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설 (잠 11:16-31)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 쓰지만 단 훈계 (잠 12:1-3)

오늘은 상당히 긴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들을 한 절씩 한 절씩 축조해 가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또 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지금은 좀 치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는다고 했는데요. 유덕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덕이 있다.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설명을 해드린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자비롭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자애롭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자를 말하게 되는데요.

종종 갑질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하고, 또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그런 깐깐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 앞에서는 상당히 조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기도 하고 조심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만족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벌벌 떨 수는 있겠지만, 뒤에서는 다 욕을 한다고 하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앞에서 갑질하고 있고 호통을 치고 있고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앞에서는 어떻게 항거하지 못하고 그 말에 이렇게 숙이는 것처럼 그렇게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지만, 사실은 뒤로 돌아가서 그 사람에 대해서 욕을 한다고 하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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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가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는가? 누가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누가 존영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깐깐하게, 그리고 아주 호통을 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자애로운 마음으로, 정말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해주는 사람들을 뒤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높게 여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악마가 되기가 쉽습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돈을 내고 음식을 주문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내 돈을 받아서 음식을 제공해야 되는 그 상황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우리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조그마한 허물, 조그마한 잘못 앞에서 화를 내기도 하고, 그 식당의 주인을 향해서 혹은 종업원을 향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나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조금만 실수를 하고, 무언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고 갑질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하면, 그런 꼬마 아이들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그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유덕한 사람이 되어야 자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조금만 유하면, 이 세상에서 조금만 내가 까다롭게 하지 아니하면, 무시를 당하고, 나에 대해서 존중을 해주지 않고, 나를 깔보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우리가 유하게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그러면 결국 손해를 당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학습한 것이죠. 그게 이 세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부드러우면 무시를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실수를 봐주고, 용납해 주고 정말 너그럽게 대하면, 나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계속 당하면서 여러 가지 피해를 겪으면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냐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화내는 것이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화를 내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것 같고, 내가 분노하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 같고, 내가 화를 내면, 빨리빨리 서비스를 해주는 것 같고, 내가 뭐라고 다그치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와서 서비스를 더 잘해주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몸에 익숙해져 버렸어요. 너그러움이 아니라 분노와 갑질과 깐깐함과 호통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자주 우리의 몸에 익숙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덕한 여자가 존영을 받게 될 것이다. 여자만이 아니라 유덕한 여자라고 했다고 해서 여자들만 유덕해지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그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16절 말씀에서. 그런데 이 근면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이 번역은 아무래도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한번 16절 도표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어가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라고 했을 때, “왜아리침 이트메쿠 오쉐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아리침”이라고 하는 것에 제가 색깔을 입혀놨는데요. 그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violent men, 그러니까 폭력적인 남자들, ruthless men, 무자비한 남자들이 부를 얻고, 부유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영어 성경에서는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번역과는 좀 다르게 번역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근면하게 되면”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히브리어 원문 “아리침”이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 원어는 성경 대부분의 경우에서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입니다. 그렇게 강포한 자, 포악한 자라고 번역한 단어를 안타깝게도, 이상하게도 잠언서 11장 16절에서만큼은 “근면한” 남자라고 그렇게 번역을 해버려서 아쉽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이유가 아마 아쉬운 번역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잠언서를 번역하면서, 유덕한 여자 정말 nice하고, 부드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존영을 얻게 되지만,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이 번역자의 마음 가운데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으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포악한 사람이 재물을 얻으니까, “우리가, 모두가 다 포악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서, 아마 그렇게 “근면한”으로 바꾸어서 번역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말은 무엇이냐면, 포악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고 하는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도 포악한 방법을 써야 된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너그럽게 (하면) 영광을 얻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공을 못하는 길이고, 포악해져야, 갑질을 해대야, 그래야 재물도 얻고, 성공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려야, 그래야 성공해 버릴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그런 재물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밑에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서는 이 번역을 16절을 번역하면서, ruthless men gain only wealth, 그러니까 부를, 부 정도만 얻을 수 있겠지, 부를 얻을 수는 있겠지 정도로 번역을 한 거죠. 겨우 얻는다고 하는 것이 부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영생을 얻는다거나,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재물 썩어질 부에 대해서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얻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뉘앙스를 심어주면서, NIV의 성경은 번역을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6절과 연관되어서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인데요.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유덕한 여자가, 자애롭고 너그러운 여자가 존영을 얻는다고 한 그 말을, 다시 한 번 17절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인자한 자는 결국 자기의 영혼이 이롭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러나 잔인한 자는, 아까 조금 전에 16절 말씀에서 강포한 남자, 아주 포악한 남자는 재물을 얻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 잔인한 자는 결국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에, 16절에서 잔인한 자가 포악한 자가 재물을 얻는다 한들, 사실은 그 재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잔인한 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해로운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17절 말씀 가운데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을 가만히 읽다 보면,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데, 잔인한 자는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하는 표현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겠습니다. 왜 인자한 자는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한 자는 왜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했을까? 왜 영과. 인자하면 왜 “몸”에는 도움이 안 되고, 잔인한 것은 왜 “영혼”에는 해롭게 안 되고, “몸”에만 해롭게 된다고 했을까? 그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나프쇼”라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나프쇼” 하는 것은 자신의 “나프쇼”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고, “쉐에로”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왜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왜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냐? 그것은 영혼과 몸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하는데요. synecdoche라고 하죠. 영어로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영혼만 이롭게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무슨 뜻이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에요.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얘기는 잔인한 자가 자신의 몸만 해롭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영혼 영혼이라든지 몸이라든지 이런 단어들이 많이 사용될 때가 있는데요. 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몸만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이 다 포함된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 시편의 말씀은 영혼만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왜? 네가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 “네가 왜 그렇게 낙망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몸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든지, 영혼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조금만 배우신 분들은 몸과 영혼을 막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하고, 이것은 영혼만 얘기했으니까 영혼만 가르키는 것이고, 몸을 이야기했으니까 몸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마는, 제유법으로 사용됐다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이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인자한 사람은 친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잔인한 사람은 누구를 해롭게 합니까?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결론은 잔인하게 할 것이 아니라, 인자하게 대하며 살라. 그것이 16절 17절의 결론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악인이 받아 가지는 것은 허무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것이고, 결국은 의미 없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겠죠. 그러나 공의를 뿌린 자, 다시 말하자면 의를 추구하는 자는 확실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보상이 확실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아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요. 의를 행하면 생명에 이르는 것이고, 악을 따르면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까? 조금 이해가 안 되죠. 왜냐하면 공의를 지키든, 악을 따르든 다 살고, 다 죽잖아요. 그죠? 사는 게 의인만 삽니까? 악인도 삽니까? 의인도 살고 악인도 살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또 다 죽잖아요? 악인만 죽습니까? 의인도 죽습니까? 의인도 죽잖아요?

