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길을 잃었나? (히 12:1-2)

오늘은 먼저 그림을 하나 보고 설교를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림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그림이겠습니까? 무엇이 제일 먼저 눈에 띄십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번 지나가 보죠.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혹시 그림을 보면서 코끼리를 제일 먼저 보신 분 계십니까? 한번 잠깐 손 들어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코끼리가 보인 분이 계십니다. 혹시 나무를 보신 분 계십니까? 예, 나무를 보신 분도 계십니다. 새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새도 많이 보셨네요. 집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예, 집을 보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이냐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림입니다. 코끼리가 보인다고 한다면, 코끼리가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엄격하고 빈틈 없는 성격이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지적받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자신에게 엄격한 스타일의 사람인데요. 능력이 뛰어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들을 다 자신이 하기 때문에, 일들이 늘어나 불안감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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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제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의 잘못과 실수들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미래에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걱정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새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이 좀 희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그런 사람이지만,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또 희생에 비해서 사람들의 인증이 부족해서 좌절하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작은 집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버럭하고 욱하는 성격의 사람일 수가 있다는데요. 일처리가 빠르고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급해지고 욱하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 자신의 성격과 유형과 비슷한가요? 전혀 다른가요? 1부에 물어보니까, 다 신기하게 맞는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여주었는데요. 사실 이건 제 생각인데, 이건 그냥 재미삼아 하는 것이지,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금 설명한 모든 유형은, 어느 한 유형만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 놓으면, 다 맞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지, 이것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나는 이런 성격인가? 이런 유형인가 고민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성격의 유형이 다르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그림이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 먼저 보는가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그림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 거예요. 어떤 그림을 보면 똑같은 그림인데, 어떤 사람들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고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노파가 보인다고 말하는 그런 그림도 있고요. 똑같은 사진인데 어떤 사람은 어떤 잔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 말씀이 있는데요.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도,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바라볼 때도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똑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보고 다르게 접근하는 겁니다. 그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창고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발견해가지고 나오는 것이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것이죠. 그런데 이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보물 창고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셨을 때에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별로 내 인생에 중요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한 것들만 가지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서 저주를 받은 상태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성경 말씀이 우리들 눈 앞에 있지만, 이 성경에 보물 창고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만, 정말 귀중한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엽적인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좋은 것이 놓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개와 돼지는 자신 앞에 진주가 놓여져 있으면 좋아하고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고 오히려 그 진주를 내놓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죠. 시골 쥐는 서울에 올라가서 화려한 모습 멋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망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보배로운 그 선물들을 발견해 나와야 되는데,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더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예수님이고요. 또 그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성경을 읽으나 마나 하는 것이 되죠.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 교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이슬람 교도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은 그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핵심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성경 속에서 발견해야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하셨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서 이야기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성경에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쓴 것인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미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구약 성경을 모세와 모세의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로 이렇게 삼 구분할 수 있겠는데, 이 구약 성경 전체가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모두가 다 이루어져야 했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무슨 책입니까?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인데, 그 영생을 얻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냥 읽고 듣기 좋으라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말씀은 그냥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 영생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누구를 발견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발견해야죠.

종종 예술 작품 같은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혹시 그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예술 작가가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예술 작품이 탄생되는 그 순간 예술 작가와 작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버려서, 그래서 그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자율적인(autonomous) 그 자체로 “의미가 열려 있는” 그런 것이 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의미가 예술 작품에 반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하는 사람이, 자기의 처지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그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내가 보면서 사랑을 느끼면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 작품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작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작품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래서 수천 수만 가지의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미학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유엔 본부에 가면 그림이 UN본부 회의장 양 옆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이 그림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요. 프랑스 작가가 그림을 양 옆에 그려서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도대체 이 작가는 무엇을 그리겠다고 해서 이것을 그린 것일까요? 그때 UN 본부에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이것은 “무제”다 그랬어요. 제목이 없다. 그냥 보는 사람이 알아서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감상하고 싶은 대로, 감상하면 되고, 그래서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좋게 느끼면 되는 것이고, 그 의미는 마음대로 열려 있다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그림이 어떤 그림으로 보이십니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만 대통령, 트루만 대통령은 유엔 본부에 가서 이 그림을 보고 하는 말이, “아, 저건 꼭 계란 후라이 같이 생겼네요.” 또 다른 그림을 보고 “저건 토끼같이 생겼네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해석을 자유롭게 해도 괜찮은 것이 예술 작품인 것이죠. 음악을 듣든, 시를 듣든, 영화를 보든 그 작품이 탄생이 되면 보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을 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즐기고 자신의 입장에서 누리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그런 미학적인 이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무슨 이야기들을 많이 하냐면, 성경도 그런 거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성경도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내가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그런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술 작품처럼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어서, 마음대로 해석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대부분의 것은 제대로 잘 이해해야 돼요.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돼요. 예를 들자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법률이라든가, 계약서라든가,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니요. 계약을 같이 맺어놓고, 내가 이해하기를 돈을, 굳이 내가 이 금액을 다 안 줘도 괜찮지 않을까? 좀 돈을 늦게 줘도 되지 않을까? 계약을 해놓고도,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무난하지 않을까? 마음대로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이면 되는 게 아니라, 결국 법적인 그런 절차에 들어가게 되고,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내가 말하고 듣는다고 한다면, 말한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는가를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지, 그 사람이 말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마음대로 이해해 버리면, 결국 관계가 깨어지고,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그런 아주 위험한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예술 작품의 경우야 이렇게 해석해도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내 마음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정확하게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학생이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해서 답을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대로 쓰면 오답이 되어서, 결국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성경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엉뚱한 것만 보게 된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망하게 되는 것이죠.

불가에는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 달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달을 보고, 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을 불가에서 종종 하는데요. 성경 밖에서 만나는 진리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진리가 다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고, 일반은총(common grace) 차원에서의 진리이기 때문에, 아주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달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무엇을 봐야 되는가? 달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우리가 읽는다고 한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것, 성경이 의도된 것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되는가? 누구를 바라봐야 되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래야 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성경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성경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한다면, 그 신앙 교육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들이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야 될 내용인데요. 오늘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누구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어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바라봐야 될 대상이 누구냐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요. 제대로 된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고, 헛된 믿음이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보고 난리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를 두 개 말씀드리겠는데, 첫 번째는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바로 그 떡을 봤습니다. 그 물고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 떡만 있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게 부족해서 힘들었거든요. 우리가 육신이 배고파서, 배고파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를 보면서 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그 떡과 물고기 자체가 아니라, 떡과 물고기는 하나의 표지판이고, 그걸 통해서 보기를 원하시는 진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기적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표적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표적,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표적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표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표적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표지라고 하는 말이 훨씬 더 맞는 원어에 맞는 말일 겁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이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인(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지라고 하는 말이죠.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가리켜서 표지라고 하는데, 예를 들자면 표지판이 뭐죠? 저기에 뭐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표지판입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게 뭐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뭐냐? 그 기적을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누구를 보라 예수님을 바라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서울에 갔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다 보면, 반가운 표지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표지판이죠? 전주 표지판이 있습니다. 먼 길을 오다가, 언제 전주가 오나 하고 운전하고 오다가 보면, 전주라고 하는 표지판이 딱 보이는 순간에, “이제 다 왔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표지판이 전주입니까? 표지판을 따라 더 가면 전주가 있습니까? 표지판이 전주가 아니에요. 표지판은 전주가 아니고, 그 표지판을 보고 저기에 전주가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 교회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비전 교회라고 하는 간판이 붙여져 있습니다. 주춧돌에 예수비전교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지판 간판을 보면서 이 건물이 예수비전교회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아니요. 여기에 예수비전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고 있구나. 이게 공동체고, 이게 교회고 모임 자체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봐야 되는 것이지,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해서 아 이게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예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읽으면서 그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율법만 보았습니다. 율법이 손가락으로써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율법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 율법주의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그 안타까운 일들을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반복해 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설교에서,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율법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고 율법만을 보여주게 되어서, 결국 그런 바리새인들과 같이 생각하고, 바리새인들처럼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었고 바리새인처럼 성장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완벽하고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고, 더욱더 철저하게 종교적인 열심을 내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주일성수하고,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결과,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어 버린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와서,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암송하면 그게 잘 된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기도를 많이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그게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전도를 더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하면, 그게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될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한 결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첫 번째 결과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졌어요. 왜?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고,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고, 내가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고 가르쳐준 그 시스템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교회 교육에서, 설교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살라고 신앙적으로 살라고 하면, 그러면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고 말았어요. 우리가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겁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옆에 서 계시는 거죠? 왜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오셔야 될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린 것이죠. 다윗처럼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살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을 바친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바치면 성공하게 됩니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면 엄청난 결과를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설교에서 교회 교회에서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설교하지 않고, 한 번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두 번째로 영적인 교만함이 생겨버렸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에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내가 열심히 경건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영적으로 교만함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더 전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영적인 교만이 생기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깔보고 무시하고, 저딴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정지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죠.

