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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강좌 2강: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승인 – 기독교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인가?

1.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승인

오늘은 초대교회사 강좌 두 번째 시간이 되겠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초대 교회가 초창기 교회가 로마 황제에 의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쉽고 편안한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 가지 핍박을 통해서 목숨을 내놓아야만 하는, 그리고 사회에서 격리당하고 또 추방을 당하고 하는, 그런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그런 시절을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지냈어야만 했었던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는데, 오늘날에도 그러한 박해들이 전혀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정말 무서운 위협 가운데서 믿는 분들이 참 많이 있죠. 특별히 공산 세계에서나 아니면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런 곳에서나, 또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고요. 오늘날 우리 한국도 쉬운 상황만은 아니죠. 특별히 우리 아이들의 경우에는, 우리 동료들이 우리 친구들이 비난하고 조롱하고, 신앙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그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박해를 많이 받았는데 박해를 받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기 때문에, 황제를 신으로 섬길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 세상은 황제를 중심으로 해서 황제의 권력 앞에 굴복을 해야 되는데, 그 황제를 신으로 숭상할 수 없기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었죠.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데요. 우리로 하여금 성경적인 가르침에서부터 떠난 이 세상의 그 가치관들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방식을 따르지 아니하면 박해를 하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인데요. 더 나아가서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인육을 먹으며 피를 마시는 그런 아주 파렴치범들이라고 하는 오해를 받았고, 로마 시내에 불을 낸 방화범이라고 하는 그런 비난을 받게 되었고, 또한 근친상간을 하는 그런 무리들이라고 하는 그런 오해들 또 받았죠. 사실은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오해를 받으면서, 엄청난 고난을 받았는데,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날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런 비난들이 아주 많죠. 왜 많습니까? 왜냐하면 가짜 크리스천들이 있어서, 사이비들이 있어서, 사이비들이 행한 그 모든 악한 나쁜 짓들도 다 우리가 행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죠? <나는 신이다>라고 하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사이비 교주들이 얼마나 사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발한 프로그램들은 참 유익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 사이비들에 대해서 경고하게 해주는 그런 프로그램이니까. 하지만 일반인들은 사이비나 참된 종교나 구별이 안 되는 겁니다.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이 행한 잘못들을 우리가 그대로 뒤집어쓰는 겁니다.

그런 오해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데,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것을 해결하고 견뎌냈는가? 그것은 무력을 사용해서 저항하는 방법은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력을 사용하고 저항하는 방법처럼 보였던 것은 오히려 더 큰 핍박과 박해를 불러일으켰을 뿐이고, 어떻게 이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야 했는가? 참고 인내하며 바른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실은 무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박해를 받으면서 핍박을 받으면서, 조용히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했는데, 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52번째 황제입니다. 그 황제가 나타나서 어느 날 기독교를 승인해 주고 지하에 숨어 있던 우리 크리스천들을 다시 복권시키는, 그래서 이제는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한 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가 4개의 황제들이, 4개의 왕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로마는 동서로 나뉘어서, 그리고 각각 두 명의 황제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방에 있었던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군사력은 열세였습니다. 별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약세의 그런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막센티우스라고 하는 다른 황제와 전투를 벌여서, 그래서 전투를 해서, 거기서 승리를 따내야 되는데, 이 막센티우스라고 하는 황제의 요새는 정말 강력한 요새였습니다. 강력한 요새를 가지고 있는 막센티우스와, 그리고 군사력이 얼마 없는 콘스탄티누스와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군사력이 센 데가 이기는 거죠. 큰 요새를 아주 막강한 요새를 가지고 있는 그 막센티우스가 이길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나가기 전에, 밀비안 다리에서 전투를 해야 되는데, 그 저녁에 잠에 꿈을 꾸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꿈을 꿨는데, 하늘에 깃발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깃발이 하나 보이는데, 거기에 어떤 형상이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보는데, 그 꿈에서 들리는 얘기가 뭐냐면은 “너는 이 표식을 가지고 나가서 싸워라” in hoc signo vinces. 라틴어로 hoc는 “이것”이라는 얘기고, signo라고 하는 것은 “표식” vinces 하면, veni vidi vici 하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inces 너는 승리하라. vincere 이겨라. 이런 거 있잖아요? 라틴어로 “너는 이 표식으로 승리하라”라고 하는 그 꿈의 환상을 보게 됐는데, 그 환상의 그림이 무엇이냐면, 바로 P자하고 X자하고 그려진 이 마크입니다. 이 마크 좀 보셨습니까? (좀 반응 좀 해요.) 처음 봅니까? 좀 봤습니까? 많이 보았을 겁니다. 천주교에서 특히 많이 쓰이고 있는 그런 표식이고, 교회 내에서도 강대상이나 이런 데 보면, 이런 표식들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꿈의 그 표식을 보았을 때, 이 표식이 무슨 표식인지 몰랐어요.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이 콘스탄티누스는 그 꿈을 꾸면서, 이것은 자기가 믿는 태양신이 자기에게 이런 계시를 주었다 생각하고, 그래서 모든 군대에게 이 깃발을 다 만들어 달라. 그렇게 해가지고, 이 표식을 다 들고서 전투하러 갔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군대가 이겨버렸어요.

