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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 (잠 19:17)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 잠 19 17

오늘 또 잠언서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잠언서 19장 17절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하는데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잠언서 19장 17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이 지혜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이 잠언서에서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인가,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주면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게 그게 지혜로운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랍습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 게 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이익을 최고의 우선을 두면서 내 이익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그게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인가?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어 주는 삶이, 긍휼을 베푸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명으로 주셨다고 하는 관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기신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다고 한다면 왜 허락해 주시는가 아무 이유 없이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라고 한 것이죠.

누누이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민족을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만 잘 먹고 잘 살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으시대고 우리는 뛰어난 민족이다. 우리는 남다른 똑똑한 민족이다 자랑하면서 살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온 세상의 빛으로 살라, 온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라고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가 수많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고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며 우리 때문에 다른 민족이 행복해지는 그런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고 오로지 이기적인 자신들의 탐욕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다른 민족들은 무시하고 핍박하고 압제하는 그런 악한 일을 저지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왕이 되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혼자 잘 먹고 혼자 마음껏 누리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마음대로 명령하면서 자신이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슬픔을 당한 자, 고난을 당한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보호해 주고, 이스라엘 민족을 왜적의 침입에서부터 보호해 주고, 그들의 복지를 잘 만들어서 행복한 민족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왕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왕으로 세워주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다고 한다면 왜 자녀를 주셨습니까?

자녀들을 우리의 그냥 놀이개로, 우리의 신분으로 그렇게 이용해 먹으라고 그렇게 부모에게 자녀를 준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아이들이 잘 자라고 성장하고 그 아이들이 최고의 기량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보호가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면서 정말 좋은 사람으로 양육시키도록 만들기 위해서 부모에게 자녀를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재능이든지 달란트든지 그 어느 것이든지, 심지어 우리의 고난과 아픔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텐데, 그 고난과 아픔도 그냥 아무렇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위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봉사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선물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그게 우리들의 당연한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늘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위치에 놓으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왜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며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하시고, 이런 행운을 겪게 하시기도 하시고, 수많은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한 하나님의 선을 위해서 나에게 이러한 것들을 허락해 주셨는가를 질문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가 찾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가난한 자들, 어려운 것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사명에 따라 가난한 자들,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그런 삶이, 하나님의 사명에 따라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에 만일 우리가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내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의 반대니까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죠. 왜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명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명과는 정반대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 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의 말씀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에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내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의 그 직분들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다 빼앗겨 버릴 것이고,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가리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가난한 자들을 향해서 긍휼을 베푸는 자, 불쌍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갚아 주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럼 우리가 돌봐야 될 가난한 사람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1차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다 가난한 사람의 범주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또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 또는 외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돌보아야 될 그런 가난한 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도 역시 가난한 사람의 범주 가운데 들어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해서 망해져 가고 죽어가는 저 심령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외면하며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슬픈 사람,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 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내고 우리의 재정을 쓰고 우리의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채 만나게 되는 그 사명들을 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회피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모든 가난한 사람들, 모든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들을 모두가 다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을 다 도와줘야 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도 아닌 것이죠. 사실은 그러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그래도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서 그래서 그들이 적어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으로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죠. 따라서 정말 좋은 국가를 잘 만들어야 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고 그리고 기능을 제대로 하는 정부를 잘 만들어서 그래서 이 나라에 그리고 이 사회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 않도록 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런 일을 전담으로 해서 할 수 있는 국가의 기능을 제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국가가 그러한 사명들을 망각해 버리고 가난한 자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외면해 버리고, 오히려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그리고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정부들이 탄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로비를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런 정부들이 탄생하기가 쉬운데 그런 정부가 탄생하지 못하도록 정말 가난한 자와 어려움에 처한 자들, 이방인들, 그리고 여러 가지 언어적인 문제로 인해서 인종적인 문제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자비로운 역할들을 감당하는 그런 정부들을 잘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일들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다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게 맡겨 주신 그런 가난한 자들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것을 외면해 버리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역할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돕거나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다가 우리가 늘 실망해 버리고 그런 마음이 싹 달아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서 그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요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 때 이들에게서 반대급부가 별로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와주면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도와주면 정말 감사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보람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때에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서 과연 이게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저런 고마움도 몰라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도와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누군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어떠한 반응이 필요하지 아니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죠. 하나님은 그 자체로 완벽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는 달라서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고,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생기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어느 정도 정을 베풀면 상대방으로부터 그 정에 대한 반응이 나와야 그래야 더 신이 나서 더 정을 베풀게 되고 더 사랑을 베풀게 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된단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여러 가지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정을 베풀 때 놀랍게도 그에 대한 반응이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실망하게 되고 적절한 반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내 동력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반응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괜찮은 사람들, 그런 대로 근사한 사람들은 내가 사랑을 베풀면 그 이상으로 사랑을 보여줘요. 내가 무엇인가 선물을 하면 그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을 나한테 주기도 하고, 내가 따뜻하게 말을 하면 저쪽에서 또 따뜻하게 말을 해 주고, 서로 그런 관계 가운데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내가 뭐 하나 주면 고맙다고 또 뭣을 주기도 하고, 내가 또 뭐 하나를 베풀면 그 사람은 또 뭐 고맙다고 해서 또 무엇인가를 주고 하면서 이게 너무나도 사랑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죠.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 많은 사랑을 돌려받게 되고, 우리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들, 그런 대로 좋은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또다시 돌려받고, 사랑을 또 베풀면 또 돌려받고 하기 때문에 우리 괜찮은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재미가 있고 괜찮은 것이죠. 하지만 다시 갚을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다시 베풀 힘이 없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시 반응이 오지 않기 때문에 동력이 자꾸만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특별히 교회 내에서 여러 사역들을 하는데 새가족부 활동을 하다 보면 힘이 빠지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새가족부에서 새 교우들을 방문하게 되면 그 새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 선물도 주고 따뜻하게 인사도 해 주고 또 환영해 주면서 그렇게 사랑을 많이 베풀어요. 사랑을 베풀려고 정말 작정을 하고 새 교우가 오면 사랑을 많이 베풀어야 되겠다고 하면서 이모저모 신경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몰라요.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그런데 새 교우들이 반응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는 척도 안 하고 가 버립니다. 말 시키면 쳐다보지도 않고 쌩 하고 가 버려요. 그러면 내가 이게 참 내가 뭐 하는 짓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또 어떤 경우에는 정말 열심히 사랑을 베풀고 밥도 먹여 주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는데 어느 순간에 안 나와 버리는 거죠.

