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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들 (막 3:13-19)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한꺼번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런 케이스(case) 저런 상황 가운데서, 이 사람을 부르고, 저 사람을 부르고 하셔서, 총 12명의 제자를 부르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12명의 제자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알고 계십니까? 아마 외시는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열두 제자의 이름을 보면, 베드로, 아주 유명하죠. 베드로라고 하는 제자를 비롯해서, 또한 제자 가운데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버렸던 가롯 유다도 들어있고, 또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와 같은 그런 제자들도 있고요.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 마태, 그리고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김선조 장로님” 농담이고요. 다대오라고 하는 제자를 주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이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리고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은 아주 특이한, 아주 주목받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제자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지만, 어떤 제자는 전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그런 제자들도 있습니다. 바돌로매라고 하는 제자라든가, 다대오라고 하는 제자 같은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있지, 이 제자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제자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제자를 이렇게 예수님께서 뽑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를 뽑으신 것은 어떤 기준으로 뽑았을까요? 어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우리가 그것을 쉽게 알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실 때 12명을 뽑았다고 하는 점에 먼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았는데 10명도 아니고 15명도 아니고 12명을 뽑았는데요. 왜 12명을 뽑으셨을까요? 그냥 뽑다 보니까 한 명씩 2명씩 부르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12명의 제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나중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해버리고 자살한 이후에 교회가 모여서, 가롯 유다를 대신할 또 한 사람의 사도를 선발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하면 이 숫자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맛디아를 뽑아서 굳이 12명으로 채워 넣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의 지파가 12 지파였던 것에 비추어 보아서,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뽑으신 이유는 어쩌면 영적인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위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육체적인 혈통을 따라 만들어진 그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을 대신할 영적인 이스라엘, 새로운 교회의 대표들을 뽑기 위하여, 그래서 12명이라고 하는 제자들을 뽑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충분히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두 번째 특징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는데요. 그건 무엇이냐 하면, 제자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었다고 하는 점이죠. 다양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뽑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뽑을 때는 주로 어떻게 뽑습니까? 이 세상의 방법은 우수한 사람들을 뽑습니다. 대학을 대학 입시를 통해서 학생들을 뽑을 때, 성적이 좋은 사람들을 뽑는 것이 대학입니다. 어쩌면 입사 시험을 통해서 새로운 신입 직원을 뽑을 때도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을 직원으로 뽑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 12명을 선발하신 것은 그것은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최고의 사람들, 아주 대단한 사람들만 뽑은 것이 아니죠. 최근에 제가 텔레비전에서 하는 방송을 보다가 이근 대위가 나오는 걸 봤는데요. 혹시 보셨습니까? 별로 텔레비전에는 관심이 없으시는군요. 아무튼 그걸 보니까 그 udt 해가지고, 이렇게 훈련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을 하는데, 보니까 최상의 정예 부대를 뽑더라고요. 몸이 튼튼하고 아주 최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뽑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그 12명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천차만별로 뽑았습니다. 잘 아는 대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마테라고 하는 제자는 세리 출신이죠. 세리 출신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가장 비난을 받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장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리라고 하면, 진절머리를 내는 그런 사람도 예수님께서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나인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도, 예수님께서 제자로 받아주셨는데요. 이 가나나인 시몬은 열혈당파 출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그 신앙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무장봉기까지 할 정도로 아주 극단적인 어쩌면 오늘날로 말하면 극좌나 극우에 해당하는 그런 사람이 가나나인 시몬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우리 식으로 비유를 한다면 마테는 친일파에 가깝다고, 한다면 시몬은 독립투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독립투사와 친일파가 한 제자가 될 수가 있는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 것 같아요. 도무지 상극이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 친일파와 독립투사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마테는 당시 로마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그리고 그 혜택을 모두 받았던 마태라고 하는 세리장이었고,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하면 목숨을 내놓는 것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무장봉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런 열혈 당원이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완전히 상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면 특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10명은 유대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빌립과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는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식이라고나 할까요? 헬라식이라고 할까요? 