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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의 위협 (출 5:17-23)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가 있는데요. 미국이라고 하는 그 큰 대륙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있습니다. 류현진, 김광현이라고 하는 두 뛰어난 투수가 있고요. 또 타자로는 추신수, 최지만이라고 하는 그런 선수들이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그래 알고 계시는군요. 수준이 높습니다. 그 가운데 최지만이라고 하는 선수가 있는데요. 탬파 베이에서, 야구 선수라고 한다면 4번 타자가 제일 잘 치는 선수일 텐데, 탐파베이의 4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는 최지만 선수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경기가 시작되는 것이 늦어지고, 그래서 다들 너무나도 괴로워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최지만 선수는 스위치 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늘 전에는 좌타석에서만 나갔던 선수인데, 그 길어진 휴지 기간을 이용해서 연습을 더 많이 해가지고, 이번에는 우타석에서도 치는 그러한 스위치 타자로 변신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늦어진 그 개막이 있고 난 뒤에, 한 세 번째 게임에서 놀랍게도 오른쪽 타석에서 들어서 가지고 홈런을 때려버린 거죠. 전에는 한 번도 오른쪽 타석에서 경기에 서지 않았었는데, 그 휴지 기간을 이용해서 연습을 했고, 변신을 꾀해서 그래서 오른쪽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는 엄청난 일을 이뤄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최지만 선수가 대단한 선수구나. 남들은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불평만 했을 텐데, 그것을 활용해가지고, 그 기간을 활용해서 변신을 꾀하는 그 모습을 보고 참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가 됐습니다. 한 번 홈런을 때린 이후로 그다음부터는 안타를 치지 못하는 겁니다. 오른쪽 타석에 들어섰지만 볼을 맞추지 못하고, 그리고 왼쪽 타석에 들어가서도 볼을 맞추지 못하는 거예요. 뭔가 늘 하던 방식대로 하는 그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고 뭔가 변신을 꾀하려고 해서, 어쩌다가 홈런을 한 번 치기는 했지만,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감을 잃어버려가지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아무 타석에서도 안타를 치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져버리게 된 겁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최지만 선수는 다시는 오른쪽 타석에서 지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리고, 옛날로 좌타석에만 서는 선수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어쩌면 단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변화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무언가를 바꾸어 보려고 하는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변화를 추구해가지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가만 내버려 두었던 것이 더 좋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하는 그런 말처럼, 그냥 내버려 두면, 그런대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했었는데, 더 좋게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오히려 더 큰 난관에 부딪히고 슬럼프에 빠져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야구 선수들을 보면 그 타자들의 폼이 전부 다 제각각입니다. 어떤 정확한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칠 수 있는 그런 폼이 있는 게 아니라, 선수들마다 제각각 자신들의 모습을 가지고 치는데요. 타격 코치가 와서 그 선수들을 향해서 코치를 하기 시작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슬럼프에 빠져버립니다. 네가 조금만 방망이를 좀 더 짧게 잡고 친다고 하면, 아니 조금만 길게 잡고 친다고 하면, 아니면 좀 발만 발 모양만 조금만 바꾸고, 래그킥만 조금만 수정만 하면, 더 큰 홈런이 나올 것 같다고 설명을 해주고, 그것을 연습하면 그래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한데,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에 그저 이전의 타격 감각도 다 잊어버리고, 결국 엉망이 되고 슬럼프에 빠지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래간만에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까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보내주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울부짖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서 가나안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기쁨의 소식을 들려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너무나도 기뻤고 너무나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 앞에 나아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민족을 보내어 주십시오. 하지만 바로 왕은 그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말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대응해준 것이 아니라, 바로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더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하지 않고, 그냥 너무 느슨하게 풀어주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하고, 이제부터는 공포 정치로 들어가는 겁니다. 더 억압을 하고 더 힘들게 만들고,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어버려서, 다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게 이 애굽 왕 바로가 그런 정책을 시도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벽돌을 구울 때 재료를 주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재료를 주지 않으면서도 똑같이 만들어내라고 하고, 이전처럼 똑같은 그런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되면, 그러면 아주 억압을 해버려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들은 더 큰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됐습니다.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된 셈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 데에는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땅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그 여정 가운데 여러 장애물들이 늘 많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한 방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매 단계 단계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고, 그 어려움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그런 장애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장애물들을 만났는데,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야만 하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고 나서,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이후에라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냥 이스라엘 민족을 그대로 옮겨다가 가나안 땅에다 넣어 놓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을 하는데,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원하는 소원대로 그냥 아무런 문제 없이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만든다면 얼마나 참 좋겠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만나는 모든 일들은 다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조금 있으면 결혼 소식이 곧 들릴 텐데요. 한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어서 사는 것, 결혼만 시키면 이제 모든 시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운 문제가 없이, 순풍에 돗 단 듯, 행복하게 그런 결혼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요. 동화책에 보면 “왕자님과 신데렐라가 만나서 그리고 결혼하고,” 한 줄입니다.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 한 줄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면 그 후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이죠.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이죠.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게 되면, 이 아기가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아프거나 감기 걸릴 일 한 번도 없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다치는 일도 한 번도 없고, 늘 공부를 하면 1등만 하고 부모의 속을 한 번도 안 썩이는, 그런 잘 자라는 아이로 커졌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돼요.

