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와 순교적 신앙

1. 종말을 사모하는 신앙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맨 마지막 장인 22장은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어서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다스려 달라는 간청의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일맥상통하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세가 많으신 성도들 중에는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빨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천국으로 가고 싶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좋은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3-4에 보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사라지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서 속히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가 예전에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천국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럽기에, 어서 빨리 내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복음성가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께서 만든 복음성가도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한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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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저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바른 성도의 모습일까?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 “어서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소망하며 사는 것이 과연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망 중의 하나가 순교였다. 초대교회 교부 중에는 늘 “하나님, 나를 순교의 제물로 삼아주옵소서. 빨리 순교시켜주옵소서.” 기도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증오하면서,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건전한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이러한 종류의 생각이 결코 건전한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엘리야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 “하나님,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 더 이상 이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지금 당장 제 목숨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러한 엘리야에 대하여 하나님은 순교를 사모하는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위로하시고 다시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엘리야 선지자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7천 명의 의인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만드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셨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옷과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세 분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천국의 모습을 맛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저 산 밑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막 셋을 지어 그냥 거기서 살고 싶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면서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만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셨다.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다. 지긋지긋한 이 세상을 당장 끝장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때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오.” 마지막 그 영광의 나라가 언제 올지는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결코 무의미한 곳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이다.

종종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고,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로 좋다고 생각하곤 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놓고 가게 되는 것이니까, 사라져버릴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특별히 장례식장에서 설교를 듣다 보면 더욱 그렇다. 죽음이 사실은 천국을 향하는 문이고 저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설교를 듣다 보면, “왜 우리가 살아있지?”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거의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갈망하는 불교적인 관점일 뿐이다. 사도 요한이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빨리 순교하여 저 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엘리야의 간구와 사도 요한의 간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는 기도인 반면, 요한의 기도는 이 세상을 피하여 도망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3. 세속 세계에서 신실하게 살았던 사람들

다니엘서 3장은 바벨론에 포로로 와서 살아가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바벨론이란 나라에서 일하면서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을 충실하게 섬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 가운데 있지 않았다. 이방 신을 섬기는 보디발의 집에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뛰쳐나가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최선을 다해 보디발을 섬겼다. 그래서 결국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정도까지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는 골로새서 3:22-24의 정신 때문이다. 에베소서 6:5-8에서도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최선을 다해 느부갓네살 왕을 섬길 수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신앙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론이란 우상숭배의 왕국에서 살아갈 때, 신앙적인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그 금 신상 앞에서 엎드려 절하라는 명령을 발하였다. 만일 그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맹렬히 타는 용광로의 풀무불에 던져넣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러한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면서 좋은 말로 할 때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할 것을 강요하였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어기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그 말이 말뿐인 엄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사느냐 죽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 순간에 순교를 불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라고 말씀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금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그저 순교를 막연히 동경하는 그런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소망하는 그런 도피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한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들이라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는 그 어떤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다. 느부갓네살은 몸밖에 멸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데(잠 1:7), 그들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 죽음에서 건져내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대답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순교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려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간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하면 들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렘 33:3; 마 7:7-8). 더 나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3:4).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붙들어주셔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91: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따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뜻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떤 때에는 기적적으로 건져주시기도 하시지만, 어떤 때에는 건져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 모든 선택권은 하나님께 달려있을 뿐이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지만, 자신들을 건져주실지 건져주지 않으실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 그래서 설사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금 신상에 절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순교자적 결단이 보이다. 우리의 목표는 목숨을 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신다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성도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였다(롬 14:8).

죽어도 괜찮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이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8-39).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전능하시며,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살려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부불 속에서 건져주셨다. 그들을 풀무불에 던졌던 사람들마저도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맹렬한 불이었다. 그러니 그 풀무불은 순식간에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강력한 불이었다. 하지만 맹렬히 타는 불 속에서도 전혀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을리지도 아니하였고 불에 탄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간증들을 종종 듣다. 엄청난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내신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다.

5. 오늘날에도 순교적 신앙이 요구된다

하지만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길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 밥이 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선교를 위해 길을 나섰던 선교사들은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의 피를 수없이 많이 뿌려왔다. 우리나라에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여울목에서 목을 베이고 말았다. 복음을 받아들였던 우리의 선조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기도 했으며, 6·25 동란 중에는 믿음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믿음을 저버리기도 했고, 타협하기도 했다. 마치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져 결실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했던 순교자들도 있었다.