누군가 힘들어서 있으면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저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교사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이 학생들을 보면서 자녀들을 보면서 지각한다고 혼내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혼내고, 예배 시간에 태도가 불량하다고 혼내고 자꾸만 혼내는 일들이 반복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녀들은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실증나게 되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러한 교육을 받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나지 않기 위해서, 눈가림만 하는 신앙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죠. 완벽하게 바리새인처럼 행동하게 된 겁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상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일학교 학생들이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더 이상 교회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매력이 없어지는 거에요. 주일 학교에서 장난감을 주고 피자를 주고 상을 주면 그러면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했었는데, 어느 정도 키가 크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이상 피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안 가르쳐도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누가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욕 먹기 때문에, 혹은 칭찬받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율법주의적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님도 완벽하지 않고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교사 선생님도 완벽하지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이 많아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들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숨겨요. 잘 포장하고 잘 행동하면, 그러면 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존경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 위선의 모습 뒤에 엄청난 죄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고, 우리가 완벽하게 변화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근데 우리 자녀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거죠. 엄마 아빠를 보면서, 교사 선생님을 보면서, 지도자들을 보면서 말로는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교사 선생님이, 지도자들이 사실은 뒤로 호박씨 까고 있는 모습을 다 알고 있어요.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골리앗을 무찌르지 못하는 그 부모님, 선생님을 보면서, “왜 당신들은 그렇게 못하느냐?”라고 의구심을 품는 거죠. 의혹을 품는 거죠. 요셉처럼 꿈을 꾸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별 볼 일 없잖아요? 교사 선생님이 별 볼 일 없고, 부모님이 별 볼 일 없고, 목사님도 겨우 그만한 조그만한 교회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그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가 아니라, 아 저 말을 하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서 율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목적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서 예수님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고 완벽하게 살아서 그래서 우리가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따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는 다 연약해서 할 수 없는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셨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 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가서 훌륭한 선배들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 학생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선배들처럼 나도 성공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반에 한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다 실패하는 거에요. 다 들러리 서는 거에요.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살면 여러분도 요셉처럼 살면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생활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거에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면서, 저 사람은 요셉과 같다는 그런 헛소리를 하고, 저 사람은 다윗과 같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높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안 됐어요. 엄청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이었고, 엄청난 죄 가운데 거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면서, 너는 빵점짜리 인생이니 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라고 내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구원의 길로 초대해 주셨어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삭개오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온갖 많은 죄를 지었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보시면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너는 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빵점짜리”라고 하면서 낙인을 찍어버리고, 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케와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신다고 보여주셨을 때, 그 삭개오는 동료들에게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았다”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자기 동네에 가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셨다”고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눈이 번쩍 뜨이게 되는 겁니다. 나도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나도,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위인들처럼 열심히 살면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팽개치지 아니하시고 죄인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 자격 없는 자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해 주고 계시다고 하는 은혜의 메시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나도 욱하는 성질이 있고, 나도 여러 가지로 나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늘 실수가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 아들을 내어주셔서 그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단다. 너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신단다. 자격이 없어도 주님께서는 받아주신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지는, 놀라운 은혜가 넘쳐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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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설 (잠 11:16-31)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

오늘은 상당히 긴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들을 한 절씩 한 절씩 축조해 가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또 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지금은 좀 치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는다고 했는데요. 유덕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덕이 있다.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설명을 해드린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자비롭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자애롭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자를 말하게 되는데요.

종종 갑질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하고, 또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그런 깐깐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 앞에서는 상당히 조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기도 하고 조심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만족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벌벌 떨 수는 있겠지만, 뒤에서는 다 욕을 한다고 하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앞에서 갑질하고 있고 호통을 치고 있고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앞에서는 어떻게 항거하지 못하고 그 말에 이렇게 숙이는 것처럼 그렇게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지만, 사실은 뒤로 돌아가서 그 사람에 대해서 욕을 한다고 하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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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가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는가? 누가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누가 존영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깐깐하게, 그리고 아주 호통을 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자애로운 마음으로, 정말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해주는 사람들을 뒤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높게 여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악마가 되기가 쉽습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돈을 내고 음식을 주문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내 돈을 받아서 음식을 제공해야 되는 그 상황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우리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조그마한 허물, 조그마한 잘못 앞에서 화를 내기도 하고, 그 식당의 주인을 향해서 혹은 종업원을 향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나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조금만 실수를 하고, 무언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고 갑질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하면, 그런 꼬마 아이들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그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유덕한 사람이 되어야 자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조금만 유하면, 이 세상에서 조금만 내가 까다롭게 하지 아니하면, 무시를 당하고, 나에 대해서 존중을 해주지 않고, 나를 깔보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우리가 유하게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그러면 결국 손해를 당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학습한 것이죠. 그게 이 세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부드러우면 무시를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실수를 봐주고, 용납해 주고 정말 너그럽게 대하면, 나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계속 당하면서 여러 가지 피해를 겪으면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냐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화내는 것이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화를 내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것 같고, 내가 분노하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 같고, 내가 화를 내면, 빨리빨리 서비스를 해주는 것 같고, 내가 뭐라고 다그치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와서 서비스를 더 잘해주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몸에 익숙해져 버렸어요. 너그러움이 아니라 분노와 갑질과 깐깐함과 호통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자주 우리의 몸에 익숙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가 존영을 받게 될 것이다. 여자만이 아니라 유덕한 여자라고 했다고 해서 여자들만 유덕해지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그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16절 말씀에서. 그런데 이 근면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이 번역은 아무래도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한번 16절 도표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어가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라고 했을 때, “왜아리침 이트메쿠 오쉐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아리침”이라고 하는 것에 제가 색깔을 입혀놨는데요. 그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violent men, 그러니까 폭력적인 남자들, ruthless men, 무자비한 남자들이 부를 얻고, 부유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영어 성경에서는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번역과는 좀 다르게 번역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근면하게 되면”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히브리어 원문 “아리침”이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 원어는 성경 대부분의 경우에서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입니다. 그렇게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를 안타깝게도, 이상하게도 잠언서 11장 16절에서만큼은 “근면한” 남자라고 그렇게 번역을 해버려서 아쉽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이유가 아마 아쉬운 번역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잠언서를 번역하면서, 유덕한 여자 정말 nice하고, 부드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존영을 얻게 되지만,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이 번역자의 마음 가운데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으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포악한 사람이 재물을 얻으니까, “우리가, 모두가 다 포악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서, 아마 그렇게 “근면한”으로 바꾸어서 번역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말은 무엇이냐면,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도 포악한 방법을 써야 된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너그럽게 (하면) 영광을 얻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공을 못하는 길이고, 포악해져야, 갑질을 해대야, 그래야 재물도 얻고, 성공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려야, 그래야 성공해 버릴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그런 재물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밑에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서는 이 번역을 16절을 번역하면서, ruthless men gain only wealth, 그러니까 부를, 부 정도만 얻을 수 있겠지, 부를 얻을 수는 있겠지 정도로 번역을 한 거죠. 겨우 얻는다고 하는 것이 부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영생을 얻는다거나,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재물 썩어질 부에 대해서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얻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뉘앙스를 심어주면서, NIV의 성경은 번역을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6절과 연관되어서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인데요.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유덕한 여자가, 자애롭고 너그러운 여자가 존영을 얻는다고 한 그 말을, 다시 한 번 17절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인자한 자는 결국 자기의 영혼이 이롭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러나 잔인한 자는, 아까 조금 전에 16절 말씀에서 강포한 남자, 아주 포악한 남자는 재물을 얻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 잔인한 자는 결국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에, 16절에서 잔인한 자가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는다 한들, 사실은 그 재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잔인한 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해로운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17절 말씀 가운데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을 가만히 읽다 보면,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데, 잔인한 자는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하는 표현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겠습니다. 왜 인자한 자는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한 자는 왜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했을까? 왜 영과. 인자하면 왜 “몸”에는 도움이 안 되고, 잔인한 것은 왜 “영혼”에는 해롭게 안 되고, “몸”에만 해롭게 된다고 했을까? 그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나프쇼”라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나프쇼” 하는 것은 자신의 “나프쇼”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고, “쉐에로”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왜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왜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냐? 그것은 영혼과 몸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하는데요. synecdoche라고 하죠. 영어로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영혼만 이롭게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무슨 뜻이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에요.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얘기는 잔인한 자가 자신의 몸만 해롭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영혼 영혼이라든지 몸이라든지 이런 단어들이 많이 사용될 때가 있는데요. 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몸만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이 다 포함된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 시편의 말씀은 영혼만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왜? 네가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 “네가 왜 그렇게 낙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몸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든지, 영혼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조금만 배우신 분들은 몸과 영혼을 막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하고, 이것은 영혼만 얘기했으니까 영혼만 가르키는 것이고, 몸을 이야기했으니까 몸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마는, 제유법으로 사용됐다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이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인자한 사람은 친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잔인한 사람은 누구를 해롭게 합니까?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결론은 잔인하게 할 것이 아니라, 인자하게 대하며 살라. 그것이 16절 17절의 결론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악인이 받아 가지는 것은 허무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것이고, 결국은 의미 없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겠죠. 그러나 공의를 뿌린 자, 다시 말하자면 의를 추구하는 자는 확실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보상이 확실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아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요. 의를 행하면 생명에 이르는 것이고, 악을 따르면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까? 조금 이해가 안 되죠. 왜냐하면 공의를 지키든, 악을 따르든 다 살고, 다 죽잖아요. 그죠? 사는 게 의인만 삽니까? 악인도 삽니까? 의인도 살고 악인도 살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또 다 죽잖아요? 악인만 죽습니까? 의인도 죽습니까? 의인도 죽잖아요?

