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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명령(삼상 14:24-30)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27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사울 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무것도 먹지 않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약을 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금식의 서약을 한 것입니다. 도대체 왜 사울이 이런 명령을 내리고 어기면 저주를 자초하는 맹세를 했는지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 그 어느 곳에도 군인들이 전쟁을 하러 나갈 때 금식을 한 경우가 없고 금식을 명한 성경 말씀도 없습니다. 군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적인 관계였습니다(cf. 출 19:15; 삼상 21:5; 삼하 11:6-13). 여인들을 가까이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을 성결케 하고 전쟁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군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금식이 요구되지는 않았습니다.

금식과 전쟁을 연결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경우가 있다면 예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금식하고 회개하러 모인 적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치러 온 블레셋 민족을 물리쳐주신 적이 있습니다(7:5-11). 어쩌면 사울은 여기에서 착안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신앙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대하 20:15). 금식이라는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갈망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명령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곤하여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충분히 있었지만 백성들은 사울의 명령 때문에 단 한 사람도 그것을 먹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될 때 율법을 따라 피를 제거한 후에 먹어야 했지만, 배고픔이 너무 큰 나머지 닥치는 대로 고기를 먹는 바람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율법(창 9:4; 레 3:17; 7:26)을 어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잘못은 사울의 어리석은 명령 때문에 결과되어진 것입니다.

금식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마치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선교, 예배, 전도, 금식, 기도, 봉사, 구제, 헌신 등과 같은 말들입니다. 선교하는 게 당연히 옳기 때문에, 선교에 대해서 반대한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예배는 당연히 드리는 것이 옳은 것이고, 더욱 더 많이 드리면 좋은 것이지, 혹시라도 있는 예배를 없애거나 축소한다면 역적이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고,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신앙적인 것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말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여야 좋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도서에서는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전 3:1-8). 심지어 사랑은 무조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미워할 때도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놀랍습니다(전 3:8).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좋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 금식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금식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눅 5:34-35).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중에 금식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든 백성들이 금식하여야 하는 맹세는 잘못된 과도한 열정이었으며, 균형감을 상실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14:29-30).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라고 할 때, “곤란하게 하다”라는 단어는 그 옛날 아간이 물건을 감추어둠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던 상황을 묘사할 때 썼던 단어입니다(수 7:26). 요나단이 신앙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균형 잡히지 못한 잘못된 열정을 보인 것입니다.

아쉽게도 교회 내에서 언제나 사울과 같은 생각이 늘 승리합니다. 선교하자는데 반대가 있을 수 없고, 기도하자는데 반대할 수 없으며, 예배를 더 드리자는데 차마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균형 잡히지 않은 과도한 신앙적 열정이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예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쉴 줄도 알아야 하고 사회에 나가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노는 것이나 일을 하는 것은 악한 것이며 오로지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생각은 결코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종종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앙적 열정은 잘못된 동기를 감추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구제를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자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에 가룟 유다의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마음의 동의를 얻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마음의 악한 생각을 간파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놀랍게도 예수님은 암행어사 마패와 같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가룟 유다의 구제 주장에 맞서서, 구제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향유를 부은 것이 결코 허비가 아니며 귀한 일이었음을 변호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종종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앙적 열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만 하고 자신은 빠져나가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앙을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습니다. 예배를 드리자 하고, 기도를 하자 하고, 구제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 어깨에 지울 뿐, 정작 자신들은 교묘하게 빠져 나가며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마 23:4).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예산서를 집어 들고, 왜 이렇게 선교를 위한 예산이 부족하느냐고 목청껏 따져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영웅이 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장학금이나 구제비가 턱없이 부족하느냐고 따져보십시오. 왜 이렇게 미래를 위한 주일학교에 투자하는 것이 적느냐고 지적해보십시오. 당신은 영웅이 될 것입니다. 제한된 예산을 어떻게 하면 균형을 맞출지 고심하며 초안을 만들어가지고 제시할 때, 조금 적어 보는 것들을 지적하면서 열을 내어보십시오. 당신은 굉장한 의로운 투사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은 선교를 위해서 주머니를 털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구제를 위해서 나의 것을 나누어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교회의 재정을 이렇게 사용하라 저렇게 사용하라 말을 하는 당신은 정말 자신의 재물을 쪼개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복음을 위해 선교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 투자할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선교나 예배나 기도나 금식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처럼 삶을 살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행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신앙적인 일과 세속적 일로 나누고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은 가치가 없으며 오로지 신앙적인 일을 많이 해야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잘못입니다.

사울의 균형을 상실한 과도한 신앙적 명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금식을 하면서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기본적으로 고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생활이란 고행이라기보다는 기쁨입니다. 미신을 비롯하여 기독교가 아닌 거의 모든 종교는 신앙생활이란 기본적으로 고행입니다. 정욕을 물리치고 고행과 금욕의 수련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가 성경을 깨달은 후에는 무릎으로 꿇고 고행의 길을 가던 길에서 일어섰던 것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은 고행이라기보다는 기쁨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지못해 억지로 고난의 길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기쁨으로 즐거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배도 기쁨으로 참여해야 하고, 선교를 하는 것도 기쁨으로 해야 하는 것이며, 기도도 즐거움이어야 하고, 심지어 금식도 자발적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울의 명령에 따라 힘들고 고달픈 금식을 억지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에 아주 나쁜 영향을 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나중에 고기를 잡아먹을 때,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피째 먹는 죄를 저질렀습니다(14:32). 이는 자발적 기쁨의 요소가 배제된 금식 뒤에 찾아오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강요되고 억지로 하는 신앙이 가져오는 해악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사울이라는 잘못된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온 민족이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비슷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신에 빠진 사람들, 이단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거짓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같은 피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신을 비롯하여 거짓 종교에 기대게 됩니다. 하지만 그 거짓 종교가 강요하는 피곤한 명령으로 인하여 그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지게 됩니다. 이단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미신 때문에 재산을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선택한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당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8:7). 다른 나라들에 왕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왕만 있으면 자신들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왕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울 왕 때문에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거짓 신을 세우는 자들은 언제나 이런 결과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성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편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이나 성공 등등 우리가 꿈꾸며 갈망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강요합니다.

우리가 기댈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2:2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이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사울을 따라가는 자들은 금식을 해야 했지만, 예수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양식을 얻고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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