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초대교회사 강좌 1강: 로마의 박해를 초대교회는 어떻게 견뎠는가?

역사에 제가 별로 자신감이 없어서, 사실적인 면에서는 좀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을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걸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오늘날의 교훈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종종 우리의 교만의 재료가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그런 교만의 재료가 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중국이 예전에 화약을 발명하고, 중국이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뛰어난 민족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조선의 역사가 5천 년이 넘고, 한글을 창조하고, 이런 뛰어난 업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역사라기보다는 그것은 그냥 그냥 교만의 재료요. 자랑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죠. 역사를 보면, 역사를 배우게 되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라이언킹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아기 사자 심바가 이제 저 밀림을 떠나서 살고 있을 때, 과거에 사로잡혀가지고, 늘 절망 가운데 지내는 겁니다. 절망 가운데 지내고 있으면서, 사실은 이 심바가 왕의 밀림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될 심바인데, 아빠를 죽였다고 하는 죄책감, 그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을 때, 그 심바로 하여금 자신 있게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게 만든 원숭이가 있습니다. 그 원숭이가 나무를 가지고 심바를 교훈을 하는 거죠. 막대기로 “나는 과거는 바꿀 수가 없다.” 내가 아빠를 옛날에 죽였다고 하는 그 과거를 바꿀 수가 없다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 심바를 향해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다. You can learn from history.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거나, 혹은 You can run away from history. 과거를 통해서부터 도망가는 선택을 하거나, 배우는 선택을 할 것이냐? learn. 혹은 도망가는 선택을 할 것이냐? run.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막대기로 딱 때리니까, 아야. 그러는 거예요. 그 심바를 막대기로 딱 때리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면 그러면서 막 얘기하다가 또 막대기로 딱 때리려고 하는데, 이번에 두 번째는 심바가 맞았을까요? 안 맞았을까요? 안 맞았어요. 싹 피한 거예요. 이 막대기가 언제 나를 향해서, “또 이 막대기가 나한테 올지 모르겠구나”라고 기대하고 주시하고 있다가, 원숭이가 막대기를 또 한 번 때리려고 하니까, 피한 거죠. 이게 역사예요.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를 우리가 얼마나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우리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거죠. 과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한번 살아온 삶이기 때문에,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게, 과거인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왜 우리가 들여다보는가? 그 과거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교훈을 얻게 만드는 것이 역사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늘 실패하면서 삽니다. 지금까지 어쩌면 우리는 많은 실패들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또 반복하고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배우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역사를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에요.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들에게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죠.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역사를 바라봐야 되는데, 그렇게 배우는 역사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세계 최초로 뭘 해냈다든지, 그런 교만의 재료, 우리 교회가 역사가 100 몇 년이 된다든지, 우리 교회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라든가, 그런 게 역사가 아니에요. 그걸 역사로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망하는 징조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과거는 화려하지만, 그 과거의 감옥에서 갇혀서, 결코 앞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것이죠. 과거는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토트넘의 콘테 감독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감독이 와서 토트넘이 아주 작년 시즌에 8등인가 할 때, 그 팀을 이끌어가지고 4위로 올려내는, 그래서 챔피언스 리그에 올라가게 만드는 그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룬 감독이 콘테 감독이에요. 그런데 잘하는구나 해서, 구단에서 이 감독의 말을 듣고, 선수들을 여러 명 사줬어요. 그런데 누구를 사줬는가? 예전에 역전의 용사들을 다 사준 거예요. 그런데 그 선수가 그 선수가 아니요. 이미 늙었어요. 예전에 승리의 주역이었던 선수가, 지금은 승리의 주역이 아니라, 패배의 주역으로 되고 만 것이죠. 손흥민을 방해하는 선수가 되어 버린 것이죠. 과거의 성공이, 과거에 그 화려했던 것이,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과거에 우리 교회가 한참 부흥하고 발전할 때, 그때 썼던 방법, 그때 썼던 아이디어, 이런 것들이 과거에 성공했다고 해서, 지금 21세기 MZ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에요. 지금은 시대가 바뀐 거예요. 지금은 옛날 방식대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과거만을 반복하고 있으면, 우리는 망해버리게 되는 것이죠. 왜 유럽의 교회는 망해 가는가? 그리고 왜 우리 한국 교회는 망해 가는가? 왜냐하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고, 오히려 그 역사가 발전하는데 오히려 장애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이 과거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우리들에게 미래를 예견하고 또 준비하고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거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로 전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과거의 속박에 묶어버리는 그런 족쇄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게 될 겁니다. 초대교회사를 우리가 배우게 될 텐데, 어쩌면 제가 역사가 재미없었던 이유는 사실은, 과거만을 그대로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 과거를 통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고 한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하나도 안 틀릴 뻔했는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농담입니다.