그래서 너무나도 놀라가지고, 정말 내가 태양신을 의지해서 군대에서 이겼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누군가 와서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황제시여, 이 표식은 크리스천들의 표식입니다.” (아까 그 그림 한번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밀비언 다리 전투에서, 십자가 깃발을 들고, 강력한 요새를 가지고 있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는데, 이 표식이 뭐냐면 X자는 희랍(헬라)어로 “그리스도”라 할 때 키(X)라고 하는 글자입니다. P자는 헬라어로 “로”(P)라고 하는 그런 알파벳으로, 다시 말하자면 크리스투스, 크리스투스라고 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헬라 말의 첫 두 글자, “크리” 할 때, 영어로 치면 r자 같은 거죠. 그러니까 x, P가 P가 아니고 “로”입니다. 헬라어로 그래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 표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그 순간 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때부터 기독교를 승인해 주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신앙생활하도록 허락해 주는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황제였는데, 동방의 황제였던 리키니우스와 함께 313년에,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라고 하는 것을 반포하게 됩니다. 이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제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사실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고, 기독교를 승인해 준 겁니다. 승인해 주어서 “모든 종교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해라”라고 하는 그런 선포를 하게 되어서, 그래서 기독교는 완전한 법적인 허락을 받게 되었고, 종교적인 자유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했었는데, 몰수했던 재산을 돌려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크리스천들의 재산을 가져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은 다시 돌려주어야만 했었고, 그리고 돌려줌으로 인해서 손해 보는 사람들에게는 정부가 그 재산을 보전해 주는 그런 것을 해서, 크리스천들이 이제는 재정적으로도 박탈당하지 않게 되었고, 주교(bishop) 다시 말하자면 성직자들이 성도들에 대한 민사 재판권을 할 수 있는 그런 권한도 성직자에게 주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졌던 기독교인에 대한 모든 법적인 제재들을 다 무효화시켜서, 자유롭게 예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는 지하로 들어가서 그 지하 속에서 그렇게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했었는데, 이제는 지상으로 올라와서 자유롭게 예배를 하면서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성직자들에게는 월급을 정부가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참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그 일을 겪게 된 우리 크리스천들은 너무나도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죠.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라. 감사하라.” 하면서 정말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늘 박해만 받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이 투쟁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초자연적인 그런 역사를 통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마음을 바꾸어 버리고, 그리고 기독교가 이렇게 보상을 받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어서, 기독교가 승인을 받게 된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사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고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건이 있었죠?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있을 수 있겠죠. 사실은 사도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러 다니고 정말 고통을 주면서 많은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었는데, 그는 박해를 하러 가는 그 길 가운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완전히 180도 변화되어서,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처럼,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사실은 그전까지는 전혀 기독교에 대해서 몰랐고, 그리고 박해를 했던 왕이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꿈 한 번 꾸고,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독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기독교를 인정해 주는 그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이후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주후 3백80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식으로 임명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2. 기독교 승인의 장점

