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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들 (롬 11:1-10)

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 참 안타까운 뉴스들을 종종 듣게 됩니다. 신생아 때 아기가 죽은 경우, 또는 아이를 죽여서 암매장해 버린, 그래서 아예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사라진 아이들이 있다고 하는 그런 참 충격적인 뉴스들이 자꾸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그런 인륜을 저버린 그런 끔찍한 일들이 실제로 있는데, 그것이 한두 건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그런 뉴스를 들 때마다 참 충격적이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욕하거나 비난할 것은 아니겠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1장 1절 말씀에서는 바울 사도가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는 것이 끔찍한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럴 수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바울 사도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 상황이 아주 암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죄를 씻으시고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되었지만, 부활하셔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우리들에게 전해졌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의 소식이 있는데, 그런데 그 복음을 누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방인들은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던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고 했던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 상황이 바울 사도에게는 정말 딜레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우리 동포, 우리 민족 그 민족은 복음을 거부하면서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반면에,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 현상을 보면서, 바울 사도의 그 심정 가운데 질문이 던져지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셨는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는가?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열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강퍅하게 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그 민족을 포기하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데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가 그만큼 그 자기 민족, 자기 동포들을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동포가 망하는 것을,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마치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참 사랑하는데, 이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자라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고, 함께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데, 우리 자녀들을 보면 자꾸만 다른 길로 가는 거예요. 이제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교회 가기를 싫어하고 예배드리기를 거부하고, 이제 세상길로 가고 있는 그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이 답답한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버리셨습니까? 예전에는 주일학교도 잘 다녔고, 예전에는 주일 학교에서 학생회장도 했었고, 예전에는 정말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도 했었는데,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믿음의 길에서부터 떠나버려서, 지금은 방탕한 길로 걸어가고, 교회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려서, 그래서 완전히 불신의 길로 가고 있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이죠. “하나님,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두고 보시렵니까? 우리 아이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셨습니까?”라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나도 들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진 다음에 바로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있는데요. 그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버리셨는가? “버리셨을 수도 있겠다”가 아니라, 바울 사도는 아주 강한 어조로 대답하는데, 하나님이 절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릴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대답을 1절에서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지금 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이 현실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만 같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어요. 반역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절대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바울 사도가 대답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개인적인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이니요. 아브라함의 시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 사도가 대답하고 있는 대답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예로 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유대인이라는 거예요. 내가 아브라함의 씨라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그런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대인인데, 하나님께서 나도 살려주셨다는 거죠. 나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과 이 사람은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과 그것을 한번 등급을 매겨서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최악질 중에 악질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에 바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바울은 누구였습니까?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까지 이야기를 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 저항을 하고 핍박을 하고 교회를 쫓아다니면서 박해를 했던 이 바울이야말로 어쩌면 적색 리스트에 가장 최상위에 올려져 있어야 될, 가장 불순분자요, 가장 지옥에 들어가야 될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바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해, 그리고 그 바울을 건져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생생한 증거가 바로 바울 자신이 되는 것이고, 바울을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면, 사실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 이유가 절대로 없는 것이죠. 소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이 정말 의롭고 정말 좋은 사람들만 골라서, 그런 사람들만 구원하신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자신할 수 없을 겁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손양원 목사님 같은 그런 사람들만 천국 간다고 한다면, 자기 아들을 죽인 그 원수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그 원수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아서 사랑을 베풀어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손양은 목사님과 같은, 그런 정말 훌륭한 사람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천국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가능하지 못한 거죠. 우리는 거기까지는 따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를 건져주셨는가? 누구를 구원해 주셨는가? 최악질을 구원해 주신 거예요. 바울과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신 것이죠. 오늘 주보에도 썼습니다마는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불신자들을 향해서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먼저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그래야 하나님을 드러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을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보구나.”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만들어야 되는 당위성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복음이 100 퍼센트 완벽하게 전달되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우리가 위선자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렇게 거룩한 척 하지만, 뒤에는 호박씨 까고 있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저 사람이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고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정말 저렇게 근사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안에서는 순 엉터리라고 하는 걸 우리 자녀들이 너무나도 잘 알아요. 위선자라고 하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완벽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고 하면, 물론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콧방귀만 뛰는 겁니다. “저런 위선자, 저런 나쁜 놈” 하면서, 우리들의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복음은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가? 우리의 완벽한 행실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셨다”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이 성질 내고, 우리도 똑같이 욕심이 많고, 우리도 똑같이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너무나도 부족하고 너무나도 약한 존재들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도 사랑해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와 같은 연약한 자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씻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되는 거예요. 나와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고, 나와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건강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버렸는가? 하나님은 포기하셨는가? 아니다. 왜? 나 같은 죄인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가장 악질인 나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받아주실 거라고 하는 말씀을 오늘 첫 번째 이유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로 드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엘리아 시대 때의 일입니다. 엘리아 시대의 상황은 어쩌면 바울 시대의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만 바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여러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의 복음을 거절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답답한 것이죠. 너무나도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이 엘리야의 시대와 아주 똑같았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이라고 하는 그런 우상에게로 다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엘리아 선지자는 아무리 해도,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해도, 여전히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왕비가 버티고 있는 그 모습 앞에서 절망하고, “하나님, 이제 내 목숨을 거두어 주옵소서.” 하소연하고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버렸습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절에 보면 엘리아 선지자의 하소연이 기록돼 있습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완전히 다 하나님을 배반해버리고 맙니다. 완전히 다 주님을 다 거절하는, 거역하는 그런 배반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나 혼자 남았고, 나도 죽기 바로 일보 직전입니다.

