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컵을 하나 들고 왔는데요. 오늘 또 마술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한번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보입니까? 커피가 있는 게 보일 것입니다. 커피가 반절이나 차 있습니까? 반절밖에 차 있지 않습니까? 정답을 너무나도 잘 아셔요. 우리가 이 컵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커피가 반절밖에 없구나, 반절이 비었구나를 볼 수도 있고, 커피가 반절이나 차 있구나를 볼 수도 있는데요. 이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관점이 좋은 관점일까요? 사실은 두 가지 다 좋습니다. 커피가 반절이나 차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다 차 있지 않구나를 보면서 아직 부족한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채우기 위한 도전이 되는 것이고, 모든 발명의 어머니가 무엇인가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부족한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부족한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리고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족을 느낄 수도 있고 감사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어느 한 가지 관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관점이 다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것이 반절이나 차 있다고 하는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유익한 것이겠지만, 반절밖에 차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안주하고 아무런 발전을 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해로운 관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도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부족한 것을 보면서 절망하고 또 괴로워하면서 우울에 빠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관점이 아니라 우리를 해롭게 만드는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겠는데, 그러한 사실 직시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로 삼는가, 아니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리고 주저앉는 관점으로 삼는가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될 수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어떤 관점을 많이 갖게 되는가? 안 좋은 쪽으로 보게 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부족한 것을 보면서 ‘아 이렇게 부족하구나, 저것밖에 없구나’ 하면서 좌절하고 그리고 쓰러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만 보지 말라고 하면서 반절이나 남았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을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고 11월 감사의 달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흔히 잘못되기 쉬운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부족해 보이지만 그러나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근데 사실 여기에는 커피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많이 있어요. 무엇이 있냐 하면 이 속에 공기가 반절 들어가 있어요. 뿐만 아니라 컵도 있습니다. 그리고 컵을 들고 있는 저도 있고요. 그리고 이 주변에 다른 배경들도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은 한 가지만 보면서 하나만 집중하고 그것이 얼마나 있느냐, 많이 있느냐 적게 있느냐를 가지고 우리가 일희일비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살펴보고 싶은 말씀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오늘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아주 놀라운 신비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9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은 아주 놀라운 말씀, 신비한 말씀인데요.
그것은 ‘있는 자는 더 풍족하게 될 것이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결론 부분에 첨가해 주셨던 경구와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는데요. 그 많은 것을 허락해 주신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없을까? 나는 왜 부족할까?” 없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보여드린 것처럼 여기에는 커피만 있는 게 아니에요. 또 무엇이 있습니까? 공기가 차 있잖아요. 컵이 있잖아요.
그 외에 다른 것들도 많이 보이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커피만을 보면서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신 것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도 주셨고, 많은 것들을 우리들에게 주셨는데요. 우리들은 그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한두 가지에 집중을 해서 그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없는가를 보면서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짜증 내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없다. 나는 부족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인가?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서 마지막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자신에게 주었던 그 한 달란트를 보면서, 자신에게 이 한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종은 불평하고 원망한 것이죠.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혀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나쁜 사람이란 말이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나이다.’” 주인을 향해서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겁니다.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준 그 주인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고, 그리고 불평과 원망 가운데 있는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모습. 그렇기 때문에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서 그냥 땅속에 감추어 두고 만 것입니다. 잘 활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이것을 주었지만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그냥 썩혀 두고 말았는데요.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왜냐하면 이 한 달란트가 어떤 한 달란트입니까? 어마어마한 금액이에요. 오늘날의 돈으로 정확하게 가치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대략적으로 이야기한다면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인 것이죠.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아요. 제발 저도 그걸 줬으면 좋겠어요. 정말 많은 금액인데, 안타깝게도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지도 못하고, 주인에 대해서 원망하면서 땅속에 감추어 두고 만 것이죠. 그래서 이 한 달란트가 사실은 어떤 가능성이 있습니까? 두 달란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열 달란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백 달란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 한 달란트를 그냥 땅속에 감추어 두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원망하는 마음 가운데 그냥 썩혀버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고, 결국 그 한 달란트마저도 빼앗겨 버렸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두 달란트가 네 달란트가 되고,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되고, 정말 그 받은 것으로 감사하며 성실하게 일을 했을 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원망과 불평 가운데 있던 이 종은 그 가지고 있던 것마저도 빼앗겨 버렸다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오늘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서 바로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옛날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겼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을 수도 있겠는데, 그런데 우리가 서로 비교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것을 다양하게 주셨다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컵을 가지고 나왔는데 이 컵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커피와 공기가 들어 있는 거예요. 커피만 볼 게 아니고 공기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없는 것’만 바라봅니다. ‘부족한 것’만 바라봅니다.
