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초대교회사 제7강, 마지막 강좌인데요. 오늘의 주제는 무엇이냐면, 수도원 운동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는 처음에 로마 황제의 박해 가운데, 아주 힘들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카타콤이라고 하는 지하에 들어가서, 정말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한 채, 그렇게 순교를 각오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기독교가 공인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죠. 기독교가 종교로서, 합법적인 종교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 몇 년도죠? 313년입니다. 그것 정도는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해 주었는데,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공인해 준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지하에서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이 양지에 나와서,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제는 기독교가 인정받은 것을 넘어서서, 기독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 로마의 국가 종교가 무엇이냐? 기독교가 된 것이죠. 언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까?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국가의 국교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는 기독교인이 됐다고 하는 것이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고, 힘을 얻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타락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목회자들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면서, 또 세금을 면제받고, 그리고 온갖 권력을 가지게 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출세를 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까 믿음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님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 때문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초대교회사를 쭉 살펴봤는데, 초대교회 내에 여러 가지 다투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세례가 진짜 세례냐 가짜 세례냐? 이것이 옳냐 그르냐? 그래서 그런 논쟁들이 많이 있었는데, 사실 그런 논쟁의 배후가 무엇이냐 하면, 이 로마 정부 내에서 어떤 종교적인 권력을 취득하기 위한, 자기들이 자기네 파가 뭔가 좀 권력을 갖기 위한 권력 투쟁의 성격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종교가 이런 국가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서, 결국은 종교는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이렇게 종교가 타락하게 되는 그 순간에,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성도들은 참된 신앙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 이건 아닌데.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거룩에 대한 갈망들이 성도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렇게 기성교회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이건 정말 타락한 교회다. 성직자들도 다 타락해 버렸고, 성도들도 다 타락해 버렸고, 종교와 권력이 결탁되어 있는 그런, 그런 시스템 속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교회를 뛰쳐나가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1대 1의 신앙생활을 하겠다. 내가 이런 그런 교회라고 하는 그런 조직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신앙생활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참된 신앙을 찾으려고 하는 그런 열망들은 종교가 타락할 때마다 늘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다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교가 타락했기 때문에, 당시의 유대교 타락상은 어디서 알 수가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들여지는 제사가 돈으로 제물을 사고팔고, 거기에 이권이 걸리고, 그래서 이 제사장,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 돈을 주고서, 그런 제사장이 될 수가 있고, 대제사장이 되고, 그것을 하나의 어떤 이권이 되어버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 당시에 에세네파라고 하는 사람들, 쿰란 공동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다 광야로 가서, 광야에서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자꾸만 타락의 길로 걸어가게 되자, 내가 사막에서 광야에서 정말 자신의 진실한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수도사라고 알려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수도사입니다. 사막의 성자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상상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린 겁니다. 피에로디 코시모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안토니우스의 그림에서 이렇게 볼 수가 있는데요. 이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집트의 사막으로 가서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사막으로 가서 거기서 사막에서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이 세상의 유혹을 다 떨쳐내려고 하는 최초의 수도사였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원래 이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부자였다고 해요. 엄청난 갑부였는데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9장 말씀에, 젊은 관원이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줘버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는 그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은 거예요. 내가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물질이 있어서는 천국에 못 가는구나. 부자는 천국에 못 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던 모든 재물들을 다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줘 버리고, 저 이집트의 광야로 들어가서, 그리고 공동묘지 사이에 살면서, 거기서 혼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죠.