오늘은 초대교회사 가운데서, 박해사. 교회 박해 로마 교회가 교회를 로마가 교회를 박해했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박해를 엄청나게 받았는데요.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행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걱정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면 너희가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셨는데, 박해를 제일 먼저 누구에게서 받았을까요? 유대인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볼 때 박해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유대인들이 볼 때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성모독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몇 분이에요? 한 분! 그렇죠> 그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로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민족이 유대 민족인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어떤 종교예요? 하나님이 한 분이에요? 몇 분이에요? 세 분이에요. 성부 하나님도 계실 뿐만 아니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세 분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완전히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성 모독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요? 돌로 쳐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종교적인 그런 열정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인 것이죠.

우리가 도착한 때가 언제였냐면, 성지순례 하면서 도착한 때가 언제냐면, 금요일날 도착했어요. 금요일이 무슨 날이죠? 안식일 전날이고, 금요일 밤에 도착했는데, 해가 지면서부터는 무슨 요일이죠? 토요일이니까, 해가 지면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공항에 내려서 베들레헴으로 가는데 차들이 별로 없어요. 왜? 유대인들이 토요일, 안식일날에는 안 움직이니까, 차가 별로 없어서 아주 쌩쌩 달렸는데, 이 토요일, 안식일날, 예루살렘 성전 경내로 들어가게 되면, 어떤 일이 있는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차에다 막 던지는 거예요. 왜 돌아다니냐? 그러면서. 지금도 그렇게 신성모독을 하거나 안식일을 모독하거나 하면,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는데, 이스라엘 법이 그 손해배상을 안 해요. 네가 잘못했다. 왜 안식일날 왜 돌아다니냐? 그러면서, 손해배상도 안 해준다고 그래요. 지금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예 경찰이 막아서 못 들어가게 만든다는데, 아무튼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돌로 쳐 죽이는 겁니다. 왜 돌로 쳐 죽였을까요? 다른 걸로 안 하고 왜 돌로 쳐 죽였을까요? 이번에 가보니까, 유대 땅을 보니까 전부 돌밭이에요. 자갈밭이에요. 전부 온 세상천지가 자갈로 가득 차 있는 동네더라고요. 그냥 돌이 막 널려 있어요. 그래서 그 돌을 가지고, 아 좋구나, 쳐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도 물론 섬기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또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박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마을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이죠. 당시 유대 사회는 마을 공동체, 마을 마을이 하나의 부락을 이루어서, 마치 씨족 사회처럼 그렇게 사는 공동체였던 겁니다. 그 마을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고, 심지어 공동 식사도 이루어지고, 같이 빵을 굽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처럼 그렇게 지내는 마을 공동체에서 살았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마을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되거나, 돌을 던져서 죽게 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신앙생활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크리스천들은 유대 사회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에서 이러한 박해가 아주 강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왜냐? 예루살렘이라든가 갈릴리라든가 하는 그런 도시 지역에서, 크리스천들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골로 가면, 그 마을 공동체가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도시로 가게 되면 어떻게 되죠? 마을 공동체적인 그런 힘이 별로 없어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그런 마을에서는, 도시화가 시작된 겁니다. 헬라 나라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그때부터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살게 되니까, 도시에서는 마을 공동체와 같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수월했던 것이 도시라고 하는 세팅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초창기 크리스천들은 도시 속에서 그나마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죠.

