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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만 단 훈계 (잠 12:1-3)

사랑의 역설 (잠 11:16-31) +++ 능력 있는 사람 (잠 12:4)

오늘 읽은 말씀 1절에 보면,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가 지식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하는 것이죠?

음식이야 좋아하면, 자주 먹고 많이 먹고 하는 걸 통해서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고, 스포츠라고 한다면 자꾸만 스포츠 경기를 즐겨서 자꾸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데, 그런데 지식을 좋아한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혜롭게 된다고 하는 말이 되겠죠.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 훈계를 들을 때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달게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식이 늘어나게 되고 지혜로워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꾸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현명해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훈계를 좋아하게 될 때, 우리는 현명해지고, 훈계를 잘 받아들일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잘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지식이 늘어나고 지혜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하거나, 어떠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지혜로운 결정일까? 어리석은 결정일까?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일까? 어리석은 행동인가? 처신을 하게 될 때, 이것이 과연 지혜로운 처신인가? 지혜롭지 못한 처신인가? 우리가 구분할 수가 있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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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모든 면에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지혜롭게 일을 처신할 수 있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고, 지혜롭게 결정할 수 있는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냐면, 훈계를 좋아해라. 다른 사람들이 훈계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잘 듣는 훈계를 잘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지혜롭게 결정할 수 있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고,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성공하는 인생이 있을 것이고, 실패하는 인생이 있을 것인데, 지혜롭게 행동해서 성공하는 인생을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본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가 있겠지만, 오늘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아주 중요한 한 원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누군가 우리들에게 훈계를 할 때, 누군가 우리들에게 조언을 해줄 때, 누군가 우리들에게 어떠한 아이디어를 주고, 또는 의견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훈계를 잘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될 때,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향해서 말을 합니다. 때로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고, 훈계를 할 수도 있겠고, 조언을 할 수도 있겠고, 또 때로는 화를 내면서 책망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 때, 그것을 들을 때 내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충고와 비판을 잘 받아들여서, 그래서 자신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혜롭게 될 것이고, 결국 지혜롭게 행동하고 처신한다면 성공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1절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훈계를 잘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혜롭게 될 수 있다. 훈계를 거부하면 지혜롭게 되지 못하지만, 훈계를 잘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면 우리가 지혜롭게 될 수 있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고 결국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것이 훈계만이 아닙니다. 1절 말씀에서 앞부분에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가 지혜로워질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전반부만이 아니라 그다음 절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부연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잠언서를 설명하면서, 히브리 평행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드렸는데요. 같은 사상을 다른 표현 방법으로 반복하는 방식을 가리켜서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1절 말씀에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가 지식이 지식을 좋아하게 된다. 지식이 늘어나게 된다라고 말했고, 그다음에 또 반복해서 말하기를,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훈계만이 아니라 무엇도 받아들여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징계도 받아들여야 된다는, 우리들에게 훈계가 있을 수 있고, 징계가 있을 수 있는데, 훈계하고 징계의 차이점이 느껴지시죠? 훈계는 그런대로 좀 나이스(nice)하게 이야기하는 게 훈계일 겁니다. 하지만 징계는 뭔가요? 책망하고 잘못을 꾸짖고 책망하는 그런 아주 좀 정말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아주 그런 과분한 그런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훈계로 이야기하면은 그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훈계와 징계 모든 종류의 그런 이야기들을 다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책망하거나 꾸짖는 소리를 하게 된다면, 또는 비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다면, 기분이 좋을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굉장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분이 상하게 되는, 내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했는데, 내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하는 말이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 텐데”라고 이야기를 하거나, “왜 그렇게 했느냐?”라고 책망을 하거나, 아무튼 옆에서 누가 한마디 말을 하게 되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상해버리는 게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그런 감정일 것입니다.

혹시 누가 뭐라고 얘기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분 계세요? 그런 분이 없을 거예요. 다 기분이 나빠요. 칭찬해 주고 박수 쳐주고 잘했다고 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지만, 왜 그랬냐고,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다르게 해야 된다고, 그것보다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갑자기 마음이 상해버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더 이상 이제는 이런 거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반응이 나오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이죠.