좋습니까? 반응이 없어요?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렇게 놀라운 기독교가 승인을 받고, 인정을 받고, 그리고 결국 로마의 국교까지 되는 이 상황, 그리고 모든 정부 관리들이 기독교를 보호해 주고, 이제는 성직자들에게 월급도 주고, 온갖 지원을 하면서 그래서 국가가 기독교에 의해서 운영되는 이 상태 너무나도 좋은 것이죠.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우리나라도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바람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1970년대 ccc에서 내걸었던 그런 구호가 하나 있습니다. 혹시 CCC에서 내걸었던 구호가 기억나시는 분 계십니까? 그때 내걸었던 구호가 뭐냐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묻혀서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던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소망은 사실 어쩌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믿음의 소망일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사회가 하나님을 모르고, 또 교회를 박해하고, 그런 사회가 되기보다는, 이 사회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래서 기독교 친화적인 사회가 되고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을 갖는 것은 어쩌면 순수한 우리들의 마음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380년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더 좋아졌는가?”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본다고 한다면, 사실은 교회의 신앙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말았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는 그 믿음이 순수하고,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그런데 오히려 기독교가 인정을 받고, 그리고 국교가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이제 타락의 길로 걸어가 버리고 말게 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인정을 받았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한 나라의 국가 종교가 되는 것은 좋고 바람직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될 목표인가라고 질문을 던져본다고 한다면 그 대답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선은 좋은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박해를 받지 않으니까, 좋은 것이고요. 박해받으면서 신앙생활하는 게 좋을 일은 없죠. 그러니까 박해 없이, 참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좋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국가적인 차원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족 식구들 모두가 다, 아버지 어머니가 극렬하게 반대하고 형제들이 다 극렬하게 반대하는 가운데, 혼자 맨날 욕먹으면서 혼나면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함께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너무나 좋잖아요? 그걸 우리가 기대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국가 전체가 한 나라가 정말 복음화되어 버려서, 이 사회가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래서 신앙의 자유가 확대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말 편리하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소망들이 있는 것이죠.

요즘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에는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게 쉽지 않다고 그래요. 예전에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얘야, 교회 가자.” 하면서, 아이들에게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아이들을 인도하고, 문제아들이 있든, 어떤 아이들이 있든, 교회로 인도해서, 그 아이들을 좋은 신앙생활을 잘하게 만들고, 큰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이렇게 선생님들이 잘 인도해 줬는데, 요즘에는 선생님들이 자기 반 아이들한테, “교회 가자” 그러면 크게 문제가 된다면서요? (어디 교사 선생님이 안 보이나?) 그런 시대가 됐다고 그래요. 이제는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교회 가자고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어렵다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만약에 기독교화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마음껏 전도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심지어 미션 스쿨에서도 이제는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하거나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고 그래요. 그래서 미션 스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고, 지금은 또 군대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요. 예전에는 제가 군복 생활만 할 때만 해도 제가 전화를 걸었어요. 부대장한테, “부대장님 교회로 우리 군인들 좀 보내주세요.” 그러면 “집합” “종교 집합” 해가지고, 쫙 “무조건 가” 그러고 왔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그래요. 함부로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함부로 가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약이 있는 이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금 보니까 기독교 인구가 자꾸만 떨어지는 이유가 다 손발이 다 묶여 있는 거예요. 군대에서도 손발이 묶여 있고, 학교에서도 손발이 묶여 있고, 이 사회에서도 요즘에 아파트에 어디 가서 초인종도 못 누르고, 아파트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지금은 다 비밀번호 눌러야 들어가고 그러니까, 요즘은 모든 것들이 다 복음을 전하는 데 제약이 있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는데, 예전처럼 마음껏 전도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기독교의 친화적인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아마 좋을지 몰라요.

