 얻은 승려인데요. 이분이 쓴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던 그런 스님입니다. 이제는 이제 입적하셔서 이 세상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이분이 쓴 책 가운데 “화”라고 하는 책이 하나 있어요. (이제 치워주세요.) “화”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틱낫한이라고 하는 스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왜 현대인들이 화를 많이 내느냐? 화를 많이 내는 이유는 우리가 화가 난 음식을 먹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화가 난 음식들을 먹고 있는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닭장에 가두어 놓아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래서 정말 화가 치미로 솟아나 있는 그 닭이 낳은 계란을 먹고서 살기 때문에, 화가 난 음식들을 먹고살기 때문에 우리가 화가 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 보이는데, 근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화를 안 냈을까요? 고려시대 사람들은 들판에 기른 닭을 먹었으니까, 계란을, 자연에서 낳은 계란들을 먹었으니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아주 아주 온유한 사람들만 조선시대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우리의 식단을 다 바꾸어서 유기농과 자연식품으로 다 바꾸면 우리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해결될 수 없는 거예요. 물론 자연식품을 먹고, 유기농 먹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화해 문제가 해결되는 법은 없는 것이죠.

성경적인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화를 내는 성경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성으로 얼룩져서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존재가 되었고,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져서, 그래서 우리는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늘 화를 내고 분노하며, 그래서 나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죠. 신선한 계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영원한 죄악과 죄악에서부터 구원해 내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원한 죄에서부터 건져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의 마음이 솟아올라서,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나와 엎드리고, 주님의 그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의 은총으로 덮어주셔서 변화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화내지 아니하시고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조약의 길로 갔지만, 그러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냥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분노해 버리고, 그래서 모든 관계를 깨뜨려 버리고, 그래서 다툼을 더 일으켜 버리고 이를 더 그르치는 그런 결과를 맺을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에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 주셔서 지혜롭게 이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 주시고 오히려 더 좋은 결과들이 나올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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