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한 후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요.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 그 기도의 내용의 일부가 되겠습니다. 기도의 내용 가운데 그 첫 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솔로몬은 하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고백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을 먼저 했는데, 열왕기상 8장 23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라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고백하는 그 고백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는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최고의 하나님이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 “최고의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러한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객관적인 고백입니까?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고백입니까? 이러한 고백이, “주님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객관적인 고백입니까?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둘 다죠. 객관적이면서도, 동시에 경험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종종 최고라고 하는 말은 객관적인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주관적인 것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에서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의 최고를 말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 엄마 최고”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 엄마가 정말로 최고인 건가요? 그 자녀들에게 최고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자녀들에게 최고라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 엄마가 객관적으로 보면, 다른 엄마들에 비해서 학력이 좀 모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 비해서 미모가 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서 재정적인 능력이 좀 부족할 수 있어요.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최고가 아닐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자녀들에게 있어서, 엄마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엄마인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그래서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을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가 최고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최고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인 것이죠. 상대적인 의미인 것이고, 경험적으로 내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최고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인들께서 우리 교인들이, 종종 저를 가리켜서 “우리 목사님 최고” 그러시는 분들이 가끔 계셔요. 자주 있지는 않고 가끔 계시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하고 참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객관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저를 좋아해 주신다고 하는 의미이고, 주관적으로 정말 우리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나도 고맙고, 너무나도 그 말에 힘입어서 “정말 우리 교우들이 최고다”라고 하는 생각을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하냐면, “우리 하나님은 최고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해서 최고라고 고백하고 있는 그 의미는 어떤 의미입니까? 역시 솔로몬에게 있어서도, 그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최고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고 하는 주관적인 고백일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솔로몬이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서,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서 성전을 잘 건축하고, 그리고 그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죠.
솔로몬이 누구였어요? 다윗과 바세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왕자들 가운데 가장 정당한 왕자가 아니라, 나중에 스캔달로 인해서, 나중에 여러 가지 참 부끄러운 과정들을 통해서 얻게 된 그런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들이 솔로몬인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솔로몬은 다른 배다른 형제가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그래서 이 솔로몬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그런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이 솔로몬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 솔로몬을 사랑하시고, 그래서 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 내 아들의 손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그 약속에 따라서, 솔로몬이 그 성전을 마치게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정말 좋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최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왕조를 든든히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이 솔로몬을 통해서, 모든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약속을 그냥 내팽개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만유의 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최고의 하나님이라고 주관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주관적인 고백이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고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신들이 다 가짜예요. 사람이 만든 수공물에 불과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그냥 이름만 신이라고 붙여놓았지, 신으로서의 기능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엉터리 신이 즐비한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 온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볼 때에도, 참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솔로몬의 고백은 주관적인 고백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고백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종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주관적으로 고백했다고 하는 이 사실은,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도 최고일 수 없다”고 하는 말의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종종 종교 다원론주의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 기독교의 종교나 불교나 아니면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든지, 사실은 다 똑같은 것이고, 너나 나나 서로 우열을 가릴 것이 없이, 서로가 다 자기가 최고라고 얘기하고, 서로가 다 자기가 진짜라고 이야기하지만, 종교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다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어느 길로 가든 정상에서 다 만나게 되어 있듯이, 어느 신을 믿든지 결국에는 다 마지막에 다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너네만 최고라고 말하지 마라. 니네만 진짜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마라. 니네만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마라. 모두가 다 똑같은 신이고, 너희가 말하는 그 최고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의미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관적인 고백을 한다고 해서 객관적인 최고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예를 들어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아주 뛰어난 축구 선수라고 말하면, 그게 주관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객관적으로도 그렇잖아요? (물론 손흥정웅은 월드클래스 아니라고 자꾸만 그러는데), 김연아 선수가 세계 최고의 그런 피겨 스케이팅 선수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일가 친척들이 우리 선수가 최고라고 말하는 게, 그게 주관적으로만 그렇습니까? 아니요. 사실적으로도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고백을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고백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솔로몬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객관적으로도 최고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정말 참되신 하나님이고 정말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진짜 하나님임을 경험한 다음에 주관적으로 고백하게 되었는데,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주님을 최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는데, 그런 찬양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무리 객관적으로 최고라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아니했다고 한다면, 이런 주관적인 고백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내게 선하신 하나님이었는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이었는지를 하나씩 하나씩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이 정말 최고라고 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어서 고백하게 된 것이죠.
오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데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이 정말 최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고백할 수 있을까요? 고백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겁니다. 경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좋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어떤 음식이 정말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음식을 보고 칭찬할 수 있나요? 아니요. 맛을 봐야 되는 거예요. 맛을 봐야 맛을 알고 먹어봐야 맛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최고라고 하는 것을 알 듯이, 어떤 멋진 광경을 우리가 직접 가서 봐야 그곳이 정말 좋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맛보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솔로몬은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서 성전을 지었는데요. 그렇게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게 되고 최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인데요. 약도 좋은 약이라고 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먹어봐야 아는 거예요. 음식도 어떻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먹어봐야 아는 것이죠. 믿음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알아집니까? 어떻게 성장합니까?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의 믿음이 더 성장해지는 거예요.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거예요. 하지만 그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는데 주님 이 아이에게 어떻게 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고 한다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좀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이야기했을 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이 아버지가 고백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님 제게 믿음을 제가 믿습니다. 그런데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믿음이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믿고 그래서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더 믿음이 더 생기는 것이죠.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죠. 처음에는 이게 의심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주님을 믿기로 하고 작정하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결국 이 사람의 믿음이 더욱더 확실하게 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최고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멀리 떨어져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최고인가 아닌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 나는 발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겠다고 꼼짝하지 않겠다고 하고 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경험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것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겁니다.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야 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더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더욱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25절에서 26절 말씀에 이렇게 더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내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 왕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그런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원하건데 주는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확실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더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더 경험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는 단계로 더 깊이 나아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의 결단이 하나님을 더욱더 맛보아 알아야 되겠다. 그냥 자꾸만 먼발치 떨어져 있지 말고, 뭐 하라고 해도 안 하고, 성경 읽으라고 해도 안 읽고 기도하라고 해도 기도 안 하고 예배드리자고 해도 안 하고, 그렇게 경험하지 않고 저 밖에 있을 것이 아니라 경험의 자리로 나와야 되는 거예요.
시편 34편 8절 말씀에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편 34편 8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언제 이렇게 금방 바꿨죠? 실력이 대단합니다. 놀랍습니다. 맛볼 음식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맛보아야 맛있는 걸 알잖아요? 하나님이 계셔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음식보다도 가장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가장 행복하게 만드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먼 발찌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솔로몬이 하나님을 맛보아 알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을 맛보아 알고 주님을 더욱더 깨닫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