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게 되자 사람들이 그 안토니우스를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고, 안토니우스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추종자들이 많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렇잖아요? 누군가 정말 특이한 신앙생활하는 것 같다 싶으면, 사람들이 몰려들게 돼 있는데, 그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이 수도사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고, 그 사람의 손을 만졌으면 좋겠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또 도망가요. 너무 사람이 많아서 내가 수도하는데 너무 힘들다. 그래서 옛날 로마군이 사용하던 요새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생활하면서 한 6개월마다 한 번씩 자신의 친구들이 가져다주는 마른 빵과 소금으로 연명을 하면서 그렇게 수도생활을 이어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의 이런 수도사를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는데 이 사람이 손을 만져주기도 하면, 병자들이 낫기도 하고,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국정을 뭔가 결정하려고 할 때, 이 사람에게 물어보고 이 사람에게 조언을 들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어떤 일을 결정하기도 하는 등, 이 사람의 소문이 널리 퍼져서 유명 인사가 된 것이죠. 5천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하고, 그리고 이 사람은 소식하면서 살았는데, 105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요즘에도 뭔가 영적으로 영험한 사람 같으면, 자꾸 가서 물어보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이 당시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 안토니우스의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물어볼 정도의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죠.
또 하나의 수도사가 있었는데요 아주 기둥 성자로 알려져 있는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둥 성자 시므온은 390년에서 459년경에 살았던 사람인데, 이렇게 기둥 돌기둥처럼 돼 있는 그 돌기둥 위에 올라가서, 지금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실제 봐서 그린 건 아니고, 폴란드에 있는 박물관에 있는 16세기 그림을 가져온 것이죠. 이 사람은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수도사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 “나도 수도 생활을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을 해서, 산속으로 들어가고, 사막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성에 안 차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좀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래서 기둥을 쌓기 시작해서 그 기둥 위에 올라가서 거기서 생활을 하기로 한 겁니다. 왜 기둥 위로 올라갔을까요? “좀 더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좀 더 이 세상과 멀어지면 더 멀어질 수 있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올라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기둥 위에 올라가서 앉지도 않고 서서 생활을 했다고 해요. 과연 어떻게 서서 생활했는지 이해는 할 수 없지만, 그 기둥 위에서 계속 내려오지도 않고 살면서, 밑에서 제자들이 빵을 올려주면 그 빵을 받아먹고 최소한의 소식을 하면서 살았는데, 머리도 안 깎아서 그 머리가 저 밑에까지 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소변을 어떻게 봤을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아무튼 그 위에 올라가서 수도하면서,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만을 묵상하고, 성경을 읽고 찬송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죠. 이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려고 했지만, 이 사람이 40일씩 금식을 자꾸만 하니까 몸이 약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체 생활하는 데 좀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쫓아내 버렸죠.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할 수 없이 산속에 들어가서,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고, 그렇게 있다가, 결국에는 그 기둥까지 올라가서 그 위에 올라가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고, 그 기둥 위에서 하나님 앞에 하루에 몇 번씩 절을 하기도 했는데, 밑에 있는 제자들이 우리 선생님이 저를 몇 번씩 하나 봤더니 하루에 1244번씩 절을 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모습을 봤다고 하는 말이 있고, 기둥 위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세수를 하고, 그 세수한 물을 밑에다 뿌리면, 밑에 있는 추종자들이 그 새순물을 한번 맞아보려고 막 달려가서 그 물을 맞으려고 하기도 하는 등, 아주 유명한 수도사가 되어버리기도 했는데, 자신의 육신을 괴롭게 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욕망들을 제어하고, 오직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던, 그런 수도사가 바로 기둥 성자로 알려져 있는 시므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음에는 파코미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또 등장하는데요. 파코미우스는 292년에서 346년경 사람으로서 수도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320년경에 나일강 근처의 도시에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그러면서 노동을 하고 하면서 이렇게 하는데, 아무래도 수도원을 만들어서 몰려드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같이 수도 생활을 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수도원을 만들었는데, 그 수도원에서 “어떻게 규칙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라고 하는 여러 가지 법칙들을 만들어가지고, 그래서 그 수도사들을 훈련시켜서, 그래서 이 파코미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수도원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면,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매달려야 되고, 명상하는 일에 매달려야 되고, 그리고 노동을 했는데 그 노동을 하는 것은 자급자족을 위해서 노동을 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 수도 단체 생활을 하려고 하니까, 규율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런 체제가 갖춰져야 했기 때문에 수도원 원장을 아 아빠라고 부르면서, 수도원장의 권위에 절대복종하는 그런 수도원을 만든 것이죠. 그리고 그 수도원의 담을 높게 쌓아서, 그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끊어버리도록 그렇게 만들었고, 잠을 잘 때는 서로 앉아서 3명씩 둘러앉아서 눕지 않고 앉아서, 왜 앉아서 잠을 잤을까요? 수도 생활의 기본적인 개념이 금욕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의 욕망 그런 것들을 자꾸만 억제하는 것이 방법이기 때문에 편하게 잘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앉아서 자면서 누가 좀 약한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 깨우고 하면서 앉아서 잤고, 그다음에 성경 암송을 한다든지 단체 기도를 한다든지, 하루에 음식을 두 끼만 먹게 만들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게 만들고, 또한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그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런 수도원을 만드는 것이 이 파코미우스에 의해서 최초로 만들어졌고, 그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을 모방한 수도원들이 전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지게 된 것이죠.
