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물리치고 이제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 부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을 선택해 주셨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왕이 되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지만 왕이 되기까지는 다윗이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지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되고 산을 넘어야 되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왕까지 올라가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왕이 되기까지는 쉬운 길이 아니고 굉장히 험난한 길이었는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그 가운데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된 그런 난관, 다윗이 드러나게 된 이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이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 가운데 빠졌을 때 다윗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공격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 블레셋을 당해낼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겁니다. 너무나도 강대국의 나라가 공격해 오는 것이고, 특별히 골리앗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장수가 블레셋 군대를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 골리앗과 더불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정말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때 다윗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나서서 저 골리앗을 무찌르게 하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평범하게 양을 치고 있던 목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 가운데 열정을 불어넣어 주시고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셔서 내가 이 순간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구나, 저 골리앗과 싸워서 이겨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다윗에게 심어 주셔서 그래서 다윗이 나서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쩌면 이 상황을 가만히 비유하자고 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도 만난 한 사람이 쓰러져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지나쳐만 간 것이죠.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도와주기로 결정한 것이죠. 어쩌면 이 순간에 다윗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괜히 나섰다가 내가 개 죽음을 당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되고 나서지 않아도 되고 그냥 모른 척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사명감을 허락해 주셔서 내가 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다윗의 마음 가운데 심어 주었기 때문에 다윗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듯이,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어쩌면 가장 큰 위기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윗이 목숨을 걸고 나아가서 골리앗과 싸우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고 그리고 격려하면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방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장애물들이 있었던 것이죠. 제일 먼저 제일 큰 장애물로 다가왔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친형 엘리압입니다.
전쟁터에 와서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윗이 그 자초지종을 묻고,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친형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서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8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친형이 자신을 비난하면서 책망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아마 낙심되는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내가 왜 나서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되는가, 내가 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일을 해야 되겠는가 하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낙심하지 않았어요. 선을 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박수 쳐 주지 않고 격려해 주지 않고 함께해 주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지, 교회에서도 역시 사역을 할 때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수고하고자 할 때 박수 치는 소리보다는 무슨 소리가 더 많이 들립니까?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뭔가 지적하는 소리가 들리고, 단점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면서 저런 소리를 듣는가, 내가 왜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들이 언제나 많이 들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이 순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자신의 형하고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해서 책망하고 있는 이 엘리압과 싸우지 않았는데요. 싸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싸워야 할 대상이 형이 아니기 때문에. 형은 협력해야 될 대상이고, 사랑해야 될 대상이고, 보호해 줘야 될 대상이지 싸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죠. 우리의 대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골리앗이란 말이에요. 골리앗과 싸워야지 형과 싸우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다윗은 무너지거나 형과 싸우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린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잘 넘어서 이제 골리앗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다윗은 골리앗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3절에서 44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정말 키가 장대와 같이 큰 사람이 자신을 향해서 무섭게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심적으로 위축될 수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골리앗이 상대가 될까요? 안 되는 거죠.
골리앗은 너무나도 장대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군대가 얼마나 강한 군대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앞에서 멈출 수도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말고 저 골리앗과 싸우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열정을 허락해 주시고, 내가 나서서 싸워야 되겠다고 하는 그 사명감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한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 강한 대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내가 의지하고 신뢰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어디에 달려 있는가? 칼과 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보여주세요. 사무엘상 17장 45절에서부터 47절의 말씀에 이렇게 다윗이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네가 믿는 것은 칼을 믿지, 네가 믿는 것은 창을 믿고 단창을 믿지. 하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이 세상에 칼과 창을 보면서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 앞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가 있었고, 그래서 결국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이겼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 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늘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묵상하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주눅 들지 말고,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포기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의 승리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골리앗과 같은 존재들이 늘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늘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들에게 골리앗이겠습니까? 내게 있어서 골리앗은 무엇을 골리앗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골리앗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니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죄성이 골리앗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로 하여금 바로 서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죄성이 우리 안에 있어서 늘 넘어지는 그 문제, 어쩌면 그게 우리 마음속의 골리앗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우리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골리앗과 같은 것이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생각될 때 그때 그 문제들만을 바라보면서 좌절해 버리고 포기하고 아, 나는 안 되겠다, 나는 힘들다 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면서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 면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한 번 우리 옆에 사람들에게 격려 한 번 하십시다. 하나님을 믿읍시다.