3. 기독교 승인의 단점 – 신앙은 성공의 수단으로 전락

하지만 부작용은 그 장점들을 지워버릴 만큼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우선 국가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가 기독교 국가가 되어 버리자,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근데 교회로 몰려드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교회로 몰려들까요? 믿음을 갖기 위해서, 교회로 몰려들고,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며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공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에도 어느 직장 기독교 계통의 직장에 다니려고 한다면, 세례 증서를 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이 확인돼야 접수를 받는 그런 데가 있어서, 그래서 그냥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왜 나오냐면, 취직하기 위해서, 세례 증세가 필요해서 그래서 나오게 되는데, 그럴 경우에는 대부분 믿음을 제대로 갖느냐? 제대로 갖는 것이 어려워요. 그냥 요식 행위로 세례 증서가 목적이 되고, 취직하는 게 목적이 되고 하기 때문에, 믿음을 제대로 갖느냐 하면, 제대로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당시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되자,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래야 국가 공무원이 되기 쉽고, 그래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짜 성도들이 몰려든 것이지, 참된 부흥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319년에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어떤 방법을 쓰게 됐을까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겁니다. 왜 성직자가 되면 세금을 안 낸다고 하니, 내 재산에서 세금을 안 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성직자로 자원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목사가 되는 길이 성직자가 되는 길이 정말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탐욕을 얻기 위한 그런 수단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이죠. 321년에는 성도들의 유산을 교회가 상속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개정이 되었고, 성직자들은 군대를 가는 것을 면제받았고, 결국 이 로마 사회에서 성직자들의 신분이 굉장히 높은 위치에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결국 세속화가 필연적인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가 급속하게 타락하게 되어 버렸는데,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타락했던 것과 똑같은 타락이 시대에 일어나게 된 것이죠. 참된 믿음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세속적인 목적 때문에 오늘 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기독교 승인의 단점 – 국가와 종교가 연결됨

두 번째로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황제가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개입하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다 보니까, 이제는 교회의 문제가 국가의 문제고, 국가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군목으로 사역할 때 보면, 우리 부대장이 교회에 나오게 됐는데, 부대장이 교회에 와서 우리 참모들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교회 일이 곧 군대의 일이 되고, 군대의 일이 곧 교회의 일이 되고,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인데, 역시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가가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한참 논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걸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황제가 나서서 해결하게 되는 거죠.

황제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의 첫 번째 건이 무엇이냐면, 니케아 회의라고 하는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보십시다. 니케아 회의라고 하는 것은 325년 6월 19일에 열린 회의였는데, 모든 교회 성직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성경적인 교리가 어느 교리가 맞는가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게 된 겁니다. 성자 예수님이 누구냐? 성자 예수님에 대한 이견이 있을 때, 성자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한 토론을 통해서, “성자 예수님이 누구다”라고 결정을 하게 된 회의가 니케아 회의인 것이죠.