그런데 왜 오늘 19절의 말씀에서는 공의를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를 것이고, 악을 따르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를 거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공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계속 살 것이라고 하는 말인가요? 공의를 지키는 사람은 지금 당장 악을 따르는 자는 지금 당장 죽을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기서 생명에 이른다.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의미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은 장수하고, 악인은 단명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망하고 흥한다고 하는 표현을 “생명에 이르고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표현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흥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생명과 사망이라고 하는 단어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0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마음이 굽은 자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행위가 온전한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 영적인 것인데, 어떻게 굽죠? 물건이라고 하면, 구부릴 수 있고, 철사라면 구부릴 수 있지만, 마음은 어떻게 굽어졌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 행에 있는 말을 대조해 보면 됩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말은, 그런 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르키는 것이죠.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굳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을 얻으리라.” 악인은 결국 지금은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이야기고, 의인의 경우에는 결국 구원을 받고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니까, 그러니까 의를 행하며 살라고 하는 말씀이겠습니다.

22절 말씀이죠.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의 금고이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그것은 우리가 외모를 멋있게 꾸미는 것보다도, 예쁘게 치장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삼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 삼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죠? 진중하게, 사려 깊게, 예의 바르게, 모든 일들을 잘 생각해서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그러한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멋지게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습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씀일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 말씀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의인이 소망을 품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 의인의 소원은 결국 선한 일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가 선한 일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겠지만, 악인이 그 악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24절에서부터 26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구제하면서 너그러운 삶을 살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비를 베풀고 자산을 베풀며 살리는 것이 그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부유해지는 길이고, 과도히 아끼고 구두쇠처럼 살고 나만을 위해서 살면 아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살면, 그러면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곡식을 판다고 하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것 곡식을 파는 것이 무엇입니까? 독점을 말하는 거겠죠. 독점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도, 그냥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것을 이야기할 텐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힘든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여유롭게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여유로운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풍족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선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고, 악을 행하게 되면 결국은 악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죠.

28절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는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내가 재물을 의지하게 되면,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이 우리들에게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재물을 의지해서 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이고, 의인이 누군가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정말 해로운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국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지만, 그리고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의 종 종밖에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고요.

30절 말씀.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의롭게 사는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고,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니까,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것이 아니라, 정말 의롭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3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오.” 결국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생을 얻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31절의 교훈입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 쭉 살펴봤는데 이 말씀 전체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결론. 결론이 생각이 안 납니까? 선을 베풀며 살자.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자. 베푸는 삶을 살자. 인자하게 대하며 살자.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결론인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요? 왜 우리는 인자할 수 없고, 왜 우리는 너그러울 수 없고, 왜 우리는 옹졸하고, 화를 내고, 갑질을 해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면, 재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져서, 그 재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갑질하고 폭력을 쓰고 무자비한 그런 일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재물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아닌 제물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 속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어떤, 자신의 힘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결국 그 행동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갑질로 나오고, 화내는 것으로 나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물의 우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말씀에서 전체적으로 해 주시는 말씀이 그런 사람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재물을 숭배하면 망하게 됩니까? 왜냐하면 우상은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합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약속은, 이 재물을 섬기면 너에게 행복을 줄 것이고, 너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하면서 온갖 좋은 약속들을 다 해야 됩니다. 하지만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이 그 약속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느냐? 행복을 주지 않아요. 제물이 약속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느냐?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 않아요.

마치 사악한 정치인처럼, 선거 전에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언제 공약을 했는 듯이 다 잊어버리는 사악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우상이라고 하는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온갖 좋은 약속을 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고, 나에게 절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을 하지만, 그 사탄의 말대로 행했다가는 정말 그 사탄이 약속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자하게 대하고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게 되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게 손해 보는 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너그럽게 대하자.” 누구에게요? 누구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될까요? 실수한 사람들에게, 내가 돈을 냈는데 그 돈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해주지 못하고 실수한 사람들에게, 그 돈만큼 가치를 해내라고 윽박지르고 갑질을 해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너그럽게. 지금 섬기고 있는 그 웨이터가,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공무원이,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직원이, 나의 아들 나의 딸이 거기 서 있다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세요.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차 앞에 끼어드는 그 초보 운전자들에게 자유롭게 대보세요.

물론 법과 질서를 교란하고 이러한 자애로움을 악용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레리 버켓(Larry Burkett)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쓴 <성경 속의 경영학>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크리스찬 사업가가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챕터(chapter)에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레리 버켓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비즈니스를 경영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책을 써내려가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크리스찬 사업가라고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적절하게 지시하고 적절하게 안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손해만을 끼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해고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징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포악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그래서 조그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악랄한 방식으로 갑질을 해대는 것은 전혀 크리스천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정말 정말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양극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극단은 무엇이냐면 금욕주의라고 하는 극단이에요. 그래서 그 금욕주의를 따라서 돈을 버려야만 하고,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고 고통을 자초하면서 살아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금욕주의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적인 접근은 성경 전체의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금욕주와는 정반대의 다른 방향이 다른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탐욕주의의 생각들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삼기면서 그 돈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소득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정말 그 우상을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사는 삶과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양극단이 아니라 성경적인 균형 잡힌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말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먼저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받은 종이라고 한다면,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그 돈을 나에게 빌려간 사람에게 모질게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엄청난 은혜를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으며, 용서하지 못할 실수가 어디 있겠고, 우리가 너그럽지 못할 일들이 허물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을 베풀고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복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세상에 세뇌 작업과는 반대로 선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잘 되고 과도히 아끼는 자는 오히려 망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우리가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에 이런 복음성가가 있었어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하네.” 진리예요.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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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삼상 8:1-22)

