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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짐이 주는 기회 (롬 11:11-16)

오늘 읽은 로마서 11장 1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오.” 여기서 그들의 넘어짐,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넘어지고,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이 이방인들의 풍성함이 되고, 온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이 넘어졌다고 하는 것, 실패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죠. 거부한 것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거부한 결과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 1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유대인들의 회당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을 가든지, 유대인들은 항상 유대인들의 회당을 만들어 놓고 그 회당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여행을 갈 때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의 회당에 찾아가서,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 것이죠. “성경 말씀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를 베풀어 주실 거라고 하셨는데, 그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살아나셨습니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곤 했습니다.

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갔을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이 유대인이고,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의 동포들에게 메시아가 왔다고 하는 이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회당에 가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 바울 사도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들었냐 하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전부 거부해버리고 만 거죠.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다. 한 번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바울 사도가 무슨 말을 했는가? 이제는 내가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6절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오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말을 한 겁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죽는다고 한다면, 그 책임이 전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있겠지만, 내가 복음을 전했지만, 너희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멸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서, 먼지를 털고, 바울 사도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고, 놀랍게도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이방인들은 복음을 엄청나게 잘 받아들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인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실패했고, 유대인들이 넘어졌던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히 실패한 줄 알았는데, 실패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복음이 이방인 전 세계로 열리게 되는 그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오늘 로마서 11장 1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바울 사도는 굉장히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저도 설교를 하다가 보면 반응이 없는 것 같으면 굉장히 위축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도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바울 사도의 마음이 굉장히 위축되고, “아, 내가 실패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바울 사도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넘어졌고, 유대인들의 실패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게 되는 그런 엄청난 결과가 일어났다고 오늘 성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데요.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실패할 때마다, 내가 계획했고, 내가 소망했던 일들이 좌절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굉장히 절망감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그 실패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나를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길을 막아버리셨다고 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망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길을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들을 무지기수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예로 요셉의 예를 찾아볼 수가 있을 텐데요. 요셉은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한 꿈을 꾸던 청년이었습니다. 행복한 꿈을 꾸면서 미래를 계획하던 그런 행복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배 다른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려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는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있었던 그 수많은 꿈들, 계획들, 다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만 겁니다. 내 인생은 이제 끝장이 난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은 이제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평생을 살아야 되는, 그런 엄청난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이 그렇게 노예로 끌려간 것은 요셉이 망하는 길로 갔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훈련시키시고 단련시키신 다음에, 온 세상의 구세주로 만들어가기 위한, 이집트 나라의 총리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여러 단계 가운데 한 단계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요셉이 이것을 한 번만 겪은 게 아니죠. 또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보디발의 집 안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이제는 노예들 가운데서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제는 보디발의 집에서 그나마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겠다고 생각되던 그 순간, 자기 여주인의 모함에 따라서 억울하게 감옥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죠. 열심히 인정받으면서 노예로서 그나마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던 요셉에게 더 크고 충격적인 일이 생기게 된 겁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이제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요셉의 방향을 바꾸고 또 바꾸어서, 이제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온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경험을 한 번 두 번 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에서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계획을 가지고, 소아시아 지방,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계획하는 것마다 다 막히는 겁니다. 다 좌절이 되는 겁니다. 예약해 놓으면 예약이 취소가 되고, 어디로 가려고 하면 그것이 계획이 틀어지고, 그래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자꾸만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때 그 경험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다.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바울의 발걸음을 저 마케도니아로, 유럽으로 가게 만드시는, 그런 놀라운 계획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바울 사도의 길을 막으셨던 거죠.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잘 전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대로 성공을 한 것 같았어요. 그러나 거기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그런 힘든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자유의 몸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이제는 차꼬를 차고, 전혀 자유가 없는 그러한 감옥의 지하에 갇혀서 있을 때, 그의 마음 가운데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빌립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 길로 인도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은 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지만, 빌립보 감옥에서 그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바울을 감옥으로 인도해 주셨고, 그리고 그 가족들을 다 세례 받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일을 한 다음에 풀려나게 하시는 놀라운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이죠.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미리 낙망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들의 눈앞에 좌절이 있고, 실패가 있고, 막히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실까?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린 것 같나요? 그렇게 보이지만, 제 인생 가운데서도 많은 실패와 좌절들이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그 여정 속에서도 실패와 좌절들이 있었고, 연애에서도 실패와 좌절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거죠. 목회의 여정 가운데서도 막히는 막다른 골목이 있었어요.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계획을 가지고, 저런 목적을 가지고 달려 나가는 가운데, 앞이 꽉 막힌 것과 같은 그런 답답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일이고, 너무나도 힘이 빠지는 일이고, 마음의 상처가 깊이 남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나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신 그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시고, 우리의 실패를 더 빠른 길로 인도하시는,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혹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어떤 목적을 달려가다가 문제가 생겨서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겁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계획하고 목적을 가졌던 것들, 내 꿈은 우리 아이들이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 아이들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정말 원대한 꿈을 가지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짜내서 우리 아이들을 기르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실패의 경험들을 우리가 해오면서 삽니다. 어떤 대학에 보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어떤 직장에 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연애를 하는 가운데 실패하기도 하고 도중에 헤어지기도 해요. 우리는 무엇인가 계획을 가지고 이대로 하면 좋지 않을까?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지만,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막히고 좌절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그게 나만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집 아이들은 다 잘 되는 것 같고,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고, 모든 것들이 다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우리 집은 고통스럽고 내가 하는 일들은 다 안 되는 것 같고, 모든 일들이 좌절되는 것 같아서 낙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낙망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니고, 그 실패가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길을 틀고 다른 길로 인도하셔서, 더 나은, 더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왜 낙망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느 순간에 우리의 목적이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목적, 이런 것들은 결국은 사실 가장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수단에 불과한 것들이에요.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든지, 무엇을 이룬다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 성공한다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들이고, 방법적인 것들인데, 그런데 우리는 늘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걸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이 우상이 되어버리고, 성공이 우상이 되어버리고, 돈이 우상이 되어버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그 모든 것들, 갈망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되어버렸을 때,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놀랍게도 그런 순간들을 맞이했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전도의 길이 막혔을 때 좌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럽으로 간 것이고, 자유의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고, 감옥에 갇혔지만 감옥 속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느 길로 인도해 주시는지, 순종하면서 그 상황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막히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좌절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또 많은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유대인들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가게 했다고 하는 그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잘 반응을 했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아마 그러면 유대인들 안에서만 복음을 전했을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이 막히게 되니까, 바울 사도의 길이 이방인에게로 틀어지게 됐고, 그래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 가운데 엄청난 대전환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데요. 바울 사도는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겁니다. 그들의 실패로 인해서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고, 그들의 넘어짐으로 인해서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난 그 어떤 일들 때문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어느 곳으로 인도해 주실지 기대하며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로마서 11장 11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또 13절과 1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혹시 이해하셨습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실패한 거냐?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가능성이 없는 거냐? 아니라.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라고 말했잖아요? 지난번에 우리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린 게 아니다고 얘기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방인들이 자꾸만 믿고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이 시기하게 되어서 그래서 자기들도 구원받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 거부한 걸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많이 보면서, 유대인들이 그걸 보고 시기하고, 그래서 결국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게 되는, 이방인도 구원받고 유대인도 구원받는, 그런 그런 “일거양득의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좀 이해가 되십니까?