신앙생활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신앙생활하는데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내가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응답이 이루어지고 예배를 드리면, 항상 기쁨이 넘치고, 설교를 들으면 항상 은혜가 넘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세워지면 그 교회가 계속해서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고,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속해서 부흥해 나가고 발전해서, 사람들이 자꾸만 모여들고 정말 아름답고 멋진 교회로 만들어지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는 그 길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아픔들이 놓여 있는 것이죠.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냐면, 이런 일들이 있을 때 그냥 한 사람만 바꿔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을 소망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구 경기를 하는데 어느 팀이 늘 지기만 하면, 요즘은 어느 팀이 꼴등인가요? 한화가 계속 꼴등인가요? 아무튼 어느 팀이 꼴등이 된다고 한다면, 전혀 이기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들의 생각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감독을 바꿔야 되겠다. 그래서 감독을 경질하면, 그때부터 다 이기나요? 아니요.

우리는 한 방에 해결될 것을 기대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속 썩이는 아이들을 보면, 이 아이를 단기 선교에 보내면, 이 아이의 문제가 해결이 될까? 아니면 수양회에 보내서 정말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은혜 한 번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까? 그래서 한 큐에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하고 싶은 열망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그냥 배우자와 이혼해버리고 딴 사람과 재혼하면 그러면 행복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도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 큐에 해결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신앙생활하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해보고 싶으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좀 도와주셔서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그때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이게 아닌가? 이게 잘못된 것인가? 우리들은 이런 질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들도 역시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민족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해서 주셨던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그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될 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무엇이냐면, 더 좋은 결과가 아니라 더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온 거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고 한다면, 그나마 지낼 만한데 벌집을 건드린 셈이 되었고, 긁어 부스럼이 되어 버린 경험이고, 또 혹을 떼려 갔다가 혹 하나 더 붙여버린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였습니다.

왜 건들었느냐? 왜 우리로 하여금 미운 칼이 바로의 눈에 미운 사람들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왜 우리를 죽게 만드느냐?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냈느냐고 그렇게 항의하는 것이죠. 원망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반응은 결코 옳은 반응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억압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예요. 바로에게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고 있는 것은 정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우리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엉뚱한데 화풀이하는 그런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 자녀들을 보면 그렇잖아요. 자녀들이 누구를 원망하나요? 꼭 부모님을 원망해요. 내가 시험공부를 잘 못해놓고, 그래서 점수가 잘 안 나와도, 엄마 때문에, 내가 공부 못해서, 이렇게 점수가 좋게 안 나왔다고. 엄마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내가 늘 그것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그게 우리 인생의, 죄성을 가진 우리들의 모습이죠. 늘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욕하고 원망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는 것이죠. 설교를 좀 망치면 제 아내를 향해서 화풀이를 합니다. 당신이 뭐라고 하니까, 내가 설교를 못 한다고.

두 번째로 모든 변화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 잘못인 것이죠. 변화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익숙한 것에서부터 벗어나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그런 변화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사실 불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졌던 그 삶에서부터 변화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좋은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변화 자체가 좋은 면보다도 좋지 못한 면을 먼저 겪게 되는 것이고, 불편한 것을 먼저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아, 이게 아닌가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때, “아,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변화와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만일 변화를 통해서 무엇인가 난관을 만나게 된다고 하면, “아, 내가 잘못 판단했나?” 내가 신앙생활을 여기서 하고 싶었는데, 내가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고 싶었는데, 만일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서 내 판단이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올 게 왔구나.” 고난이 닥친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옳게 왔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죠.

