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추리 소설이나 추리 영화 같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안 보셨나요? 추리 소설이나 추리 영화를 보면, 뛰어난 탐정이 사건 현장에 가서, 범인들을, 범인을 찾아낼 만한 단서들을 찾아내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들을 뛰어난 탐정은 그걸 예리한 눈으로 발견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조그마한 단서 정말 조그마한 흔적들을 가지고, 범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내는데 아주 기가 막힙니다. 셜록 홈즈라고 하는 소설, 또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요. 이 셜록 홈즈의 그 모습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한번 쫙 보더니만, 이 사람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무엇을 하다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옛날 직업이 뭔지 다 추리해 내는데, 그걸 다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대단한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곤 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는 그 흔적들이 온 세상에 아주 널리 퍼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 세상을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다스리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단서들, 하나님에 대한 흔적들은 셜록 홈즈와 같이 이렇게 뛰어난 탐정들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다 알 수 있는, 너무나도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보여지는 흔적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취들을 많이 남겨놓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지문이 온 세상에 다 찍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아,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아, 정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구나! 하는 그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흔적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은가? 마치 우리 엄마의 흔적과 같아요.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있는 것이 느껴지죠.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집 안을 지키고 있고, 엄마가 집 안을 잘 꾸미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있는 그 흔적들이 집안 전체에 다 있어요. 손이 안 간 구석이 없이, 집 안의 모든 부분 부분에, 그 엄마의 손자국, 엄마의 흔적들 땀이 다 배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한 번 엄마가 아파버리고 누워버리면, 그것이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잠시 아파서 쓰러져 있을 때,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싱크대의 모든 음식 처리가 안 된 것들이 쌓여 있는 것이고, 모든 것들이 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모습이 금세 나타나는 거죠. 엄마가 잠깐 아파버리면, 엄마가 잠깐 힘들면, 그 모든 것들이 “아, 엄마가 없으니까, 이렇구나”라고 하는 것을 금세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아이들의 흔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집 안에서 같이 아이들과 함께 살다가 이제 아이들이 대학에 갈 나이가 되어서, 멀리 대학에 가버리고 빈 방에 있으면, 그동안 아이가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난 그 빈 방,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와닿는 것인데, 그만큼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흔적이 있는 것이고, 자취가 있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존재를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다스리고 계시며,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라고 하는 이 증거들도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셜록 홈즈와 같은 그런 위대한 탐정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자연 세계를 보면서 이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것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옛날에 C. S. 루이스라고 하는 문학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태양을 쳐다본 후에야, 태양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게 아니라, 태양을 우리가 직접 바라보지 않더라도, 태양이 오늘 해가 떴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알죠? 그 태양이 비치는 빛에 의해서 우리가 사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내가 눈을 들어서 태양이 진짜 떴나 안 떴나 그 태양을 찾아보고, 태양을 보고 나서야, 태양이 있다고 하는 걸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태양빛에 의해서 우리가 사물들을 보고, 우리가 활동하는 그걸 보면서, “아, 오늘도 해가 떴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법칙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그 빛 아래서,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그 법칙 아래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시편 19편 1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 내는 도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이 저기 있구나. 그렇게만 생각한 게 아니에요. 다윗은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죠.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펼쳐지고 있구나.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구나”라고 하는 자연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느끼게 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지혜 속에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그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또 한 번 발견하고, 또 한 번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증거를 보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수많은 증거들을 보면서 그 증거들에 대해서 눈을 닫아버린 것이죠.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고, 자취가 아니라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에게는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가져다주어도 알 수가 없는 것이죠. 만민이 다 똑같이 “이것은 누구다”라고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나는 모르겠다고, 내 눈에는 안 보인다고, 그렇게 말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증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서 눈을 일부러 눈 감아버려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아주 큰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 그것이 불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을 외면해 버리고 인정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그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다고 하는 것,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으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는다고 하는 것은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엄마가 있는데도 엄마를 인정하지 않고, 엄마와 아무런 관계를 하지 않는 그런 어리석은 것과 똑같다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배가 고프면, 엄마한테 가서, “엄마, 배고파” 하면 뭐가 나와요? 뭐가 나와요? 맛있는 게 나와요? 그런데 엄마가 있는데도 배고픈데, 얘기를 안 해. 괴로운데도 얘기를 안 해 속상한 것이 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가서 이야기하면 안아주기라도 하고, 내가 가서 이야기하면 등을 두드려주기라도 하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에게 힘을 주는 엄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마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혼자 외로움이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그 어느 것도 아깝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부탁하고,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것을 하나님을 부인해 버리고, 홀로 외로이 인생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생의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흔적들을 보고 하나님의 그 지문들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데 하나님과 아무런 사귐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누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행동이 변화하게 돼서,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과 교제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풍성함을 우리가 누려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혜택을 우리가 체험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집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집에 엄마가 있어요. 집에 엄마가 있구나. 그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게 아는 건가요? 아니요. 집에 엄마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엄마에게 말을 해야 되는 거예요.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속상한 일이 있다고 말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와의 그 생생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 엄마 됨의 그 축복을 누려야 되는 것이죠. 1부 때 이렇게 했더니, 왜 아빠 얘기는 안 해요? 아빠는 뭐 한 게 있어야죠? 농담입니다. 아빠한테도 가서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요즘 한창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어서 봤습니다. 그게 뭘까요? “폭싹 속았수다”를 봤습니다. 넷플릭스를 오징어 게임으로 보다가 이제 그 뒤로 안 보고 있었는데, 하도 재밌다고 해서 저도 보게 됐습니다. 오래간만에 보게 됐는데요. 거기에 보면 어린 애순이가 등장하는데요. 이 애순이, 안 본 분들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이 애순이는 엄마의 집에서 떠나서, 죽은 아빠의 집에 가서 사는 거죠. 할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의 있는 집에 가서 사는 겁니다. 엄마는 재혼했어요. 그래서 엄마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집에서 사는데, 그 아빠의 집에서 여자라고 천대받고 외면당하고, 힘들게 그렇게 사는 아이가 애순이라고 하는 아이예요. 엄마는 그래도 아빠 집이 부자니까, 그 집에 가면 얻어먹을 거 있고, 그 집이 부자니까 너를 학교 공부시켜 줄 수 있고, 나는 가난하니까, 내가 해줄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아빠 오 씨 집에 가서 살아라 하면서, 애순이를 그 집에 보내버렸어요.
