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6-8)

 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왜 우리는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는가? 늘 불평만 하면서 사는가?

여러분들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은 아주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고 꿀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참 멋진 목소리를 가진 그런 연예인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 연예인이 누가 있죠? 아마 현빈을 떠올렸을 수 있겠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이라고 하는 그 드라마를 하면서 정말 멋진 그 청년이 꿀 떨어지는 그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때 참 우리들의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에 대한 팬덤이 아주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연예인들을 보면서 좋아할까요? 왜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말 멋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뛰어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포츠계에서 아주 뛰어난 기능 역량을 발휘하는 선수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다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수 가운데 손흥민 선수를 알고 계십니까? 잘 알고 계시죠. 지난 Aston Villa 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엄청난 기량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정말 우리나라 선수가, 아시아 선수가 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다 열광하고,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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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그렇게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엄청난 그런 성과를 보여주었을 때, 미국의 nbc 스포츠라고 하는 곳에서 손흥민 선수를 데려다 놓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인터뷰를 많이 하는 가운데 레베카 로우 하는 로우라고 하는 그런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요. 그 아나운서가 이 선흥민 선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은 겁니다. 아주 그윽한 눈으로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또 대화를 하면서 그래서 손흥민 선수와 대화를 마치고 손흥민 선수가 이제 퇴장할 때, 그 여기자가 다른 동료 기자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냐 하면, 사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나, 저 선수 너무 좋아. 나, 사랑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것이 정말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튜브를 한번 찾아봐서 어떻게 했나 하고 보려고 했더니, 아 그 장면은 무음으로 처리했더라고요. 아마도 결혼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봐, 무음 처리를 했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사랑한다는 얘기는 정말 좋아한다는 얘기죠. 정말 그 선수가 너무나도 뛰어나고 너무나 좋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나 아주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하다가도, 그런 선수들이 갑자기 실력이 없어지거나,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한때 열광했던 그런 팬들이 돌변해 버리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하는 축구팀에 해리 머과이어라고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몰라도 됩니다. 근데 그 선수는 어떤 선수냐면, 엄청난 돈을 받고서 이적해 온 선수입니다. 정말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고, 그래서 그 선수가 엄청난 기량을 발휘해 놓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엄청난 부진입니다.

지난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4대 0으로 지게 되었는데, 그때 부진한 활약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서 골을 먹게 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자, 그 해리 머과이어라고 하는 그 선수의 집에 폭탄을 설치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그런 위협이 있었다고 해서 신문의 뉴스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 선수가 생긴 모습이 좀 나이가 들어 보이길래, 그래도 좀 꽤 나이가 있는 선수인가 했더니, 알고 봤더니 1993년생이더라고요. 제 둘째 딸보다 한 살 많은 그런 어린 선수인데, 참 팬들로부터 그런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우리 사람들이 하는 이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그것은 뛰어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죠. 뛰어나기 때문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겁니다. 그 선수가 나를 즐겁게 해주고, 나를 만족시켜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폴 트립이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분이 쓴 <복음 위에 세운 결혼>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 그 책을 보여주고 싶은데요. 이 책은 정말 우리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경적인 결혼이 무엇인가? 부부 관계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정말 잘 써놓은 책이기 때문에, 한번 한 번쯤 구입하셔서 읽어본다고 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이 폴트립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썼냐면, 이런 말을 했어요.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서로 상당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나에게 유익이 되고, 내 계획에 내가 생각한 방식에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일 수가 있다고 진단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세운 그 계획에 가장 잘 들어맞는 배우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만일 그 사람이 더 이상 나의 계획에 맞지 않게 되고, 내 계획에 들어맞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돌변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정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를 향한 이기심 때문에 상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한 번은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만족시켜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한 에 있어서는 좋아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돌변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사랑과 폭탄 위협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사랑하셨는가?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족시켜주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 5장 6절에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5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는데, 목숨을 내어주셨는데,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왜 우리를 사랑했는가? 우리가 뛰어나고, 우리가 정말 멋지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다고요?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튼튼하고 건장할 때가 아니라, 연약해서 병들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 같고,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했을 때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아스테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연약하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성경에서는 다양하게 이 단어를 번역했습니다. 연약할 때, 혹은 아플 때, 병들었을 때를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손흥민 선수처럼, 그리고 현빈이라고 하는 그런 연예인처럼,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병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아무런 능력이 없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뛰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별 볼 일 없고, 나약하고, 심지어 병들어서 아무것도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연약한 자는 누구입니까? 연약한 자는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는 자에요. 우리는 마치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중풍병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중풍병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어요. 그래서 이 병을 낫고 싶어서, 치유자 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 앞에 나아갈 능력이 없어요. 걸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움직일 수가 없는 거에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마치 38년 된 병자와 같아서, 내 몸이 낫기 위해서는 물이 동하는 순간에 제일 먼저 뛰어가고 싶은데, 그런데 뛰어가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지만 그러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이고, 연약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데, 그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주님께서는 “탈락입니다”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연약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또 표현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5장 6절에서, 또 어떤 식으로 우리를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를 “경건하지 않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성산에 올라갈 자격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자였는가? 경건하지 못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15편에 보면 이런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선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죠.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로운 자죠. 거룩한 자죠. 의롭고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읽은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었는데, 우리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죄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단순히 연약한 정도가 아니라, 단순히 경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 심각하게 말하면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사망이죠.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사망을 당해야 될 것인데, 심판을 당해야 될 것인데, 죄인인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건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참사랑, 그 사랑을 확정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또한 우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이라.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연약한 자를 향한 사랑이고,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고, 죄인을 향한 사랑이고,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해 주셨는가요? 로마서 5장 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여기서 “기약대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기약대로”라고 하는 말은 기약대로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바로 그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영어로는 그렇게 번역해 놓았는데요. 헬라어로 보면 “카타 카이론”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카타”라고 하는 말은 “무엇 무엇에 따라서” “뭐 뭐 할 때”라고 하는 말이고요. “카이론”이라고 하는 말은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하는 말의 목적격인데, 시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시간에”라고 하는 말이죠. 그러니까 직역하면, 그때 우리가 연약한 그때, 주님께서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해 주셨는가? 그때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시간 끌다가 마지못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순식간에 나갔다는 겁니다. 그 바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황금 시간이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지게 된다고 한다면, cpr을 하게 됩니다. cpr을 해서, 그 순간에 cpr을 하게 되면 살려낼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cpr을 하는 것이 늦어지게 되면 살려낼 수 없잖아요? 바로 그때, CPR을 해서 살려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살려내셨는가? 우리가 연약한 그때 그냥 방관해 두고 모른 척하고 나와 상관없다 하시면서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향한, 더 나아가서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만 상대가 실력이 떨어지거나,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거나,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거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마음이 돌변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을 모른다고 방황하며 떠나갔을 때, 우리를 그냥 내 팽개쳐버린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원수들을 위하여 희생해 주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제 가족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희생할 마음이 있어요. “패트릭 몰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거울 속의 남자>라고 하는 책을 보면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 리틀포드”라고 하는 어떤 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어떤 그 필 리틀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 21살짜리 마크라고 하는 아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알래스카로 연어 낚시를 하기 위해서 여행을 갔습니다. 수상 비행기를 빌려서 그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라고 하는 추운 지방에 가서 연어를 낚기 위해서 잡기 위해서 놀러 간 거죠.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산란하기 위해서 돌아오면 그때 잡는 거잖아요? 수상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까지 날아가서 비행기를 세우고 바다 위에 세우고, 그리고 그 바다에서 그 비행기에서 내려서 연어를 잘 잡을 수 있는 상류 지역으로 걸어가 거기서 고기를 낚고 돌아오게 됐습니다. 한참 고기를 낳고 돌아오니까 바닷물이 쭉 빠진 겁니다. 썰물이 되어서 그 수상 비행기가 모래톱에 얹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물이 차야 그 바다 위에서 달려서 비행기가 뜨게 되어 있는 것인데요. 모래톱 위에 가라앉아 있는 그 비행기를 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날 밤은 비행기 안에서 자기로 결정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까 물이 들어왔어요. 비행기가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동을 걸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동을 걸고 해서, 쫙 달려서 이륙하려고 했는데, 아뿔사 큰 일이 난 겁니다. 그 물 위에 떠 있게 만든 부력을 할 수 있는 그 플로트에 거기에 공기가 들어가 있어야 되는데, 바닷물이 빠지면서 비행기가 내려가다가 부딪혔는지 돌에 부딪혔는지 깨어졌고, 그 깨진 사이로 바닷물이 다 들어차 버려서 한쪽에 물이 가득 차 버린 겁니다. 다행히 그래서 그 비행기가 제대로 날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바다에 꺾여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헤엄쳐야 되는 거죠. 같이 갔던 일행들은 열심히 헤엄쳐가지고 나와서 밖에 나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필 리틀 포드 박사가 못 나오는 거예요. 필리트포드 박사도 수영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오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필 리틀포드 박사가 아들을 붙잡고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허둥버둥거리면서, 거기서 그렇게 노력하고, 자기 혼자 산다고 하면 그냥 헤엄쳐서 나와서 살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혼자 나와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나오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을 붙잡고 그 아들을 끌어내려고 하다가, 이안류가 쳐서 그 리틀포드 박사는 그냥 아들과 함께 바닷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안타깝게 멀리서 보아야만 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 같아요.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내 목숨이 끊어져도, 그 아이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것이 우리 부모들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것이죠. 2011년 2월에 나온 기사가 하나 있는데요. 어떤 캐빈 조던이라고 하는 그런 운동 선수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야구 선수인데요. 아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서 고등학교 때 아주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입단 제의를 할 정도로 이렇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선수가 케빈 조단이라고 하는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는 프로야구 구단으로 바로 직행하기보다는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 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 입학을 해서 야구부에서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 입학했는데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신장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석을 해야만 하는 그런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휴대용 투석기를 차고 있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야구 선수가 그걸 자고서 운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신장을 기증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맞는 신장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가족들에게서도 맞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원을 했습니다. 내가 신장을 주겠다고 해서, 자원을 했는데 신장을 줄 수 있도록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대학의 야구 코치였습니다. 톰 월터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사진을 한번 잠깐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톰 월터라고 하는 야구 코치가 신입생 야구 선수를 위해서 자신에게 있는 신장 하나를 떼어서 기증한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여러 신문에 보도되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신장이 아무리 두 개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자기 가족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에 난 거죠. 뉴스에 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뉴스에 난 거죠.