죽음마저도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순교를 불사했던 신앙의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순교자들의 비석을 꾸미며 외식하자는 말이 아니다(마 23:29-30).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려는 다짐해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10:21-22; 24:13).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야 생명의 관을 얻을 수 있다(계 2:10).

오늘날에는 순교자적인 신앙까지는 요구되지 않을까?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믿어야 할 상황까지는 오지 않는 안전한 시기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교자적인 결단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교묘하게 우리들의 목을 졸고 있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 절을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위협한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라는 우상이 시키는 대로 굴복하곤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잘못된 생각 앞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이미 돈이라는 금 신상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처럼, 돈은 우리로 하여금 무슨 악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식으로 돈의 우상 앞에 절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돈의 우상 앞에 엎드려야만 살 수 있을 것처럼 느끼곤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협을 느끼곤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순교자적 마음으로 담대하게 대답해야 한다. “나는 돈이라는 우상 앞에 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살지는 않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따라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주님의 방법을 따라갈 때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여 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악한 방법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탐욕적으로 살면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이 세상의 방법이라는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서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 선을 베풀 것이고, 인자와 긍휼을 베풀며 살겠다.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순교자적 신앙은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하라고 주신 사명을 망각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속 깊이 감추어두는 것과 같다. 순교자적 신앙의 핵심은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순교자적 믿음은 그러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6.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의 상황은 지금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상황과 비슷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빌 3:20),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이중국적의 상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in the world)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not of the world). 우리의 모든 영역이 이 세상의 법칙에 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더 높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불편하여 그저 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고 저 천국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사명이다.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들은 불신자이며 우상 숭배자들이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상종하지 말고 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들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을 섬기며 살기도 해야 한다. 나아만 장군을 섬겼던 소녀처럼, 보디발을 섬겼고 애굽 왕을 섬겼던 요셉처럼, 느부갓네살 왕을 섬겼던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들에게 최선의 봉사를 해야 한다. 마치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세속 정권이며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정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믿음으로 순복하여야 한다(롬 13:1).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친절하게 대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5:46-47). 우리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마 5:44),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같이 칼을 빼 들고 덤비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26:52).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한다(고전 5:9-10).

종종 우리 가운데에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러 이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나 악을 행하거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향해서 공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전도한다는 미명 하에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공격해오면 순교자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감옥에 가거나 순교하더라도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성경을 제대로 잘 읽지 못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마 10:16). 일부러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를 당할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구원하시겠다는 뜻이지, 일부터 우리가 위험의 상황 속으로 뛰어 들어가도 구해주시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성전 위에서 뛰어내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지를 테스트하지 않으셨다(마 4:6-7).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거부한 것이지, 일부러 왕을 대적하면서 위험을 자초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순교가 아니라 개죽음일 뿐이다.

성경은 거룩한 것을 존중하지 않는 개에게 마구 던져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돼지 앞에 마구 던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었으니까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격할 것이다. 발로 밟고 돌이켜 우리를 찢어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런 공격을 당할 때, 내가 주를 위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할 게 아니다. 주를 위해 순교를 당하게 될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했던 결과일 뿐이다.

팀 켈러 목사는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바위를 폭파시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바위 주변에서 마구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는 실수를 한다고 한다. 그래봤자 바위를 그슬리기만 할 뿐 바위를 쪼갤 수 없다. 바위를 폭파시키려면 바위를 드릴로 뚫어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폭파시켜야 한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바위 곁에서 폭파하면서 전혀 바위를 깨트리지 못한 채, 우리만 다치곤 한다. 그리고선 순교자적 신앙을 운운한다. 그것은 순교자적 신앙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정말 참된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하거나 순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이 어리석게 행동하고 잘못된 행동을 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순교를 당한다면, 그것은 칭찬을 받을 게 전혀 없다(벧전 2:19-20).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을 부서뜨리겠다고 달려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이스라엘에서라면 우상을 부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바벨론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 아니다. 물론 이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옳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시민법으로서 우상을 제거하라는 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우상을 부서뜨리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란 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바벨론이란 나라의 관리로서 바벨론이란 왕국에 충성하며 살았다. 여기서 순교자적 결기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웃으로 함께 살았다. 바벨론 나라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은 선택할 때가 다가온다. 금 신상에 절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얼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들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에 다니엘은 단호하게 믿음을 지켰다. 그래서 죽을 것 같았는데, 살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도 순교자적 결기를 보여주면, 반드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순교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는 게 사는 길임을 보여준다. 만일 이때 순교자적 믿음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살았어도 죽은 셈이다. 목숨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결국 영혼을 잃어버린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우리는 주를 위해 살 때 사는 것이다. 죽으나 사나 주를 위해 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왜 우리는 순교자적 신앙을 가져야 할까? 첫째, 그것은 먼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어가는 모습을 저 멀리서 방관만 하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선 우리를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다.