몇 주 전에 이어서 두 번째 여러분들을 뵙고, 하나님의 말씀 함께 나누게 돼 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올려드립니다. 옆 사람하고 한번 인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따뜻하게 환영해주면서 인사 한번 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읍시다 손도 잡아주시고, 네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굉장한 혼란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대통령이 하야해야 된다. 혹은 탄핵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뜨거운 주장들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숫자를 갱신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지금 들끓고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지난 몇 년간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지지층이 30%가 넘는 그런 콘크리트 지지층을 자랑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5%도 채 안 되는 그런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난 4년간 대구에서 목회를 했었는데요. 거기에 살면서 대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랑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제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냉담해졌고, 심지어 분노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 이 현 시국에 어떠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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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문제가 좀 잘 해결되고 순리대로 진행이 돼서 이 땅에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래도 정의가 살아있구나 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어쩌면 현재의 시국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만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상 8장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의 뒤를 이어서 사사가 되었던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자신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탄핵하고, 그리고 새로운 왕을 뽑아달라고 하는 요구가 빗발치는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지금까지는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요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 민족도 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사가 아니라. 사사는 당시에 그저 평상시에는 그냥 생활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아니면 때에 따라서 재판도 하는 그런 일들을 했는데, 그런 좀 시시한 사사 말고, 번듯한 왕이 있고, 총리가 있고 군대가 있고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저 선진국 주변의 강대국들처럼, 우리나라도 왕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뜨거운 분출이 지금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주변의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변 민족들은 강대국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왕의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을 이겨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내심 부러웠을 것 같아요. 우리는 왕이 없는데 저들은 왕이 있고, 우리는 군대가 없이 그냥 우왕좌왕하다가, 남의 지배를 받다가 나중에 군인들을 모으니라고 힘이 드는데, 저 민족들은 왕 밑에 군대 장관이 있고, 그리고 군대가 있어서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주변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민족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 땅에서 바로 왕의 그 압제 아래서 종살이 하다가, 이제는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 국가로서 살아왔는데, 신정국가 왕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 나라는 왕이 없었고, 때에 따라서 사사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왕을 요구하게 됐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 왕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왕의 제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 상 오늘 읽은 말씀 8장 11절부터 18절 말씀까지 보면, 왕을 세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왕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왕을 세우면 나라가 좀 튼튼해지고 군대도 제대로 잘 갖추고 있어서 그래서 좀 체계적인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그래서 우리도 강대국에 진입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왕이 되면 그런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작용도 있다는 거예요. 단점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단점입니까? 왕은 너희의 아들 딸들을 데려다가 시녀 시종으로 삼을 거다. 너희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나가 10분의 1씩 빼앗아서 세금으로 빼앗아가게 될 것이다. 왕이 되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의 밭을 갈게 하는데,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데려갈 것이고, 왕의 그 궁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재산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경고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해주고 계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면 언제나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뽑습니다. 몇 년 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요. 그때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각각 자신들만의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저렇게 하겠습니다. 그 공약들을 보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공약들만 보면 정말 좋은 공약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었어서, 그래서 그 공약들만 보고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만 하면 우리나라가 다 잘 될 것 같고, 우리나라가 곧 선진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고, 곧 복지국가가 되게 될 것이고, 어린아이들 교육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늙어도 전혀 진료 때문에 의료 때문에 문제 겪고 있지 않는, 그런 선진국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장밋빛 소망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 그때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대구에 있으면서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택시 운전사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게 기억이 납니다. 경상도 그 택시 운전사가 하는 말씀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대요.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할 것 없이 세 명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다. 공약들을 보니까 너무나 다 좋기 때문에 다 시켰으면 좋겠다. 누가 나와도 우리나라는 잘 살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몇 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우리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이 그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4대강이니 자원외교니 하면서 나라를 망쳐 먹고, 국고를 고갈시켜 버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 무엇인가 좋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버리는 그런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면서, 왕만 세워주면 우리나라도 다른 민족처럼 그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도 좀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제발 왕을 좀 우리에게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그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왕을 세우게 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왕이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종으로 삼을 그 왕이 너희들의 물건을 10분의 1씩 세금으로 걷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어쩌면 이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면, 그 소망이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잖아요.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저 선악과를 먹으면 그러면 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 이야기에 솔깃해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저것만 먹으면 내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저 선악과만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은 높은 위치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비참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죽음 에덴동산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그런 비참한 결과, 장미빛 선악과(공약)를 바라보면서 그걸 먹으면 살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 선택했던 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돈에 소망을 겁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요. 돈이 있으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고,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고, 돈만 내 손에 집어넣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돈만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그 돈에 두는데, 그런데 그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우리가 지불했던 대가가 무엇입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고, 내 건강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고, 돈을 얻기 위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이 없었던 민족인데, 그 왕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좋았는가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편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 사람을 믿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100프로 실망할 것이에요. 사람을 믿으면, 저 사람이 나의 구세준가? 저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줄 것인가? 하고 그 사람을 믿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이것은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목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항상 좋은 사람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는 잘못된 망상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각이 뭐예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뭡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해결될 거 아닙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는 거짓된 망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결혼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인생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망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좋은 신랑감만 찾으면, 결혼 생활은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이죠. 좋은 아내만 만나면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좋은 남편이 있던가요? 좋은 아내가 있던가요? 좋은 남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이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한 남자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아직 미숙한 한 여성이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게 그게 결혼이에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지 마세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기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옛날에 어떤 노처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자기가 결혼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항상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못 했다는 겁니다.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그래서 결혼을 못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나중에 그 노처녀가 나중에 고백하는 말이 뭐라고 고백하냐면, 나는 왜 그렇게 유부남만 좋아했었나 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부족한 남자가 결혼을 해서 그래서 인격적으로 점점 성숙해지고 해서,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된 거지. 결혼하기 전에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에요. 결혼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게 좋은 결혼이 아니라,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모든 게 미숙한 한 남자와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어설픈 한 여자가 만나서 두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싸우면서 성격 차이 때문에 서로 조율해 가면서 다투면서 그러면서 점점점점 인격이 성숙해져 나가는 게, 그게 인생이고 그게 결혼 아닙니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완벽한 부모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젖을 어떻게 먹여야 되는지, 이 아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 모르는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 아이를 기르는 과정 가운데서, 내 인격이 성숙하고 인내심이 생기고 신앙이 더 커가는 그런 성숙의 과정을 걸어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완벽한 100퍼센트 흠도 없는 배우자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는 경우가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완벽한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교회를 간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교회에 가면 내가 신앙생활 잘할 것만 같아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는 꼴 같지 않은 그런 사람들도 있고, 결국 여러 가지 불합리한 모습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 이 교회는 정말 안 된 교회다. 이 교회는 정말 내가 다닐 수 없다라고 포기하면서, 더 나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스펄전 목사님이 한 번은 어떤 청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목사님,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 내가 다니는 이 교회 성도님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너무나 많이 주고, 그래서 내가 이 교회를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좀 사랑이 넘치고 그리고 따뜻하고 정말 아름다운 교회 어디 없을까요? 목사님은 그래도 유명한 부흥사니까, 영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수많은 교회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교회 중에서 제일 좋은 교회, 추천할 만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정말 멋있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 소개해 주시면, 제가 그 교회 다니겠습니다. 제발 그 교회 좀 하나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랬더니 스펄전 목사님이 그 청년 앞에서 고민고민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습니다.

“여보게. 청년. 내가 지금까지 부흥회를 하고, 집회를 다니면서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부분 다 다녀보고, 그 교회를 다 살펴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내가 볼 때 아무 문제없고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교회는 단 한 교회도 발견하지 못했다네. 내가 간 교회마다 다 문제 투성이고, 거기에 문제의 교인들이 있고, 여러 가지 시기와 질투와 그리고 갈등들이 있는 교회들 뿐이었지, 그렇게 좋은 교회 찾지 못했다네. 미안하네. 내가 좋은 교회 추천해줄 수가 없어서 정말 미안하네.” 이 청년이 대단히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게. 청년. 자네가 한번 찾아보게나. 자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 있으면 한번 찾아보게. 그리고 그 교회가 어디인지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 알려주게.” 그러자 그 청년이 목사님에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알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제가 한번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이 떠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기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잠깐만.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네.” “무슨 부탁입니까?” “만일 자네가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사랑이 넘치고 따뜻하고, 정말 좋은 교회를 발견하거들랑, 제발 그 교회에는 절대로 가지 말게.” 깜짝 놀라서 그 청년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제가 그런 교회를 찾고 있는데, 그런 교회에 가지 말라요.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여보게. 만일 그렇게 좋은 교회에 자네가 들어가는 그 순간, 나쁜 교회가 되는 거야. 절대 가지 마.”