가족 간에는 줄 수 있어요.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어떤 성도님은 신장이 망가졌는데 언니로부터 신장 이식을 받았어요. 그런데 뉴스에 안 나더라고요. 왜 안 나죠?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니까. 그건 줄 수 있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관계니까, 줄 수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고, 자녀가 부모에게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코치가 선수에게 주는 것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뉴스에 난 거예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까, 뉴스에 난 거죠.

그런데 이런 뉴스를 보신 적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전과 18범이고 살인범인데, 그 살인범에 의해서 자신의 아들을 잃어버린 그 피해자가 그 전과자를 위하여 신장을 떼주었다고 하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와요. 쫓아가서 죽이고 싶은 것이지, 그 사람 만나면 쫓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지, 그 사람을 위해서 신장을 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였고, 경건한 자가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자였고,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셨습니까? 사랑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쓸모 있어서, 우리가 뭔가 하나님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유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있을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왜 구원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면서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이래봬도 봉사 많이 하니까, 당연히 날 사랑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여전도 회장도 하고, 주방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성가대에서 수고도 많이 하고, 나는 전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내가 이 정도면 인텔리이고,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정도는 사랑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목사요, 장르니까, 내가 권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감사가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그만 일에도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망각해 버릴 때, 우리는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게 되고 시험에 빠진다고 믿습니다.

워낙 이런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매일 매 순간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원해 주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날마다 날마다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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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6-8)

믿음은 모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놓여져 있고 준비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연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안 믿으시나요? 믿으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은총 축복을 누리는 게 맞는 것인가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 놀라운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환난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겁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때부터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우리들의 믿음의 길에는 이렇게 고난이 있고, 험난한 여정을 우리가 걸어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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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부터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불시험과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인데,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게 될 건데,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고난이 오는 게 정상적인 것이지, 비정상적으로 이상하게 우리들에게 고난이 다가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스러운 정상적인 것이지,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성경은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라고 하시는 분께서 한 말 가운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그래서 아주 유명해졌는데, 그런데 청춘만 아프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다 아픈 것이죠. 아프니까 인생인 것이고, 아프니까 우리들의 삶인 것이죠. 사도행전 14장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무엇이 있어야 되는가? 많은 환난이 있어야만 하고,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환난이라고 하는 계급장을 얼마나 많이 달았느냐에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천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전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반드시 아픔이 있고 반드시 슬픔이 있고 반드시 환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러한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그 환난을 맞이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한다면, 고난을 만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반응입니까? 1번. 짜증 내고, 절망하고, 불평하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 원망의 대상을 찾아서 분풀이한다. 2번. 오히려 기뻐하고, 오히려 감사한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좀 크게 좀 대답해 주세요. 힘 좀 나게 몇 번이 정답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환난을 만나면,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냥 절망해버리고 쓰러질 게 아니라,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오히려 기뻐하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에요. 기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슬픈 일이 있어도 감사하라는 얘기고, 기뻐하라는 얘기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슬픔을 만난 사람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슬픈 마음을 무시하고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 슬퍼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찬들이 욕을 많이 먹는데요. 비난을 많이 받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 사람의 슬픔에, 고난에 공감하지 못한 채, 정답만을 말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주 차갑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하기를, “슬퍼하지 마라.” “오히려 성경에 기뻐하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건 그렇게 큰 게 아니고, 감당할 만한 것이야”라고 말하고,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왜 그래?”라고 말하고, 왜 우냐고 이야기하는 그렇게 정말 공감 능력이 떨어져 버린 채, 그냥 정답만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그런 크리스찬들이 종종 있습니다.

내가 하는 그 말이 내가 던진 그 말이 얼마나 그 사람에게 아픔이 되고, 내가 한 그 표현이 얼마나 그 슬픔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찢어버리는지 공감하지 못한 채, 정답만을 이야기해버리는 정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크리스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엄청난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자녀들은 다 죽어버렸고, 모든 재산은 다 날라가 버렸고, 그리고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때, 옆에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니 죄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는 그런 차가운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욥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비슷한 일들을 우리들이 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맞는 말, 2번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그게 옳은 게 아니에요.

말은 언제 해야 되는가? 때와 시기와 장소를 가려서 이야기해야 되는 건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이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대답해 버려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히려 더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제발 우리 예수 비전교회 성도님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만일 우리 가운데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우리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기뻐하라고 정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야 될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같이 울어주고 같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우셨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게 정상적인 반응인 것이죠. 그런데 공감하지 못하고 정답만을 이야기하는 입만 살아있는 크리스찬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특히 그런 실수들을 누가 많이 하냐면 우리 목회자들이 더 많이 하는 거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리고 가르치다 보니까, 그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공감하기보다는 정말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말들을 많이 해버릴 수가 있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선포하면 나는 선포를 잘했다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한 시간에, 제때에 전해져야 그것이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은 말씀이 되는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는 이 말씀,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은 언제 말해야 되나요? 평상시 얘기해야 되는 거에요. 평상시. 평상시에 “환난을 당해도, 어려움을 당해도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이 있고, 환난을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앞에 가서 기뻐하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그 순간에는 함께 울어줘야 되는 거에요. 함께 울어야. 함께 정말 애통해야 하는 것이죠.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 누군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갖다 대고, 이른 번씩 7번 뿐만 아니라, 정말 7번씩이 아니라 이른 번씩 7번까지라도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은 언제 가르쳐줘야 되는 거예요? 언제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평상시에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고,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해서 고통스럽게 정말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상황 가운데는 같이 공감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때와 장소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용서하라고 하는 뜬금없는 소리 하면서, 화를 더 부추기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성폭력을 당하고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용서하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크리스션들 가운데 많이 있어요.

