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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분쟁하면 (막 3:20-3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또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 예수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반응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말씀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또 말씀을 가르치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이 무엇이냐면, 주님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몰려드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고, 너무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몰려와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식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식사할 틈을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나도 주님 앞에 가면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있겠구나. 나도 주님께로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되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몰려들게 된 것입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은 병자가 고침 받는 그런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바라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일이 있었나 보네.” 하면서 그냥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 앞에 간다고 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몰려들었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늘 지켜보아 왔던 예수님의 가족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았던 그 사람들은 어느 날 그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거 미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신들의 지식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이 되어버리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 얄팍한 지식, 그 조그마한 그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그들의 생각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가족들이었다고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 직접 가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도 그들의 마음의 문이 닫혀버려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려고 한 것이죠.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사탄의 왕, 귀신의 왕이라고 하는 그런 존재를 바알세불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그냥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쫓아낸 거라고 비방하기 시작한 거죠.

이것이 아주 놀라운 일인데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몇 명입니까? 한 분이셔요. 똑같은 예수님, 똑같은 그 주님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데, 그 똑같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반응이 달랐다고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나와 “내 병도 좀 고쳐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주님을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그런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우리들에게 믿음의 문을 좀 열어주십시오.” 예수님이 있으면 뭐 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뭐 합니까?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바라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고 한다면, 아무리 황금 보석이 있고 아무리 산삼이 있어도, 매번 등산하는 그 길에 산삼이 떡 하니 놓여 있어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길거리에 황금 보석이 떨어져 있어도, 바라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만유의 주 만류의 왕 우리 주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문이 닫혀버려 있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 저희들에게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는데, 그 똑같은 예배 시간에 똑같은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이 닫혀버려서 전혀 반응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내 마음이 완약해져 있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은 “주님, 저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눈을 뜨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어떻게 사탄의 나라가 설 수 있겠느냐? 서로 분쟁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 나라가 세워질 수 있겠느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죠. 서로 싸우면 세워질 수 없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문명사를 연구한 역사 학자인데, 그 사람의 결론이 무엇이냐면, 위대한 문명이 왜 무너졌는가? 역사상에 등장한 그 위대한 문명은 왜 무너졌는가? 외부의 침공으로 인해서 무너지기 전에, 이미 안에서부터 스스로 서로 무너지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일부 세력에 의해서 정복당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학자는 세계의 모든 문명들을 연구를 했습니다. 온 세상에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찬란한 문명들, 그런 문명들이 어떻게 흥왕 했다가 그랬다가 나중에 어떻게 망하는가? 그것을 연구한 다음에 이 학자가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문명을 왜 망하는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안에서부터 서로가 서로를 싸우고 다투고, 서로를 무너뜨려서, 그래서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서로 싸우게 된다고 한다면, 스스로 분쟁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나라가 설 수 있겠는가? 심지어 사탄의 나라라도 서로 싸운다고 하면 설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같은 편이 서로 싸우는 그런 공동체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5장 14절 15절의 말씀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어떻게 될까? “멸망할까 하노라.” 이 원리는 그 어떤 공동체에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되는가? 어느 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멸망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원리인 것이죠.

가정이라고 하는 아주 아주 작은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며, 서로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다고 하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운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제대로 된 가정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평탄대로만 열리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우리의 인생의 길은 온갖 어려운 과정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험난한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어떤 때는 그게 재정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게 스트레스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게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위험들이 우리들의 문 앞에 우리들의 삶의 여정 가운데 놓여 있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그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원망하고 비방하고, 서로 남 탓을 하면서 싸우게 된다면 그 가정은 망하는 것이죠.