예수비전교회는 이제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단계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목사님 오실 때, 가장 좋은 목사님 가장 훌륭한 목사님만 오신다면 괜찮아지겠지,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이 세상에 좋은 목사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목사님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으면, 멸망당할 죄인들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다 멸망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100퍼센트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혼란은 한국사회의 이런 현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시편 146편 5절 말씀에 “여호와 자기 하나님을,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건물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과 능력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걸 다 내버려야 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배격하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병을 낳기 위해서 의사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과 협력하고 무엇인가를 협력하면서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배격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좋은 목사님도 찾아야 할 것이고, 좋은 신랑감도 찾아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찾는 것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왕을 세우면 이런 단점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경고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겁니다. 아니, 왕의 제도의 나쁜 점들을 이야기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십니까? 나쁜 거라고 한다면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왕을 세우는 것이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우리가 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왕을 세우지만 그 왕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애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왕은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온전히 잊어버리고, 왕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거나, 물질이나 내 능력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는 그 순간에, 우리의 문제가 완전히 잘못되어 가게 될 수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우리들의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가를 의지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섬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애굽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인간 왕을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결과는 아주 비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소망을 두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월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은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은 성탄절을 앞둔 한 달 동안 정도의 기간을 가리켜서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은 대강대강 지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강림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대강절인데,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교회에 참석했는데, 미국 교회에서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을 지내면서 나뭇잎으로 만든 동그란 원에 촛대가 꽂혀져 있는 여러 개의 촛대가 꽂혀져 있는 그 촛대에, 첫 번째 촛대에 촛불을 켜는 것으로 대강절 그런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초록색 나뭇잎으로 엮은 동그란 원인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끊임없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그 촛대들은 어둠 가운데 오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촛대에 불을 켜면서,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기념하는 그 모습 가운데 첫 번째 촛대를 켜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누구로 오셨는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만왕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권력자는 우리들에게 실망을 주지만, 참된 왕이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있는 두 딸 아이를 만나러 갔다 왔는데, 큰 딸 아이는 27, 28 나이가 되고, 두 번째 아이는 23살 정도 되는데, 미국 나이랑 한국 나이랑 좀 헷갈려서 그래요. 그 아이가 있는 사는 곳에 가보니, 한숨이 나오는 거에요. 우리 둘째 아이는 지금 어느 한 집에 자취생 한 대여섯명이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 방 하나하나에 대학생들 자취생들이 모여 살아서, 함께 살고 있는데, 화장실을 하나 공룡으로 쓰고 있는 그런 상태인데, 방 안에 갔더니, 고양이 털이 날리고, 화장실은 먼지로 가득 떼가 가득 차 있고, 엉망 신청. 그 딸아이를 방문하러 이번에 처음, 사는 곳을 이사 간 이후로 처음 가봤는데, 대학생 아이들이니 청소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미국 아이들은 공부하면서 평생 학교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과는 달리. 그러니까 청소를 배워보지 못한 이 아이들이 엉망 칭찬으로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제 아내가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졸라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면서 그 화장실을 깨끗이 닦아내는데, 우리 아이가 말하면 엄마 이거 여러 명이 쓰는 건데 우리가 청소할 필요 없다고 하는데,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반짝반짝반짝 윤기가 나게, 허리가 아픈데도 힘들어 하면서도, 그렇게 막 하고 그리고 방도 막 고양이들 다 털어내고 하면서 가서 쉬고 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치우고 청소하느라고 막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때 제 아내가 “내가 이러려고, 배 아프고 딸 나서 엄마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힘든데 행복한 거에요.

그게 엄마의 마음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엉망진창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 가운데 온갖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사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깨어진 가정 갈등이 있고, 재정적 문제가 있고, 건강에 문제가 있고, 소외의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가득한 우리들의 모습.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우리들이 지은 죄의 문제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비롯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냥 외면한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그 보좌를 버리시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이 땅 위에 내려오셔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엉망진창된 우리들의 모습을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주님에게 두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착취하고 재벌들의 돈을 뜯어가는 권력자가 아니라, 애국애국 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뱃속만 채우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 바로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12월 성탄절을 앞에 두고, 어떤 성탄절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소망을 더더욱 하나님에게만 두고 만왕의 왕 되신 주님 앞에만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고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괜찮다 하시고 우리들의 모습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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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나님 (마 6:5-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독일의 신약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라고 하는 그런 학자가 있었는데, 이 학자는 1세기의 유대 문헌들을 깊이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러면 어떻게 불렀는가?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존귀하신 하나님, 친근하게 다가가기에는 너무 무서운 하나님, 장엄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을 부를 때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존귀가 많으신 그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불렀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고 그렇게 연구해 놓았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을 향해서 기도를 가르칠 때, 너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 가르침은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고 획기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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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아바”라고 하는 이 아람어는 우리나라 말에 “아빠”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치 꼬마 아이가 자신의 아빠를 부르듯이, “아빠” 친밀하게 그렇게 부르듯이,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되는가? 두려워서 가까이 하기 뭐 하기에는 너무 먼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장엄한,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 하려면 무서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우리들의 사랑이 많은 아빠처럼, 마치 사랑이 많은 우리 엄마들처럼, 그렇게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서 부를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기도문에서 맨 처음에 하나님을 부를 때 부르는 그 호칭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주기도문 번역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번역입니다. 헬라어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지금 이렇게 쓰여진 것이 헬라어 단어들입니다. “파테르 해몬 호 엔 토이스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헬라어 표현인데요. “파테르”(πάτερ)라고 하는 말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고, “헤몬”(ἡμῶν)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들의라고 하는 말이고, “호”(ὁ)라고 하는 것은 정관사인데, 마치 관계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이고, “엔”(ἐν)은 인(in), “안에”라고 하는 말이고, “토이스”(τοῖς)는 정관사이고,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말은 하늘 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직역하면 “하늘에 있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할 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을 집어넣어서 번역한 겁니다.

그러니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이해하기 좋도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을 하다 보니까, 우리들의 생각에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하늘이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번역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장소적인 의미에서 하늘에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차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이라고 하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우리들의 혈통의 아버지, 이 땅에서 우리를 낳아주신 그런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먼 하늘, 저 먼 천국의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땅의 일은 관심도 가질 수 없거나, 이 땅의 일은 잘 참여하기 어렵거나,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영적인 아버지라,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표현을 보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아닌 저 먼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의 인간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이 땅의 아버지와는 달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죠. 이 땅의 아버지는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 때문에 우리들에게 빨리 다가올 수가 없어요. 우리들은 시간에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필요할 때 바로 달려가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든지 다가오실 수 있고, 우리들의 기도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도대체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를 좀 아시겠습니까?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혹시 이해가 안 되신다고 하면 그 문장 전체를 천천히 문맥에 따라서 읽어보시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6장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니까 중언부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기도를 우리가 한 번만 하는 것보다는, 작정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기도의 양을 많이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정성을 보시고, 우리들의 정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개념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할 필요 없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좀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를 잘 안 하다가, 정말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그때만 하나님 앞에 한 번씩, 필요할 때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기도를 많이 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기도의 양을 많이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기도할 게 아니라, 언제든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절망하고 낙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포기해 버리고 기도하지 않을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기도하라는 이야기고, 그 어떠한 일들이 우리들 앞에 펼쳐 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항상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것이지, 기도의 양이 응답을 결정한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만 정성을 아주 다해야만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로 그렇게 우리가 정성을 들여야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경우는 언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아닐 경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들의 아버지세요. 우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누가 아닌가?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악한 재판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과부가, 불쌍한 과부가 나아가서 그 재판관을 향해서 간청을 합니다. 내 어려운 사정이 있는데 내 어려운 사정 좀 해결해 주세요. 그랬을 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 과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척 해버립니다. 그런 상황이 있을 때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또 가서 조르고 또 가서 조르고 계속해서 간청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때서야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이 자꾸만 와서 나를 괴롭히는데, 이 여인을 더 이상 오지 않게 만들 묘수는 없는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생각하면서 이 재판관은 차라리 이 여자의 간청을 들어줘버리고 말겠다. 그러면 더 이상 이 여인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에서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일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양을 많이 해서 괴롭게 해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응답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길 가다가 어쩌다가 만난 아저씨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심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마치 우리의 아버지와 같아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그런 부모님과 같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셨습니까? 우리 아이가 어느 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 나 저 장난감 갖고 싶어”라고 그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이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말이 내 가슴 속에 박혀요. 이 아이에게 장난감 사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콱 박혀서 돈을 버는 겁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어서 가게로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장난감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거죠.