얼마 전에 제가 친하게 지내는 형님 목사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설교 시간에 우리 나라의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협력해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자기 교회에 있던 사람들 몇 명이 굉장히 반발하더라고 하면서,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왜 반발하는지 모르겠다고 저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형님, 그 이야기는 선거 전에 이야기하고, 선거 다 끝나서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나도 지금 이 말을 지금 얘기할 게 아닌데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형님, 마음이 아프겠어요”라고 얘기만 하고 끝내고 그랬어야 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가서, “그러니까 평상시 공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해버리는 어리석은 부모가 우리들이에요. 아, 시험 망치면,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괜찮아”라고 그때는 얘기해줘야 되는 거예요. 시험 망친 아이에게 가서, “그러니까 평상시에 일찍 일어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숙제도 잘해야지. 놀지만 말고”를 그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그건 다른 때 이야기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 아이에게는 마음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로마서 5장 3절에서는 환난 중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읽고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을 로마서 5장 3절 가운데 기록했는데요. 이 말을 했던 바울 사도는 정작 자기 자신도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질병이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정말 바울 사도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이었는데요. 바울 사도가 기도하는 가운데 병자가 낫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는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 사도의 질병은 자기가 고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해가 되고, 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여러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차라리 그 아픔이 있는 게 너한테 유익이다. 네 질병이 있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가 있기 때문에, 네가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겸손하게 일할 수 있으니, 약한 것이 강하게 되는 것이고, 약한 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다음에, 바울 사도가 했던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약함을 자랑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여기서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한번 제가 만든 도표를 한번 보시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라고 했던 그 말씀이 헬라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동사를 사용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동사가 오늘 읽은 로마서 5장 3절에 있는 단어와 똑같아요.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나니”라고 하는 말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그런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가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하는 이 말은 바울 사도가 그것을 기뻐했다라고 하는 말이에요. 나의 약함이 있는데, 나의 질병에 대해서 내가 기뻐한다. 나의 약함에 대해서 기뻐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이 아픔이 있고, 질병이 있고 환난이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환난이 그냥 환난으로 보이기만, 하지만 그러나 이 환난이 우리를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그 것으로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약함도, 환난도, 고난도, 슬픔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그냥 우리를 박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짓밟아버려서 우리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이 긍정적인 아주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한 것들에 대해서 환난에 대해서 기뻐한다고, “카우카오마이” 기뻐한다고 자랑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은 로마서로 강의를 아주 오랫동안 하신 목사님이신데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의가 아주 유명한데, 그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뭐라고 설명했냐면,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되는 게 아니라, 환난 “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환난이 있지만, 환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환난, 그것 때문에 기뻐해야 된다고 하는 것으로 설명했는데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백신과 같은 거예요. 백신이라고 하는 것 우리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코로나가 처음 시작되면서 우리가 간절하게 기대했던 바가 무엇이냐면, 어서 빨리 백신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다들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미국에서 백신이 이제 발명되어서 판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여러분 좋았습니까? 나빴습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 곧 코로나가 끝날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백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예방 접종하게 되면, 그러면 결국 우리 몸의 능력이 생겨서 면역이 생겨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침투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그래서 가볍게 지나가거나 그리고 아주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줄 거라고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백신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하면 굉장히 아픈 것이었어요. 여러분 아팠습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습니까? 아프더라고요. 1차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2차 때 되니까 하루 종일 아프더라고요. 열도 나기 시작하고, 이러다가 내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로, 백신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백신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뻐했어요. 왜 기뻐했어요? 이것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근데 환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환난도 힘들어요. 아파요. 괴로워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환난을 통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되는 것이, 그러니까 백신 나왔을 때 여러분 어떻게 했습니까? “야, 백신이다”라 했던 것처럼, 환난이 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야, 환난이다.” 좀 과장돼서,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그런데, 그게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18절 말씀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아주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환난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이고, 결국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해 줄 거라고 하는 것이고요. 야고보서 1장 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환난이 왔을 때 어떻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환난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래서 환난을 당했지만 기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절망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환난은 환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사탄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리고 소망을 얻게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환난을 만났을 때 절망한다면, 사탄의 목적에 굴복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뻐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무엇을 이룬다고요? 인내를 이룬다. 우리가 인내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데요. 환난을 경험하게 될 때 인내가 커져가는 것이죠. 누가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잠수를 해서, 그래서 숨을 얼마나 안 쉬는가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폐활량이 커지고 그리고 숨을 오래 더 참을 수 있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연습을 할 때 그 능력이 길러지는 것처럼, 환난이 있을 때 우리의 인내가 커지는 것입니다. 인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아가게 될 때 인내가 커지는 것이고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말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연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도키메”라고 하는 단어는 무엇을 나타내냐면, 연단이라기보다는 “단련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결과” 그래서 “진짜라고 하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 9절에서,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도키메_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라고 하는, 그렇게 번역했는데 로마서 5장 4절에서,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고 그렇게 번역했는데, 여기서 연단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어떻게 번역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냐 하면, 메시지 성경처럼 번역하는 게 훨씬 더 이해하기가 편할 겁니다. 메시지 성경에서 번역한 게 무엇이냐면, 쇠를 연마하듯 우리를 단련시켜준다는, 그러니까 어떤 것이 진짜냐 가짜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불속에 넣어가지고 단련을 시키면, 연단을 시키면 진짜는 진짜로 증명이 되는 거죠. 불을 통과하는데, 가짜는 다 다 벌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고, 진짜는 순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이 환난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 참된 믿음이라고 한다면, 가짜 믿음은 낙망해버리겠지만, 참된 믿음은 참고 견디고 이기며,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해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죠. 환난이 좋을 이유는 없습니다. 고통스럽죠. 달갑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십자가를 내가 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좀 지나가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는 거에요. 십자가에 달리셔서, “별것도 아니네” 하면서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으면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것이 고난이에요.

우리가 만나는 고난이 그렇게 아픈 거죠. 쓰라린 거죠. 하지만 아무리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인내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소망을 붙잡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기에,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 보호하시고,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랑하는데,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더 많이 신경을 쓰고 더 많이 애정을 쏟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언제였죠? 늘 사랑하고 늘 신경을 쓰지만, 특별히 더 신경 썼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였냐면, 우리 아이들이 아플 때예요. 우리 아이들의 몸에서 열이 나고, 그래서 아이가 죽겠다고 신음하고 있으면 부모는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는 겁니다. 밤새도록 뜬눈을 세우고, 피곤한 몸이지만 눈 한숨 붙이지 못하고, 그 자녀를 향해서 물수건을 갈아치워 가면서 아이의 몸에 물을 발라주면서, 그 아이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 이 아이의 상태를 계속 뜬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아이를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그냥 내 팽개쳐 버리고, 외면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오셔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져주셔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신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당하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땅해야 될 그 죄의 책임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이 환난이 나에게 어떠한 놀라운 은혜와 소망으로 이끌지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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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은총과 믿음 (롬 4:16-22) +++ 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지난 주간에 저하고 제 아내는 정말 맛있는 외식을 한번 했습니다. 100만 년 만에 한번, 모처럼 나가서 외식을 한번 했는데, 오마카세라고 하는 일본어 단어가 있는데 혹시 아시나 모르겠어요. 맡긴다는 말이죠. 차려주는 대로 그냥 셰프가 만들어주는 대로 믿고 먹는 그런 스타일의 식당에 고급 식당에 가서, 저하고 제 아내가 음식을 먹으면서 아주 행복한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전주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식당도 있구나 하면서 음식을 먹었는데요. 이런 식당을 가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면 지난 제 생일을 맞이해서 미국에 있는 우리 두 딸아이가 저희 가정에 선물을 하나 보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종이에 적혀 있는 식사 상품권이었습니다. 종이에 얼마짜리 식사 교환권이 있어서 그걸 믿고 그 식당에 가서 먹었는데요. 그냥 돈도 아니고 그냥 종이 쪼가리에 어느 식당 얼마짜리 식사 교환권이라고 써있는 그것을 받게 되었을 때 이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고 믿지 않고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딸 아이들이 나를 생각해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줬구나! 우리 딸아이를 믿고 이것을 보고 예약을 해서 가서 먹게 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참 행복한 그런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우리 꼬마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제에게 주었던 조그마한 선물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정도 됐을 때 제 생일이 되었을 것 같았어요. 그때 우리 아이들이 우리 꼬마 아이가 제게 다가와서 아빠 생일 축하해 하면서 제게 뭘 내미는데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 아이들이 저를 생일 축하해 준다고 하면서 내밀었던 종이 쪼가리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냐면 심부름 교환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거기에 심부름 교환권도 써놓고 아빠가 뽀뽀할 수 있는 권리도 준다고 하는 그런 것도 써놓고 여러 가지 교환권들을 많이 써가지고 그 서툰 글씨로 제게 줘서 그것을 바라봤을 때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얼마나 고맙던지 그걸 가지고 참 이걸 받아서 참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게 되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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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큰 선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보내준 그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바라보면서, 웬 종이 쪼가리야 하면서 내 버린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게 될 때, 정말 그곳에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그래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시간에 정말 사랑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믿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엄청난 축복이오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텐데요. 믿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믿는가, 내가 얼마나 정말 철저하게 믿는가, 정말 뜨겁게 믿는가라고 하는 열정이 많고 적음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가 믿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열정적으로 믿는데,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이 헛된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믿는 그 대상이 허망한 것이면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짜를 믿는다고 한다면, 더 열정적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고, 열정적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더 절망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선거가 있으면 선거 전에는 엄청난 공약들을 다 쏟아냅니다. 그런데 그 공약들을 다 해보면 5년 내에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예산으로 할 수 없는 공약들을 막 쏟아내는데요. 그런데 당선이 되고 나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듯이 다 잊어버리고. 말을 바꾸어 버려서 그래서 늘 실망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정치인들이 말을 쉽게 바꾸어 버리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 버려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묻지마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지지하면 지지할수록, 실체가 없다고 한다면 믿음의 대상이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 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알라신을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정말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종종 들어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바를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든 그 믿음의 대상이 부처님이든 그 믿음의 대상이 알라신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말 순수하고 정말 진실하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우리는 같은 곳에서 만날 거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어떤 스님이 전도를 하는 어떤 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예수님은 학생이나 잘 믿게. 나는 부처님을 잘 믿을 테니까. 나도 학생의 신앙을 존중해 줄 테니, 내가 믿는 신앙도 좀 존중해주게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 멋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옳다고 아웅다웅거리면서 싸우는 이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다르다고 미워하거나 다르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면서 자네도 인정하고 상대방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면서, 서로가 함께 어울리면서 배려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그 마음은 정말 멋있어 보이고 정말 괜찮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아무거나 믿어도,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아무거나 믿어도 내가 진실하게만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열정적으로 믿기만 한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가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유괴범이 사탕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따라갔다가는 큰일 나니까, 아무나 따라가지 마라 말하는 것이 그게 우리가 배워야 될 진리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쉽게 아무나 믿어서는 안 되고, 내가 그냥 열정을 내서 믿으면 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열정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실망과 절망과 혹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아직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마는,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던 교회에서 한 사건이 크게 일어나서 당시 필라델피아 사회에서 크게 회자되었던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어떤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권사님이 교인들한테 돈을 빌린 거예요. 돈을 빌리고 이 사람한테 돈을 빌리고 하는데, 돈을 빌린 다음에는 잘 갚아요. 어떻게 갚냐면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갚아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한테 돈을 빌려서 얼마간 쓰다가 다시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때 내가 정말 돈이 필요했는데, 나한테 빌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너무 감사했다고 하면서, 이것은 원금이고 이자도 이거라고 하면서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딱 주니까, 좋아요? 안 좋아요. 좋잖아요? 그렇게 해서 신뢰를 얻었던 그분이 어느 날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엄청나게 큰 돈을 다 빌려가지고, 하루 저녁에 사라져버린 거에요. 그래서 그 교회가 엄청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요.