그렇게 하소연할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이 로마서 11장 4절의 말씀입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울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지금 엘리야의 눈앞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반역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네가 보지 못하지만, 이곳저곳에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 참으로 신실한 자들이 7,000명이나 남아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악한 시대에는 악한 사람들이 날뛰기 때문에 정말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일 것만 같습니다. 의인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의인들은 다 망해버린 것 같고, 황당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면서, 뻔뻔하게 마음대로 악을 행하고, 죄악을 행하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이 완전 다 썩어버린 것만 같아요. 이 세상이 완전 악에 의해서 지배를 당한 것만 같아요. 모든 의인들은 사라져 버렸고, 모든 기관에 악한 사람들만 다 남아버린 것만 같은 현실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시고, 의인들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죠. 강호의 고수들이 있다고 하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은 도처에 널려져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신실하게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널려 있고,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의인들이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데요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고 아주 유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이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유익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믿음의 식구들을, 믿음의 동료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져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살다 보면 외롭고 쓸쓸합니다. 믿음의 길을 지키면서 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나 혼자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나 혼자 이렇게 살다가 나 혼자 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 세상에서 힘들게 힘들게 여러 가지 상처를 당하면서 살다가, 우리 함께 모이면서,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의 동료가 있구나! 우리와 함께 같이 예배드리는 믿음의 식구들이 있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모여 있구나!”를 바라보면서, 위로받는 거예요. 내가 다른 사람을 봐보면서 위로를 받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 그런 놀라운 그 기쁨의 치유의 과정들이 여기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등산과 같아요. 혼자 등산하면 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지만, 산악회를 같이 구성해서 등산을 하게 되면 쉽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난로 앞에서, 벽난로 앞에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굳이 같이 모여서 예배드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읽고,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니까,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교회에 와서 다른 성도들하고 싸우고 다투고, 또 부딪히면서 아프고 상처받고, 교회에 오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더 마음이 상해서 돌아가는 그런 일들이 많은, 이런 흠이 많은 이 교회에 와서 우리가 신앙생활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조용히 나 혼자 집에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스펄전 목사님이 대답을 하지 않고 벽난로에 있던 나무들을 하나씩 하나씩 흩어 놓았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 불들이 다 꺼져 버린 것이죠. 온기가 따뜻했던 그 방안이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가 홀로 있으면 타는 것이 아니라, 꺼져버리고 힘을 잃어버리듯이, 함께 모여서 열을 같이 내는 것이 옳은 것처럼, 우리가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 이유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고,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 외에도 엄청난 영적인 유익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할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판을 치고 불신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낙망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셨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온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려고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말렸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지도 몰라요. 잡혀가게 될 겁니다. 이렇게 결박되어서 아주 큰일을 당할 수 있으니,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권면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아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그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서 예루살렘에 갔어요. 결국 거기서 잡혀가지고 로마로 압송당하게 되었는데요.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바울 사도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사도행전 21장 19절에서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라.” 유대인들이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수만 명이 믿고 있는 것을 본 거예요. 예루살렘에 가서 믿음의 유대인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 어쩌면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나 혼자인가? 나뿐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질 때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남겨두셨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며, 믿음으로 다시 한번 힘을 얻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로마서 11장 5절, 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건져주신다고 한다면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 누가 자신의 정당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셔서 은혜로 그들을 남겨두셨다고 하는 것이죠. 원래는 하나님께서 다 버려야 정상인데,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이 수많은 악한 유태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해야 당연한 것인데,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부어주셔서,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됩니다. 종종 로마서에 있는 이 말씀, 특별히 9장, 10장, 11장의 말씀을 오해해서, 그러니까 혈통적 유대인들이 어떤 하나님의 특권을 받은 것인 양, 그렇게 착각하는 기독교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지금 저 중동지방에 세워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국가이고, 그래서 우리 기독교 일각에서는 마치 저 국가 이스라엘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무조건 이스라엘과 중동 사람들 사이에 무슨 분쟁이 있거나 하면, 무조건 이스라엘 편만 들으려고 하는 그런 우매한 크리스천들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국가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점을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에서 29절 말씀 가운데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장 28절에서 29절까지 해주고 있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한번 도표로 한번 정리를 해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혈통적으로 유대인인 사람들이 모두가 다 유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면적 유대인, 속이 진짜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진짜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이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믿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 진짜 유대인이고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아무튼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고, 그래서 유대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남겨주시고,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남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야 될 것이고, 또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얻어야 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절망하지 않아야 됩니다. 낙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 혼자 하는 것 같아요. 다들 전도 안 하는데, 나만 전도하는 것 같아요. 아무도 봉사 안 하는데, 나만 봉사하는 것 같아요.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데, 나만 찬양하는 것 같아. 모두가 다 협조하지 않고 모두가 다 뺀질거리는데, 나만 기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만 신앙생활하는 것 같고, 다 신앙들이 다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만 이렇게 외롭게 쓸쓸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낙심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을 각각의 상황 가운데 인도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평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죠. 마르다처럼 “주님, 왜 나만 이렇게 일해야 됩니까?” 그렇게 불평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내가 감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남은 자의 사명을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해 주셨던 그 약속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유대 지파에게로, 또한 다윗 왕조에게로, 그리고 남은 남은 자들로 이어져서 결국 유일하게 남은 한 남은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을 배반하고 다 잘못된 길로 갔을 때, 주님께서는 친히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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