우리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우리 아이가 말을 합니다. “엄마, 나 떡볶이 먹고 싶어. 나 치킨 먹고 싶어.” 그러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요. 일을 하면서도 내가 빨리 집에 가서 우리 아이에게 이 맛있는 거 만들어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생각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님들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 그것밖에 안 한 것 가지고 내가 들어줄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주님께서 보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1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하나님이라고,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아버지는 한계가 있죠. 부모로서의 사람 부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들이 어리석어서 좋은 것을 주기보다는 나쁜 것을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주었는데,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이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주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 같은 것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고,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로서 훈련받지 못하고, 서툴고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그리고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데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못한 것을 주었어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 아이가 너무나도 겁이 많은 겁니다. 용기가 없는 겁니다. 부모님과 분리 불안 증세가 있는 겁니다. 제 마음 가운데 우리 아이가 이렇게 크면 안 되는데, 이 아이가 좀 잘 자랐으면 좋겠는데, 용기가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아이가 자신 있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 정말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는 그런 위대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아이는 불안 증세가 있고, 부모님과 떨어지기를 두려워했고, 용기가 없고 자신감이 없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용기 있게 만들고 싶어서, 제가 했던 어리석은 행동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를 다그친 거죠.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면, “그래. 아이스크림 사줄 텐데, 네가 슈퍼마켓 들어가서 네가 사가지고 나와.” 얘기를 하니까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도, 두려워서 못 들어가는 거에요. “아빠가 좀 갖다 사다 줘. 아빠가 사다 줘. 아빠 손이 붙잡고 가고 싶어.” 이야기하는데 이 어리석은 아빠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네가 가서 못 사오면, 못 먹어.” 윽박지르고, 그러자 이 아이는 펑펑 울면서, 그렇게 하는데도 모질게 이 아이의 용기를 길러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더 세상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더 용기가 없게 만들어버리고, 이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고, 아이를 정말 자신 없는 아이로 길러버리고 만 그 책임이 책에 있더라고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아요.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손 붙들고 “걱정 마. 아빠가 함께 갈 테니까, 같이 가보자. 뭐 먹고 싶니?” 골라보라고 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옆에서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살만한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세를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 딸아이 결혼할 때, 제가 했던 말이 뭐냐면, “미안하다. 아빠가 바보 같아서 미안하다.” 얘기한 건데요.

우리 인간 부모는 어떤 부모인가?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리석어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나오는 일들을 하는 게 우리 부모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우리들의 하늘의 하나님 우리들의 영적인 아버지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부모님은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능력이 없어서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연로해지면서 이제는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더 이상 해줄 것들이 줄어가고 있고, 그리고 우리들의 호흡이 끝나면 멈추면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되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 부모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 우리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들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이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어떻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일까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이 필요하죠? 피를 물려받아야 자식이 되는 겁니다. DNA가 같아야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인이 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식은 부모를 빼다 닮게 되어 있는 겁니다. 붕어빵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닮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닮기보다는 마귀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왕따 시키고, 아는 척하지 않고, 여러 가지 악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꾸만 솟아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마치 마귀의 자녀와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해 보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 그 모습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마귀의 자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닮지 못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당당하게 부모님에게 나가지만, 그러나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아버지 앞에 부모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집을 나갔던 탕자는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 말씀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은 집에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내 백성이라고 칭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2장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 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1932년에 소설을 발표한 김동인이라고 하는 소설가가 있는데요. 일제시대 때 동광이라고 하는 문학잡지에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은 의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인데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기에, 성병에 걸려 생식 기능을 상실한 M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노총각 신세로 있다가, 그래서 어쩌다 보니까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는데요.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겁니다.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아기를 임신한 것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의사를 찾아와서 자기 자신에게 생식 능력이 있는 것인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가도, 그런 검사를 받지 않고 그냥 다시 돌아가버렸어요. 또 다시 돌아와서 그런 기능이 있는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얘기를 했지만, 다시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의사는 자초지정을 듣고 나니까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하루는 시름시름 아프게 되니까 그 아이를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안고 와서 그 의사에게 치료해달라고 하면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의사선생님, 이 아이가 우리 증조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리고 나도 닮았는데, 저 발가락 가운데 발가락이 좀 길어요. 그게 나를 닮았어요.”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M이라고 하는 청년을 의사가 바라보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선생님의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라, 선생님의 얼굴도 닮았네요.” 그 이야기를 했지만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일까 하면서 의혹의 시선으로 또 희망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봐 두려워서, 그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아닐 것 같은 그 아들을 보면서 내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삶이 부정을 당하고, 정말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그냥 이 아이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심리가 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을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을 보면서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의 아들이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내 팽개쳐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들의 죄를 다 씻기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서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한 목사님이 계시는데요. 그 목사님은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사람입니다.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학생들 모두가 다 동양인이라고 중국 사람이라고 놀리면서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었는데요. 그러니까 이 이 사춘기의 이 소년이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는 겁니다. 학교에 가서 늘 싸우고 다투고 문제를 일으키고,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이 학교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넌 커서 뭐가 될래? 너는 커서 누가 되려고 이렇게 말썽을 비우느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대답하기를 “상관없어요. I don’t care. 내 미래에 뭐가 되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막 나가던 그런 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을 향해서 교장 선생님이 얘기하는 거예요. “너 내일 어머니나 아버지 데리고 와라.” 그 이야기를 들은 이 학생이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야기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겁니다.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자기 전에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요. “엄마, 내일 학교에서 오래요.”

다음 날이 돼서 그 어머니가 교장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학교로 옵니다. 시카고 아주 추운 곳인데,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로 총총총총 걸어오고 있는데,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서 교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가 자기 엄마를 본 거예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엄마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으로 달려오는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그 아이는 그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나중에 목사님까지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늘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들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잘못을 다 우리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이 추한 곳으로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영적인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넘어지고 쓰러질 때 혼자 당황해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다시 한 번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 한 번 일어서고 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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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배려와 멸시 (잠 11:12-13) +++ 사랑의 역설 (잠 11:16-31)

우리는 두절을 읽었는데요. 14절의 말씀 그리고 15절의 말씀이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의 말씀의 경우에는 보증을 서는 것에 관한 교훈을 해주고 있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보증을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증 서지 마라. 보증을 서게 된다면, 해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러니까 함부로 보증을 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증 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작년이었던가요? 작년이죠! 작년 9월에 잠언서 6장 1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근거해서,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보증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을 아주 깊게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보증을 안 서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힘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이웃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말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보증을 서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 보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벌써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다 잊으셨다고 한다면, 예전에 제가 했던 그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설교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이번 주 이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리게 될 텐데요. 이 설교 홈페이지에 링크를 걸어 놓을 테니까 , 예전에 우매한 보증에 대해서 설교했던 내용을 링크해 놓을 테니까, 보증에 관해서 다시 한번 듣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하는 것으로 15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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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두 절을 읽었지만 한 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 한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대요.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된대요. 그러니까 지략이 있는 게 좋겠죠? 지략이 있어야 됩니다. 끝!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지략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죠.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말 사전을 살펴보니까, “어떤 일이나 문제를 명철하게 포착하고 분석 및 평가하여 해결 대책을 능숙하게 세우는 뛰어난 슬기 그리고 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 어떤 사건, 어떠한 난처한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빨리 분석 평가하고, 그 해결책을 빨리 해결해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지혜, 슬기, 계책, 계략,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지략들이 많으면 평안하겠지만, 이런 지략이 없다고 한다면,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고, 정말 힘들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지략이 많아야 된다. 지략이 있어야 된다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근데 지략이 많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지략이 많아집니까? 아니잖아요.

