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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싸움 (롬 7:15-25)

요즘 <수리남>이라고 하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리남에서 마약 왕국을 건설했던 조봉행이라고 하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꾸며낸 드라마인데요. 흥행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황정민과 그리고 하정우가 나와서 아주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아마 보신 분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보지는 못했지만, 그 드라마, 긴 드라마, 몇 부작으로 나와 있는 드라마를 간단하게 압축해 놓은 그런 소개 영상을 유튜브로 보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까 정말 흥미롭고 재미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게 뭐냐면 이 수리남이라고 하는 남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그 나라에서 마약 조직을 이끌고 있는 그 주인공이 목사라고 하는 직업으로 등장한다고 하는 겁니다. 목사 행세를 하면서,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그곳을 하고 있는데, 목사도 마약왕이고, 그곳의 신도들도 모두 마약 조직이 되어 있어서, 그 마약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교회 용어들을 아주 아주 찰지게 쓰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모습이 아주 특이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목사를 마약왕이라고 설정을 하게 되면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것이죠. 정상적인 것을 말하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장기매매를 한다든가, 선생님이 인신매매를 하고, 그리고 국정원에서는 간첩 노릇을 한다. 이렇게 반전을 줘야, 그래야 영화적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목사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목사라고 하는 신분으로 마약왕을 하고 있는 그 설정이 그럴듯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와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실제 그 조봉행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 감독이 그럴듯하게, 그렇게 한 것이죠.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크리스천들이나 목사님들의 반응은 아주 씁쓸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좋은 모습 정말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폄훼했다고 하는 시도라고 분개하는 그런 반응들이 sns에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동네북 신세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어도 한 가지로는 긍정적인 면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목사라고 하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믿을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경각심을 일깨워준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목사님들도 있지만, 그러나 목사 행세를 하는 사기꾼이 분명히 있는 것이고, 가짜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항상 가짜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예를 들자면, 위조지폐라고 하는 것이 왜 등장합니까? 위조지폐가 등장하는 것은 진짜 지폐의 가치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 위조지폐가 등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위조지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제는 더 이상 현금 거래를 하면 안 되겠구나.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돈 가지고 살 수는 없구나”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짜를 조심해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경각심으로 결론을 짓는 것이 옳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가짜 목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같은 걸 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정말 분별을 잘해야 되겠구나.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분별하면서 신앙생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짜에 속아 넘어갈 수 있겠다고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환자를 돈벌이로 알고 있는 그런 나쁜 의사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최근에 아파가지고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을 하지 않고, 온갖 검사를 다 하더랍니다. 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 한국으로 들어오신 분이었는데, 기록에 진료를 받은 기록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모든 검사를 다 했는데, 정작 문제는 발견하지 못한 채, 아마 위가 나쁜 것 같으니까, 위장 장애가 일어난 것 같으니까, 물만 좀 많이 마시세요. 막 그렇게 이야기해서, 그 의사 말을 듣고서 물을 많이 마셨더니, 퉁퉁 퉁퉁 부으면서 전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그냥 병원에서 나와버렸답니다.