그런데 누구 때문에 문제가 됐냐면,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가 된 겁니다.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성자는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성자는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다. 피조된 존재다. 성부 하나님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우리보다도 우리와도 다르고, 그래서 신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는 같지 않고, 성부 하나님과 비슷할 뿐, 피조된 존재라고 하는 주장을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그런 표현이 성경에 있으니까,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부 하나님만 혼자 계셨을 텐데,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하기만 할 뿐, 똑같은 분은 아니라고,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보여주세요.)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고, 빛에서부터 나신 빛이고, 창조되지 않고 나신 분이며,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것을 라틴어로 homoousios라고 합니다. 호모 우시오스. “호모”라고 하는 것은 같다는 이야기고, “우시오스”라고 하는 것은 본질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존재라고 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한 반면에, 아리우스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할 뿐이다. homoiousios라고 주장을 한 것이죠. 그래서 알렉산더는 homoousios 예수님은 하나님과 homoousios라고 주장한 반면에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똑같은 게 아니라 비슷하다. homoiousios라고 이야기를 해서, 헬라어로, 헬라어로는 이오타(i) 이오타 논쟁이라고 합니다. 서로 이오타가 있느냐, 없느냐로 싸웠다고 해서, 그래서 이 문제가 있는데 서로 주교들끼리 성직자들끼리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성도들 사이에 교리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맞습니까? 이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한 게 이런 주장이 있고, 이 사람이 읽고 해석한 주장이 이게 있으면, 어떻게 그 문제를, 서로 다른 해석이 있으면 어떻게 그 문제를 서로 다른 의견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죠? 토론하고 설득해서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이죠. 그렇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성경을 찾아봅시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있으니까,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러면 어느 게 더 맞겠습니까? 서로 대화하면서,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그래서 같은 귀결로 이르게 돼야, 그게 정당한 회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그리고 교회가 국가에 국가 종교가 된 이 상황 속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황제가 결정하는, 황제의 권력에 의해서 “네가 틀렸고, 당신이 맞았다”라고 인정해 주게 되는, 그래서 황제를 설득시키는 자가 승리하는 겁니다. 많이 토론이 있지만, 황제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그 교리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죠. 다행히 누가 승리하게 됐는가? 알렉산더가 승리하게 됐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잘 포섭해서, 결국 아리우스는 정죄를 당하고, “너는 잘못됐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아” 해야 한다면서,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신조를 받아들이게 됐는데요. 그런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아리우스 파 쪽에서는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죠? 무슨 방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울 수 있을까요? 다시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황제를 설득시켜서, 이번에는 알렉산더의 주장을 이어받은, 아타나시우스를 황제가 유배를 보내고, 이제는 니케아 신조를 무효화시키면서, 아리우스가 맞다고, 그렇게 황제가 뒤집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나중에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한번 회의가 열어지게 되는데, 그때는 다시 정통 교리로 와서, 오늘날 우리가 삼위일체 교례를 가지고 있는데, 삼위일체 교리는 뭡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이 하나님이며, 모든 것이 다 똑같고, “능력과 권세와 종교와 영광과 모든 것이 다 똑같다”라고 하는 그런 삼위일체 설이 결정되게 됐는데, 그 삼위일체를 결정하기 직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같다.”라고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 회의가 니케아 회의였고, 그 이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떻게 됐는가? 이제는 국가 종교가 되다 보니까, 국가의 힘을 빌어서, 모든 것들이 결정되게 된 것이죠.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기독교가 국가를 이렇게 이렇게, 기독교에 의해서 나라가 움직이고, 사회가 움직여지는 그 사회를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텐덤, 영어로 Christendom이라고 하는데, 기독교가 지배하는 국가나 사회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현대가 되기 전 근대가 되기 전까지 유럽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서 사회가 움직이던 그런 사회였는데, 그 사회는 크리스텐덤 사회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목사님들이 그때 크리스텐덤 시대를 굉장히 그리워해요. 왜? 그때는 성직자가 된다고는 하는 것이 굉장히 뽀다구가 났었거든요. 성직자가 말 한마디면, 황제의 권위도 떨어뜨릴 수 있고, 성직자가 황제에게 이렇게 교회 치리를 가해버리면, 황제도 꼼짝을 못 하고, 왜냐하면 모든 국가 사람들이 성도들이기 때문에, 그 성도들이 성직자 말을 듣는 겁니다. 황제 말을 안 듣고. 그러니까 황제 권력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약하던 그 시대를 성직자들은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리 이 나라를 크리스텐덤으로 만들까?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까?”라고 그런 꿈을 꾸는데, 사실은 이 꿈이 바람직하고 건전한 꿈이 아니라, 건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하고, 굉장히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아무튼 기독교 국가가 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것들을 국가가 관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국가가 해야 되는 모든 일들을 성직자들이 관여하게 되는 국가와 정치가 교회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었을 때, 결국에는 국가도 망해 먹고 종교도 망해 먹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5. 기독교 승인의 단점 – 화려해지는 교회