아멘. 이 세상에 골리앗만 바라볼 게 아니라 무엇을 바라봐야 돼요?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 말이에요. 내 앞의 문제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칼과 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일 안타까운 사람이 무엇일까요? 제일 안타까운 사람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제일 안타까운 사람. 포기할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나가야 되는 거죠. 찬송가 302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한 번 바닷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 그 물결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어요. 그래서 그 바다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냥 곁에 서서 바다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한 번도 그 바다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거. 3절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이 약하여 못 간다. 이게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물고기가 있어요. 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어요? 신대륙이 있어요. 바다에 가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많은 거예요. 그런데 무서워서 한 발자국도 바다 속으로 못 들어가는… 좋은 예는 아니지만 그 옛날 유럽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서 나갔습니다.
예전에는 무역을 하면서 인도에서 후추를 들여오고 인도에서 많은 물자들을 들여오게 될 때 그 길목을 이슬람 교도들이 막고 있어서 정말 힘들었을 때 유럽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겁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데—최근의 발견이에요—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계속 서쪽으로 가다 보면 바다를 통해서 인도를 갈 수 있겠구나 하면서 바다를 향해서 나아간 겁니다. 바다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위험이 왜 없겠습니까? 해적이 있는 것이고 바닷물에 의해서 배가 파선할 수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수많은 걱정들이 있지만 그러나 큰 배를 만들어서 우리가 배를 타고 한번 가 보자 해서 나가면서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고, 나가면서 많은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그래서 세계 초강대국들이 다 된 것인데 그게 아니고 ‘나가면 죽는다, 나가면 우리가 망할지도 모른다’ 하면서 가만히 있던 사람들은, 그런 나라들은 발전하지 못하고 다 쪼그라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의 인생 앞에 얼마나 많은 기회가 널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저 작은 파도 보고, 그저 작은 무서움을 보고, 내 앞에 골리앗이 서 있다고 하는 것을 보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면서 그래서 거기서 벌벌 떨고 있는 게 만일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에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짓을 해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생들이 늘 양극단의 위험에 빠질 때가 있는데요.
한편으로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나약한 모습의 극단으로 빠질 수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무모하게 되지도 않는 일을 그냥 신앙의 이름으로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냥 아무거나, 내가 무조건 아무런 계산도 해 보지 않고 무모하게 모든 일을 저질러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일입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만일 그 일이 선한 일이라고 한다면, 만일 그 일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 눈앞에 볼 때 많은 위험이 있어 보이고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주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나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죠. 골리앗, 쓰러뜨릴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워낙 장대하고 키도 크고 엄청난 사람이니까, 그래서 골리앗 앞에 나아가면 죽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다윗이 조그마한 물맷돌 가지고 그 물맷돌을 던졌을 때—키가 크니까 이마도 컸을 거 아니에요—맞아서 쓰러지고 결국 다윗이 승리하게 되거든요. 오늘 이 이야기를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 우리 가정의 여러 문제들 그것들을 볼 때 좌절하고 쓰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문제, 그것은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많은 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맞아, 나도 다윗처럼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나도 하나님을 신뢰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죠?
그런데 정작 골리앗 앞에 서게 되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우리들의 모습. 우리가 다윗과 같아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구와 같은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데, 그래서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으면 조그마한 문제가 있으면 다윗처럼 담대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기쁘고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우리 위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승리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죄성이라고 하는 그 골리앗 앞에서 늘 쓰러지고 늘 넘어져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고, 정말 사랑을 베풀며 살고 싶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고, 원수도 용서하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며 살고 싶은 게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우리들을 가로막고 있는 이 죄성이라고 하는 것이 골리앗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들고 쓰러지게 만들고 또 힘들게… 그렇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데,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 옛날 다윗처럼 우리를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어요. 마치 그 옛날 다윗을 보면서 비웃었던 것처럼,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들고 왔느냐” 하고 비웃었던 것처럼, 다윗을 향해서 엘리압이 소리를 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저 나사렛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 저 요셉의 아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저 마리아의 아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비아냥거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런 수모와 온갖 조롱을 다 참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무참히 죽으시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쓰러뜨리셔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죄의 그 영향력에서부터 건져내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저 죄의 그 골리앗과 같은 죄악을 물리치시고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저희들을 건져 주옵소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주님께 다시 한 번 나아가서 회개하고 다시 한 번 새 힘을 얻고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될 텐데요. 이 성찬 예식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해서—그 옛날 다윗이 목숨을 내놓고 골리앗 앞에 나갔던 것처럼—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피 흘려 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이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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