근데 그 애가 맨날 맨날 엄마 집에 달려가는 거예요. 학교 끝나면 엄마 집으로 달려가는 거야. 맨날 맨날 매일매일 엄마한테 가서, 엄마 엄마 부르면서, 엄마한테 가요. 엄마가, 아니야. 오지 마. 너 그냥 저 집에 가. 그러는데도 맨날 엄마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말하고, 엄마한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엄마한테 자꾸 가는 거예요. 왜? 엄마가 거기 있는 거 아니까.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한테 가는 거예요. 학교에서 시를 써서, 그 시가 너무나도 잘 쓴 시여서, 부장원을 줬어요. 그거 가지고 가서 엄마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엄마 내가 부장원 받았어 얘기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잘 못 먹는 거 얘기하는 거예요. 왜?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엄마가 있구나 하면서 그냥 지식적으로 머릿속에서만 엄마가 있다고 아는 것을 말하는, 생각하는 게 엄마가 있는 걸 아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있다고 안다고 한다면 그 엄마한테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 사정을 슬픔을 말하는 거죠. 내가 잘한 거 있으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를 쓴 걸 보여주는데 그 엄마가 얘기를 해요. “이게 부장원이야? 너네 학교 사람들이 다 눈이 삐었네.” “엄마, 이거 뭐 잘 안 됐어?” “장원을 줘야지.” 엄마에게서 인정받고, 엄마에게서 사랑을 받고, 엄마에게서 그 엄마의 품에서 놀라운 은혜를 얻기 위해서 엄마의 집으로 달려가는 그 아이처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냥 혼자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혼자 울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냥 괴로워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토로하는, 그런 누림이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그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셔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쩌면 고아처럼 생각하면서 살지 몰라요. 아무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을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를 정말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가서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을 날마다 날마다 경험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순 엄마가 모질게 얘기해요. 우리 집에 오지 말고. 너 가라고. 매몰차게 말해요. 너 아빠한테 가. 아빠 집에 가서 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쩌면 그게 매몰차게 여겨지지만 딸은 그래도 엄마가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걸 알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랑하는.
어쩌면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우리가 그 어떤 상황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하나님과의 깊은 누림이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려야 하는 것이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이 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요.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반드시 중요한 것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나님 앞에 말해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시는가를 들어야 되는 것이죠. 대화 기도가 곧 대화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들으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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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9편 7절에서부터 11절의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있구나. 이 말씀이 나를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있구나. 송이꿀보다도 더 달고 금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말씀으로 여기며,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 것이죠. 이 말씀은 그냥 성경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 일독을 하면서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는데, 성경을 빨리 읽고 해치우는 게 그게 목적이 아니에요. 성경을 읽고 해치우는 게 “나 읽었다”라고 하는 도장 찍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묵상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해요. 단순히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살았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에게 원하시는가를 늘 질문해 보면서,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한 거예요. 그래서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그 사울을 향해서 내가 원수를 갚아버리고 사울과 대적해서 그래서 내가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 전쟁하러 나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하러 나갈 때 하나님 이 전쟁을 제가 나가야 되겠습니까? 나가지 말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나가지 말라 하면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 가운데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다 거룩한 일이고 누가 봐도 다 의로운 일인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전을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리에서 멈춘 거예요. 내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기다 꿰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신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런 삶을 산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의 계심을 우리가 누리기 원한다고 한다면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나가는 가운데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왜 죽어갑니까? 영적으로 그것은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는 것인데, 말씀을 보지 않고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이죠. 왜 우리의 영적인 굶주림이 생깁니까? 자꾸만 말라갑니까? 그것은 영혼의 양식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깊이 읽고 묵상하면서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육신의 다이어트는 늘 실패하는데 영혼의 다이어트는 자꾸 해요. 그러면 안 돼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자꾸만 도망가버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우리 곁으로 오셨어요.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로 오신 그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데,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기도하며 묵상하여 나가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과 소망이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