그리고서 이 시대에 벌어졌던 일들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제는 교회당이 화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예배를 어디서 드렸어요? 카타콤에서, 무덤에서 거기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상화되고 공인인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이제는 황제의 후원 하에 아름다운 교회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가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한 것이죠. 황제에게 향불을 피웠는데, 황제에게 향불을 피워서 드렸던 그런 예식 같은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 향불을 피워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논리는 간단해요. “높은 사람에게 영광을 올려드리는 방법으로 향불을 쓰고 있네?” 하나님은 황제보다 더 높은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도 하나님 앞에 향불을 올려드리자.” 하면서 향불을 피우는 거죠. 가톨릭에서 뭐 합니까? 향불 이렇게 하는 거 보셨어요? 안 가봤으니까, 모르죠? 그런 것들이 다 이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고, 성직자들의 복장이 화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릴 때는 성직자들의 복종이 뭐였겠어요? 그냥 평상복으로 입고 한 거죠. 오늘날로 치면 청바지 입고 일하다가, 청바지 입고 설교하고, 그냥 평상시 보고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했던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이 되면서, 왕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그런 신하들의 복식보다도 더 화려한 모습으로 성직자들이 옷을 입는 겁니다.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는, 신하보다 더 높은 성직자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에, 더 화려한 옷을 입게 되었고, 화려한 복장은 결국 권위주의로 귀결되게 된 것이죠.

교회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제는 성도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비성경적인 방법을 쓰는 겁니다. 성지에 가서 성지의 물품을 가져온다거나, 아니면 그 옛날 순교했던 순교자들, 순교자들의 유골을 가지고 와서,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성경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지팡이 순교자들의 뼈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무덤을 쓸 때는 그런 순교자들 옆자리에 묻으면 더 좋다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성지순례를 갔더니,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기념 교회들이 엄청나게 많이 지어져 있었어요. 왜 그렇게 천주교나 동방 정교회나 에티오피아 정교회나 이런 모든 그런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모든 기념교회를 짓는 이유가 뭐예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묻혔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당했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넘어졌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뭐 했고,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더 더 거룩하고 더 복되다” 해가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복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난번에 성지순례에 갔더니, 예루살렘 탄생 장소라고 하는 곳이었어요. 예수님 탄생 장소를 아주 황금 그걸로 장식해 놓고, 4개 종단이 돌아가면서 매일매일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매일매일 미사를 드리는 거예요. 왜? 다른 데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더 우리에게 복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까지 있게 된 것이죠. 심지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엄마가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다 하면서 그것을 놓고 예배하기도 하고, 결국 이게 기독교가 공인화되면서, 자꾸만 잘못된 방향으로 유물을 섬기는 쪽으로 가게 되었고 더군다나 절기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예배드릴 때 절기 별로 많이 안 지키죠? 그냥 뭐 성탄절 부활절 몇 가지만 하잖아요? 그런데 가톨릭에 가면은 절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순절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되기 4주 전부터 집회 시작하고, 성탄절 전에 대강절로 만들어 놓고, 부활절 전에 사순절 만들어 놓고, 또 부활절 이후에 또 오순절 성령 강림절 만들어 놓고 해서, 성령 강림절 후 해가지고 1년 내내 1년 내내 특별 절기들을 다 만들어 버리게 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성인에게 기도하면 성인이 우리들에게 더 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또 성인들의 순교자들의 매장지에서 성찬식을 하면 더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고, 내 세례 받을 때, 세례명을 성인들의 이름을 따면, 나와 그 성인이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가톨릭의 그런 전통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결국 신앙은 완전히 다 가짜 신앙이 되어버리고 만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없는 타락한 종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죠.

6. 도나투스 논쟁

기독교가 승인받았던 게 결과적으로 유익한 것이었는가? 결코 유익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렇게 승인된 상태에서 벌어졌던 일 중에 하나가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보여주시죠.) 카르타고라고 하는 곳이 어디냐면 이탈리 남쪽에 있는, 지금 알제리아 쪽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가 카르타고라고 하는 곳입니다. 알제리가 튜니지아인가요? 지금 튜니지아에 있는 그런 도시가 카르타고인데, 그 카르타고의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직자가 받은 세례가 누구한테 받았는가? “변절자에 의해서 받은 세례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성직자는 자격이 없다고 하는 문제로 서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자 치워도 됩니다.)