정말 내가 믿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렇게 사기를 저지르게 됨에 따라서 결국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믿어야 될 게 있고, 믿지 말아야 할 게 있는 겁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고요.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게 되면,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고 재정적인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마음이 아프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열정이나 어떤 진실함이나 그것보다도, 물론 그게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필요하죠. 열정적으로 믿어야죠. 진실하게 믿어야죠. 그것도 다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과연 믿음의 대상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믿지 못할 것인가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항상 혼란스럽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우매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믿어야 될 대상인데도 믿지 못해서 그래서 모든 관계가 끊어져버리는 그런 결과가 나타날 때가 있고요. 믿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어서, 엄청난 손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권사님이라고 해서 믿지 말아야 될 것까지 믿어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그 대상이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거나 믿은 게 아니에요. 그냥 믿음이 좋다고 해서, 이 사람도 믿고 저 사람도 믿고 아무나 믿은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셨다고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믿을 때 인정해 주실 거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엄청난 것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고 한다면 절망스러울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는 바칠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완벽한 인생을 살아서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완벽하게 의롭게 살아서 아무런 죄가 없이 완벽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인정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믿게 되면 의롭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한 것이죠. 로마서 4장 23절에서부터 24절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 24절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아무거나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저 유대 땅에서, 가나안 땅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죄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적인 행위를 하셨기 때문에 성전을 파괴한다고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는 그런 오해를 받아서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로 죄목을 가지게 되었고요. 로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역죄의 목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를 정복하고, 가이사에 대항해서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하는 그런 반역죄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죄목을 가지고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사실은 어쩌다 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죄를 위해서 나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게 된다고 하면, 그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 우리들의 것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일이 우리들의 것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속죄 죄사함을 가리켜서,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사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사면이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데요. 사면이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때 손해 보는 게 있나요? 손해 보는 게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정치적인 위험을 떠안을 수는 있겠지만, 형식적으로 본다면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주 간단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면을 이루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죄의 용서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그 죄 사함의 공로가 우리에게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고요. 나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고 나 때문에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4장 2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 용서를 위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하기가 쉬운데요. 도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을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서 의롭게 만드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 그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사역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뭘까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쉬운 겁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가장 쉬운 것인데요.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것인데요. 쉬운 것은 왜 쉽습니까? 가난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없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없어도 아무것도 없어도 믿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누구든지, 돈이 많든 적든 그 누구든지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고자 하는 그 생명의 양식은 많은 돈을 내야만,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으로 아무 돈도 내지 않아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원이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이 적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것들은 머리가 뛰어나야만, 뭔가 많은 학식이 있어야만,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어야만 수제들만 다다를 수 있는 그런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 수학적인 것은 우리가 복잡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하지만 구원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자 무식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어린아이라고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이 복음인 것이죠. 찬송가 566장에 보면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적어도 잘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이 믿음인 것이고, 그래서 쉬운 것이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왜 쉽습니까? 믿음이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를 닦고 경지를 닦아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냥 믿을 수 있어요. 우리가 40일 금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100일 기도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공양미 3,000천 석을 갖다 바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치성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냥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인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벽한 인생을 살고 먼지 하나 털어도 먼지들을 막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은 그런 완벽한 인생을 살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고, 연약한 사람 그 누구도 다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쉽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이렇게 쉬운데, 그런데 믿기가 어려워요. 이렇게 쉬운 것을 돈도 필요 없고 지식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이 쉬운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의심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가? 쉬운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워 보이는 것을 더 잘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짜라고 하면 믿지를 못하는데, 돈을 내라고 하면 믿어요. 그래서 그냥 내가 기왓장에다가 이름 적어놓으면 된다 하면, 만 원 2만 원 내놓고 기왓장에다 이름 써서 내는 거예요. 까짓 거 1만 원 내버리지, 까짓 건 2만 원 내버리지 하면서 해버리는 거예요. 연등을 달아놓고 그래서 10만 원짜리 100만 원짜리 50만 원짜리 연등을 달아놓으라고 하면, 까짓껏 50만 원 지출해버리지, 까짓 거 100만 원 지출해 버리지 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요. 108배를 잘하라고 하면 힘들기는 하지만 108번만 잘하면 되니까 그냥 엎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게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죠. 그래서 어렵게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열정적으로 믿기도 하고 더 따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이단이나 거짓 종교를 보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그 이단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냐면 쉽지가 않아요? 시간 다 갖다 바쳐야 되고 돈 갖다 바쳐야 되고 또 시험도 봐야 되고 전도도 해야 되고 막 엄청난 요구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엄청난 것들을 해버리면 수치화시켜버리면 훨씬 더 달성하기가 쉬운 거죠. 그래서 어떤 이단에서는 시험까지 봅니다. 성경을 달달 암송하게 하고 그래서 그 시험을 봐서 어느 정도 합격이 돼야 144,000명이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하면 열심히 해서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장 쉬운 방법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거에 사람들은 외면해 버릴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보면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이 늘 흔들리고, 의심이 자꾸만 솟아오르게 되었을 때, 그래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 텐데,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것들을 다 마련해놨는데, 마치 우리들은 그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고아와 같다 생각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 내 자신의 동굴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지도 않아. 그렇게 자꾸만 떨쳐버리면서 혼자 외롭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 나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들에게 종이 쪼가리 적어주고 그래서 우리에게 선물 정도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랑의 약속들을 해주셨는데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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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믿음 (롬 4:16-22)

아브라함의 자녀들 (롬 4:13-15)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sbs 라디오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2시의 컬투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재미있는 유머들이 많이 소개되는, 그래서 듣다 보면 정말 폭소을 터뜨리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인데요.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그런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택배 기사들이 문 앞에 택배 물건을 놓고 가는데, 예전에는 직접 전달해 주고 가던 시대에 아마 나왔던 사연 같습니다.