말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좀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구원이 뭐 애들 장난입니까? 마치 애들한테 “너 이거 먹을래?” 하고 줬더니 아이가 “안 먹어.” 그래서 “그럼 너 네가 안 먹으면, 그럼 네 동생 줄게” 했더니, 동생 준다는 소리를 듣고 “아니야. 내가 먹을게” 하면서 다시 먹는 그런 어린아이처럼, 구원도 이 유대인들한테 줬다가, 안 받으니까 이방인에게 줬더니,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그 구원을 받을 거라고 하는 말이 좀 이해가 돼요?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가 되는 것 같은데, 논리적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런 유대인들이 식이 나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아마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극을 받아서 복음을 더 잘 전하게 되지 않겠는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래서 이방인들이 자꾸만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부러운 겁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너무나도 자극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들도 저렇게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 우리 민족이 복음을 안 받아들이다니,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전하자!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자! 해서 그래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선교지에 가면, 우리가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고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기 선교를 가게 되면, 그 저 동남아시아 지역에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고 단기 선교팀이 가면, 우리가 가진 복음을 그들에게 다 전하고, “야, 이제 잘 전했다.” 하면서 보람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단기 선교팀이 자극을 받습니다. 가서 보니까 선교지에 있는 성도들이 정말 믿음이 순수하거든요. 선교지에 있는 성도들이 정말 헌신적이거든요. 선교지에 있는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서,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우리도 정말 경건하게 살아야 되겠구나. 자극을 받고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겠는데요. 아마 그런 의미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유대 크리스천들이 각성하게 되는 것이죠.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원래 선택된 민족이 아니냐?”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선택하지 않으셨느냐?” 그러면서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게 되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고, 그래서 결국은 유대인에게도 전파되는 그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했던 그 복음의 노력들이 때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실패를 겪었지만, 그것이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혼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는 모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아마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예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 자녀들을 믿음으로 가르치려고 했고, 우리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했고,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아, 나는 실패했나 보구나. 나는 안 되나 보다.” 내가 했던 그 모든 수고와 노력들이 헛수고가 아니었나 생각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이어나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실패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낙망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던 것들이 막혀버리고, 우리가 계획했던 것들이 전혀 진전이 없고,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 제목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실패했을 때 그냥 포기해 버리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막히는 때가 있어요.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했는데도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절망하거나 좌절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하며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내 뜻대로 하려고 하다가 그래서 절망하고, 그래서 낙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실패를 만나더라도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기대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기가 어려워요. 늘 믿음이 없어서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지죠.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나가서 우리들을 씻겨주시고,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해주시고 그래서 다시 일어설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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