그런데 왜 오늘 19절의 말씀에서는 공의를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를 것이고, 악을 따르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를 거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공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계속 살 것이라고 하는 말인가요? 공의를 지키는 사람은 지금 당장 악을 따르는 자는 지금 당장 죽을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기서 생명에 이른다.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의미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은 장수하고, 악인은 단명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망하고 흥한다고 하는 표현을 “생명에 이르고 사망에 이른다”라고 하는 표현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흥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생명과 사망이라고 하는 단어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0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마음이 굽은 자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행위가 온전한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 영적인 것인데, 어떻게 굽죠? 물건이라고 하면, 구부릴 수 있고, 철사라면 구부릴 수 있지만, 마음은 어떻게 굽어졌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 행에 있는 말을 대조해 보면 됩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굽었다고 하는 말은, 그런 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르키는 것이죠.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굳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을 얻으리라.” 악인은 결국 지금은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이야기고, 의인의 경우에는 결국 구원을 받고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니까, 그러니까 의를 행하며 살라고 하는 말씀이겠습니다.

22절 말씀이죠.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의 금고이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그것은 우리가 외모를 멋있게 꾸미는 것보다도, 예쁘게 치장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삼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 삼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죠? 진중하게, 사려 깊게, 예의 바르게, 모든 일들을 잘 생각해서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그러한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멋지게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습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씀일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 말씀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의인이 소망을 품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 의인의 소원은 결국 선한 일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가 선한 일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겠지만, 악인이 그 악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24절에서부터 26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구제하면서 너그러운 삶을 살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비를 베풀고 자산을 베풀며 살리는 것이 그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부유해지는 길이고, 과도히 아끼고 구두쇠처럼 살고 나만을 위해서 살면 아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살면, 그러면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곡식을 판다고 하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것 곡식을 파는 것이 무엇입니까? 독점을 말하는 거겠죠. 독점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도, 그냥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것을 이야기할 텐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힘든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여유롭게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여유로운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풍족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선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고, 악을 행하게 되면 결국은 악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죠.