그럴 때 낙망하게 되는 게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인 거죠. 어쩌면 새가족부의 활동을 하는 것도 일종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 영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필요를 공급해 주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 것인데, 그런데 반응이 어떤 반응인가 쌀쌀한 반응이 오게 될 때 많은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6장 9절 10절의 말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또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이 무엇입니까? 잠언서 19장 17절. 오늘 읽은 말씀이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누구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누가 갚아 주신다는 얘기예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겠다.

가난한 자가 갚지 못해요. 가난한 자에게서 오는 정이 없어요. 나는 정을 베풀었는데, 가난한 자로부터 그에 상응할 만한 오는 정이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 수 있어요. 하지만 잠언서 19장 17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 너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으실 거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 가난한 자들을 볼 때, 가난한 자, 그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든지 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서 내가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며 내가 내게 있는 그 사명을 다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돈을 빌려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3절부터 36절의 말씀에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도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의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조폭들도 하는 짓이에요. 깡패들도 하는 일이에요. 도둑들도 하는 일이에요. 범죄자들도 하는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가족을 사랑해 놓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 놓고 자신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되고, 가난한 자도 사랑해야 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을 보여줬지만 그들은 내게 다시 갚지 못해요. 하지만 갚지 못할 때 속상해야 되겠습니까? 기뻐해야 되겠습니까? 기뻐해야 돼요. 왜냐하면 누구로부터 갚아 주실 거예요? 누가 갚아 주셔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니까 기뻐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갚으실 때는 어떻게 갚으실까요? 원금만 갚아요? 아니에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에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제가 차를 살 때는 채권을 사야 됐습니다. 요즘도 삽니까? 요즘도 사나 봐요. 채권을 살 때 이자가 얼마예요? 이자가 얼마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채권을 사면서 바로 팔아 버려요. 싼값에. 왜 이자 받으나 마나 한 그 채권, 돈을 걷다가 묵혀 두는 것보다 그냥 싼값에 팔아 버리는 게 좋다고 해서 헐값으로 판매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에 빌려 주는 돈은 이자가 얼마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꾸어 주는 돈은, 하나님께서 매입하시는 채권은 이자가 많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고 하는 거죠. 따라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문제예요.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원수도 용서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대로 살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심판이 있을 텐데 어떤 심판이 있을 것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웃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님께 하지 아니한 것이고, 내 이웃에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한 것이다. 말씀하시면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시면서 해주셨던 말씀,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부터 4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줄일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하시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 주께서 줄이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은 것을 보고 옷 입혔었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보면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보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장 7절의 말씀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고 계시다고 하는 이 말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망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는 자비로워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자비로우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멀리 떠나 죄악을 범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오늘 우리가 기억한다고 한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그 사명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어떤 사람들인가 다양한, 내 주변에 사명으로 맡겨 주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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