이방인 외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수백 년 동안 유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외세의 영향력 밑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유대식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이 개화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외국 이름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왜정시대 때 창씨 개명을 했던 것처럼, 유대인들 가운데는 외국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면 바울 사도죠. 바울 사도의 이름은 유대식으로 말하면 사울이고, 로마식으로 말하면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두 개를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인데, 그만큼 외국과 많이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런 안드레나 빌립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어떤 최상의 그룹이라든지 어떤 특징이 있는 그런 공통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의 다양한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면 특징일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놓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아주 실력이 좋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가지고 제자를 삼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사명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다양한 사람을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교회가 종종 획일화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실 때, 교회를 만드실 때 똑같은 사람들만 불러서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제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다양한 사람들을 다 불러서 제자를 만드셨고 교회를 만드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냐면 끼리끼리 모이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요. 가능하면 같은 편끼리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대화가 통하는 사람끼리 함께 모여서, 그래서 같은 부류를 형성하고, 그것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부류를 형성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같은 그 그룹 안에 들어오지 아니한 사람들을 왕따시키고, 소외시키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 서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한 번에 부르셔서, 교회로 엮어주시고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교회가 서로 다르지만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죠?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이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알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그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은 그 교회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예수님이 진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교회가 분열이 되고, 서로 싸우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게 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방법을 우리는 종종 어떤 식으로 생각하냐 하면, “획일화를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획일화시켜버리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하나가 되겠지만, 그 무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소외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이런 경험이 없으셨습니까? 오늘은 체육을 하는 날이기 때문에 체육복을 챙겨 와야 했었는데, 체육복을 챙겨가지 못한 겁니다. 우리 때는 교련이 있어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교련 시간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교련복을 가지고 와야 되는데, 안 가지고 온 겁니다. 다들 체육복 입고 앉아 있는데, 나만 체육복을 입지 않고 있었을 때, 그 느끼는 불안감, 당황스러움, 나만 소외되었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들이 들게 되는 것이죠. 획일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 되게 만드는 것 같고, 그래서 파워풀(powerful) 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걸 통해서 하나가 되게도 만들지만,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배척해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죠.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엄청난 힘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군인들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이 제식을 하면서 행진하는 그 모습을 보면 엄청난 파워(power)를 느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고, 소외를 당하는 것이죠. 하나가 된다고 하는 얘기는 이렇게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 다름과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획일화를 해버리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데요. 다수가 획일화하면서, 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고, 다수가 같은 것을 진행해 나갈 때, 그 다수의 의견에 동참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소외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데, 하나가 되는 방법은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줄 때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르구나. 이 사람의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만나는 것은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만나게 되어 있는데요. 그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왜 힘든가요? 남편이든 아내든 나에게 맞추라고 하기 때문에 힘든 겁니다. 한 사람이 기준이 되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주어야 된다고 한다면, 힘들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고 당신은 저런데, 그 두 가지 사실을 서로 인정하면서, 취향이 다르구나.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나는 차를 좋아하다. 당신은 차를 좋아하는구나. 서로가 다름을 나는 뜨거운 것이 좋은데, 저 사람은 차가운 것이 좋구나. 그것을 서로 인정할 때에 서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교회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설명합니다.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는데, 그 지체들이 각각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눈과 같고, 코와 같고 입과 같고 귀가 있어서, 각각 다른 지체들이 모여 있을 때,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인데, 만일 온몸이 다 눈이면 듣는 곳이 어디일 것이며, 만일 온몸이 입이면, 귀는 누가 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획일화돼 버리면,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할 때,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고 그들의 귀를 기울일 수가 있는 겁니다.