어느 가정이 있었는데요. 그 가정은 장난기가 많아서 그래서 서로 엄마와 아들 사이에 장난을 잘 치는 그런 집안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외출한 상태에 택배 아저씨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어머니께서 안에서 대답을 했어요. 누구세요? 그랬더니 “택배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답니다. 종종 아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쫙 깔고 어머니 성함을 부르면서 택배가 온 것처럼 장난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택배 아저씨가 왔는데, 아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던 어머니는 속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웃기시네.” 그러자 그 택배 아저씨가 또 대답을 했습니다. “택배입니다.” 엄마는 대답을 합니다. “최홍만 키 크는 소리 하고 있네.” “아니, 택배라고요.” “나는 엄마라고요.” 당황한 아저씨는 다시 목소리를 다듬고 “아무개 씨, 택배 왔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안에서 또 이렇게 대답을 한 겁니다.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장난 그만쳐! 한 번만 그러면 너 문 아예 안 열어준다.” 어머니는 장난을 받아줄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택배 아저씨는 난감했습니다. “아니 진짜 택배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엄마는 더 단호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너 들어 올 생각하지 마! 너 거기서 반성하고, 엄마를 찾아. 알겠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 택배 아저씨는 어떻게 해야 되나, 물건을 전달해 주고 가야 하는데, 문을 안 열어주기 때문에 난감한 그 아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택배 아저씨가 말을 했습니다. “엄마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러자 엄마가 물었어요. “네가 누군데?” “엄마 아들!” 그제서야 아들이 장난을 치다가 반성하는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아들이 아니라 택배 아저씨가 있어서 정말 당황했다고 하는 사연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믿음이 있어야 문을 열게 되고, “내 아들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아니 택배가 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문을 열 수가 있는 것인데, 의심이 들면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약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약을 불신하면, 그 약에 대한 효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 약을 복용하고 병이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어도, 그 의사를 불신하고 그 의사에게 가지 아니하면 의사에게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도자에 대한 가짜 뉴스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로 인하여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들을 다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죠. 믿지 못하면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축복도 믿음이 있어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고요. 기도할 때도, 우리가 의심해서는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을 신실한 하나님으로 믿으며, 그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기도에 응답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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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총의 택배를 가지고 서 계신데, 그 은총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하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믿음이 필요한 것인데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게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겁니다. 나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은데도,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 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믿어야지”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지, 의심하지 말아야지”라고 내 마음속에 결심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불신이 꾸물꾸물 솟아 오르게 되어 있고, 자꾸만 의심이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이제 전혀 두려움이 없고 전혀 슬픔도 없고, 그리고 확신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솟아 올라오는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이고, 의심이 있는 것이고, 불안이 생기게 되고 초조한 마음이 생기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없애보겠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높은 곳에 서면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걱정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논리적으로는 알아요. 모든 사람들이 저 높은 곳에서 풍경을 즐기고 있고, 저 높은 곳에서 저 밑을 보면서 정말 아름답게 구경하고 있고, 이곳이 안전해서 단 한 사람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는 안전한 시설물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다 아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철저하게 완벽하게 안전이 보장된 시설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은 두려운 거예요. 그 높은 곳에 올라가면 두려워서 벌벌 떨고, 그래서 정말 두려운 마음에 그곳에 설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알아요. 하나님께서는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는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들, 그것을 없애고 싶지만 자꾸만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게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환자가 있는데, 이제 자가 호흡도 하지 못하고 이 연명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 있는 그런 환자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좀 제발 살려주세요.” 기도하는데, 그리고 성경 말씀에 기록하기를 “기도하면서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믿나이다. 주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내 기도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살려주세요.”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그 환자를 보면,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다가 돌아가실 수가 있겠구나.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거에요.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면 안 되는 것인데, 의심하면 안 된다고 하했는데, 내가 믿어야만 된다고 했는데, 의심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이 의심의 마음이 떠오르면 어떻게 하나? 그런 불안한 마음 가운데서 내 그 의심을 떨쳐버리고 싶어도, 의심이 떨쳐지지 않는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어요. 성경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도하면서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을 주문하고 계시는 말씀인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요. 이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는가? 이미 나이가 많아요. 여기서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은 안 계셔요. 우리 가운데 있는 분들 가운데 최고령자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이 이제 자기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인 그런 가능성은 제로(0) 퍼센트입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이미 경수가 끊어져 버렸고,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아서 전혀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낳은 그 아들이 있을 텐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고, 너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을 누가 맨정신으로 믿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이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어떻게 그 상황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약속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을 수 없는 것이죠. 어떻게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이 부부에게서 어떻게 아들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한, 아니 완벽하게 불가능한, 100% 불가능한 그 상황 가운데서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기셨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부터 22절에 표현되어 있는 그 표현을 천천히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렇게 대단했는가? 하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굳건해가지고, 정말 엄청난 믿음이 있어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한 사람이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며. 창세기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사실 그렇지가 않아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땠는가? 항상 흔들렸습니다. 항상 불안하게 요동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해 주셨을 때,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그렇게 고백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나 흔들렸어요. 어떻게 흔들렸어요? 아들이 안 생기니까, 흔들리는 거죠.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아기 없이 죽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완전 내 인생 끝나는 거 아니야?”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리고 천사가 와서 약속하기를 내년 이맘때에 네 집에 아들이 있을 것이고 사라가 그 아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말씀을 해주었을 때, 사라는 비웃어버렸어요. “나 같은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안을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뒤에서 비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한 번은 이집트에 가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거짓말해서 그래서 자기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불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자,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우리 집에서 길렀던 내 종 엘리에셀을 내 입양자로 삼아서, 양자로 삼아서 이 엘리에셀을 나의 양아들로 삼고 싶습니다. 이 엘리에셀을 통해서, 내 유산을 물려주고 내 가업을 잇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표출이 되었던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믿지 못해서, 하갈이라고 하는 사라의 몸종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했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언제 나왔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그 말씀 이후에, 믿음을 의로 여겼다고 하는 이야기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16장에 가면 그 믿음이 벌써 흔들려가지고 하가를 통해서 아들을 낳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예,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이 너에게 의다”라고 인정해 주셨는데, 얼마 가지 않아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려 버렸고, 믿음 없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 게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아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를 우리가 고백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늘 흔들리게 되어 있는데요.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어도, 우리들의 눈 앞에 홍해 바다가 놓여져 있으면 불안해 버릴 수밖에 없고, 광야의 길을 가다가 먹을 게 없거나 마실 게 없으면 그러면 원망하게 되어 있고, 적군이 우리들 앞에 놓여져 있으면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우리를 인도하던 지도자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조그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조그만한 가정의 아픔이 생기면, 조그만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면, 우리들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해야 되는, 마가복음 9장 24절에 보면 간질을 앓고 있던, 간질병과 같은 그런 질병을 앓고 있던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던 그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했던 고백이 무엇이냐면, “주여 믿나이다. 주님께서 이 아이를 고칠 것을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내 믿음 없는 것을 좀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고, 애정이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인데 그래서 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 붙잡아주시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의심하는 자는 주께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들면, “땡! 탈락! 자격이 안 되니까, 기도 안 들어줘”라고 하는 식으로 반응하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고,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안이 생기면 땡 탈락이라고 선언해 버리시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냥 재판관이어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가 있는가만 보시고, 그래서 합격 불합격을 외쳐버리고 끝내버리시는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의심이 솟아오를 때, 다시 한 번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불안하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 그때 나 자신을 향해서 말해야 하는 거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나 자신을 향해서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슬픈 일이 있을 때, 아픈 일이 있을 때,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일어설 수 없을 때, 우리 자신을 향해서 노래해야 되는 겁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슬퍼하느냐?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지고 “주님, 주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믿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불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만져주옵소서.” 하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런 문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들고 오신 은총의 택배 상자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그래야 그 풍성한 은총의 선물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친일 행적이 있는 시인이면서 전두환 찬양시를 지었다고 해서 비판을 받고 있는 시인이지만, 그러나 그가 쓴 시는 너무나도 멋진 시여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김춘수라고 하는 시인이 쓴 <꽃>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그 시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인데도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은총의 선물도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제치고 쳐들어와 정복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마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가서 정복할 수 있는 것처럼, 어설프게 정복을 못해서 지금 질질 끌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을 포위하고 융단 폭격해서 우리들을 완전히 항복시키려면 단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러시아 군처럼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에요. 오히려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문을 두드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죠. 마치 택배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어야, 그 택배 물건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랑의 청혼을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연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을 연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들에 되는 것인데요. 마치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것이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주고, 하나님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될 때,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때 우리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은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공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악인은 악을 저지르고 온갖 나쁜 짓을 해도 승승장구하는데, 선한 사람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그 고통을 풀 수 있는 방법조차 없는 것 같아요. 세상이 왜 엉망 진창으로 돌아가는지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기도는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하나님이 도무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은데, 오히려 돈의 위력은 더 센 것 같고, 우상의 능력은 더 강력한 것 같고, 이 세상 권력들은 더 센 것 같고, 기득권의 카르텔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정말 의심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손 놓고 이 세상을 방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아직 내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죠. 내가 찾지 못했다고,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은총의 상자를 들고 우리 앞에 와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지난주에는 제게 아주 참 큰 해프닝이 있었는데요. 5월 달에 제주도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제주도에 있는 세미나를 꼭 참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은 것은 여권입니다. 저는 제주도는 외국인들이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섬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다시 육지로 들어오려면, 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확인하고 비자를 확인하기 때문에, 제가 여권이 있어야 제주도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권을 찾는데요. 5월달을 앞에 두고 여권을 찾는데, 아무리 여권이 있을 만한 것을 뒤져도 여권이 없는 거예요. 교회 사무실을 뒤져도 안 나오고,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뒤져도 여권이 안 나오고, 제가 원래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라, 아마 옷 어디엔가 넣어놓고 그냥 방치했다가 못 찾는 것 같아서, 모든 옷을 꺼내서 주머니 다 뒤지고 하는데 안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빨리 여권을 재발급 신청하기 위해서 컴퓨터에 앉아서 여권 발급 신청을 했습니다. 여권 발급 신청을 하고 그래서 수표를, 그것도 그냥 수표가 아니라 은행 가서 수표를 띠어와서, 그래서 대사관에 보내야 하는데, 발급 신청을 하고서, 딱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무슨 메시지가 뜨냐면, “여권 분실 신고 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아직 안 했거든요. 여권 분실 신청을 하지 않으면 새로 발급할 수가 없으니, 여권 분실 신청을 먼저 하라는 거예요. 먼저 하려고 해서 딱 해서 여권 불신 신고를, 이렇게 딱 하는데 경고문이 딱 뜨는 겁니다. “일단 한 번 분실 신고하면, 그 여권을 다시 찾아도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찾았다고 신고해봤자,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문자가 뜨는 거예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새로운 여권이라도 만들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만의 하나 미국에 갈 일이 있다든가, 아무튼 하면 여권이 있어야 되니까, 필수적인 거니까 신청해야 되겠다고 분실 신고 딱 했더니, “이제 그 여권은 무효화됐습니다.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어요. 그리고 이제 그것을, 새로운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 하는데, 의자 뒤에 걸려있는 옷이 있어요. 딱 만졌는데 여권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얼마나 난감하던지. 돈 날리고, 시간 날리고, 에너지 날리고, 그래도 웃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못 찾았다고 없는 게 아니에요.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요. 나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인자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요.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들의 마음의 의심으로, 우리 집 문 앞에 은총의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의심의 눈으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총은 도처에 널려져 있는 것인데, 마치 태양이 뜨면 온 세상이 그 태양의 열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꾸물꾸물거리면서 다 살아나듯이. 이제 봄이 되니까, 여러분, 산수유 꽃이 피어나고 있어요. 봄이 되니까, 매화가 폈더라고요. 나뭇가지에 싹들이 피어나고 있어요. 온 세상이 다 바뀌어 나가고 있어요. 겨우 내 죽은 것 같았는데,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이제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그 추운 겨울을 보냈는데, 그래서 이것이 완전히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의 태양이 뜬다고 한다면, 이제 죽었던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살아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정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한 번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담대한 믿음을 회복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문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세상의 것들만을 바라보며 절망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의 시선을 주님 앞에 들어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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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자녀들 (롬 4:13-15)