로마 사람들로부터 박해는 어떻게 되었는가? 초창기에 로마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왜 초창기 때는 박해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로마는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어 가지고, 그래서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항상 중립적으로 중재하고, 흩어지게 하고 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크리스천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로마 정부의 역할이었습니다. 초창기 때에는 이 크리스천들에게 대해서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크게 박해를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면, 그 이유가 크리스천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유대 종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가 아주 하나의 종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가보니까, 유대인들의 복식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여기에 이렇게 머리를 꽈가지고, 이렇게 줄로 내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구레나룻 그런 사람도 있고, 복식들이 다 틀리고 모양들이 다 틀린데, 유대 종교도 마치 우리 개신교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순복음 등등 여러 교파가 있듯이, 유대교에도 여러 분파가 있어가지고, 그 수많은 분파가 지금도 존재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종파가 한 가지 종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종파가 있었어요.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종파가 어느 종파죠? 바리새파, 또 사두개파, 또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에세네파, 또 열혈당파, 이런 여러 분파들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크리스천 예수파가 생겨난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바라보면, 예수 믿는 크리스천들은 기독교회예요? 유대교회예요? 유대교로 본 겁니다. 유대교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았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은 이 유대교회의 한 분파라고 생각되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면 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는데, 왜 로마는 유대교를 박해하지 않았을까요? 왜 안 했을까요? 그것은 헤롯 대왕 때문입니다. 헤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헤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입니다. 처음에 언급된 헤롯왕과 두 번째 언급된 헤롯왕과, 세 번째 언급된 헤롯왕과 다 다른 헤롯 왕들이에요. 왜냐하면 바로 왕처럼, 이집트의 왕을 다 바로라고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하게, 예수님 당시 어간에 있었던 왕들은 다 헤롯 왕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헤롯 왕이라고 불렸던 것이죠. 그런데 그 헤롯 안티파터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주전 63년에서부터 43년, 주전 43년까지 유대 지역을 다스린 왕이었는데, 이 헤롯 안티파터(Herod Antipater)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 황제를 도와준 겁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데, 그 점령할 때,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가 어디냐면, 지금의 이집트 카이로 근처를 알렉산드리아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그 로마 정부가 로마 황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러 갈 때에, 유대 사람이었던 이 헤롯 안티파터라고 하는 사람이 도와주었어요. 도와주어서 점령하도록 도와주었으니까, 로마 황제로서는 이 헤롯 안티파터가 은인이겠죠. 그러니까 이 헤롯 안티파터의 공로를 인정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는 자유권을 준다. 자치권을 준다 하면서 유대 종교는 합법 종교가 된 겁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유대교는 합법 종교로 허락을 받았어요. religio licita라고 라틴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래서 합법 종교의 신분을 가지게 된 유대교는 어떤 특권을 누렸는가?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아도 되는 면책 특권을 가지게 되었고, 로마가 징집하는 로마 군대에 차출되어 나갈 필요가 없도록, 또 면제를 받았고, 여러 가지 안식일법을 지켜도 괜찮도록 그렇게 인정을 받았고, 아무튼 헤롯 안티파터 때문에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가 자치권 자율권을 허락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이 유대 종교에 의해서, 유대 종교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기독교는 유대교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다 인정을 해주고 박해를 해주지 않은 것이죠.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헤롯 왕가의 모습입니다. 헤롯 안티파터가 이렇게 로마 황제를 도와준 것이고요. 그 사람이 죽고 나서 헤롯 대왕이 다스리게 됐는데, 헤롯 대왕은 37년서부터 주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한 사람이 헤롯 대왕입니다. 그 헤롯 대왕이 예수님 태어날 때 있었던 왕이고요. 그 헤롯 대왕이 죽고 난 다음에, 세 아들이었던 빌립과 헤롯 안디바와 아켈라오가 각각 나누어서 이스라엘 지방을 통치한 것이죠.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태어났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헤롯대왕이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이집트로 피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했는데, 누가 다스리고 있어요?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아이고 무서워하면서 갈릴리로 이주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그래서 아켈라오는 아주 포악한 왕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막 로마 정부에다가 항의를 했어요. 이 아켈라오 왕을 우리가 못 섬기겠습니다. 힘듭니다. 그러니까 바꿔주세요. 그래가지고 아켈라오는 A.D. 6년에 폐위되고, 그 뒤로는 로마 총독들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을 때는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게 된 거고, 그 이후에는 헤롯 아그리파 1세가 또 다스리게 된 것이고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갈릴리 지방과 베르야 지방의 황제는 헤롯 안디바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 총독은 유대 총독이었고, 헤롯은 갈릴리 왕이었기 때문에 서로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미루다가, 결국은 빌라도가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죠.