어쩌면 이 시대는 정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은 보수적인 생각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맞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이 필요한 것이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서로가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와 다르다고 하는 그 사실이 미움의 이유, 차별의 이유, 그리고 왕따 시키는 이유가 아니라, 내 자신의 부족함을, 서로가 서로에게 도와주고 보완해 줄 수 있는,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협력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셨는데 그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14절 1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12를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뽑으신 목적이 무엇이냐면,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뽑으셨다. 함께 있게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보고 배우라는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도록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또 불러주셨는데요. 제가 12 제자의 이름을 하다가, 우리 교인의 이름을 집어넣었습니다마는, 농담으로. 근데 농담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시고, 여러분을 제자로 불러주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는 우리를 이렇게 불러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요. 그다음 말씀이 또 있습니다. 29절 30절 말씀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뭐 하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에게 가서 쉼을 얻으려고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주님의 멍에를 베고 함께 배워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제자들을 함께 있게 하시고 배우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는데, 그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이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의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배웠느냐에 따라서 극락에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도를 많이 닦고, 내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가고, 내가 얼마나 열반의 경지에까지 올라갈 만큼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목적지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 그 배움이라고 하는 것이 고행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자신의 욕망을 억제만 해야 되고, 자신의 그 모든 것들을 제압하고, 고통스럽게 해서 그런 고통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해 가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배움의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배우는 그 배움의 길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자녀로서 우리 주님을 보고 배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려운 길이 아니라 사실은 쉬운 길이고, 기쁨이 넘치는 길이고, 주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행복이 있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닮아가는 그런 훈련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주 안에서 믿음이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잘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죠. 목사님에게 있나요? 교회에 있나요? 본인한테 있어요. 우리가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돌아보면서 정말 내가 성장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 있는가? 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오늘 제자들, 열두 제자들이 있는데, 그 열두 제자들 가운데 누가 있었느냐? 누가 있었어요? 가롯 유다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버린 이유는 선생님이 좀 모자라서 그렇죠? 선생님이 누구예요? 예수님 이 세상 최고의 선생님이 가롯 유다의 선생님이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고, 변화를 일으키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감동적으로 전해 주시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목격하고 함께 따라다니고 그것도 1년 2년이 아니라 3년씩이나, 아니 어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4년씩이나 따라다니면서, 주님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는 믿음이 하나도 크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서, 결국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누구 책임이에요? 자기 책임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때가 많습니다.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질문을 던졌어요? 목사님, 어떤 사람이 아주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서, 정말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자라다가, 그래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되고 살인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나쁜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렇게 결국 나쁜 사람으로 성장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도 지옥에 가야 합니까? 환경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는데, “환경이 그렇게 나빠서 그렇게 돼 버린 사람도 그 사람 책임으로 봐야만 하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지신 분이 계십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환경을 개선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가능하면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겠고, 가능하면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것이 좋겠고, 기왕이면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좀 더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살지 않도록 국가가 제대로 복지 정책도 잘해야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그 모든 책임이 환경 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고, 지도자들이 타락한 시기에도 신앙을 잃지 아니한 7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의 경우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최고의 선생님이 있어도, 최고의 과외 선생님을 붙여줬어도, 그런데 그 마음을 닫아버리니까,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게 자랑할 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정말 멋진 교회다. 물론 좋은 교회를 다니면 좋겠죠. 하지만 그게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왜 아무리 좋은 교회를 다니면 뭐예요?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입니까? 나쁜 나라입니까? 좋은 나라예요. 전 세계에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복된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이 나라에 살아도, 내가 제대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듯이, 제가 미국에 가봤더니요. 그 좋은 나라에 살면서도 거지가 있더라고요. 거지. 그 엄청난 나라에 살면서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라고요. 우리가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만일 내가 믿음이 성장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 옛날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부르셔서 함께 있게 하시고,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전도도 하게 하시고 능력을 베풀게도 만들어주셨는데, 주님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단순히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는 그 사실만으로 안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영적으로 좀 더 성장하고 있는지, 이제는 내가 분노하는 것을 멈춰버리고, 탐욕으로 살아갔던 것들을 멈춰버리고, 이제는 배려하는 마음들이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시고,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 앞에 더욱더 엎드려 “주님, 주님의 멍에를 배우고 배울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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