주객전도 (롬 4:9-12) +++ 은총과 믿음 (롬 4:16-22)

축구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마라도나라고 하는 선수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인데요. 작은 체구에 엄청난 기량으로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반열에 올랐던 선수가 마라도나 선수입니다. 아마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람의 이름 정도는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 202020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요. 그가 축구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에, 그 많은 재산이 누구에게 상속되는가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몇 명이었냐면, 두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만 마라도나의 자녀가 아니라, 혼외 자녀들도 꽤 있었는데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3명의 혼외 자식이 있다고 하는 것도 인정했고, 또 시간이 더 지나간 다음에는 3명을 더 인정해서 8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는데, 우스갯소리로 앞으로 3명만 더 있으면, 가족으로 축구팀을 세울 수 있겠다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3명이 더 생겨서 11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11명의 자녀들이 유산을 받는다고 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또 더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받게 될 그런 유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마라도나랑 비슷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요. 거기에 견줄 수 있겠는데요. 마라도라는 축구의 실력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주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아,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아마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 차이를 말한다고 한다면,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히 있을 텐데요. 마라도나는 자기 자신의 실력으로 그 많은 재산을 얻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차이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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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마라도나가 얻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썩어질 황금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해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내가 너와 내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겠다. 그랬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해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냐면, 무엇을 주겠다고 한 것이죠? 이 땅을 주겠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어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했구나! 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태인들에게 주겠다고 했구나라고 오해를 하게 된 것이죠. 이스라엘은 정말 외세의 침입을 받아가지고, 그래서 압제 하에서 살기도 했었고, 그리고 나라를 잃어버려서 전 세계로 흩어져서 사는 민족이기도 했는데요. 그 유태인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었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 그 약속이 무엇이냐면, 저 팔레스타인 땅을,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라고 하는 그 생각을 가지고, 언젠가는 우리가 저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어떤 운동이 일어났냐면, 우리가 시온으로 돌아가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거기에 유대 나라를 세우고, 다윗의 나라를 다시 한 번 세우자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런 운동을 가리켜서 뭐라고 부르시는지 혹시 아십니까? 네. 시오니즘(zionism)이라고 합니다. 그 시오니즘에 따라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제국을 세우겠다고 하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가게 되었고, 그래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른 생각일까요? 잘못된 생각일까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 그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빼앗겼던 그 진짜 땅이 어느 땅이죠? 인류가 빼앗겼던 진짜 땅이 무엇이죠? 바로 에덴동산의 땅이고, 그 땅에서부터 쫓겨난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데, 그 빼앗겼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이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서,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이 땅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게 성경 말씀의 성취라고 오해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오늘날의 미국에 가보면 우파 크리스찬들이 이스라엘을 굉장히 지지합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의 크리스천들이 굉장히 동조하고 지원을 많이 하는 거죠. 우리 한국에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무조건 이스라엘 편을 드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것은 성경을 잘못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들을 공격하면서 수많은 악을 자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도와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본다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고, 공의롭지도 않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이냐면, 유대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아닌 겁니다. 그것은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사실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하는 점을 누가 알려주셨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주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한 소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입니까?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언제 우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로마 나라에 의해서 압재를 당하고 있고, 외세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주님 제발 우리 나라를 독립시켜 주십시오. 저 옛날 다윗처럼, 저 옛날 모세처럼,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이제는 더 이상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예수님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유태인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약속인 것이죠.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낙원에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하는,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로마 정부의 지배를 받아, 지금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이냐면, 죄의 지배를 받아서 사탄의 그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우리들에게 문제는 무엇인가? 슬픈 일이 많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고, 아프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하고, 온갖 이 세상에 많은 고통들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그것만 해결되면 되느냐? 아니에요. 그 모든 것들이 그 근원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냐면, 바로 죄의 문제에 있는 겁니다. 속에서부터 죄의 문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서 소외를 당하기도 하고, 외로움을 당하기도 하고, 슬픔을 당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 세상의 온갖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져버린 데서부터 영적인 문제부터 나오는 것이 문제인 것인데, 사람들은 이 영적인 문제는 바라보지 않고, 그저 주변의 것들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만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에서 약속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 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 천국의 유업, 저 천국의 상, 하나님 나라를 약속해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해 주신 이 하나님 나라의 유산이 있다고 한다면, 이 하나님 나라의 유산은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그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상속자가 누구일까요? 이 세상의 유산은 적법한 자녀가 받게 됩니다. 마라도나가 그 자녀들을 많이 낳게 됐는데, 그 마라도나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받을 수 있죠? 마라도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증명이 되면 받을 수 있는 겁니다. dna 검사를 해서라도 내가 정말 저 마라도나의 죽은 사람의 친자라고 하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 마라도나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데, 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유산 이 유산은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받는 겁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이죠. 하나 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피가 계속 내려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 권리가 있고 이 땅을 차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자기들은 할례를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유혹을 자기들이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로마서 4장 13절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오.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니라.” 믿습니까?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에 따라 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게 아니다는 거예요. 내가 아브라함의 피를 받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누가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혈통에 따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진짜 후손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그럼 혈통적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면,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든 유대인이 아니든,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았든 이어받지 않았든, 어떻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고,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로마서에서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인데요. 이 이야기는 로마서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그전에 바울 사도 이전에, 다른 분이 벌써 이미 얘기하셨어요.