지략이 있고 싶어요. 근데 지략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떤 문제를 만났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습니다. 정말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완전히 잘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슬기로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뭐 노력한다고 됩니까? 어떻게 그런 지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지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지략이 없는 지혜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좀 머리 좀 써라. 좀 생각 좀 해봐라. 좀 지략을 세워서, 좀 대처를 해라. 백날 이야기한다고 해서 됩니까? 안돼요. 그렇게 태어났는데, 아무리 지략이 있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들, 지략이 생겨나겠습니까? 생겨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략이 없으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지략을 많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어도, 내게서는 그런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머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 같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나 혼자 생각하면 해결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인들에게 가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런 일들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어머니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는 것이죠. 전문가에게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나는 의학 지식이 없어요. 나는 아무런 건강에 대한 상식이 없어요. 하지만 의사에게 가서 물어보는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오은영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고, 이런저런 전문가들에게, 아니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비록 우둔해서,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없지만, 지략이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귀를 기울이면 지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아서,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그리고 그 조언을 듣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얻느니라.” 평안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략이 “뛰어나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략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저 사람의 지략을 듣고,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많은 지략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실수를 줄이게 되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줄이게 되면서, 그래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의 경우에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기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왕이 여러 사람들의 신하들의 이야기들과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무슨 불평이 있고, 어떠한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결정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왕이 아닌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사람들의 지혜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 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보면, 이것은 네모나요. 이런 컵이 있으면, 이 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 네모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이 컵을 바라보면서, “아, 이것은 네모나구나”라고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네모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습니다. 한 사람은 네모나다고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동그랗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것만을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 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열어야, 지략이 많아지는 것이고,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한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서,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나무둥치와 같다. 나무둥치처럼, 커다란 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코끼리가 나무둥치 같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 흐물흐물하고, 이렇게 길쭉하게 생겨서 움직이는데, 마치 뱀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나뭇잎과 같이 생겼다고, 그 넓은 나뭇잎과 같아서, 그래서 그 나뭇잎과 같은 것으로 내에게 부채질을 하면 시원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3명의 소경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한 소경은 코끼리에 배를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코끼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에 그 뿔을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어떤 창과 같은 것이라고 아주 뾰족한 창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소경들이 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각 조그마한 부분을 만져놓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왜? 내가 만졌으니까,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코끼리에 대해서 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투는 겁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 앞에서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조그마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진리라고 하는 그 엄청나게 큰 진리를 우리들의 알량한 머릿속으로 다 집어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 일부분만 보고 있는 우리가 내가 진리를 다 보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조금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지하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귀를 기울여야 되는,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하면서, 저 사람이 틀렸다가 아니라, 나랑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가 본 부분과 저 사람이 본 부분이 다른 부분을 보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있고,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의 나의 의견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의견을 그냥 내 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마주 앉아서 나는 이것을 보았는데, 너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맞추어 보면서, 코끼리 코끼리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고, 더 나은 그런 파악을 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가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략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해결책을 얻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100%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말 완벽하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지 아니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와의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략이 많아야 돼요! 지략을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게 아니라, 다양한 지략을 같이 모아서, 들어야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해결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고, 내가 이해한 성경 말씀, 내가 알고 있는 신앙, 내가 알고 있는 그 교리,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죽여야 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국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내가 이 컵에 한쪽 면만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둔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데요.

그런 우리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똑같이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거 원인데, 왜 네모라고만 이야기하느냐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이 교조주의에 빠져서, 도무지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망하게 될 것이다.

망하게 되는 길로 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눈을 닫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려서,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부분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그 부분적인 진실 속에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지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놔야 해요. 우리들이 진리 앞에서 겸손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일부만 볼 수 있구나! 내가 전체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모습만을 보고 바라보고 있고 저 뒤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보지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극히 일부분이며,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지략이 많아지는 길이고, 그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신앙생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 엉터리고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이 얄팍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해는 우리들의 지략은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지략에 의해서 교정받아야 되고 수정받아야 되고 보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해 나가는 가운데, 영적으로 같이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믿습니까? 한 사람이면 어떻게 된다고요? 패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면 어떻게 돼요? 망하는 거예요. 내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면, 내가 맞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 가운데 있으면, 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고,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렇게 깨달은 것이 내가 잘못 깨달을 수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교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면을 내가 보지 못했었구나! 우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아서, 서로 보완해 주고, 그리고 함께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해석 공동체로 우리들을 불러주신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잘못 이해했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 공동체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은 똑같은 본문을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전혀 잘못된 길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해석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을 할 때,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가?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고민하고, 혼자 나 홀로 있다가, 그렇게 해서 내가 결정해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혼자 결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같이 의논하고, 같이 대화하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만드셨어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 가운데 하나가, 세 가지 규례 가운데 하나가 결혼의 규례입니다. 하나는 노동의 규례이고, 또 하나는 안식의 규례이고, 또 하나가 이 결혼의 규례라고 하는 것인데, 태초에 만드신 이 세 가지 법칙이, 이 규례가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을 이 부부로 짝 지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남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여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같이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서로 보완하고 도우라고 하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같던가요? 생각하는 것이 완전 정반대던가요? 완전 반대예요! 왜 그렇게 반대인지 모르겠어요. 꼭 반대로 생각해요. 왜 반대로 생각할까요? 그래야 온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면 망하는데,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보완하고 완충하고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보아서, 실수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인 것이죠.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아내의 말을 잘 듣자!” 이런 얘기하면, “목사님, 왜 남편 말을 잘 듣자는 얘기는 안 합니까?”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보니까, 아내분들은 말 안 해도 잘 들어요. 남자들이 문제지!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그냥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그런 게 문제란 말이에요.

서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야기하면서 같이 의논해야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야 돼요? 부부가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더 들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도, 그 아이가 3살짜리 꼬마 애든지, 다섯 살짜리 꼬마애든지,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아빠 생각에는 이렇고, 엄마 생각에는 이런데,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그 아이에게 물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 꼬마 아이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꼬마 아이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꼬마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되고, 또한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실수를 적게 하고, 우리가 평안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 가보니까요. 정말 그래요.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애들은 가라”가 아니라, 아이들도 같이 앉혀놓고, 처음부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빠가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내가 이 직장을 옮겼으면 좋겠니? 안 옮겼으면 좋겠니? 아내랑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데 부부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꼬마 아이를 앉혀놓고 같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아이에게 아빠가 직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고생이 많고, 이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서 직장을 어떻게 옮기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네 생각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논어의 술이편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 선생님이 계시는데, 착한 사람이, 착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따르면 되는 것이고,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든, 다 선생님이라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긍정적인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사람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지략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지략을 듣되, 그 지략들을 겸손하게 들으면서, 그리고 무엇이 가장 바른 선택인지, 스스로 그리고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나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 당나귀가 있는데, 왜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을 태우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또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젊은이는 나귀를 타고 가고, 어른은, 노인은 걷게 하다니,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서로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타고, 아들은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까, 또 옆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나쁜 부모가 있나, 어른은 자기가 편하자고 나귀를 타고 가고, 아들은 저렇게 걸어가게 만들다니, 부모가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위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니까,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나귀가 얼마나 불쌍하냐? 저 나귀에게 두 사람이 타서, 저렇게 나귀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두 사람이 나귀를 매달고, 시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아빠와 아들이 나를 막대기에 매달고 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 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강에 빠졌다고 하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수많은 지략들, 수많은 지혜들,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러면 누구의 말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의 말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요? 내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내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모님이 말한 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까? 자녀가 말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목사님이 말한 걸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다 의견이 다르면, 누구의 뜻을 따라가는 게 제일 현명한 일이죠?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정답은) 옳은 걸 따라가야 됩니다. 누가 이야기를 했든,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 옳은 것은 때때로 우리 꼬마 아이가 말할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이웃집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모님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입을 통해서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죠. 지략을 다 듣고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아, 그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떠한 것을 따라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경배하라고 하는 말을 했는데, 그러한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략이 아니라, 잘못된 유혹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여기 있자고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략을 듣는 것은 듣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할 것은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욕심에 따른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들의 탐욕의 마음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고, 때로는 내 자존심 때문에 이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시의 판단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가면서, 그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나갔던 것과는 달리, 우리들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보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신앙적으로 포장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포장하고, 정말 정당한 것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교만함에 근거해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담력의 마음 가운데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어리석음이고, 지략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략을 없게 만드는 결정이어서, 결국은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약점이고 그게 우리들의 허물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 우리들의 더러운 죄성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서, 수많은 지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하여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에 맞는 바른 판단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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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신 6:4-9)