둘째, 그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하셨다(요 12:25).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들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교묘해진 이 시대에,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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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마음의 문

믿음은 모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문(gate)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그 약을 불신하고 복용하지 않는다면, 그 약이 주는 놀라운 효능을 체험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의사가 있더라도, 그 의사에 대한 좋지 않은 헛소문 때문에 불신하고 그 의사에게 가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통해 아무런 치유를 받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인 가짜뉴스로 인하여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지도자가 잇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믿지 못하면, 마음의 문을 열 수 없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어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이 필요하고, 기도할 때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서 1:6-8에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의심하는 자는 주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게 우리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마음은 내것인데,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하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믿어야지 의심하지 말아야지 하면 의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기도하는 도중에 이러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을 아닐까? 우리들의 마음에 의심이 자꾸 솟아오르게 되어 있다. 그게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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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나이가 많아 결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 그게 로마서 4:18-22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어보면, 정말 아브라함이 아무런 의심이 없이 믿은 것 같지 않다. 그는 상황이 어렵게 돌아갈 때마다 불안해 했고, 아들을 과연 낳을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내용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바로 뒷장이 16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못해서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의심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도 기도하면서 자꾸만 의심이 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의심이 들 때마다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악인은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면서도 뻔뻔하게 행동하는데, 그런 악인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다. 선한 사람은 억을한 일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한 억울함을 풀 기회조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선하시며 공의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면, 왜 이 세상이 엉망진창일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게 의심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증거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보라. 겨우내 죽어 있는 것 같았던 나무들에서 싹이 피어나고 있지 않는가? 산수유가 피어났고, 매화가 피어났고, 개나리도 피어나고 있다. 나무 가지가지마다 푸른 눈이 나오고 있다. 겨우 내내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 같았다. 겨울에 나무를 보면 아무런 생명이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게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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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니즘(Zionism)의 오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유태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고, 팔레스타인 땅에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소망하였다. 그 옛날 다윗의 왕국이 재현되는 것을 강력하게 소망하였다. 비록 외세에 의하여 유태 민족은 압제를 받아야 했었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성경에 약속된 대로 시온에 다시 모여들 것을 소망하였다. 이러한 소망이 표현된 것이 시오니즘(Zionism)이다. 그래서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태인들이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유태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갈등에서 심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왔다. 특히 미국의 크리스천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는 정권은 이스라엘의 편에 서왔다. 이스라엘이 다시 팔레스타인에 돌아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력에 동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약속이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다윗의 왕국을 꿈꾸고 있던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우리의 문제는 외세의 지배를 받고있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한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나 죄를 지어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들만 없애면 되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게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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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얻을 유산은 이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받는 것이었다. 물론 하늘의 축복이란 그저 피안의 축복만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까지 그 영향이 나타나는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그저 이 세상의 축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수천명을 먹이셨지만, 예수님은 단지 이 세상의 빵을 제공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빵을 만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기를 갈망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열망을 가지고 추종하는 사람들을 피하셔야 했다. 우리가 보여야 할 진정한 반응은 베드로와 같은 반응이다. 물고기를 수도 없이 많이 잡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 나와 함께 동업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봅시다. 사장님으로 모실게요.”라고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죄를 보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축복은 누가 받는 것일까?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받는다. 그렇다면,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성경은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오히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 율법으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롬 4:13).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마지막 날에 쫓겨날 것이지만,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8:11-12). 이 말씀은 유태인은 아예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유태인의 혈통이라는 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이미 세례 요한이 말한 바 있다(마 3:7-9). 더 나아가 이미 구약에서도 모세가 말했다. 육체에 할례를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즉 유태인이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신 10:16). 즉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아와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원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입양된 셈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는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하늘의 유산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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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상이 될 때

나는 대선을 앞두고 계속해서 정치가 우상이 될 위험을 경고해왔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는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가 우상이 된다면, 우상을 섬길 때 얻게 되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 우상은 우리에게 화려한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착취하는데, 정치는 언제나 그렇다. 늘 속으면서도 또 속는 게 어리석은 인생이다.