오히려 그 순간에 힘들고 어려운 그 순간에, 같이 손을 붙잡고 힘든 그 남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면, 그 힘들고 어려운 난관을 같이 극복해 나간다고 하면, 그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겠지만,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 비난하고 욕하다고 한다면, 결국 그 가정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화목하고 협력해도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인데, 만일 싸우고 다툰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도 서로 성도들이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고 이해하고 협력한다면, 그 교회는 점점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갈 수가 있겠고, 이 세상에서 놀라운 영향력을 세상 모두에게 보여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나와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설까? 설칠까부터 시작해서, 나와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고, 요리하는 방식이 다르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내 마음 가운데 시기와 질투의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 교회 공동체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이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만 당하고 짓밟히게 되어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그런 잘못된 길로 나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런 유명한 교회들, 전통을 자랑하며 100년 동안 넘는 그 엄청난 교회가 있었는데, 그런 교회들이 서로가 싸우고 다투며, 아비귀환 가운데 있다가 결국 교회가 망해져 버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거죠.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비방하고 싸우는데 싸우는 이유가 뭘까요? 교회 내에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죠. 가만 놔두면 망할 것 같고, 가만 놔두면 무엇인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결과도 분명합니다.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죽이게 되어 있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인데, 그런데 결과는 산산조각으로 찢어져 버리는,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가정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은데, 결과적으로는 더 산산조각을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모든 공동체에서 사실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있는 그 어떤 공동체도 함께 협력하고 힘을 합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준다고 한다면, 함께 성공할 것이지만, 성장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는다고 한다면 서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친구로 여기고 같이 살아나가야 되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함께 선을 행하자고 하면,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악을 행할 때는 어쩜 그렇게 마음이 잘 맞는지 몰라요. 마가복음 3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완전 상극인 집단입니다. 헤롯 당파는 당시 로마 정부에 협력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새파는 그렇지 않고 믿음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니까, 어쩌면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파와 헤롯 당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으로 치면 보수 정당인 국민의 힘당이나, 아주 진보 정당인 정의당과 같이 그렇게 서로 색깔이 맞지 않는 정당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죽이자고 하는 데는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이죠. 기름과 물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인데, 악한 일을 하겠다고 하면, 두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는 것인데, 아주 마음이 잘 통한다고 하는 것이, 선을 행하자고 한다면 서로 맞지 않고 결국 다투다가 세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기도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다투는 그런 마음을 갖기보다는,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며 또 부족한 것이 있으면, 비난하거나, 연약한 것이 있으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고 돌보아서 함께 가정을 세우고, 함께 교회를 세우고 함께 나라를 세우고 함께 같은 공동체를 세우고, 회사를 세우고 모든 것들을 함께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을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이 사탄과 더불어 싸운다고 하면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망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쫓아낸다고 하는 것을 “아니다. 그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이 말씀을 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서기관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악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서기관들이 행한 일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죠? 예수님과 싸우려고 드는 겁니다. 예수님과 싸워서, 그리고 적대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그 서기관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거죠. 지금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이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나왔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면서, 서로 다투고 저항하게 될 때,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쟁하다가 망하게 된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애완동물을 치료하기 위해서, 수의사가 수술을 한다거나 아니면 치료를 해주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애완동물은 수의사가 자기를 고치려고 하는 줄 몰라서 물어버려요. 아프니까 물어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수의사가 그 애완동물의 발을 만지는 이유는 상처를 만지는 이유는 죽이려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고쳐주기 위해서 만지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애완동물은 수의사를 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싸우려고 드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서기관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메시아로서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놀라운 역사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만일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하면, 그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고 병든 자가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면 고침을 받게 될 것이고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해결되게 될 텐데, 그 예수님 앞에 나의 영혼을 맡기고 주님 앞에 내 삶을 맡긴다면 놀라운 결과가 있을 텐데, 지금 예수님을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려고 하는 이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죠.