저 카르타고라고 하는, 우리가 쉽게 교회라고 합시다. 카르타고 교회의 담임 목사 자리가 빈 거예요. 그러면 담임 목사를 청빙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청빙해서 딱 받아들였는데, 그 성직자가 누구냐면, 카이킬리아누스라고 하는 성직자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반대파가 문제를 제기했어요. 무슨 문제를 제기했느냐? 이 카이킬리아누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성직자가 신부가 세례를 받았는데,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느냐? 배교자한테 세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지금,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 박해받는 그 시절에 이 사람이 세례를 받아서 기독교인이 됐어요. 그런데 그 세례를 줬던 그 당사자가 박해를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변절해 버린 그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 신앙을 저버린 거예요. 그러면 내가 받은 세례는, 나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 변절해 버렸으면, 그 세례가 무효입니까? 유효입니까? 예? 무효 손 들어주세요. 유효? 에라 모르겠다? 유효냐 무효냐 가지고 싸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반대파가 무슨 얘기를 했냐면, 변절자가 준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성직자 자격이 없는 것이고, 변절자에게 세례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담임 목사로 담임 성직자로 못 모시겠다고 쫓아내자는 거예요. 그래서 데려온 사람이 누구냐면 마오리누스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을 담임 성직자로 모셔와야 한다고 했고, 그 사람의 뒤를 이어서 도나투스라고 하는 사람이 성직자가 된 겁니다.

왜 유효 세례의 유효 무효 문제가 생겼을까요? 그 자리가 탐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예전 박해받던 시절에는 성직자 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길이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길이었어요. 누가 당신 세례가 문제다. 아니다. 제기할 일이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기독교가 인정받고, 정상화 정상화라고 해야 되나요? 아무튼 인정받고, 공인이 됐고, 크리스텐돔 사회 속에서 카르타고 교회는 그야말로 이권이 있는 한 단체가 되고 만 것이죠. 그리고 이 이권이 있는 그곳의 책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이 사람이 받은 세례가 변절자가 준 세례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주장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죠.

사실 세례는 유효 무효가 없어요. 세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지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이제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받는 것이 세례죠. 이제는 우리의 죄의 몸을 씻어버리고, “이제는 내가 거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의식이죠. 그런 의식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확징하고 증거하고 하는 그런 하나의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 세례인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이걸 유효가 있습니까? 무효가 있습니까? 유효 무효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권리가 되다 보니까, 유효 무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세례 증서가 입사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이게 제대로 발급된 세례 증서냐? 엉터리로 받은 세례 증서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표창장이 이게 진짜냐? 가짜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왜? 이권과 권력과 탐욕이 관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실 이 세례와 관련된 문제는, 참 침례교 쪽에서는 유아세례를 안 줘요. 왜? 믿음을 고백해야만 준다. 가짜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세례를 받는다고 천국에 갑니까? 세례를 못 받는다고 지옥에 갑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내가 믿지 않고 주님을 믿지 않고 내가 거부하면, 세례 백날 받아도 소용없는 것이고, 세례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언제 문제가 되느냐? 권력이 되고 이권이 되고, 권리와 연관이 될 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세례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망각해 버리고, 그 옛날부터 있었던 도나투스의 유효성 무효성 논쟁에서 그것을 이어받아서 (참 학자들도 좀 좀 제가 볼 때는 좀 한심하긴 한데) 그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서 해야 될 텐데, 그것이 일종의 교리가 되어 버렸고, 도나투스가 이겼어요. 아니. 도나투스가 졌어요. 도나투스가 지고, 세례는 누가 주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는 것으로, 그 당시 국가 기독교가 인정해 버려서, 그게 우리의 교리가 돼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내려온 겁니다. 천주교를 통해서 천주교에서 그걸 받아들였고, 천주교에서 받아들여진 게 계속 우리 개신교까지 우리에게 계속 넘어온 것이죠. 근데 사실은 유효성 무효성 문제를 따질 수 있는 게 세례가 아닌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7. 기독교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가?