그리고 다른 병원에 갔더니 신장에 문제가 있어서, 신장 투석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응급 처치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 세상에는 정말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려고 하는 그런 정말 신실한 의사가 있지만, 그러나 개중에는 간혹 가다가 환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고 있는, 그런 나쁜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다시는 병원에 안 가야 되겠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의사를 찾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이 세상에 나타날 거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양의 옷을 입은 가짜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 있는데,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가짜들이 등장해 왔고, 그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해왔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가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그런 긍정적인 역할이 그나마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물론 부정적인 영향도 많이 있을 것 같아서 속상하죠.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믿음의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만들고, 박탈해버리게 만드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있을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러면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부터 20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데,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겁니다. 열매를 보고, 그게 어떤 열매인가를 보면서, 그 나무가 진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나무만 보고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 나무만 보면,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고, 다 똑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과연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면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가짜와 진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명함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그 겉모습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 알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에서,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런 열매가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종종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하곤 합니다. 저 교회를 봐라. 저 사람을 봐라. 열매가 저렇게 많이 맺히고 있지 않는가? 열매가 저렇게 많이 맺히니까, 정말 짧은 시간에 수천 명이 모여들고, 수만 명이 모여드는, 그런 대부흥을 일으키기 때문에, 저기에는 무엇인가 있는 것이고, 저기는 참된 선지자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유튜브 조회 수가 몇만 명에 이르게 된다고 하면, “저기는 정말 진짜가 아니겠는가?”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런데 그런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도 모이지 않고, 유튜브 조회수도 몇 명 되지 않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런 사역을 한다고 하면,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고, 가짜일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열매로 알리라고 했는데, 열매가 없고, 열매가 많고, 열매가 많으면 진짜이고, 열매가 적으면 그런 순 엉터리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많은가? 열매가 적은가로 그 나무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아까 읽었던 그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부터 14절의 말씀인데,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어떻게 되고?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어떻다? “적음이라”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사람들이 많이 열광하면, 그게 진짜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멸망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점을 예수님께서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많으면 가짜고, 적으면 진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 말씀이 무엇이냐면,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는 얘기는 좋은 열매가 맺히는가? 많이 맺히는가, 적게 맺히는가가 판단 기준이 아니라, 많이 맺히든 적게 맺히든, 좋은 열매가 맺히면 좋은 나무고, 나쁜 열매가 맺히면, 그것이 많이 맺히든 적게 맺히든. 나쁜 열매가 맺히면 그 나무는 나쁜 열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열매인가 나쁜 열매인가로,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어떤 열매를 맺어야 되는가?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이 나타나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선한 행실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야, 그래야 진짜 성도라고 말할 수 있고, 진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고, 진짜 사역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충분히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진짜이고 가짜 열매를 나쁜 열매를 맺으면 가짜라고 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또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다고 한다면 진짜는 정말 늘 항상 좋고, 거룩하고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짜일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들은 늘 넘어질 수 있겠지만, 진짜 목사님이라고 한다면, 진짜 장로님이라고 한다면, 진짜 권사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정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일반 성도들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거의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고,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 그 모습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이내 실망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세상에 목사가 이럴 수 있나? 세상에 장로가 이럴 수 있나?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런데 그것은 우리 성도님들이 보는 관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우리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세상에 교회 다니는 놈이 그런 식이냐?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이 그따위밖에 못 살아? 하면서, 우리를 향해서 가짜라고 하는 딱지를 붙여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 15절에서부터 25절의 말씀을 우리가 읽었는데요. 오늘 이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7장 15절에서부터 25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어요. 우리, 내 안에, 내 안에 죄성이 있어서, 선을 행하고 싶지만, 오히려 늘 악을 행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수렁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약이에요. 나는 선을 행하고 싶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내 마음은 정말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고, 내 안에 잘못된 자아가 있고, 그리고 죄의 법이 살아있어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나를 이기고, 내가 선을 행하고 싶지만, 늘 악을 행하고 있는데, 늘 악에 넘어지고, 악을 저지르는 모습이 있는데, 도대체 이런 수렁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나의 이 비참한 상태를 누가 건져낼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요약입니다. 긴 말씀을 읽었는데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죠.