아무튼 이렇게 다스리게 된 것이 헤롯가의 가계인데, 그래서 성경에는 헤롯 헤롯. 헤롯 안디바도 헤롯. 헤롯 대왕도 헤롯, 헤롯 안티바도 헤롯이기 때문에, 자꾸 헷갈릴 때가 있는데, 아무튼 이런 헤롯의 지대한 역할 때문에, 유대 종교가 자치권을 얻었고, 그 덕분에 기독교도 박해를 받지 않고 그나마 잘 확대되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로마 정부로부터 시작이 됐어요. (이제 이거 치워져도 됩니다.) 결국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가? “기독교가 유대 종교가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을 로마 사람들도 점점 깨닫게 된 것이죠.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안 하니까, 그것도 문제가 된 것이고요. 그래서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은 반역이라고 간주되어서, 점점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어떤 소문들이 있었을까요? 이런 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자기들끼리 은밀하게 모여서 사람의 살을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시고, 그리고 자기들끼리 음란한 행동을 한다고 하는 그런 가짜 뉴스가 퍼지게 됐습니다. 왜 이런 가짜 뉴스가 퍼지게 됐을까요? 성만찬을 하니까. 이것은 내 피요. 이것은 내 살이라. 성만찬을 했더니, 크리스천들은 살을 먹고 피를 먹는다. 그런 얘기들이 퍼지게 되어서, 그런 편견과 오해 때문에 또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 로마로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한 번 핍박을 하기 시작하니까, 기독교에 대한 그런 가짜 뉴스들이 자꾸만 확대되고 재생산되어서, 크리스천들은 아주 심한 핍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고, 국가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로마의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누구 탓이에요? 기독교인 탓이다. 우리가 지금 로마의 신들을 잘 섬기고 있는데, 로마의 신들을 잘 섬기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가지고, 로마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자기들끼리 어떤 이상한 짓을 해가면서, 나쁜 종교를 퍼뜨리고 있기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해서 결국 이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화재가 일어나고, 비가 많이 내리고 하는 모든 그런 천재지변이 누구 때문이에요? 다 크리스천들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런 가짜 뉴스들이 자꾸 퍼지게 된 것이죠.

특별히 네로 황제 때는 로마의 대화제가 있었습니다. (한번 도표를 한번 보겠습니다.) 네로 시대 때에는 로마의 화재가 일어나서 그 화재가 7주야 동안 일주일 내내 불이 타고, 로마 시내 전체가 불에 타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붙여놓고, 그리고 그 불을 보면서 시를 읊었다고 해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한 비난들이 로마 황제를 향해서 일어나게 되자, 로마 황제를 향해서 비난을 하게 되니까, 로마 황제가 그 자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그 책임을 돌렸을까요? “이건 크리스천들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이 불을 질렀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곤란하면, 누구 핑계를 대요? “다 빨갱이 짓이다. 공산당이 그랬다. 등등 불은 세력이 우리 사회에 침투해서 그랬다.” 해가지고, 자꾸만 정부에 대한 그런 불만을 다른 데로 이끌어버리려고 하는 그런 습성이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당시 네로 황제도 자신들에게 오는 불만을 기독교인들에게 다 돌려버린 것인데, 그래서 로마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넘기고, 그래서 크리스천들을 잡아서, 짐승의 밥으로 주고, 시체를 태워 거리를 밝히기도 하고, 그래서 로마 안에서 엄청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도미티안 황제가 기독교인 때문에 신들이 노했다고 하면서, 모든 이방 조건을 박해하고 동조자도 박해하는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크리스천들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카타콤(catacomb) 지하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이번에 가서 보니까, 중동지방이나 이런 곳이 전부 뭐라 그럴까요? 석회석 같은 걸로 되어 있는데, 굴들이 많이, 자연 동굴들도 굉장히 많더라고요. 자연 동굴도 많고, 그리고 깎아놓은 동굴들도 많고, 그래가지고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지하에 들어가서 들어가 숨어서 살아야만 했던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트라얀 황제 때는 황제 승배의 거부자는 중죄로 다스렸고, 이때 안디옥 주교였던 이그나시우스가 순교를 당했고요. 하드리안 황제 때는 황제 신상 건립을 하고 숭배를 강요했고, 불복했을 때는 처형했고, 기독교인을 보호하기만 해도 동조자로 처형을 하게 되었고,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이 사람은 아주 여러분들 잘 들어보는 이름이죠? 아주 훌륭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전염병 기근 가뭄 등 자연재해가 기독교 때문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던지는 일들까지 있게 된 것이죠.

