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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을 둘 집 (왕상 8:12-2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완공했습니다. 외벽도 잘 만들었고 그 안에 인테리어 공사도 했고, 그리고 그 안에 여러 가지 기구들을 놓는 작업까지 해서 이제 성전의 모든 건축 계획이 다 이루어져서 지금은 여러 백성들 앞에서 솔로몬이 연설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연설을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일까요? 이를테면 준공식 행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건축하고서 입당예배를 드렸는데 그 입당예배의 기운이, 그 감격이 아직도 있으십니까?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이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참 감사하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가 생각하면서 참 벅찬 가운데 입당 감사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오늘 이 솔로몬이 여러 백성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지금까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그 성전 건축의 준공식과 같은, 준공사를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연설을 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무슨 말을 하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라고 하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성전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한 집으로 지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캄캄한 데 계시겠다 하셨사오나”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런 성전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윗이 이 성전을 짓기를 원했고, 다윗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때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는, 그렇게 헌신의 결과로 성전을 짓게 되었는데요. 이 성전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한 집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주하실, 하나님의 이름을 둘 집이라고 하는 것이 성전이라 하겠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오락을 즐기는 장소가 아니죠. 성전이 무엇입니까? 춤을 추는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식당처럼 그런 역할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처소로서 지었다고 13절 말씀 가운데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실 집으로 성전을 지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이 표현은 맞는 것 같으면서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집이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신 집이라고 하는 그 말이 정확한 표현일까요?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하나님이 어느 한 장소에만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둘 집을 따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곳, 한 장소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신뢰하고 따르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시고 함께해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가서 저 갈대아 우르 지방, 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가서 포로 생활할 때에도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셨는가? 아니오, 그곳에도 역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항상—마치 그 옛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항상 함께했던 것처럼—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실 이 솔로몬이 표현한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둘 처소’라고 하는 이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이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바로 이 성전의 기능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이 성전에 나와서 회개하고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이라,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처소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어디서든지—우리 집에서도—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길거리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고, 또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이렇게 성전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그곳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이러한 특별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기도하면 어디서 기도해야 됩니까?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게 가능하죠. 그렇지만 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요? 힘든 일 있을 때 교회에 나와서 기도했다 그래요. 왜 그렇습니까?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몸이 움직여서 특별히 그러한 곳을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그러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하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 가운데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 도시를 선정하셨고, 이곳에 성전을 짓게 만들어서 여기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회개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네 집에서 살면서도 절기 때만 되면—유월절이 있다든지 여러 가지 초막절이 있다든지 그런 유대의 큰 절기들이 있으면—자기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하고 또 하나님을 경배하고 돌아가는, 그러한 시스템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자리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찾아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늘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그런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절기 때마다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던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감사할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삶이었는데, 우리들의 삶도 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 그런 삶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거기서 제사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때 문제가 된 것이지, 성전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제사하고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우리도 역시 그러한 것이 필요한 것인데,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제사는 드리지만 마음이 떠나 버린 것이죠. 형식적으로만 드린 것이죠. 그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로 나오는 사람, 참으로 참된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을 찾는 것이죠.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도대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그 개념이 분명하게 확 다가오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과 진리로’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의 히브리식 표현법을 본다고 한다면(물론 본문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만)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해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과 ‘진리’라고 하는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영으로도 드리고, 진리로도 드리고’라는 두 개의 개념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 두 개의 단어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한 영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말하자면 ‘참된 마음으로’—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우리가 예배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되는가? 참된 마음으로, 형식적인 그런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 그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되는가?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선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정치인들처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정치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정치인들은 기도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국가에서—기독교 국가에서는—무슨 국무회의를 하면서 “기도하자”고 하고, 그러면서 그 정책을 어떻게 세웁니까? 반(反)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랑과는 전혀 관계없는 정책을 저지르면서도 “우리가 기도하자” 하면서 그렇게 쇼를 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신앙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해 버리는 것이 그게 정치인들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먹기 위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 “저 사람들은 정말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박수를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는 그런 모습을 위해서 내가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는 어떻게 예배해야 되는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렇게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 축사를 하고 있는데—건축사를 하고 있는데, 준공사를 하고 있는데—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성전 안에 두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에게 유익한,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솔로몬은 오늘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열왕기상 8장 15절의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합니다.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전을 지어 놓고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8장 20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 일어나 이스라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지은 것이—성전을 누가 지은 것인가요? 솔로몬이 지었어요. 솔로몬이 지었는데 사실은 솔로몬은 힘을 별로 안 썼겠죠. 명령만 했겠죠. 누가 지었습니까? 건축자들이 성전을 지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많은 일꾼들이 동원되어 이 성전을 다 지었고, 그 계획을 이루는 데 솔로몬이 앞장서서 모든 것을 관할하면서 성전이 잘 지어질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합력해서 성전을 지은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짓고 난 다음에 솔로몬의 고백이—8장 15절에서 고백하는 그 고백이—무엇이냐 하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한 줄로 믿습니다.

잘못된 관점이 있는데요. 일을 해 놓고 불신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불신자들은 “이것은 내가 이룬 것이다”라고 하는 게 불신자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반대로 광신도, 맹신도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자기는 하나도 안 하면서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맹신, 광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다고 했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손 놓고 나는 기도만 할 거야.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만들어 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맹신, 광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참된 성경적인 관점의 신앙,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내가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다 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고, 그것이 나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안 될까요? 될 것 같기도 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돼요.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싶으면 기도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돼요? 아니요. 공부 열심히 해야 돼요. 공부 열심히 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학교 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가 잘 돼요? “하나님, 우리 비즈니스가 잘 되게 해 주세요.”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죠? 아니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을 다해서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될 태도가 무엇인가? 일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일하라. 라틴어로 Ora et Laboraora는 “기도하라”, labora는 “일하라”, et는 “그리고”. 곧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일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어요. 엄청난 수고를 했죠. 그리고 모든 것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지었는데, 그것을 짓고 난 다음에 솔로몬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찬양했던 것을 보면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은, 참된 믿음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 우리 가정이 잘 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내가 사랑을 더 보이고, 내가 참고 인내하고, 말하는 것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고 하면서 좋은 가정 만들기 위해서—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사랑의 가정을 만들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 우리가 하는 그 일 가운데서, 내가 맡은 일 가운데서 성공하길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올렸던 것처럼, 우리가 수고하고 얻었지만 그 모든 수고와 노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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