로마서 7장의 말씀을 놓고서 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는 이 울부짖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울부짖는, 이 부르짖음이 도대체 누구의 부르짖음일까? “도대체 누구의 울부짖음일까?”라고 하는 문제로, 로마서의 전문 학자들이 서로 토론하면서 열띤 논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울부짖음이 누구의 울부짖음이라고 생각합니까? 첫 번째,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의 상태에 있던 사람의 울부짖음인가? 2번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현재의 울부짖음인가? 누구의 울부짖음처럼 생각이 드십니까? 바울 사도가 아직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그 상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내가 왜 이러나?” 하면서, 그때 가졌던 그 느낌을 지금 여기에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지금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잘 전하고 있고 그런 상태의 그 바울 사도가, 지금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지금 이 고백을 울부짖음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여러분 어떤, 지금 바울 회심 이전의 바울의 고백으로 보십니까? 회심 이후의 바울의 고백으로 여러분들은 보십니까? 어떤 게 맞는 것 같습니까?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학자들도 서로 의견이 갈려서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 울부짖음은 현재 바울의 상태에서 부르짖는 울부짖음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바울 사도가 이제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어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 바울 사도의, 그 사도가 울부짖는 그 부르짖음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인간의 모습과 똑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갈망하냐면, 한 방에 변화되는 그 변화를 갈망합니다. 내가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돼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늘 갈망을 하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저 참 미숙한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정말 예수님을 경험하고서, 선교사, 단기 선교를 갔다가, 좀 변화가 되고, 그리고 수련회를 가서 변화가 되고,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서 변화가 되고, 혹은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변화가 되어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그날을 우리는 늘 기대해요. 우리는 부모님으로서, 자녀들을 향해서 가르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방법들을 배우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고 하는 그런 프로그램처럼, 그런 강영욱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어떤 조치만 몇 가지 취해 놨더니, 개가 완전히 변화돼 버려지고, 전에는 막 짖던 그런 개가 그런 조그마한 무언만 해주었더니,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완벽하게 변화되는 것을 기대하는 게 우리들의 기대입니다.

사실 그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으로, 교회를 핍박하면서 다녔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은 180도 변화되어서, 이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완전히 변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완벽한 180도 변화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바울 사도가 예수님이 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완벽하게, 영화로운 단계로 뛰어 넘어가 버려서, 갑자기 성스러운 성인이 되어 버려서,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는 더 이상 그 마음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아무런 악한 일도 생각하지 않고, 완벽하게 완전한 경지에 오른 그런 단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바울에게 옛사람이 남아 있는 것이고, 죄성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내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문득문득 악한 생각들이 떠오르게 되고, 나쁜 짓도 하게 되고, 분노하게 되고, 탐욕의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들을 행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래서 크리스천이 되면, 이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의 자식이 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버리는 겁니다. 신분이 달라져 버린 겁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지옥 자식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천국의 자식이 된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는 이제부터는 완벽하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죠.

그래서 불신자들이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너희들이 크리스천이라매? 그런데 어쩌면 우리랑 똑같으냐?” 욕하는 거죠. 자기들은 나쁜 짓 하는 게 당연해요. “근데 크리스천인 네가 어떻게 나쁜 짓을 하냐?” 하면서 조롱하는 겁니다. “어떻게 나같이 나쁘냐?”라고 하면서 비난하는 것이죠.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우리가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다고 해서, 그 순간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게 아닌 겁니다. 어느 날 목사 임직을 받게 된다고 해서, 그때부터 완전히 성스러운 사람으로 변화되거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장로로 임직 한다고 해서, 임직 받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성스러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임직하고 나니까, 변화가 많이 있더라고요. 전에는 열심히 안 내던 분들, 또 열심을 내기도 하고, 전에 안 나오던 예배 시간에 또 나오기도 하고, 좀 더 헌신하기도 하고,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완벽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 겁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옛사람이 살아 있고, 오늘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겉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고, 죄의 법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완성되어 버린 것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다시 태어날 때는 장성한 어른으로 태어나는 겁니까?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겁니까?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거예요. 마치 우리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100%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사람 구실 하려면, 더 자라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순간부터 100퍼센트 하나님의 자녀, 사탄의 자녀가 아니라, 완벽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지만, 그러나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영적인 훈련과 성숙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 새로 막 믿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완전히 변화된 것 같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완전히 180도로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성의 단계로 간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성숙의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인 것이죠.