이런 걸 우리가 쭉 보게 되면서, “우리는 과연 오늘날에도 크리스텐돔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계절로 만들어 버려야 할 것인가? 이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소망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 문제 그 대답은 그냥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 점을 알아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 우리나라 제헌 국회에서 기도로 시작하고, 그리고 그래서 대한민국이 기도로 시작했다고 하는 거기에 굉장히 굉장히 좋아하고, 그것을 너무나도 그리워하시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우리나라가 정말 아주 훌륭한 그런 암옥에 의해서 우리나라 국회는 국회에서부터 기도로 시작했고,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완전 엉터리 국회의원들만 있고, 그래서 지금 그러면서 막 굉장히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우리나라 국회가 기독교인들로 가득 차고, 우리나라 전체가 기독교인으로 가득 찬 그 나라를 만드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그 대답이 그냥 “예” “아니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몇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크리스천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는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타락의 지름길이기도 하고 결국 우리가 망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정치권과 자꾸만 연결해서 정치적인 그런 힘을 가지고, 기독교를 좀 어떻게 편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독교적 영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굉장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거룩해 보이지만, 별로 거룩하지 못한 소망이고, 사실은 세속적인 동기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화됐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냥 기독교 상징을 보고 그 상징이 주는 힘에 감동했을 뿐이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이죠. (빨리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빨리 끝내라고 알려주셔서.) 물론 이제 그 이후에 성경 공부를 통해서나, 신앙 교육을 통해서, 그가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두가 다 교회 안에 발을 들여놓을 때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교회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빵이 좋아서 들어오고 처음에는 사람 만나고 싶어서 들어오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를 들어오는 것은 가능한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야 그게 진짜 복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그 기독교는 그 자신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 환호했던 그 모든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통해서 빵을 먹여주었을 때 빵에 환호했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그래서 오늘날 자꾸만 정치적인 어떤 방법을 통해서, 선거나 또는 어떤 정치세력과 결탁해서, 우리 기독교가 인정받고 그래서 기독교가 좀 더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한, 그런 어떤 노력들을 하는 것이 사실상 저는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고, 사실 제대로 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온갖 핍박과 박해와 여러 가지 오해와 그런 그런 여러 가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참된 믿음을 제대로 가지고, 참된 믿음을 지키고, 그래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보여주는 길이 제대로 된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8. 성가대 서는 자격으로 세례교인으로 한정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네. 장로님.) 교회에서, 이제 세례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세례 문제를 질문하신 건데요. 성가대원으로 자격을 “세례 교인들만 성가대를 설 수 있다”라고 하는 게 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교인들만 성가대를 서는 것에 대해서 저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성가대를 서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해서,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세례를 받고 이렇게 서면 좋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이렇게 법제화시켜버리고 하는 것이 사실은 여러 가지 위험성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좀 이해하면서 우리가 좀 더 너그럽게 너그럽게, 경우에 따라서 잘 좀 대응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드는데, 때로는 이것이 우리 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는 방법이 될 수는 있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의 믿음을 살펴보고, 그래서 믿음이 있는 걸 보고 세례를 주고,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서 활동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절차를 가지는 것이, 우리 교회가 그냥 외부 세력에 의해서 함부로 흔들려 버리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이 강의를 하면서, 그 옛날 세례 논쟁이 좀 악용됐던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인데, 우리 교회의 운영과 이런 것들을 위해서는 이런 정도를 좀 가이드라인을 쳐주는 게 좀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도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교회에 등록하겠습니다” 하면 우리 교회 바로 “등록 교회입니다.”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 줍니까? 등록 교인으로 하겠다고 등록하고 싶다고 하면, 그분의 믿음을 한번 살펴보고, 이분을 우리 교인으로 받아줄 만하다 싶으면, 그때 우리가 세례를 주든지, 아니면 우리 교인들한테 소개를 하고, 우리 교인으로 받아들이든지 하는 절차를 거치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의 그 절차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것을 마치 그 옛날 피 터지게 싸웠듯이, 막 유효 무효 이거 가지고 싸우듯이 그렇게 싸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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