하지만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권면해 주시냐면, 그런 마음이 든다 할지라도, 그런 우리들의 마음 자연스러운 마음을 바꾸어 버려라. 관점을 바꿔버려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게 될 때, 심지어 비난하고 욕하고, 그리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그런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상해버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요? 어떻게 하라고? 좋아해라. 훈계를 어떻게 하라고요? 좋아해라. 이 말이에요. 좋아해라. 좋아하고 감사하고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좋아해야 됩니까? 왜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까? 왜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까? 왜냐하면 그러한 훈계와 책망들이 비판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만들고, 우리가 실수하지 않게 만들고, 결국 그래서 성장하고 성공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내게는 굉장히 기분이 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누가 이야기하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토라져버리고 기분이 상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마음을 가질 게 아니라, 아 그 사람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아, 내가 미처 그 부분을 보지 못했었구나.” “나는 내 관점으로 보면서 이것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다른 관점에서 볼 때는 이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구나.” “다른 관점에서는 이게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들의 행동을 교정하고, 또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좀 더 성장하는 반응을 보이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왜 성장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합니까? 왜 사람들은 망가집니까? 왜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까? 그것은 옆에서 말해주는 훈계와 책망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귀를 막아버리고, 나에게 좋지 않은 소리처럼 들리는 것에 대해서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하지도 않고 발전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었는데요. 안타깝게도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99%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훈계를 몹시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기분 나빠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토라져버리고, 굉장히 불쾌해하면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저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꾸짖는 스타일인가요? 안 그런가요? 물러 보이죠? 저는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꾸짖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부족한 게 있어도, 가능하면 이해하려고 하고, 가능하면 도와주려고 하고, 무엇이 부족한가 채워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지, 잘 못한다고 해서, 부족한다고 해서 책망하거나 꾸짖거나 화를 내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훈계나 어떤 조언들에 대해서 귀를 막아버린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면, 벌써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시작하고, 변명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방어막을 치기 시작합니다.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하고, 듣기 싫어하는 표정을 나타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요즘 세상이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예전에는 기분이 나빠도 이야기해 주면, 그것을 듣는 척이라도 했었고, 그냥 “내가 배워야지”라고 하는 자세도 있었고, 그래서 혼내면 혼내는 대로 그렇게 들으려고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마는, 요즘 시대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마디 얘기하면 그다음 날 사표 들고 옵니다. 아무리 참 좋은 의도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요즘에는 반응이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훈계하기를, 그래도 담임 목사가 좀 강하게 훈련도 시키고 그래야, 그분들이 훈련을 받고 그래서 더 좋은 사역을 잘할 수 있으니까, 강하게 훈련시키라고 하지만,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한마디만 하면 그다음 날이면 사표 들고 나와버리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도 없고, 해봤자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런 경험들을 너무나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사실은 교정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어차피 하나님과 나 사이에 1대1의 관계인 것인데, 왜 그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 혼자 있으면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혼자 있으면 망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지지자들과 열성 팬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거나 지지자들 열성 팬들에 의해서만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자신이 보완해야 될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착각해서 결국에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망해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이냐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이루어서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그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힘들고 넘어졌을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그런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돼.” “그렇게 절망할 게 아니지.” “그렇게 분노할 게 아니지.” “그렇게 참지 못할 게 아니라, 참아야지.” 옆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권면해주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영적인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러한 교훈들을 통해서, 훈계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그렇구나. 내가 잘못된 길로 가지 말고, 바른 길로 가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런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사실은 훈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서로 성도가 같이 신앙생활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게 무엇이냐면 훈계가 필요해요. 신앙생활 그렇게 나태하게 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훈계해 줄 필요가 있는 거죠. 그렇게 절망하고 있지 말고, 우리 기도하자라고 훈계해 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신앙생활 나태하게 하지 말고, “우리 힘 좀 한번 내보자.”라고 훈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동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권면해서, 영적인 훈계를 통해서 잘못된 길에서부터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야말로 교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그러므로 사랑으로 “참된 것을 해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서, 그리스도인까지 자라라. 그렇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는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참된 것을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들어오지 않잖아요?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뭐라고 번역해놨냐면, “대신에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주어서, ”speaking the the truth(진실)“을 말해주라. 어떻게? 사랑의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줘라. 그래서 우리가 모든 면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가야 한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영어 번역이 훨씬 더 의미 있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나갈 수 있는가?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줘야 되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살면 망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말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돼.”라고 하는 것을 말해줘야 돼요.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면 안 돼.”라고 하는 것을 말해줘야 돼요.

근데 말해 주는데 어떻게 말해줘요? 그냥 말을 아무렇게나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정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일이 필요한 거죠.

낙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가가서, “그렇게 낙망하지 말고 우리 주님을 바라봅시다.”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거예요. 누군가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면, “분노하지 말고 우리가 인내합시다.”라고 사랑으로 이야기해 줘야 되는 것이고,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못 본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못 본 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가서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이냐면,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다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누군가 옆에 와서 사랑으로 이야기를 해주면,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발끈해버리면서, 분노하면서 거부해 버리고 맙니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귀를 닫아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것이 사라져 버린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향해서 들려주는 그 훈계의 말씀들을 거부하는 시대가 된 것이고요.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훈계하라고 했으니까, 마음대로 가서 내가 아무렇게나 훈계해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다. 사랑으로 한단 말이에요. 사랑으로, 훈계를 할 때 욥의 세 친구처럼 그렇게 훈계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사춘기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 아이가 오히려 더 반발할 수 있으니까, 이 아이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부모님들이 정말 고민 고민하며, 어떻게 말해야 이 아이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면서도, 이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연구하듯이, 우리가 성도들이라고 한다고 하면, 그냥 아무렇게나 바른말을 해버리고 정답만 이야기해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옳은 말을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어떻게 하면 이 말이 잘 전달되어서 이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정말 주님 앞으로 오를 오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가운데 말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그냥 무조건 훈계만 해버리고 끝내버려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아무튼 누군가 우리에게 누군가 나에게 그런 훈계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거부하고 그 훈계한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감사함으로. 따라서 합시다.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자.” 믿습니까?