누가 얘기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어떤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로마 사람이었을 것이고,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간청하는 겁니다. 선생님 네 하인을 좀 고쳐주십시오. 중풍병에 걸린 내 하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태복음에 보면, 이 하인이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요. 사실은 하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별로 잘 번역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헬라어로 보면 “호 파이스 무”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직역을 하면 “내 소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이 보이” “내 소년” 그래서 “이 소년”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나타내는 거냐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젊은 사람을 아무나 나타낼 수 있는 말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종도 내 소년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내 군인들도 내 소년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내 자식도 내 소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이 와서 고쳐달라고 했던 그 소년이 누구냐면 하인일 수도 있고 군인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식일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자식 같아요.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 자식을, 혹은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데, 예수님께서 놀랍게도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 가자. 고쳐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근데 그 순간에 이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말하는 겁니다. “주님, 내 집에 굳이 오신다고 하니, 제가 그걸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누추한 집에 주님께서 어떻게 제 집에 오십니까? 그냥 여기서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말로만 하셔도 나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군인인데, 제 밑에 수하가 있어서, 내가 명령하면 우리 군인들이 움직이고, 제 상관이 있어서 제 상관이 나한테 명령을 하면, 내가 움직이는데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이 아이가 병에서 낳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예수님에게 고백하는 그 대답을 듣게 될 때 예수님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그런 믿음을 보여준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했던 말씀이 마태복음 8장 11절 12절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일을 갈게 되리라.” 여기서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저 하늘나라의 유산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누구라고요? 동서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여하게 된 누구? 이방인들이! 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포함될 수 없었던 그런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함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반면에 아브라함의 원래의 아들들, 아브라함의 원래 후손들은 다 쫓겨나서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물론 이 예수님의 말씀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오해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이방인들이 참여할 것이지만, 유대인들 본 자손들은 다 쫓겨날 거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면 저 천국에는 유태인은 결코 못 들어간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19세기에 20세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라고 했던 유태인들을 박해함으로 말미암아,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까지 하는 등, 그렇게 오해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혈통만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얘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가 천국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들어간다?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한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또 먼저 말씀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했던 말이 마태복음 3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대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러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세례 요한이 외친 것이고, 심지어 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얘기는 진짜 돌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은 이방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거라고 누가 얘기했느냐 하면, 벌써 세례 요한이 벌써 그렇게 이야기를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이게 신약 때부터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라고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사실은 이것은 신약 때부터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도 똑같은 얘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예를 든다고 한다면 신명기 10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쓴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신명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디에 할례를 행하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굳게 하지 말라”고, 지금 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는 말이, 이미 할례를 받은 백성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너희가 할례 받았다고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라. 할례를 어디다 행하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축복을 누가 얻을 수 있는가? 혈통으로, 그냥 내가 족보에 들어있으니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누가 구원을 받게 됐어요? 우리들이에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 중에 혹시 유대인의 피가 1%라도 섞여 있는 분 계십니까? 없으시죠. 피 한 방울 아브라함의 피가 섞여져 있지 않은 우리 이방인인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되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가? 그것은 혈통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리 스트로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스테파니 페스트라고 하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성은 누구냐면 6.25 동란 가운데 태어난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게 된 어떤 혼혈 아동이었습니다. 아, 그 당시에 혼열아로 태어나 생김새가 다르고 이상하게 생긴 그 아이가 한국 땅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이미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만날 수도 없고, 엄마만이 이 아이를 기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자라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어렸을 때, 추석이 됐었는데 온 가족이 둘러 모여 앉아서 자꾸 싸우고 소리 지르고 하는 걸 옆방에서 들은 겁니다.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건가라고 하는 대화를 가족들끼리 나누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의 어머니를 어떤 다른 남자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는데, 이 아이가 있으면 시집 보낼 수 없으니, 이 아이를 버려야 한다는 그런 가족의 결정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그 아이를 붙들고 펑펑 울고, 그랬지만 그 시대에는 아마 그 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하루는 이 꼬마아이를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는 겁니다. 보따리에 먹을 것과 그리고 옷들을 싸가지고 기차를 태워주면서,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정거장에서 내리면 삼촌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이 아이가 기차를 타고 약속된 기차역에서 내린 겁니다. 삼촌이 나를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거에요.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는 거에요. 어두워진 그 역에 혼자 남아 있다가 역장에 나와서 쫓아내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서 그냥 길거리에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생활을 고달픈 생활을 시작하기 한 사람이었는데요.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도둑질해서 먹어야 했고, 메뚜기를 잡아먹고, 들쥐를 잡아먹고, 온갖 쓰레기를 뒤져가면서 먹으면서 살아가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욕하고 쫓아내고 도둑 잡으라고 하고 세상이 험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렇게 하는 그런 너무나도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 가운데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마지막에 이제 거의 다 죽어가게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마침 그 옆에 스웨덴 출신의 월드비전 어떤 사람이 이 아이를 발견한 거예요. 발견하고 이 아이가 곧 죽을 것 같다고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 아이를 자기가 데려갈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의 임무는 갓난 아기들을 데려가는 건데, 이 아이는 갓난 아기가 아니라, 벌써 서너 살 된 아이이기 때문에 데려가 봤자 곧 죽을 것만 같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은 그냥 이 아이를 두고 가려고 하는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래요. “이 아이는 내 아이다”라고 하는 자기 모국어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결국 그 아이를 데리고 고아원에 가서, 그 아이를 그 고아원에서 일을 시키면서, 갓난 아기를 돌보게 했는데, 그때 그 고아원에 사람들이 와서 외국 사람들이 와서 아이를 하나씩 하나씩 입양해 가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바로는 어떤 선교사 한국에 왔던 선교사 부부가 고아원에 와서 남자 아기를 찾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 부부가 와서 한 남자아이들 하나씩 안아보면서 나 안아보고 또 이 아이 안아보고 하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그 선교사님 부부가 이렇게 딱 가다가 그 옆에서 돕고 있는 이 스테파니 페스트라고 하는 여자아이를 보고서 그 여자아이도 한번 안아주고 이렇게 하는데, 그 이 아이가 그 안아줌을 당할 때 너무나도, 한 번도 이렇게 자기를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준 것이 없어서, 너무나도 행복해서 이게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은 그렇지만 행동은 어떻게 나왔냐면 침을 뱉어버리고 다 도망가버렸대요. 왜냐하면 자기를 향해서 늘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한 번은 물레방아에 묶어가지고 돌려서, 물속에 빠지기도 했다 나왔다 했다 하면서 그런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던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 선교사를 향해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욕하고 도망가 버리고, 그다음 날 또 만났는데 또 욕하고 침 뱉고 도망가 버리고 했는데, 그 선교사님이 갓난아기 남자아이를 입양하러 왔다가 포기하고, 그 여자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더랍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그 선교사님 집에 가면서 아 내가 이 집의 식모로 살아가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가서 있는데, 선교사님들이 먹을 것도 잘 주고, 옷도 잘 주고 하는데, 일을 하나도 안 시키더래요. 왜 일을 하나도 안 시킬까? 참 이 사람들이 나에게 좋은 걸 해주긴 하는데, 두려운 마음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한 번은 자기가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하고 노는데 친구들이, “야, 네 몸에서 치즈 냄새가 난다.” 당시 외국 사람들은 노린네가 나고, 치즈 냄새가 나는데, 그런 얘기를 듣는데, 그래서 이 여자아이가 친구들한테 하는 말이, “나, 이 집에 식모로 왔는데, 우리 집 주인들은 참 마음이 좋은 분들이야. 나한테 화도 안 내고, 나한테 잘해주고, 먹을 것도 주고, 다 했는데, 이상한 게 한 가지가 있는데, 나한테 일을 안 시키네. 왜 왜 일을 안 시키는지 몰라.” 그럴 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너, 몰라? 넌 그 집의 딸이야! 인마. 딸로 온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여자애가 깜짝 충격을 받고, “아, 그런가?” 그때 지금까지 자기가 의문을 풀었던 모든 것들이 다 다 해결이 되면서, 이분들이 나를 딸로 삼아줬구나 해서, 그 순간 막 뛰어들어가서, 자기 입양을 해 준 부모님을 향해서 한국말로 “엄마, 나는 이 집의 딸이에요”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을 그걸 못 알아듣는 이 선교사 부부가 있는데, 통역이 그 말을 통역해 주니까, 선교사 부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이를 받아주게 되어, 결국 그 아이가 그 집에서 잘 자라고 또 나중에 선교사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 책에 써 있는 것을 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우리가 이런 스테바니 페스트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마치 우리는 혼혈아처럼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아요. 늘 생각하는 것이 약하고, 늘 행동하는 것이 잘못되고, 화내고 분노하고 교만하고 절망하는 그런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영접한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협을 얻게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하나님을 그냥 우리의 주인 정도로만 생각하시면서 살았습니까? 하나님께 하나님 눈치나 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뭐 안 뺏어가나? 그러고만 살아오시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믿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고 상속자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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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롬 4:9-12)

하나님을 믿으매 (롬 4:1-8)  +++ 아브라함의 자녀들 (롬 4:13-15)

로마서 강해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반복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했던 이야기를 또 이야기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 불합격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대한,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계속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로마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냐 할례냐라고 했을 때, 할례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를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인데, 우리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잘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어떤 무엇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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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꾸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받아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교만해질 수가 없는 것이죠.

종종 청와대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그 사람들과 대통령이 환담을 하기도 하고 만찬을 하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그런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백악관에서도 정말 위대한 사람들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칭찬해 주기도 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인 강영우 박사라고 하시는 분이 시각장애인인데, 그런 분들이 초대되어서 백악관에 가게 된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그리고 정말 좋아해 주는 것이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있다고 한다면, 청와대로 초청해서 정말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그렇게 청와대에 초청되었다고 한다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초대 안 하잖아요? 혹시 청와대에 다녀오신 분 계십니까? 저는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 근처는 가보긴 했지만, 그 안,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통령과 만날 수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일부러 초대해서 대화도 하고 만찬도 하고, 그리고 사진도 같이 찍게 되기 때문에, 누가 청와대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엄청난 명예 명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그 천국으로 우리가 초대된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초대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금메달을 딴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그 어전 회의에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저 천국의 잔치에 우리를 불러주고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영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래뵈어도 내가 목사요 장로요 권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실패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감생심,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그 천국으로 초대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신앙생활을 좀 오래 하셨던 분들은,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누구냐면, 바로 사울왕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새로운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과 다윗왕은 어떤 관계냐?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그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집안의 원수가 사울인 것이고 사울의 원수가 다윗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그리고 다윗 왕조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면, 고대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전 왕조의 모든 그 왕족들은 다 몰살시켜버리는 것이 고대 왕국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울 왕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되는 그 순간에 다 도망가야 했고, 다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 다윗 왕조의 그 눈을 피해서 다 숨어 들어가야만 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은 사울 왕가에 속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속한 가족들이 혹시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느냐라고 수소문하고 수소문했는데, 누가 알려졌냐면 바로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알게 된 겁니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울 왕의 손자인데, 아기 때 유모가 데리고 도망가다가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온전히 쓰지 못하는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윗왕의 신하들이 므비보셋의 집 안에 들어와가지고, 므비보셋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왕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므비보셋이 느낀 그 공포가 무엇인 줄 여러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죽었구나. 다윗왕에 의해서 나는 이제는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구나 생각되는 그 순간에,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극진히 모시고 왕궁으로 가서 그리고 다윗왕은 그 므비보셋에게 왕자의 대우를 해주는 거에요. 적의 아들이요. 손자요. 그래서 완전히 몰살시켜야 마땅한, 고대 세계의 법칙으로 보면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므비보셋을 다윗은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고, 왕자와 함께 식탁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는, 엄청난 놀라운 대우를 해 준 이야기를 사무엘 하에서 읽을 수가 있겠는데요.

