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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의 자중지란(삼상 14:20-23)

20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21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블레셋 민족의 군사력과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력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자신의 병사와 함께 단둘이서 블레셋 진영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거의 자살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옛날 일본의 가미가제는 홀로 비행기를 몰고 가서 미군의 항공모함이라도 격파시켰지만, 요나단의 행위는 그런 효과도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화랑 관창이 홀로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지만, 무참히 살해당하고 돌아온 것과 같은 결과가 뻔한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소위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까 그 큰 블레셋이 맥도 추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시니까 블레셋 백성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민족이 어떻게 무너졌는가에 대해서 사무엘상 14:20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블레셋이 패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요나단과 요나단의 수종을 드는 병사 단둘이서 공격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무너지게 된 이유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는 교훈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탄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성도들끼리 싸우고 교회들끼리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싸움과 분열 뒤에는 정의를 향할 열망이 있습니다. 싸우는 양쪽 모두가 서로 분열하며 싸우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숨어 있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교만한 동기는 직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다가 결국 동시에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큰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오로지 사탄 마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이 종종 사탄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리고 같은 하나님 나라의 동료 군사들끼리 경쟁하고 싸우다가 피차 망하는 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누가 최고냐”라는 질문으로 서로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혜성같이 다윗이 나타나 골리앗을 무찔렀을 때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마땅한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국가의 재난을 극복하는 책임은 왕에게 있는 것이고, 그 일을 다윗이라는 왕의 신하가 해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울 왕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의 노래 소리가 그의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사실 이 노래는 사울 왕을 폄하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히브리 시의 병행 대구법의 특징에 따라, 이 노래는 사울과 다윗이라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이 적군 천천을 그리고 만만을 죽였다는 뜻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함께 높이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 세미한 표현이 마음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목적이 다윗을 죽이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협력하였더라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사울 왕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가 크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 주목받을 때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싫어합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그저 자신들의 교회의 유익일 뿐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축구에서 주목받는 선수는 골을 넣는 선수입니다. 그래서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골을 넣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 팀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왔을 때, 내가 직접 골을 넣을 수도 있지만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 선수에게 공을 넘겨서 그로 하여금 골을 넣게 하는 스포츠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팀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는 경향이 있고, 우리 교회가 모든 것을 다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각을 드러낸 성도와 두각을 드러낸 교회만을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5-9)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열매가 맺혀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씨를 심는 단계일 수 있고, 지금은 물을 주는 단계일 수 있고, 지금은 가지를 치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결국 누군가는 그 열매를 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따는 자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열매를 따지 못한다 할지라도 묵묵히 씨를 심는 이들이 귀합니다. 묵묵히 물을 주는 이들이 귀합니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블레셋 민족은 자중지란으로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은 힘을 합쳤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것이지만, 전에 블레셋과 함께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힘을 합쳤습니다(14:21). 아마 이들은 사울이 왕이 되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 블레셋 쪽으로 갔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이스라엘과 힘을 합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브라임 산지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함께 나와서 싸우고 도와주었습니다(14:23).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우리가 던질 질문은 “이것이 나에게 유익한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던질 질문은 “이것이 우리 교회에 유익한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가”입니다. 거시적인 관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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