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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롬 9:19-24)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고 구약 성경 가운데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우수하고 뛰어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의롭고 더 참 거룩한 민족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나 다른 민족이나 다 똑같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하게 선택해 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말씀이 신명기 7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신명기 7장 6절에서부터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그들이 숫자가 많아서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우수하고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뛰어나고, 뭔가 장점이 있고, 선택해야 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왜 선택했다고요? 그냥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면, 왜 사랑하는 것이 될까요? 만일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다고 하면 아마 대답을 잘하지 못할 것 같아요. 도대체 너는 무엇이 좋아서 그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너는 도대체 무엇이 좋아서 그 남자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아마 수만 가지 이유를 댈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자기가 대는 이유지, 제삼자가 보면 아무 이해도, 이유도 아닌 것이죠. 그런데 괜히 마음이 가요. 괜히 보고 싶어요. 괜히 끌리는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괜히 사랑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는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5절 말씀 가운데서도 이 말씀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긍휼히 여기셨다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서 어떤 장점이나, 그 사람에게서 어떤 받을 만한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누굽니까? 민족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인데,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왜 선택해 주셨는가? 그것은 이쁘기 때문에 선택하셨죠? 잘생겼어요. 물론. 잘생기고 예쁘시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일방적으로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성경이 아닌 이 세상 모든 곳에서 가르치는 것에서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 다른 사이비 종교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성경적인 기독교 이외에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는 그 원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노력을 많이 해야 그래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는 거예요. 우리가 굿을 많이 하든지, 우리가 무언가 선을 많이 쌓든지, 도를 많이 닦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큼의 어떤 헌신이 있어야,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어야, 그래야 그 신이 우리들에게 반응하는 것, 우리들을 받아주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면, 우리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공로가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다고 하는 이 엄청난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선택하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고맙고 감사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상(像)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기를 바랍니까? 공정과 상식이 있어야 되는 하나님이잖아요? 공평하신 하나님이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공평해야 되는데, 공평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인데요. 이러한 공평에 대한 질문에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 하나님께서 공평하셔야 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선택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고, 우리가 행한 대로 보상을 해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상을 주시기도 하고 벌을 내리시기도 한다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다 자격미달이고, 모두가 다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연약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한번 제가 예로 드렸습니다마는 그것은 마치 고아원에 한 아이를 입양하러 간 부모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고아원에 가서 한 부부가 입양할 아이를 선택하러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둘러보는 가운데, 한 아이가 유독 눈에 들어오고 눈에 밟힙니다. 어떤 아이가 눈에 밟힙니까? 건강한 아이가 아니라, 연약한 아이예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니라, 좀 얼굴도 별로 잘 생기지 못했어요. 뭔가 부족해 보이고 몸도 약해 보이고, 지능도 뛰어나지 않아 보이는 그 아이를 볼 때, 이상하게 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그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누군가 데려갈 수 있겠지만, 저 아이는 아무도 안 데려갈 것 같다. 우리가 데려가야 되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그 아이를 선택했다고 한다면, 다른 아이들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항의할 수 있습니까? 왜 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저 아이보다 더 잘생겼고, 나는 저 아이보다 더 건강하고, 나는 저 아이보다 더 머리가 뛰어나고, 나는 저 아이보다 훨씬 더 우수한데, 왜 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을 항의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향해서 불만을 터뜨릴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닌 것이죠. 우리의 원래 모습은 그냥 이 상태인 것인데, 이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으로 선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율을 가지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한 주인이 길에 나가서 일꾼들을 부르는데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여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가서 또 불러들이고 그다음에 나가서 또 불러들이고, 해가 뉘엿뉘엿 지가는 오후 5시쯤 가서 또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 땅을 주는데,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으니까, 1시간 시급만 주면 돼요. 한 시간 시간만 주고 네가 받을 거 받고 가라 그러면, 아무 말 없이 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에요. 그런데 주인의 마음 가운데 한 시간 시급을 주지 않고, 한 데나리온, 하루치 일당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 사람을 보니 분명히 가족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을 보니, 그 사람이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딸려있는데, 시급 받아가지고 어떻게 사나?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일당을 다 준 거예요.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열두 시간 내내 일한 한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치 일당을 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열두 시간 내내 일했으니까, 나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계산해 보면 12 데나리온은 받아야 됩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더 많이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기대했는데, 그런데 주인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그 모습에 이 사람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린 것이죠. 그런데 불만을 터뜨리는데 자기에게 왜 많이 안 주었느냐를 불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받은 것은 정당하게 받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다 주는 거예요. 그걸 따지는 거죠.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선택받지 못할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선택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로마서에서 읽은 9장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토기장이는 진흙을 사용해서 그 진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그릇을 만들고 작품을 만듭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도예가가 계신 거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계세요?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도예가 선생님 우리 교회에 계신데, 그 도예가 선생님이 진흙을 가지고, 멋진 그릇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런데 장난 삼아서 그냥 허접한 그릇 하나 만들 수도 있고, 아이들이 갖고 놀 만한 것을 만들기도 하는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셨는가? 사람들을 선택하기도 하시고 선택하지 아니하시기도 하셨는데, 누구 마음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하나님은 마치 토기장이와 같고, 우리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진흙과 같은 우리들을 빚어주셔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만들어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사랑을 쏟아부어주실 그 소중한 그릇으로 만들어주실 때,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는,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향해서 질문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자가 지은 자를 향해서 항의할 수 있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온 세상을 만드시고 주무르시고 통치하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립니다. 