그다음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라고 하는 황제는 태양신 숭배를 강조하고, 기독교 개종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개종 시 사형한다고 하는 칙령을 선포하기도 했고, 막시미누스는, 암살, 이때는 전에 암살당한 전 황제를 크리스천들이 지지하고 따른다고 하는 그 이유를 들어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테키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로마 전역에서 박해, 로마뿐만 아니라 로마가 다스리고 있는 모든 전역에서 박해를 하게 만들었고요. 이때 가장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가 발생한 것이죠. 발레리아는 예배 모임을 금지하고 부동산과 재산을 수탈해 갔고, 디오클레티안 황제 때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정책을 세웠는데, 그런데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이사 황제의 부인과 신녀들이 크리스천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황제 침실 방화 사건 두 번 후에, 박해를 하기 시작하고, 기독교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이때 또 가장 심한 박해가 있었고, 군인들에게 신앙 버릴 것 강요하고, 처형하거나 성경 불태우거나 예배를 금지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공직 취업을 금지하게 되는, 그래서 한 250여 년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그 박해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303년에, 그러다가 303년이 아니고,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기독교가 313년이죠?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밤에 꿈을 꿨는데, 어떤 그림을 그려진 기를 주면서, “이것을 들고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거다.” 해가지고, 그 깃발을 만들어서 전쟁을 나갔는데,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근데 이 깃발이 뭐냐? 그랬더니, 그게 그리스도의 약자다. 크리스천이다. 그래가지고, “아 그래?” 그러면서 콘스탄티노스가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하고, 갑자기 기독교를 승인하면서 그때부터는 박해가 사라지고 이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일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기독교의 초창기 역사는 엄청난 박해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 박해 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먹고사는 게 힘들었으니까요. 죽임을 당하는 그런 위협 가운데 있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게 된 것이죠. 이것이 짧은 박해면은 견디기가 쉬운 겁니다. 하지만 짧은 박해가 아니 아니라 250년간 긴 기간 동안에 많은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또 결속을 하면서 외부의 공격에 대한 대응들을 해나간 것이죠. 그러면서 신앙을 더 강화하고 외부의 비판에 대한 변증 같은 것들이 발달이 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그 비판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들을 발달시켜 가면서, 논리적으로 무장하는 기회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교회가 거룩성을 유지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실은 박해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갖기 시작하는 거예요. 실제로 자기들이 들었을 때는 기독교인은 아주 비도덕적이고, 그리고 아주 나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면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 크리스천들이 정말 거룩하고 정말 진실하고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개종을 하게 되는 그런 결과도 가져오게 됐고요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 살면서, 약자들을 도와주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많은 힘을 얻었고요. 뿐만 아니라 성경을 성경이 서로 성경을 복사하고 필기하고 해서, 서로 회람해 가면서 이런 박해를 견디어 나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박해가 있었는데,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편하고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면 편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이고, 그리고 이 세상과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박해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로마 시대 때는 황제 숭배 문제 때문에 큰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조선시대 때는 초창기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는 어떤 이유 때문에 또 많은 박해를 받았죠?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효의 종교다라고 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오늘날에는 또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또 박해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이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요즘에는 늘 여러 가지 비난과 여러 가지 손가락질을 많이 당하게 되는 것이죠. “아직도 교회 다녀?” 막 이러면서, 왜 그럴까요? 텔레비전 뉴스를 들으면 안 좋은 얘기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들, 영화를 보면 꼭 나쁜 놈이 기독교인이에요. 영화를 보면 사기꾼이 목사고, 수리남 보면 목사 행사를 하는 사기꾼 마약상 영화를 보면, 아주 성추행 범위 장로님 등등,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너무나도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옛날 초대교회 때 여러 가지 가짜 뉴스들이 많이 펼쳐지게 된 것처럼, 여러 가지 가짜 뉴스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여러 가지 가짜 뉴스들이 1세기 때 많이, 1 2세기 때 많이 있었던 겁니다. 3세기 때까지 4세기 때까지 계속해서 교회에 대한 그런 잘못된 가짜 뉴스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런 가짜 뉴스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 얘기들만 들으면 교회를 안 다니는 게 맞아요. 그렇죠? 목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크리스천들은 다 사기꾼들이고, 크리스천들은 다 이기적인 사람들이고,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말아야 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중고등학교에 가면, 한 반에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한 명 있을락 말락, 그래요. 왜냐? 교회 다닌다고 그러면, 막 비웃고 조롱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교회 다니는 게 쉽지 않은 것이죠.