앞으로 성숙해져 나가야 될 과제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 성숙이 언제 완성이 되는가? 언제 완성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완성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고, 그 전에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넘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냥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 죄성이 서로 싸우는, 끊임없는 싸움이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넘어질 때가 많아요. 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넘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늘 회개하며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보고 싶습니다. 어느 누군가, 우리 크리스천이 넘어지고 실수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가짜 크리스천일까요? 만일 어떤 목사님이나 어떤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어떤 교회 직분자들이 살아가다가 영적으로 실수하고 넘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알 것이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나쁜 열매를 맺고 있는 우리는 다 엉터리요, 다 가짜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목표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표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표를 달고 있고, 여기다가 대통령이라고 붙였나요? 여기다가 목사라고 하는 딱지를 붙이고, 여기다가 장로라고 하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고 해서, 그냥 믿을 게 아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고 뻔뻔하고 회개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나쁜 열매만 맺고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건 가짜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겁니다. 명찰만 보고, 그 명함 내미는 것만 보고, 어디서 목사 안수받았다고 하는 것만 보고, 그냥 믿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라고 할지라도 참된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주님처럼 완벽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예요.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울부짖는 겁니다. 나는 선하게 살고 싶은데,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여기서 곤고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번역이 좀 애매하게 번역이 됐는데요. 곤고하다고 번역하기보다는, “비참한 사람이여”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이 악한 일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고 하는, 그것을 괴로워하면서, 정말 선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이 우리들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성도들은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늘 넘어지고 실수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배 째라. 내가 죄지어도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그런 뻔뻔함의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 늘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주님, 내가 이렇게 연약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것입니까?” 하면서, 거룩한 소망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고백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25절의 말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내 자신이 하나님의 범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늘 육신의 법을 섬기는, 우리 육신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기 때문에, 절망적인 게 내 모습이지만, 감사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가짜라고 평가해 버릴 것이 아니라, 순 아무런 싹수가 노랗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너는 엉망진창이구나. 꺼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늘 거룩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이제는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넘어지면 또다시 갈망하며 거룩한 절규를 외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당일 완벽한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늘 넘어지게 되어 있는데, “어차피 넘어지는 거야” 하면서 뻔뻔한 인생을 살아갈 게 아니라, 주님 앞에 울부짖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이 승리할 때마다, 사람을 보면서 사랑의 마음과 긍휼의 마음이 아니라, 미움의 마음이 내 마음을 장악할 때마다, 울부짖어야 되는 것이죠. 내 마음 가운데 긍휼과 인자함과 자비의 마음이 솟는 것이 아니라, 탐욕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승리할 때마다 울부짖어야 되는 것이죠. 너그러움과 인자한 모습이 아니라, 분노가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해 버릴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것이고, 영적인 나태함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 버릴 때,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울부짖으며, “하나님,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침에 아주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새벽에 있었던 손흥민 선수가, 그동안 여덟 경기에서 골 한 번 넣지 못하던 그런 손흥민 선수가 이번 레스터전에서는 벤치에서 시작했어요. 작년에 득점왕을 거머쥐었던 손흥민 선수가 벤치에서 후보 선수로 시작하게 되는 그 쓰라린 마음으로 경기를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그 벤치에 앉아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언론에서 “손흥민 빼라”라고 하는 그 기사를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벤치에 앉아 있는 그 모습을 봤는데, 너무나도 처량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수가 후반에 들어가서, 첫 골을 멋있게 집어넣는데, 첫 골을 집어넣고도 웃지를 않아요. 만족함이 없어서, 또 하나의 골을 집어넣고, 그래도 웃지를 않아요. 골 세 개를 넣고, 해트트릭을 넣고, 그제서야 살짝 웃더라고요. 골을 넣고 싶은데, 못 넣었던 그 마음의 한, 그게 너무나도 그 손흥민 선수를 정말 힘들게 만들었는데, 오늘 그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그렇게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골을 넣어야 되는데, 못 넣고 있어서, 마음이 답답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또 나 넘어지고, 또 실패하고, 또 미워하는 마음이 내 마음을 장악해버리고, 분노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 솟아날 때, 그렇게 쓰러지는, 죄악에 의해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이 괴로워야 되지 않겠어요?

“주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저 사탄의 골에, 골대에 골을 쳐놓고 싶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사랑의 모습이 보이고 싶습니다. 인자의 모습,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주님. 보소서.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의 마음을 내게 주셔서. 주님의 뜻대로 거룩한 삶에 승리의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간절한 믿음의 소망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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