집에서만 있던 어린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엄마와 늘 함께 있던 그 꼬마 아이를 이제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려고 할 때, 어린아이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죠. 처음 겪게 되는 상황 가운데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울면서, 엄마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들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유치원에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길 가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통과해서, 불안하지만 엄마의 손을 놓아야 되는 그 단계를 지나야 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처음 겪는 그 상황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해 나가면서 적응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 되겠구나” 하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로 하여금 어린이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같이 가서 엄마와 함께 있는다든지, 그 아이와 함께 같이 이야기도 하고, 마음을 안심시켜가면서 그 어린이집에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을 전수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잘 갖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려고 하는데, 우리들의 생각에 어떤 생각을 많이 하냐면, 그냥 주일 학교에 보내버리기만 하면, “이 아이가 잘 적응하겠지” 우리 중고등부에만 보내버리기만 하면, “거기서 잘 적응하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처음 가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나를 조롱하는 것 같고,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선생님은 낯선 선생님이고, 그래서 내가 너무나도 두려워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서 온갖 핑계를 다 됩니다. “우리 주일 학교는 재미가 없어요. 선생님이 무서워요. 친구들이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면, “아 이 교회는 아닌가 보다. 이 주일학교는 우리 아이랑 안 맞는가 보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렇게 할 게 아니잖아요?

이 아이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것이죠. “선생님이 너를 참 좋아하는 것 같구나. 그 주일 학교에 가니까 맛있는 것도 주는구나. 친구들이 많이 있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네.” 이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그 아이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장애물을 건너뛰고, 그래서 그 주일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 아닌가베.” 조그만 어려움 조그만 장애, 조그마한 나하고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아 이건 아닌가 보구나.” 그냥 포기해버려요.

오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는 모습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 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고, 그 엄청난 자유가 있는 땅으로 가는 그 길에, 이스라엘 민족이 제일 처음 만난 암초가 무엇이냐면, 바로 왕의 포악한 모습이 그 포악한 모습을 만났을 때, “아니구나. 그냥 종으로 살아야 되겠네. 괜히 건들었다. 잘못했다. 그냥 예전이 좋았다.”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민족은 바로 왕의 위협 앞에서 기가 죽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은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왕의 지배 하에 있다가, 이제는 자유인이 되어서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지배 가운데 살고 있다가, 사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다 도와줄까요? 사탄도 “그래. 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가라.” 하면서 사탄이 우리들에게 협조해 줄까요? 그게 아니라, 바로 왕이 오히려 더 강하게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하고 압제했던 것처럼, 공포 정치를 했던 것처럼,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러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거예요. 교회에 정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거예요. 내 눈에 들지 않는 이상한 것들을 보게 만들고, 마음이 불편한 것들을 목도하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들을 자극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아, 아닌가배” 하면서, 포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옳게 왔구나.” 고난과 아픔과 장애물과 여러 가지 시련들이 앞에 있다고 한다면, “올 게 왔구나.” 생각하며, 믿음으로 극복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길 가운데 고난은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온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고 하면, “올 게 왔구나” 생각하고, 그리고 고통을 당한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한다고 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바로 왕의 장애가 너무나도 크고,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하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고, 해방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길 수밖에 없는 그 전쟁 가운데 우리를 동참시키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어쩌다가 망하게 되어 있고, 어쩌다가 믿음의 길을 가다가 죽을 수도 있는, 패할 수도 있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차피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망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만드셨습니까?”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그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될 것 같은데, 안 도와주시는데, 도대체 이게 어쩐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매어 달렸어요. 이게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죠.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는 것이 특권이죠.

요한일서 5장 14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제삼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슬람교에서는요.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는데, 알라 이슬람교에 대해서 요즘 제가 좀 공부를 좀 하고 있는데, 알라신은 어떤 신이냐면 전능하신 신이고,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고, 주권적인 신이고, 아무튼 그런 신이에요. 신인데 기독교의 신과 차이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그냥 주인이신 하나님이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알라 신은. 사람은 누구냐? 종이지, 자녀가 아니에요. 이슬람교에서.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신 그 주기도문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그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을 누구로 보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나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아버지는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에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지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여러 가지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그냥 허용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장애물을 통해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망가뜨려버리고, 그래서 죽여버리고 아무 숨도 못 쉬게 만들기 위해서 목을 졸라 매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나가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우리 심혜경 전사님이 홍수가 나가지고 차가 빠졌는데요. 비가 많이 내리는 그날, 저는 사무실에 있는데 전도사님한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목사님, 큰일 났어요. 제 차가 빠졌어요.” 그래서 막 펑펑 울면서 막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아, 그냥 어떡하냐”라고 그런데 전 아무것도 못해줬어요. 알았다고 또 저기 저한테만 보고하고 그냥 빨리 끊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 듣고 보니까, 우리 전도사님 아버지가 “얘야, 이번에 차 빠졌다며?” 하면서 뭘 줬대요. 딸의 마음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가진 것, 자기가 쓰는 것보다는 딸에게 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우리 교역자들은 옆에서 놀리기만 했는데, 근데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쉽고 편안한 길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한 큐에 끝나버리는 적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바른 길로 간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과, 오히려 더 큰 재난이 그 앞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주저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 그 아버지를 바라보며 주님 앞에 기도하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그런 결단들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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