때로는 억울한 면도 있는 겁니다. 왜 이단들이 한 것도 우리가 한 일이에요. 그렇죠? 신천지가 해도, 또 다른 가짜 그런 사기꾼들이 해도 목사라고 하는 이름을 도용한 가짜 목사가 그냥 사기 행각을 벌이고, 나쁜 짓을 해내는 것이 결국은 그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억울한 면이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에 대한 대응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을 것인가?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되는 것이죠.

먼저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박해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죠? 참고 인내하라 하는 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박해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기뻐하라. 억울해할 게 없어요. 누군가 비난하고 욕하고 온갖 거짓으로 우리를 힘들게 해도, 우리는 오히려 기뻐하라. 왜 기뻐합니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부터 2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박해가 있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부터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순결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또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뱀같이 지혜롭기도 해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박해가 있을 때 걱정할 것도 아니고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담대하게 맞이해야 되는 것이죠.

마태복음 26장인가요? 51절에서부터 52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우리가 무장을 해가지고, 그 사람들과 싸워서, 그 사람들을 제압해 버리고, 우리가 승리하면 기독교가 이기는 것이죠?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칼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핍박하고 우리 교회를 힘들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대적해서 짓밟아버리고, 그리고 우리가 승리해야, 그래야 교회가 교회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를 비난하고 욕하는 글이 어떤 신문에 실렸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래요? 신문사 앞에 가서 데모하고 신문 구독 금지하고, 어떤 회사 사장이 기독교에 대해서 폄훼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면 그 회사 음식 안 사 먹기로 불매운동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꼼짝없이 항복하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두 손 두 발 사들고 우리 교회에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러면 교회가 승리하는 것이 될까요? 잠시 동안에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요. 근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행위예요. 무엇인가? 지금은 우리 기독교가 우리 한국교회 내에 세력이 있으니까, 힘이 좀 있는 것 같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면 우리말대로 되는 것 같고, 우리가 압력을 넣으면 그 압력에 의해서 다 손을 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결국은 무엇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힘이 옳다는 것을 우리 교회가 증명해 주는 거예요. 결국에는 그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또다시 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칼을 들어서 지금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대적해 가지고, 그것을 못하게 막는 게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에요. 초대교회에서 이렇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박해가 있을 때, 항거하지 못한 이유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만일 이때에 민병대를 구성해 가지고, 로마 황제를 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독교가 세력을 쌓아가지고 우리 신앙을 박해하는 로마 정부와 싸우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돼요.

오히려 바울 사도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로마서 13장 1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 정부가 박해하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 사도는 로마 정부가 누구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역자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선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주셨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복종하라고 해요. 물론 이제 우리 신앙적인 면을 건드리는 것까지 복종하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복종이죠. 우리가 세금을 내야 될 것은 세금을 내고, 협력해야 될 것은 협력하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힘을 길러서 저항하는 방법은 좋은 방법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경적인 방법이 아닌 겁니다. 아까 그 로마 황제의 여러 박해들 가운데서 막시미누스라고 하는 그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더 박해했는데 왜 박해했다고 나왔죠? 우리 크리스천들이 전임 황제를, 죽은 죽은 전임 황제들과 결탁되어 있다고 하는 오해 때문에 박해한 거예요. 정치력을 기르고 정치적인 방법을 써서 우리가 더 큰 승리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은 실패할 수 없는 게 믿음이에요.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오히려 로마의 박해가 있었지만, 그래서 카타콤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기독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라졌어요. 로마가 사라진 거예요. 로마 황제가 사라진 것이고, 기독교는 살아남은 겁니다. 믿음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이런 박해가 있을 때, 우리가 힘과 능력을 길러서 그것을 상대방을 제압해 버리고 우리의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박해를 이기는 길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그리고 선을 도모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방법이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이죠. 그 옛날 박해가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고, 소망이 있는 것이고,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잘못된 뉴스들, 가짜 뉴스들 악의적인 소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내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의 역할들을 잘해 나간다고 한다면 결국 그 초창기 때에도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 황실에서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교회를 핍박하던 그 군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들이 생겨났는데, 힘으로 그들을 바꾼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바뀌어 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고, 정치력이나 어떤 파워에 의존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현혹되어서 끌려다니지 말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교훈들을 우리가 얻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