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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결의와 목회 현장

이국진 목사 (전주 예수비전교회)

1. 총회 결의의 필요성

얼마 전 나는 최근 어느 교회로 부임한 후배 목사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자신은 설교 중에 가운을 입지 않고 있는데, 원로 장로 한 사람이 가운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후배 목사와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단 89회 총회에서 가운을 입는 문제는 당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총회의 결의는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최고의 가이드는 성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필요하고 총회의 결의가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이 때로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고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가르침인지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성경의 많은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는 할례를 반드시 받으라고 되어 있지만, 더 이상 우리는 할례를 시행하지 않는다. 구약의 의식법과 시민법은 이제는 더 이상 문자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있는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적용되는 것인지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보편적 원리를 오늘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어떤 관점이 더 성경적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이 결정하지 않고 교회의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장로교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이러한 예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수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당시에는 수많은 이방인이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종하는 단계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할례였다. 그래서 반쪽짜리 개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포부메노이)이라고 불렀다. 고넬료와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들에게 할례를 시행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구약 성경뿐으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총회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총회는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성경에는 할례가 필수규정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셔서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아무런 장애 없이 널리 퍼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바 있다.

오늘날 우리 총회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우리 총회는 많은 신학적인 결의를 내렸고, 앞으로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들은 총회에 속한 모든 지교회와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2. 최상의 권위를 가지는 성경

그런데 개혁신앙의 관점에서는 총회의 결정이 최상의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칼뱅의 종교개혁 전통은 성경만이 유일한 최상의 권위이다. 성경 앞에서 그 어느 것도 판단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와 신앙고백과 회의를 통한 결정 등등 모든 것들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 이러한 점이 교회의 결정이 최상의 권위를 가지는 로마 천주교와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총회의 결의는 성경적 원리에 맞는 결정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미 결의되었던 것이라 할지라도 혹시 성경에 비추어보아서 미흡하거나 수정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개정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만이(sola scriptura), 성경 말씀 전체가(tota scriptura) 하나님의 말씀이며, 최상의 권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총회의 결의는 언제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경에 경청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목회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서 성경적인 적절한 가이드를 해주어야 한다.

3. 디아포라와 아디아포라

총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규범적인 원리인 디아포라(diaphora)와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상황에 따라 임의로 할 수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를 구분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따라야 할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디아포라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예배를 11시에 드려야 하는지, 10시에 드려야 하는지는 지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아디아포라에 해당한다. 그런데 만일 총회에서 반드시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결의하면, 불필요한 무거운 짐을 지교회에 지우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예배 모범”은 말 그대로 모범(sample)이다. 반드시 따라야 할 디아포라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장 좋은 예시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교회는 예배 모범을 참조하면서 각각의 교회 사정에 따라 변형을 하여 예배 순서를 정할 수 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마치 디아포라인 것처럼 규정해버리면, 불필요한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우리 총회는 84회 총회에서 열린 예배는 예배 모범에 위배되며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교단적으로 금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아직 열린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지금의 목회 현장에서는 많은 교회가 이러한 열린 예배를 채용하고 있다. 사실 예배의 형식은 아디아포라적인 것으로 총회의 결정을 통해 구체적인 것까지 결정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열린 예배를 금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처럼 보이지 않고, 단지 청중을 만족시키며 흥미와 감성 위주의 예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참된 예배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이제는 예배의 “형식”은 아디아포라적인 것으로 보고 성경적인 원칙에 정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총회적 차원에서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 목회자가 예배 중에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총회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당회에 그 결정을 넘긴 것처럼, 예배의 형식은 당회에 일임하여 자유롭게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십자가를 강단에 걸지 말라고 하는 결정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 총회는 42회, 43회, 44회, 74회, 100회, 104회에서 반복적으로 강단에 십자가 장식을 거는 것을 금하는 결정을 하고 재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십자가를 우상화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위함으로 인하여 올무가 되었던 것처럼,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때로는 영적으로 해로울 수 있음을 간파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주를 위한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한 팀 켈러 목사님의 말처럼,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화될 위험을 알고 금지한 것이다. 목회의 현장에서는 십자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우상화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했던 의도는 분명 선한 것이었지만, 사실 십자가를 강단에 거는 것도 아디아포라에 해당할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이렇게 총회의 결의로 규정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 결정을 유지해야 하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말이다. 우선 우상화의 우려는 사실 설교나 교육을 통해서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우상화하여 그 앞에서 기도하며 복을 비는 성도들이 있을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우상화의 우려가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더구나 강단에 십자가는 안 된다면서, 왜 교회당 첨탑이나 강대상 장식이나 장의자나 성가대 가운에는 십자가를 장식하는 것일까? 동영상 유튜브나 교회 홈페이지에는 십자가를 왜 허용하는 것일까?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미술품으로 보면 괜찮다고 했던 58회 총회의 결의를 십자가에는 왜 적용할 수 없는 것일까?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우상화의 염려가 사라졌기에 또한 충분히 설교나 교육으로 가르칠 수 있기에 아디아포라적인 것으로 보고 해제할 필요가 있다. 총회에서 결의했던 모든 결의에 대해서 일일이 다 살펴보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하지만 디아포라인지 아디아포라인지 구분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4. 총회 결의의 목회 현장에서의 적용

총회의 결의는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들은 유념하면서 목회의 현장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도 성경의 권위가 최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총회의 결의가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고, 언제나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게 개혁신앙의 근간이다. 혹시라도 총회의 결의 중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흡하거나 수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바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고, 반드시 수정해야 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성경을 좀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면서, 과거의 결정들을 성경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총회의 결의가 유용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율법주의로 사용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법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법칙을 만든 의도는 선한 동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들은 이내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되고 말았다. 교만의 재료가 되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우리 총회의 결의도 그런 길을 갈 가능성이 많다.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총회 결의의 신학적 의미를 묵상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총회의 결의는 단순한 결의가 아니라 신학적 고민이 묻어나온 결의이다. 이것을 적용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가운데 폭넓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5. 총회 데이터 아카이브

그동안 우리 총회가 어떤 결의들을 해왔는지에 대한 자료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총회 홈페이지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인데, 회의록을 구하여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사도행전 15장의 초대교회의 회의에서는 할례에 대한 결정을 한 후에 모든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그 결정을 알린 바 있다. 우리 총회도 결정을 했다면, 그 결정이 모든 지교회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결의들을 해왔는지 홈페이지에 예산을 들여서라도 아카이브화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그 내용을 보고 지교회의 현장에 적용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 결정한 것들 가운데 개선이 필요한 것들은 재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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