적절한 예일 수는 없고, 혹시 이 예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예이기는 합니다마는, 마치 제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예화일 수도 있어서 말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운 예화입니다마는, 제가 젊은 목사였을 때였습니다. 제가 젊은 목사였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주 옛날이죠. 목사 안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죠. 제 아내가 어느 날 제게 말을 하는 겁니다. “여보, 당신의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안 돼.”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정말 은혜가 되고 정말 감동이 되고, 복음을 깨닫게 되고, 너무나도 좋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기분이 나쁘죠. 다른 목사님하고 비교를 하면서 저를 완전히 짓밟아버린 그 제 아내의 말에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듣기가 싫어요. “좀 제발 그 목사한테 가서 좀 배워라.” 근데 그 말이 듣기가 싫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아내가 테이프 하나를 주는 겁니다. 그 목사님의 테이프를 준 거예요. 지금은 테이프가 아닌데 옛날에는 테이프 이렇게 차에다 집어넣어서 듣는 거였잖아요. 그 테이프를 얻어와서, 그 당시 제가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제가 섬기고 있던 레바논 한인 장로 교회까지는 고속도로로 1시간 20분 정도를 100km 이상씩 달려가서 예배를 드리고 와야 되는 그런 멀리 떨어진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교회 가는 때 카세트 테이블을 설교를 들으면서 가는 겁니다.

설교를 듣는데, 너무 감동이 되는 거예요. 저도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면서 본 거죠. 왜 내 설교는 감동이 없을까? 왜 내 설교는 은혜가 안 될까? 그런데 이 목사님은 왜 감동이 될까? 기분이 나빴지만, 기분이 나빴지만, 그 이후로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로 가는 동안에 몇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이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웃겼는가? 그리고 그 웃기는 걸 통해서 어떻게 또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고 그리고, 복음 설교를 할 때 어떻게 예수님을 전했는가 뿐만 아니라, 이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제가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다 모아 두고 다 듣고 다 연구하고 연구했는데, 제가 그 목사님을 따라 하면서 연구하면서,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설교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전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으로 그냥 전해버린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동이 없고 결국은 율법주의적으로 사람들을 책망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전하는 설교야 말로 아주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그 목사님의 설교를 엄청나게 많이 연구를 해서, 사실 그때 정말 기분이 엄청나게 나빴지만, 그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더 발전해 가야 되는가? 어떻게 설교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것들을 엄청나게 배울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 완벽하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야기를 해주면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해주면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꼰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전혀 발전도 없고 성공하지도 못하고 지혜가 있지도 않게 되는 것이죠. 오늘 1절 말씀 하반절에서는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짐승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stupid하다, 어리석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훈계나 책망과 교훈을 듣기 싫어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우리 한국말 성경에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짐승과 같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짐승은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죠. 개와 돼지는 진주라고 하는 거룩한 것을 주면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주면, 그 가치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 진주를 준 사람을 공격해 버립니다. 나한테 먹을 것을 주지, 왜 먹을 것이 아닌 이런 진주를 주었느냐고 공격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개나 돼지처럼, 짐승과 같이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되는가?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을 들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래서 더 변화하도록 만들어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거예요. 귀를 기울여야.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디모데 후서 4장 3절 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듣습니까? 복음을 듣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이야기만을 따라가는 것인데요. 사람들이 왜 즐겁게 해주는 소리를 따라갑니까? 기분이 좋거든요. 훈계는 쓰고요. 그래서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즐거운 소리를 들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즐거운 소리를 들려주죠? 무엇인가를 빼앗아가기 위해서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칭찬하고 아주 입에 발린 말로 예쁘다고 말하고 잘한다고 말하고, 옆에서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그것만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면 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훈계는 쓰지만 양약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그게 바로 지혜가 있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훈계를 기쁨으로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한 것은 그런 분도 계셔요. 그런 분도 계셔서, 제가 이야기를 하면 제가 저한테 와가지고, “죄송합니다. 목사님. 제가 미처 생각 못했네요.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주는 그 반응을 본 적도 있는데, 그럴 때는 그분이 얼마나 참 지혜롭고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내가 이야기를 하면, 그다음 날 사표 들고 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했는데,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다르게 행동하겠습니다.” 말하는 분도 계셔요.

2절 3절 간단하게 합니다. 오늘 2절 말씀에서는 그리고 3절 말씀에서는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2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선한 자는 견고하고 의인은 견고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지만, 악한 자는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인은 누구이고, 악인은 누구입니까? 완벽한 사람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죠. 우리 모두는 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죄악을 지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만 했던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회개하면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 한번 선한 길로 의로운 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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