이 세상은 전부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주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냐면 우리가 듣기에 좀 약간 놀랄 만한 표현까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떨어진다”라고 가르쳐줍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일어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그 참새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심지어 악인이 악을 행하는 것도 우연히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로 왕의 경우인데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내려고 할 때 그것을 막아선 자가 바로 왕이었습니다. 바로 왕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았는데,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면 그렇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분, 바로로 하여금 그렇게 강퍅한 마음을 품게 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 왕이 말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는데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 조사를 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게 왜 잘못인가 오늘은 그걸 설명하는 것은 설명하는 시간이 아니니까, 그걸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겠습니다마는, 아무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은 악한 일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왜 그런데 다윗이 그런 악한 일을 했는가? 사무엘하 24장 1절 말씀에 보면 아주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려고, 진노하시기 위해서 다윗을 격동시켜, 그런 잘못을 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우연히 배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의 손에 팔려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이라고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내용 가운데 이 부분만 살짝 오려가지고, 뉴스에서 방영해 버리면 정말 큰 문제가 나게 될 것입니다. 설교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어느 한 부분만을 이 부분만큼을 딱 오려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고 모두가 다 분노할 만한 그런 말이 될 것입니다. 정말 위험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이 사실은 하나님이 다 통치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라고 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마치 악한 하나님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작가와 같다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요즘 드라마 가운데 어떤 드라마가 제일 재밌습니까? 무엇을 재미있게 보시나요? <더 글로리> 보십니까? 저는 안 봤는데요. 거기에 보면 악한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나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를 미워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배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연기할 뿐이고, 작가가 써준 대로 연기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고, 감독이 시키니까 그것에 따라서 연기를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악한 게 아닌 것이죠.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마치 우리들은 하나님의 꼭두각시처럼 그렇게 움직이는 것 같고,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이 있고,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뉘앙스를 주는 그런 메시지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정말 하나님이 그런 악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주의 깊게 듣지 아니하면 우리가 오해하게 될 텐데요. 사실 이렇게 위험할 수도 있는 것 같은 이 표현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악이 아무리 판을 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악을 물리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결국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할 거라고 하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왕이 이렇게 나쁜 마음을 품었던 이유는 그것은 바로 왕이 연기자들처럼 나는 선한 역할을 맡고 싶은데, 감독이 시켜서 작가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악역을 맡는 배우들처럼, 바로 왕이 자기 의지 없이 그렇게 나쁜 일을 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왕은 왜 나쁜 마음을 품었는가? 악한 일을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수 없이, 내가 하나님이 시키니까 나는 항거할 능력도 없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순간에 바로 왕은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충분히 자유로운 그 상태 가운데서, 악을 선택한 것이 되는 것이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에게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가롯 유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도 있었고 팔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할 수 없이 짓습니까? 여러분들이 원해서 짓습니까? 내가 원해서 짓는 거예요. 내가 안 하면 안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충만한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의 미혹을 받아서 욕심에 이끌리어서 그래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지, 나는 거룩하게 살고 싶지만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일부러 갖다 먹였기 때문에, 일부러 악을 행하게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100% 자유로운 상태 가운데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죠.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똑같은 행위라고 할지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행동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역사해 주시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죠. 하지만 똑같은 것을 우리 인간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내가 100%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일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항의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가롯 유다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가롯 유다의 선택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좋은 그릇으로 만드셨는지 나쁜 그릇으로 만드셨는지, 그걸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선택을 우리가 해나가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좋은 그릇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해놓으셨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하면 아무 물고기가 없는 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물 반 고기 반 하는 곳에 가서 고기를 잡잖아요? 포인트라고 하는 곳에 가서 고기를 잡잖아요? 거기에 분명히 물고기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낚시를 할 수 있는 담대한 기준이 되는 것이고요. 근거가 되는 것이고,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씨를 뿌리면 난다고 하는 그 확신 가운데서 씨를 뿌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토기장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불만을 터뜨릴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감사해야 할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진흙으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멋진 도자기고, 우리 스스로가 멋진 그릇으로 귀한 것으로 그릇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좋은 그릇으로 빚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토기장이오 우리는 하나님의 진흙이라고 하는 사실은 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리는 그런 주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토기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다가 결국은 파국으로 치밀게 되지 않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들의 눈앞에는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엉망칭창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고 악이 승리하는 것만 같고 이 세상은 정말 망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 결국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이신데 그 토기장이가 우리를 빚으시고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도예가들을 보면 열심히 만듭니다. 열심히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화로에 굽고 그것을 꺼냈는데, 꺼내고 난 다음에는 아주 매의 눈으로 그 도자기들을 그릇들을 살펴봅니다. 잘 만드는 그릇인 것 같은데 꽉 깨버려요. 제가 볼 때는 쓸 만한 그릇인데 깨버려요. 왜 깼습니까? 기포가 조그마한 게 하나 붙어있어요. 머리카락 조금만 것 하나 붙어 있대요. 아니 깨지 말고 저를 좀 주지. 주면 우리는 잘 쓸 것 같은데, 그런데 깨뜨려버려 내 이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이런 도자기들을 그냥 깨버리고 버려버려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깨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우리 가운데 흠이 많고 더러움이 많고 온갖 잡티들이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오히려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무런 흠도 없고 문제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깨뜨려버리시고 우리 대신 깨뜨려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생각할 때 날마다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 올려드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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