수도원 중에서 유명한 수도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529년 몬테 카사노 이탈리아에 있는 곳에 만들어진 수도원인데요. 이 베네딕트 수도에는 무엇으로 유명하냐면, 지금까지 존재하는 수많은 수도원들의 규칙들을 다 통폐합해서, 그래서 수도원의 규칙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수도회가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도 역시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여기는 좀 더 그나마 좀 이성적으로 금욕주의를 실천했는데요. 예전에 수도사들이나 수도원들은 무엇이냐면, 가능하면 자기가 좀 더 경건하고 좀 더 영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꾸만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튼 뭘 먹지 않는다든지 잠을 안 잔다든지 등등, 해서 극단적인 금욕으로 나가려는 경향들이 있었는데, 이런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된다고 해가지고,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배제하면서 적절하게 먹고, 포도주는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조금씩 사용하고 노동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이 베네딕트 수도 안에서는 성경 공부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공부를 많이 시켜서 도서관도 만들고 해서, 이 베네딕트 수도에서는 학자들도 많이 나오고 그랬는데, 이 베네딕트 수도의 그 원칙들 가운데 뭐가 있냐면,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 청빈한 삶을 살아야 된다. 복종해야 된다. 무조건 따라야 돼.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 이런 규칙들이 있었는데, 요즘 가톨릭 교회에서 신부들 그리고 수녀들이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에서 근거가 되냐면 바로 이 베네딕트 수도에서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규정들이 결국 가톨릭 교회에도 이어져서 계속 이렇게 나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수도원 운동에 보면, 대체로 이렇게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는 그런 운동으로 시작이 됐는데, 그런데 이 수도원 운동이 계속해서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었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경건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가게 됐는데, 나중에는 다 일반 보통 교회에서 타락한 현상들이 수도원에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성적인 문제, 돈의 문제, 권력의 문제들이 수도원에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 수도원으로 재산들이 많이 들어오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재산을 다 바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수도원의 재산이 늘어가는 거죠. 땅들도 많이 생기게 되고 그러니까 수도원을 둘러싼 권력이 또 다투게 되는 것이고, 돈 문제가 불거지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래서 고아원도 생기고 사실 그 고아원이 누구냐? 수도사들의 아이들을 거기다 기르기도 하는 등 역시 수도원들도 타락의 길로 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것을 겪으면서 또다시 이제 제대로 된 수도원을 세워보자 해서 기욤 1세라고 하는 사람이 만든 클루니 수도원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프랑스 동부의 클루니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의 가운데 하나인데 여기에는 귀족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고 옛날에 그 베네딕트 규칙서를 다시 채용하기도 하면서, 성직 매매도 반대하고 결혼도 반대하고 부패한 성직자들을 개혁하기도 하는 등, 그렇게 엄청난 개혁 운동을 많이 벌인 것도 있고, 또 시토 수도원이라고 하는 것도 유명한데, 1098년에 베네디트 수도 규칙을 회복을 목적으로 세운 그 시토 수도원에, 거기에는 또 열심히 사람들이 모여서 자급자족해야 된다 해서, 농사법을 개발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도 하는 등, 그런 수도원의 명맥들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12세기, 13세기에 들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라고 하는 것들이 만들어집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는 지금까지 가만히 보니까 왜 수도원이 탈락하게 되었는가? 돈 때문에 자꾸 타락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면 아예 재산을 받지 않고, 그리고 구걸해서 다녀라. 수도사들이 탁발 수도회가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스님들도 보면은 이렇게 이렇게 시주받아가면서 살잖아요? 그런 이유가 뭐냐면은 그냥 자신의 것을 안 갖고 그저 남이 주는 대로 먹고 산다 그런 의미거든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도 우리가 정말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꾸만 재산을 수도원에 모아둘 것이 아니라, 그런 걸 다 버려두고 우리가 구걸을 해서 다니면서, 탁발하고 다니면서, 그렇게 먹고살자. 그렇게 하는 수도회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이제 그런 탁발 수도회가 돼가지고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내려오다가, 제자들 사이에 막 논쟁이 벌어진 거예요. 이거 우리가 그래도 좀 돈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야 우리는 돈 필요 없어. 탁발하면서 계속해야 돼 하면서, 제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그러다가 결국 누가 이겼을까요? 