교회 안에 아주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됐거나, 혹은 잘못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과연 이것이 맞는지, 잘못된 것인지, 늘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정보를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에 대한 과장된 평가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동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이 동영상은 유태인들이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면, 유태인들은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은 온 세상을 이 세상을 리드하고 있는 그런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태인들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의 동영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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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참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영상일 텐데요.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들어보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조그마한 내용을 확대 과장했고, 그리고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 말씀, 이것을 “쉐마”라고 부르는데, 유대인들은 이 쉐마라고 불리는 이 구절의 말씀들을 늘 암송하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잘 받고 있으며, 그래서 유태인들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12살이나 13살 정도의 성인식을 치르게 될 텐데요.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유태인들 어린이들은 모세 오경을 다 암송하게 된다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을 다 암송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고,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라고 하는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암송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쉐마를 들으면서 태어나고, 그리고 죽을 때에도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죽는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마에 성구함을 매달고 팔목에 성구함을 매달고, 집에는 “메주자”(mezuzah)를 붙이면서 정말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에 우뚝 서 있는 그런 위대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은 거짓 정보이거나, 조그마한 것을 확대 과장한 내용이어서, 별로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두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태인들이 많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가 다 신앙적인 교육을 잘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무신론자들도 많이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그들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는 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 극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위치에 달성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극빈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어서, 유태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들만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국인들도 프랑스인들도 독일인들도 미국인들도 그리고 중국인들도 인도인들도 일본인들도 전 세계 방방 곡곡에서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마치 유대인들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냥 말하고, 그리고 그것이 신앙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일반화(generalization)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별로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정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제대로 된 신 교육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을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유태인들에 대한 막연한 호감, 막연한 같은 편 같은 의식들이 우리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유태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순 엉터리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물론 종교적인 면에서, 열정적인 종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극히 일부분의 열정적인 신앙인들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아주 철저한 신앙인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정적이고, 그리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몰라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괜찮은 것이었느냐면, 하나님 앞에서 빵점짜리 신앙생활이었던 것뿐이고, 유대인들이 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구약 성경을 읽는 것은 엉터리일 뿐인 것이고, 이단들도 그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그야말로 성경의 핵심을 놓쳐버린 그런 불쌍한 영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 종종 유태인들에 대해서 자꾸만 좋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앙을 정말 본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동기가 “성공하고 싶다.” “우리도 좀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도 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도 좀 재물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 세상적인 탐욕이 동기가 되어서, 그러한 유태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했는데, 왜 성공했는가? 신앙을 통해서 성공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한번 그런 식으로 신앙을 이용해서 성공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동기가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탐욕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을 가리켜서 흔히 쉐마 교육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쉐마 교육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 쉐마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쉐마 교육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쉐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들만의 교육 체계를 가지고서, 이것이 유태인들의 교육이고, 이것이 쉐마 교육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쉐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것을 내놓고, 쉐마 교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적인 방법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배울 점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철학 같은 것들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교육이다. 쉐마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성경적인 가르침과 멀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이 신앙 교육을 잘해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확인되지 아니한 일반화의 오류, 단순하게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어떤 본문이냐면 쉐마라고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우리들의 탐욕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글이 히브리어인데요.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번역을 하자면, “들으라. 이스라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뿐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뿐인 여호와시다”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이 “들으라” “쉐마”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구절을 “쉐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알려주시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몇 분이시다?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쉐마 구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으니,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쉐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라고요? 한 분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닌 거죠.

돈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목회자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성공이 하나님이 아니고, 정치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고, 행복이 하나님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누구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까,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됩니까?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는 이야기는 관계적인 의미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거할 때 만족감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가 복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그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보호받고, 정말 행복할 수가 있는 거죠.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닌 유괴범을 따라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엄청난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님이 아닌 조폭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난한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지만, 조폭은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서, 따라가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불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들을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 행복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성공하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가 획득하기만 하면, 그러면 괜찮을 것처럼 우리들을 유혹하면서, 그 탐욕의 길로 가라고 우리을 유혹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하게 되고, 비패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털리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요.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때,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하나뿐인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만 사랑하라. 이게 첫 번째 메시지고요. 두 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메시지가 뭐냐면, 바로 그 메시지를 1번의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데요. 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똑같은 의미죠.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복된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데요. 이 가운데 자녀들에게, 나쁜 거 주기 원하시는 부모님 계십니까? 없잖아요.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가장 좋은 게 뭐예요? 돈이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좋은 대학 가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믿음을 심어주는 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을 심방하면서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몇 가지 지혜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신명기 6장 6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어디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가르쳐주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하라고요? 우리들의 마음에 먼저 새겨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자녀들이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왜 실패하곤 합니까? 그것은 부모님들이 말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그래요. 우리들의 행동에서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최고야” “좋은 대학 가는 게, 최고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최고가 되는 게, 그게 너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들의 모든 바디 랭기지(body language)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은 쓸 데가 없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학 가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최고야.”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행동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눈치가 아주 빨라요.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야기를 하면, 부모가 말하기를 “너 교회 가야지.”라고 이야기를 하고, “신앙생활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정말 말해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지금 입으로 딴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너, 교회 가야지.”라고 윽박지르면, 우리 자녀들이 그 부모를 보면서 교회를 가는 게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체면이 제일 중요하구나.” 사람들로부터 창피 안 당하는 것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아빠가 목사인데, 그래서 목사 자녀가 안 나온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나오라고 하는구나.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공해야 인정받는구나.”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인정받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새겨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먼저 해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야 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돌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고 나무가 아니어서, 바위라고 한다면 정을 찍어서 새길 수 있을 것이고, 나무라고 한다면 목각을 해서 새길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또 잊혀지고, 또 망각해 버리고,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에 새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고, 또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방법을 해야 됩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내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대로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하는 것인데요.

한번 그림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테필린(tefillin)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우리 개정 개혁 성경에서는 “경문”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경문”이라고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튼 성구함을 가죽으로 만든, 네모난 성구함에 오늘 읽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넣어두어서, 그래서 이마에 붙였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그렇게 테필린(tefillin)을 메어 달아서,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 문설주에도 메주자(mezuzah)를 달았습니다. 그림 한번 다시 한 번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냐면, 히브리어로 “문설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저 조그마한 나무통 속에, 성경 구절을 적어서 그 안에 넣어놓고 그것을 문에 붙여둔 겁니다. 신명기 6장 9절의 말씀에서,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붙여 놓은 것이죠.

제가 미국에 살 때 보면 유태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유태인들의 집 앞에 가보면 문에 이런 메주자(mezuzah)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이사 갈 때는 띠어가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아주 잘 지킨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잘 지켰나요? 잘 지켰다고 생각이 들어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한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이거 잘 지킨 거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너는 이마에, 그리고 손목에 문설주에 이런 걸 달고 매달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건 어리석은 성경 읽기죠. 바보 같은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봐야죠.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읽어야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문설주에 달으랬으니까, 문설주에 달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이마에 붙이라고 했으니까, 이마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망해요. 엉터리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는 예로 제시될 것이 아니라, 잘못 지키는 대표적인 방법,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제시돼야 될 모습인 것이죠. 마치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식판 가지고 집합”했더니, 식판만 가지고 왔어요. 숟가락은 안 가져오고. 왜 안 가져왔냐 하면 “식판 들고 집합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식판하고 숟가락하고 가지고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식판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이런 식의 성경읽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앉았을 때든지, 일어섰을 때든지, 그 어느 곳에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모든 케이스에 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야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자녀들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 단 어느 한 점도 우리의 신앙과 연관이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반경 가운데 1제곱센티미터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학교를 가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것, 우리가 친구 관계를 맺고,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런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회 학교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전도사님이 알아서 신앙 교육을 해주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늘 반성경적이고, 반 신앙적인 세뇌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살라.”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며 살라.”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눌러버리고, 내가 성공해야,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우리가 완전히 노출되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따랐느냐? 잘 믿었느냐? 아니오. 그들은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자신들의 이득이라고 하는 탐욕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고, 너희들이 나그네 되었던 적을 기억하면서, 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고, 성공과 그리고 이 세상에 그 파워(power)를 위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닌, 죄악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며, 이 세상의 탐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우리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에게로 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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