예수님을 대적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한다면, 그의 삶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텐데, 적대적으로 여기고 스스로 분쟁한다면, 결국은 망하는 결과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분쟁하는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누구로 간주하고 계십니까? 싸워서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계십니까? 힘을 합쳐서 함께 협력해야 될 동지로 간주하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가족을 적으로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해야 될 성도를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내 자신이 외로운 섬에 혼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비난하고 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머지않은 시간에 내 자신이 광야 한복판에, 사막 한복판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밀어내고 그들을 내 마음의 자리에서부터 쫓아내 버리고,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 싸우기 시작하면, 그런 결과의 가장 큰 피해는 누가 당하느냐? 누가 당해요? 내가 당하는 외로운 무인도에 혼자 남아 있는 모습이 되게 될 겁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외롭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내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의 물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주변이 점점점 메말라져 가고 광야로 바뀌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사랑의 물을 퍼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을 심어주어야 될 텐데, 그래서 광야를 옥토로 바꾸고, 기름진 땅으로 바꾸고 사랑을 보여주어서 내 주변을 푸른 풀밭으로 바꾸어야 될 텐데, 자꾸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적으로 간주하고 모든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부터 밀어내기 시작하면,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그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 분쟁할 것이 아니라, 친구로 만들고, 사랑을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적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로 받아줘야 돼요. 축구 선수가 같이 축구를 한다고 하면, 그 가운데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선수가 mvp가 되겠지만, 그 선수가 나의 적이 아니라, 함께 뛰어야 될 동료라고 생각해야 그 경기에서 이기는 거예요. 같이 협력해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적으로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 팀은 망하게 되는 것이고 더 이상 전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심어놓는 악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요. 나를 향해서 악한 일을 하는 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그 적을 어떻게 하면 무찌를까? 어떻게 하면 무너뜨릴까? 생각하는 것이죠. 같이 신앙생활하는데, 우리가 함께 손 붙들고 어려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적으로 생각하면 그 교회는 망하는 것이죠.

그런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누굽니까? 사울 왕이죠. 사울 왕은 다윗을 볼 때,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적으로 생각했어요. 골리앗을 무찌르고, 그 엄청난 전과를 만들어냈던 그 다윗이 돌아오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기뻐하며 다윗을 영접하고, 우리 함께 친구로서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가자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날부터 다윗을 적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다윗을 적으로 죽일까? 마음에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 다윗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사탄의 영에 사로잡힌 사울 왕은 결국 쓸쓸하게 블레셋과의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싹이 트고 있다고 한다면, 아니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사람을 향한 미움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망치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빨리 그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을 볼 때 적이 아니라 친구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의 안타까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말을 할 때, 그것은 왜 하겠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그 말을 듣는 자녀들은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우리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잘 정착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우리 자녀들이 주일 학교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잘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마음 어떤 마음을 심어주냐면, “우리 교회 학생들은 나를 싫어해. 나를 미워해.” 그런 마음을 심어줘요. “우리 전도사님은 나한테는 불친절해. 나의 적이야. 저기 가면 사자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자 소굴 같아.” 그런 적으로 생각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우리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만드는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런가 보다” 하고 포기할 게 아니고, 그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그게 아니라 “적이 아니라 친구란다. 적이 아니라 사랑해야 될 사람이란다. 네가 함께 마음의 문을 연다고 한다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를 안내해줘야 되는 것이죠. 사랑의 손길로 표현해 줘야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교회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그 어느 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가 다 적이라고 생각하고 싸우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사랑의 물을 주기를 중단하게 된다고 하면, 결국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 우리는 외롭고 쓸쓸하게 멸망의 길로만 갈 수밖에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와 스타일이 다르고, 내 성향과 다르면, 미워하는 마음이 들려고 할 때,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생각이기에 “주님, 나와 다른 생각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내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 사람들을 내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28절 29절의 말씀에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을 보면서도, 진리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고 한다면, 구제불능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녀로 간주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마치 애완동물과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주기를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우리는 대적하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모른 척하고,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물어버리는 것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웬만한 수의사 웬만한 의사라고 한다면 “내가 이따위 이 환자 치료 안 해.” 요즘 뉴스 보니까 환자가 의사 치료받다가, 의사를 막 때리고 그러는데, 의사가 그러면 치료해 주겠어요? 치료 안 해줄 것 같아요. 수의사가 물리면 치료해줄 것 같아요? 이러는 거, 안 치료해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물려도,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포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내어주셨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영원한 죄에서부터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마치 애완동물처럼 애완동물이 수의사를 물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적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도망쳐도 끝까지 쫓아가서 하나님의 품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안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주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고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사랑의 손길로 내어주고 따뜻한 사랑의 물을 뿌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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