돈이 필요하다는 쪽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또 타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고요. 그다음에 나중에 도미니크 수도회도 탁발 수도회로서 청빈한 삶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결국 그 수도회들이 늘 성공한 것이 아니라, 또 실패로 돌아가고 또 거기에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들이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타락했을 때 수도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정말 믿음을 지키고 잘 살려고 했지만 그 운동이 성공했느냐면 사실은 성공하지 못한 것이죠. 왜냐하면 수도원에 들어가도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여러 가지 권력의 문제, 욕심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서 결국 수도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고, 특별히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수도원의 전통이 사라져 버리게 됐습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수도원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개신교 쪽에 별로 잘 못 들어보셨죠? 가톨릭 쪽에 가면 거기에서는 수도회가 계속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그래서 프란시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 무슨 마리아 큰 딸 수도회 등등 무슨 수도회 해가지고, 남자든 여자든 그 수도원, 안내가 뭐냐 하면, 우리의 재산을 다 내버리고. 가난하게 들어가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우리는 독신으로 산다는 그런 수도원의 전통이 가톨릭에는 계속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 개신교 쪽에는 그런 수도원의 전통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이 수도원의 전통은 이신칭의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구원받아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우리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데, 수도원 운동의 모토는 뭐예요?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고, 우리가 열심히 그 신앙생활을 잘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서, 하나님께서 보실 만한 그런 거룩한 삶을 살아서, 그래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행위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수도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이런 수도원 운동을 사실은 반대한 거죠. 사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은 어떤 계기냐면 마틴 루터 자체가 수도원에서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금식하기도 하고 고행하기도 하고, 막 그런 생활을 했는데, 로마서를 읽어보면서 그게 아닌 걸 발견한 거죠. 이게 복음이 그게 아니구나.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됐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마틴 루터가 무릎을 꿇고 막 이렇게 층계를 막 올라가잖아요? 고행하면서 올라가다가, 마틴 루터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런 것들은 다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수도원 운동이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는 우리 개신교 내에서 이런 수도 운동을 벌인 것을 안타까워하는 학자들이 조금 있어요. 마틴 루터가 아기를 목욕시킨 후에 그 목욕물을 버린다는 것이 아기까지 같이 버린 것 아니겠는가? 수도원이라고 하는 것까지 “다 같이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수도원 운동을 가만히 보면서 우리가 한번 결론을 내려봐야 될 것이 있는데, 어떤 교훈들을 얻어야 될 것인가? 첫째는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수도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유혹이 사라진 곳, 그래서 완전히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곳이 있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죠. 우리가 이 속세를 떠나서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고, 또한 일을 하고 하는 이 새 속의 일을 하면서 살다 보면, 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욕심을 부리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미워하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복잡한 세상을 다 떠나버려서 오로지 성경 말씀만 읽고, 오로지 기도하고 오로지 찬송하고 묵상하는 그런 수도 세계에 들어가면,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이 수도원의 그런 개념이거든요. 근데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유혹이 없는 곳이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이 세상을 떠나서 수도원으로 간다고 해서,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거기에도 세속적인 욕망들이 그대로 있는 것이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거룩하겠다고 하는 그런 교만함, 또는 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그런 그런 교만함, 우쭐거림, 이런 모든 문제들이 사실은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결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문제에 해결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겁니다.