건강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없다’고 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보고 발전의 에너지, 발전할 수 있는 동력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왜 없을까, 부족하다” 생각하고 절망하고 우울감에 빠지고 그래서 쓰러지는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거라고 하는 이 경고의 말씀을 오늘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잘못 보게 되는 것일까요? 이 컵을 보면서 왜 커피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요? 이 속에 공기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커피의 가치를 너무나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커피를 마시고 싶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커피가 커 보이는 겁니다. 공기는 커 보이지 않는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우리가 우상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주셨는데, 그 다양한 것 가운데서 어느 일부분만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어느 일부분만 우상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우상화하기 쉬운 가장 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돈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을 우상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돈이 누구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서, 돈이 많은 사람을 보면서 적은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주셨고 많은 장점들을 주셨는데, 우리는 돈을 우상화하기 때문에 그게 제일인 줄 알고 거기에 우리가 우상화시켜서 그것을 보고서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절망에 빠질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상화하기 쉬운 또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성공’이라고 하는 우상이에요. 성공하면 좋은 것 같기 때문에 성공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우상화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서 결국 고통에 빠지고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좋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자식이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건강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우리의 명예가 우상이 될 수가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나쁜 것이냐? 나쁜 게 아니에요. 있으면 좋은 것들이고,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좋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우상의 위치’로 올라가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것을 최고로 여기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게 되고,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겨 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제일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반복하고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른 신을 내 마음 가운데 두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독차지하고 싶어서, 우리가 사랑해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만 그래야만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고,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만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만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지 않아도, 우리가 감사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양 드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충분히 영광 받으시고 충분히 하나님이세요. 우리의 예배가 필요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예배하라” 말씀하시고, “하나님만 섬기라” 말씀하시고,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면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 버리니까, 우리가 우상 앞에 나아가면 모든 것들을 다 박탈당하고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마치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잔소리하는 것처럼, “얘야, 그러면 안 돼. 너 그렇게 인생을 살면 안 돼” 자꾸만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이야기해 주고 싶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처럼(잔소리가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 “너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돈을 섬기지 말라. 성공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것을 너희가 추구하게 되면 결국 너희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망가지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래서 어느 한 것만을 강조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기쁨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감사가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이것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것만 있구나, 내게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없구나” 부족한 것만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런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결국 우리는 더욱더 피폐해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겨 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점검해 보아야 되는가?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감사가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행복이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찬양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점검해 보아서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뭔가 부족하다고 한다면,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면,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부족한 것을 채워야 될까요? 물론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부족하다 하면 부족한 것을 채워야 될 것이고, 뭔가 여전히 아직 이루지 못한 게 있다고 한다면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해서 채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채운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했구나. 내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없었구나.”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상을 섬기는 바람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높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졌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늘 인용하는 표현인데요. C. S. 루이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겸손하고 도량이 넓고 균형감 있는 사람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 괴짜이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일수록 칭찬에 인색하다. 훌륭한 비평가는 불완전한 작품들에서도 칭찬할 점을 찾아내지만, 시원치 않은 비평가는 끊임없이 금서의 목록만 늘려간다. 건강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화려한 환경에서 근사한 요리를 두루 경험하며 자랐을지라도 소박한 음식에서도 칭찬거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소화불량 환자나 늘 까다롭게 구는 속물들은 모든 음식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찬양은… ‘찬양’이라고 얘기했지만 거기에 많은 걸 집어넣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칭찬은, 감사는, 기쁨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다. 내가 지금 영적으로 건강한가, 건강하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기쁨이 넘쳐나고 있는가?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행복이 넘쳐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 우리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감사와 찬송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감사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기쁨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한 거예요. 왜 심각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욕심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괜찮은 게 아니라 우상숭배인 것이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불만을 일으키고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결단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이며,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반대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감사가 있다고 한다면, 찬양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그런 것들이 나오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겠습니까? 더 풍족하게 되는 것. 감사한다고 한다면 내가 더욱더 풍성해지는 길입니다. 찬양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더욱더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더욱더 풍족하게 되는 것이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이 주인을 감사하고 주인의 은혜를 기뻐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감사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더 풍족해질 것이고, 감사가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면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까? 우리 이웃들을 향해서,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잖아요. 건강한 것만 해도 감사한 거예요.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거예요. 우리 남편을 보면서, 우리 아내를 보면서,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우리와 함께 같이 예배하는 예배의 동료들을 보면서,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만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감사하는 마음들을 확대해 나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더욱더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해지고 은혜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알아요. “감사해야지, 있는 것을 바라봐야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바라봐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감사하기가 어렵고, ‘없는 것’이 너무나도 크게 보이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우리의 삶을 짓누르게 될 때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인죄를 저질러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탐욕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시각이 잘못된 그것 때문에,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연약함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주님,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해 주옵소서.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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