28절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는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내가 재물을 의지하게 되면,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재물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이 우리들에게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재물을 의지해서 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이고, 의인이 누군가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정말 해로운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국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지만, 그리고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의 종 종밖에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고요.

30절 말씀.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의롭게 사는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고,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니까,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것이 아니라, 정말 의롭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3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오.” 결국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생을 얻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31절의 교훈입니다.

16절에서부터 31절까지 쭉 살펴봤는데 이 말씀 전체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결론. 결론이 생각이 안 납니까? 선을 베풀며 살자.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자. 베푸는 삶을 살자. 인자하게 대하며 살자.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결론인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요? 왜 우리는 인자할 수 없고, 왜 우리는 너그러울 수 없고, 왜 우리는 옹졸하고, 화를 내고, 갑질을 해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면, 재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져서, 그 재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갑질하고 폭력을 쓰고 무자비한 그런 일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재물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아닌 제물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 속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어떤, 자신의 힘이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결국 그 행동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갑질로 나오고, 화내는 것으로 나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물의 우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말씀에서 전체적으로 해 주시는 말씀이 그런 사람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재물을 숭배하면 망하게 됩니까? 왜냐하면 우상은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합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약속은, 이 재물을 섬기면 너에게 행복을 줄 것이고, 너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하면서 온갖 좋은 약속들을 다 해야 됩니다. 하지만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그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이 그 약속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느냐? 행복을 주지 않아요. 제물이 약속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느냐?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 않아요.

마치 사악한 정치인처럼, 선거 전에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언제 공약을 했는 듯이 다 잊어버리는 사악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우상이라고 하는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온갖 좋은 약속을 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고, 나에게 절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을 하지만, 그 사탄의 말대로 행했다가는 정말 그 사탄이 약속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자하게 대하고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게 되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게 손해 보는 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너그럽게 대하자.” 누구에게요? 누구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될까요? 실수한 사람들에게, 내가 돈을 냈는데 그 돈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해주지 못하고 실수한 사람들에게, 그 돈만큼 가치를 해내라고 윽박지르고 갑질을 해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너그럽게. 지금 섬기고 있는 그 웨이터가,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공무원이, 지금 서빙하고 있는 그 직원이, 나의 아들 나의 딸이 거기 서 있다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세요.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차 앞에 끼어드는 그 초보 운전자들에게 자유롭게 대보세요.

물론 법과 질서를 교란하고 이러한 자애로움을 악용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레리 버켓(Larry Burkett)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쓴 <성경 속의 경영학>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크리스찬 사업가가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챕터(chapter)에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레리 버켓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비즈니스를 경영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책을 써내려가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크리스찬 사업가라고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종업원들을 해고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적절하게 지시하고 적절하게 안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손해만을 끼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해고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징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포악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그래서 조그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악랄한 방식으로 갑질을 해대는 것은 전혀 크리스천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정말 정말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양극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극단은 무엇이냐면 금욕주의라고 하는 극단이에요. 그래서 그 금욕주의를 따라서 돈을 버려야만 하고,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고 고통을 자초하면서 살아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금욕주의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적인 접근은 성경 전체의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금욕주와는 정반대의 다른 방향이 다른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탐욕주의의 생각들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삼기면서 그 돈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소득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정말 그 우상을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사는 삶과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양극단이 아니라 성경적인 균형 잡힌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말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먼저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받은 종이라고 한다면,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그 돈을 나에게 빌려간 사람에게 모질게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엄청난 은혜를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으며, 용서하지 못할 실수가 어디 있겠고, 우리가 너그럽지 못할 일들이 허물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을 베풀고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복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세상에 세뇌 작업과는 반대로 선을 베푸는 자가 오히려 잘 되고 과도히 아끼는 자는 오히려 망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우리가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에 이런 복음성가가 있었어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하네.” 진리예요.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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