두 번째로 수도원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바리새주의로 회귀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정말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빵점짜리 인생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교만함의 문제였고 그런 것이죠. 근데 결국 수도원 주의라고 하는 것, 또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자신을 막 닦고 갈고닦고 막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영적인 교만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수도가 정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더 심각한 것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가? 왜 우리를 가정에 넣어주셨고, 왜 우리를 이 마을에 넣어주셨고, 왜 이 사회에서 살아가게 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 것이죠. 우리 가족에서 살면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우리 아이들을 잘 양육해야 될 사명이 부모님들에게 있는 것이고, 부모님을 잘 공경해야 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이 사회에 살면서 많은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함께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될 하나님의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명들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오로지 나 혼자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하는, 묵상하고 하는 그런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에만 매진하는 것이 과연 그게 바른 신앙생활인가 했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참된 참된 신앙,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게 참된 경건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그것이 참된 경건인 것이지, 그 모든 것들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그냥 더러운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그저 일주일 내내 기도원에 가 있으면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만 살면, 그게 참된 믿음이냐? 그게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게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이죠. 그래서 이 수도원 운동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영육이원론, 성속이원론이라고 하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하는 것들은 거룩하지만, 그게 아니라 내가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가족생활을 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더럽고 아주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그 관점 자체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겨주셨으면 그걸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되는 것인데, 한 달란트 그냥 땅속에 묻어두고 나는 성경만 읽고 있어요. 나는 기도만 하고 있어요.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는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냐?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주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사명들을 해나가는 것이 참된 믿음의 생활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수도원 운동은 이 세상의 삶 자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그게 잘못인 것이죠. 다행하게도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잘 연구하면서 이런 수도원 운동이 잘못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고 수도사가 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직업소명론이라고 하죠? 농부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병자를 치유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이 가치 없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거룩한 사명이라고 하는 직업 소명론이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성경적인 원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럼 수도원 운동은 무슨 빵점짜리냐? 그건 아니에요. 그 의도와 그 정신만큼은 우리가 그대로 어느 정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수도사들의 마음은 어떤 한편으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죠. 우리가 그저 이 세상의 일들에만 매몰되어서, 그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물질에만 소망을 두고, 그저 이 세상에 그 욕심만이 우리의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태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때때로 우리는 시간을 따로 내서, 경건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가 때때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닌지, 때때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수도사들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내팽개쳐버린 채, 도피성으로 도피해 버려서 살아가는 그런 삶은 균형적이지 못한 잘못된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늘 살아가는 가운데,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가 하나님에게서 가까이 있는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는 그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수도원 운동을 보면, 우리는 늘 뭔가 존경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드는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욕심을 내버리고 산다. 누군가 정말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하면서 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금식을 한다든지, 어떤 사람이 뭔가 종교적인 열정을 다한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들은 늘 “내가 못하는 걸 하네.” 그러면서 금식을 한다. 혹은 뭘 한다 하면, 괜히 우러러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균형 있게 성경의 말씀을 잘 이해해서 균형이 갖추어진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지,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겠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사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결국은 양극단으로 치우쳤던 것 같아요. 한편은 교회가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면서 세속화 타락의 길이라고 하는 그런 세속화의 길로 간 반면에, 그것에 반발해서 그래서 수도원 운동으로 갔는데, 이 양쪽이 다 이쪽이나 이쪽이나 사실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겠고, 우리가 균형을 제대로 잘 갖추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할들이 무엇인지 사명이 무엇인지 잘 그 사명에 충실해 가면서 우리가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