바로 우리의 신분이 바로 그러한 것과 같다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장치에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의 고마워, 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이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꾸만 망각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엄청난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물에서 건져서 살려놓았더니 무슨 반응을 하죠? 내 가방 내놓으라고 하는, 내 물건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그런 적반하장 안하무인 배은망덕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만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자꾸만 기어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교만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저 갈릴리 바다에서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제자들은 그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불러주셔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낳는 어부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사실만 생각한다고 하면 겸손하게 따라가야 할 텐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주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받을 상, 내가 이만큼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노력했고, 이만큼 헌신했는데, 이만큼 반주자로 수고하고, 이만큼 설교자로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주님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하는 그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주님, 제가 목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장로가 아니었습니까? 권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 교회 짓는데, 내가 엄청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무엇입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거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는 말이, 내가 귀신을 내쫓았는데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자신의 그 장점들을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진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그런 교만함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솟아오르는 겁니다. 이래 뵈어도 내가 40년 신앙생활한 사람인데 주님 나한테는 뭐 없습니까? 이래 뵈어도 나는 교회를 한 번도 빠져보지 않은 사람인데, 나에게는 무슨 상이 없습니까? 내가 헌신을 한 사람인데, 하나님, 나에게 줄 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어떻게 의롭게 함을 받게 되었는가? 공로가 아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자꾸만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교만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른 위치에 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거룩한 일을 하는 것, 거룩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 거룩, 행위, 믿음,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가? 정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긴 하는데, 그것이 있을 자리가 어딘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로마서 4장 11절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는 누구죠?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과 할례,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던 것인데, 그 의롭게 된 것을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그 표를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할례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어로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인데요.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죠. 요람이라고 하는 하나를 통해서 탄생 전체를 가리키고,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 전체를 가리키는, 펜이라고 하는 하나를 가지고 문학이나 언론을 나타내고, 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를 통해서 무력이나 전쟁 같은 것을 나타내는 방법을, 이렇게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을 가리켜서 synecdoche라고 합니다. 제유법이라고.

여기서 할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어떤 믿음의 행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할례가 차지하는 위치, 오늘날은 우리는 할례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순종이라고 하는 것, 행위라고 하는 것으로 대체시켜도 되는 말인데요. 어떻게 우리 할례와 의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할례는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할례로 인쳤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표시를 할례로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도표로 한번 보시면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로서 할례를 받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모습, 거룩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이 의롭게 된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착각을 하냐면, 내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혹은 내가 순종함으로써, 거룩함으로써, 그래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을 획득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 먼저고, 그것에 대한 표시, 그것에 대한 인침,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서, 이 할례나 순종이나 거룩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이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먼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게 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에서 순종이 나타나고 거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면 좋냐면, 제 생각에 이것은 통장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그 통장에 얼마가 예금되었다고 적혀집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그렇죠. 통장 써봤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굳이 통장이 없어도 거래가 됩니다. 체크카드를 가지고, 현금카드를 가지고 물건을 쓰면, 그러면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갑니다. 처음에 100만 원을 예금을 해놓았는데, 그래서 내 통장에 100만 원이라고 찍혀 있어요. 그런데 그 통장에 들어있는 그 돈을 체크카드를 가지고 계속해서 돈을 쓰기를 쓰는데 통장 정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통장에는 얼마가 있다고 찍혀져 있습니까? 100만 원이 그대로 찍혀져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저는 체크카드로 돈을 여기저기서 많이 쓰면, 실제로 은행에는 100만 원이 들어 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을 겁니다. 통장에 찍혀 있는 게 중요한가요?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인가? 중요한 건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는 게 중요해요. 거기에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겁니다. 나중에 그것을 정리하면, 아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나! 이렇게 나중에 통장 정리하게 되면, 이만큼 잔액이 남아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통장은 알게 해주는 것이지, 통장이 돈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쩌면 믿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의가 나타나는 것이고, 정말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통장에 이렇게 얼마가 찍히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위로 우리들의 순종으로 우리들의 거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통장에, 실제로 은행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은행 잔고 증명서를 위조해서 이만큼 나에게 돈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돈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거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걸 혼동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혼동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야 되는데,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내가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거짓 잔고 증명서로 나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성도님들 사이에는 이제 곧 임종하는 분들을 위해서 임종 세례라도 베풀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믿음이 없어도 그냥 군대에서 단체 세례라도 받으면 그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게 아니고, 있습니다. 안 받는 것보다야 받는 게 좋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그래서 목사님 되신 분들도 있고, 그렇게 그런 예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레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친 것이지, 세례만 받았다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동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할례로, 우리의 순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다 가져다 놔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지 않고 잘못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거나, 또 정반대로 우리가 믿기만 하면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막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 순종에 대해서 오해하는 양극단의 이야기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있는데요.

둘 다 다 다 틀려먹었어요. 순종은 무엇인가?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순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순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의 반응으로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와야만 하고, 반드시 따라 나와야만 하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종종 오해를 받았는데요. 어떤 오해를 받았냐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고 다니니까, 유대인들이 그 바울 사도를 보면서 저 바울은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비난을 받았는데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분이라고 그렇게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제 위치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기 위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순종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순종의 위치가 어딘가? 믿음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이 나타나야 되는, 반드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 위치를 찾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항상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그것 때문에 안심하고,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우리의 구원이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up and down이 심하죠. 내가 신앙생활을 좀 잘하는 것 같으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같다라고 느껴지다가도, 어느 날 실수할 때도 있고, 어느 날 분에 못 이겨 화를 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심각한 죄를 지을 때가 있는데, 그때, 아, 이제 나는 망했구나! 나는 구원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심각한 영적인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될 겁니다.

우리들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때는 내가 구원받을 것처럼 느껴지다가, 어떤 때는 나는 완전히 절망스럽고, 나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영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완벽함에 구원이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데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기에, 담대하게 언제 어디서나 기쁨으로 믿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제 딸이 바이올린을 했는데요. 학생 때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 거치는 과정이 무엇이냐면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 아이를 데리고, 여러 콩쿠르을 데려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콩쿠르에서 우승을 해가지고, 영예스럽게 그런 상을 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상을 타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상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훨씬 더 많아요. 한 번은 제가 우리 딸을 데리고 콩쿠르장으로 아침에 일찍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데려다 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콩쿠르을 하게 되는 거야! 이제 콩쿠르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우리 딸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빠, 나 콩쿠르에서 1등 못해도 괜찮아? 1등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너 일등 못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마”라고 한석봉 엄마처럼 얘기를 했었어야 되는데, 저는 그렇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손웅정 옹처럼 좀 했어야, 손흥민 같은 사람이 나올 텐데, 그렇게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딸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괜찮아. 네가 바이올린 콩쿠르 대회에서 1등하지 않아도, 너는 내 딸이야. 물론 네가 열심히 수고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나서, 1등을 한다고 한다면, 정말 기쁠 것이고, 그런데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게으르고 열심히 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대충 살아서, 그래서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슬플 것이지만, 네가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네가 어떤 상태이든, you are my 내 딸이야! my precious daughter. 너는 나의 소중한 딸이야!

대학을 가는 우리 딸을 향해서 해준 말도 그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되면, 아예 부모를 거의 떠나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데요. 우리 집에서부터 차로 운전해서 12시간 운전해야 되는 인디아나 대학에 우리 아이를 데려다주고 올 때 그 아이를 향해서 했던 말도 이 말입니다. “예림아, 다른 거” 마지막에 해준 말이 무엇이냐면, “다른 거 기억하지 말고, 이 말만 기억해라. 네가 이 대학 생활을 하다가 무슨 일을 만나도, 넌 내 딸이야. 네가 대학생활 하다가 분에 넘쳐서 화가 나서 사람을 죽여도, 네가 대학 생활하다가, 엉망 진창이 돼서 술에 쪄들고 마약에 쪄들고, 그래서 인생을 망치는 그런 일을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내 딸이야. no matter what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는 내 딸이야!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 아빠 믿고, 우리에게 연락해. 너를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우리 딸아이를 거기다 내려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해서 영원한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너 같은 놈 쓸모 없다. 내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마라” 하면서 우리를 쫓아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 앞에서, 담대하게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로 확신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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