우상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표현했는데, 사실 이러한 표현은 과장법적 표현이다. 우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게 있기는 하다. 우상은 마치 선악과와 같아서, 그것을 베어무는 순간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매력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약속했던 것은 주지 않는다. 즉 아무리 선악과를 먹어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우상을 갈망하는 데 그 결과는 재앙일 뿐이다. 우상화된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치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정치에 대해서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거나, 정치와 거리를 두고 무덤덤하여지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정치적 중립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며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기계적 중립이란 고도로 위장된 정치적 참여일 뿐이다. 악한 정치에 대하여 기계적 중립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악한 정치에 동조하는 셈이며, 선한 정치에 대하여서는 결국 그 선한 정치를 외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일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것이고, 미치광이가 운전대를 잡는다면 그를 운전대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지, 옆에서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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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열정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하여 선거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서 정당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을 위해 설득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정치가 우상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복음의 영역은 정치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역으로 정치의 영역도 신앙의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면 언제 정치가 우상이 되는가? 첫째,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오로지 유일한 희망이라고 착각하여 무조건적 지지를 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단점이 있고 실수가 많으며,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한다. 정치인에 대한 묻지마 지지는 그 정치인이 우상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그의 정신적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정치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게 아니라, 그가 주창하는 정책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될 때 그 정책을 지지하여야 한다.

둘째,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후보를 향해서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미워하는 경우이다.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후보의 주장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고, 항상 진리의 한쪽 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의 머리보다도 더 커서 다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원통의 한쪽 면을 보고 둥글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은 원통의 다른 면을 보고 직사각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들으면서 차분하게 대화할 수 없다면, 증오와 분노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만 보이고, 누군가가 싫어지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만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해도 전자에게는 용납되지만 후자에게는 혐오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는 것은 그렇게 찾아낸 이유들이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여서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게 우상의 수준으로 넘어가면, 객관적인 판단은 흐려지고 무조건 미워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우상을 섬기다보면, 우리는 우상을 닮게 되어 있다(시 115:8). 그래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그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혹시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려서 내가 그 우상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왜 정치를 우상으로 만드는가? 정치라는 우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정치를 판단하고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우리는 이미 정치의 자기장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정치라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내가 매일 듣고 보는 뉴스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다 정치의 자기장 속에 있다. 진공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운동장은 한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태어나서 정치적으로 양육받고 정치적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으면서도, 가나안으로 들어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는 오히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길 갈망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셋째, 내가 지지하지 않은 정치인이 당선되었을 때, 불평하고 분노하며 그 정치인이 성공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일에 나서게 되는 경우이다. 우리는 다른 정책과 다른 노선을 걷지만 한 팀이다.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불복하거나 그 정치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이미 내가 정치와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그의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장 선하신 뜻대로 움직이신다. 그 하나님은 때로는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기도 하셨다. 로마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은 악한 정권이라 할지라도, 통상적이고 선한 통치에 대해서는 헙력할 것을 가르친다. 누가 당선되든,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뻐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정당한 통치에 대해서는 협력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중립을 지켰다. 중립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위치를 지킨 것은 적어도 우리 후보들 가운데 그 누구도 히틀러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분명 선악이 있고, 누군가는 누군가보다 더 좋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전략적 중립을 지키는 것은 정치의 우상에 빠진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안타깝게도 우상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을 공격하곤 한다. 그래서 전략적 중립을 지킨다. 들리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더 나아가 복음이 오해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복음은 어느 진영의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데, 한쪽을 편들 때 복음은 한쪽 진영인 것으로만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나라가 좀더 발전적으로 진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로 후퇴하기보다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혹시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결국에는 이런 실패가 더 나은 사회로 가게 되는 계기로 사용되길 기대한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주님뿐임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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