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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4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기도문 강좌 3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주기도문 강좌 5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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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청원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예수님 당시에 살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어떻게 이해를 하죠? 천국,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하죠? 지난 시간에 그렇게 이해할 게 아니라, 훨씬 더 큰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아무튼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있듯이, 유대인들도, 예수님 당시에 살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이스라엘이 잘 나가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나라”다웠던 때가 있었어요. 그게 언제죠? 다윗의 시절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을 때, 그 이스라엘 나라는 아주 참 태평성대를 이룬 것이죠. 다윗의 원칙들을 보면, 전쟁하러 나갔다가 전리품을 얻게 되면, 그 전리품을 싸우러 나간 군인들만 차지한 게 아니고, 누구에게도 줬어요? 싸우러 가지 못한 병사들에게까지도 같이 나눠준 거죠. 다윗의 나라는 온 세상을 정복해버려서, 이웃 주변의 나라들을 다 정복해버려서, 이웃의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는 그런 나라가 되었고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나라가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어서, 그 시절이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룬 시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그 다윗의 나라가 영원해졌습니까? 중간에 멈췄습니까? 멈췄어요. 안타깝게도 다윗의 왕국이,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는 그 다윗의 왕국이. 다윗이 죽고 난 다음에는 솔로몬으로 해서 이어지는 것 같았는데, 거기까지였습니다. 솔로몬 이후에는 르호보암 왕이 나타나더니만, 나라가 두 나라로 쪼개져 버렸고요. 그래서 열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로, 두 지파는 남쪽 유다로 나누어지게 됐고, 그리고 계속 반목이 되면서, 외세의 침입을 받으면서, 정말 힘들게 힘들게, 그나마 견디다가, 결국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저 북쪽 앗수르(Assyria) 나라에 의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남쪽 유다는 그런 데로 좀 더 견디다가 바벨론(Babylon)에 의해서 주전 586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완전히 망해버렸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왕국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는데, 그 예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해버린 거죠.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는 메대(Media)와 바사 나라, 페르시아(Persia) 나라죠. 그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에는 주전 332년에 헬라 제국이 이스라엘을 정복해서, 또 이스라엘은 헬라 제국 밑에서 고통스럽게 삶을 살았습니다. 헬라 제국 이후에는 프톨레미(Ptolemy) 왕조와 셀류키드(Seleucid) 왕조에 의해서 계속해서 지배를 받았다가, 그래서 주전 63년에 이번에는 누가 쳐들어와요? 로마(Rome)가 쳐들어와서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복하고, 그래서 로마의 지배하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외세의 침입 하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삶이 행복했겠어요? 고통스러웠겠어요? 고통스럽죠. 우리나라 왜정 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산 것처럼, 실컷 벌으면 다 세금으로 갖다 바쳐야 되고, 노예로 끌려가고, 군사로 끌려가고, 정말 고통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빨리 이 외세를 무찔러 주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온전히 서게 해 주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나라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게,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런 간절한 기대였었던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여러 종파들마다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가운데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종파 하나가 뭐죠? 바리새파(Pharisees)이죠. 바리새파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대로 순종하며 산다면, 과거에는 우리가 죄악을 저질렀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종살이하게 만들고, 남의 압제 가운데 살게 만들었는데, 이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고,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다시 세워질 거다”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어서 빨리 우리나라가 독립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다윗의 왕조가 재건되고,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 와서,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를 일으켜줄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 바리새파 종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종파들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 다른 종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또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오늘 그 모든 종파들에 대해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 어떤 종파가 있었냐면, 열심당파(zealots)가 있었습니다. 열심당파, 열혈당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시몬이라고 하는 제자는 바로 그 열혈당파 출신, 열심당파 출신의 제자였는데요. 이 열혈당파에서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우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죄악을 제거해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거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그 열심당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그 옛날 출애굽할 때, 모압 민족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말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때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큰 역병 가운데, 완전히 몰살을 당할 처지가 있었는데, 그 역병이 그치게 만들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이 있었는데, 퀴즈. 그게 누구였습니까? 성경, 구약성경 잘 아시는 분? 제가 잘난 척하라고 일부러 대답을 안 해 주시는군요. 참 대단한 성도님들이십니다. 비느하스! 비느하스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을 내겠는가?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겠는가?”라고 했을 때, 비느하스(Phinehas)라고 하는 사람이 들고 일어나가지고, 모압 여인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고 있는 그 두 남녀를 어떻게 했어요? 찔러 죽인 거죠. 창을 박아가지고, 두 사람을 죽이는 그 순간, 어떻게 됐어요? 하나님의 역병이 그치고, 이스라엘의 평화가 오는 그런 사건이 출애굽 당시에 있었단 말이죠.

그렇게 이 비느하스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는 죄악을 저지르는 그 나쁜 놈들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서 죄를 제거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평화가, 하나님의 샬롬(shalom)이 이스라엘에 온 것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입니까? 마치 지금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거예요. 우리가 율법도 잘 지켜야 되겠지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해야 한다? 우리 민족 가운데서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그런 아주 나쁜 놈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열심 당원들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있는 죄악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는, 중동 사람들이 입는 옷이 뭐죠? 이렇게 이렇게 통으로 짠 그런 옷으로, 옷 속에 칼을 숨기고 다니다가, 그러다가 나쁜 놈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팍 찔러 죽여가지고, 제거해서, 세리가 있다? 세리를 죽여버리고. 창기가 있다? 창기를 죽여버리고. 우리 민족 가운데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 죽임으로 말미암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통치가 수립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을 하게 되고, 외세는 물러가게 되고, 모든 나라에서 우리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는 그런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짠하고 나타난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로 나타났어요?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난 겁니다. 다윗의 후손, 다윗의 후손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만들 그 예수님께서 짜잔하고 나타나신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 중심으로 모이면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나라가 다시 회복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방식의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관점에서 봤냐면 영적인 차원에서 본 것이죠.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은 이 세상, 이 물질적인 세계, 이 육신의 세계에서 외세들을 무찌르고, 그래서 우리나라가 독립하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 국가가 잘 되는 것, 이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냐면,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더 큰 문제예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더 큰 문제인 겁니다.

우리들이 사탄의 지배 가운데 있고, 죄 아래에 있어서, 그래서 그 죄의 영향력 때문에,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지르고, 그런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결과로,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들을 살고 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이제는 우리가 죄의 노예가 아니라, 사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바뀌어지는 그런 영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율법의 요구로부터, 율법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종교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마치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었는데, 그 종살이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서, 그래서 독립 국가가 되게 만들었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인생인가? 바로 왕과 같은 그런 사탄의 지배 가운데 있는 우리가 죄의 요구를 따라서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참 힘들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서,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보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어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어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관점이 다른 거예요.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 있어서의 그런 왕이냐? 아니면 “영적인 차원이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게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다윗의 후손이었고, 우리를 영적으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묻죠.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고 그럴 때. 예수님의 대답이 뭐예요? 내 나라는 어디에 속한 게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해방되고, 국가가 잘 되고, 그게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영적인 그런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이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너무 말을 빨리 했나요? 고맙습니다.

2. 누가복음에는 빠진 제3청원

오늘은 제3청원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3청원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고 하는 기도가 제3청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맨 첫 시간에 했던 것처럼,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제1청원 제2청원 제3청원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1청원이 있고 2청원이 있는데, 3청원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생략돼버렸어요. “왜 누가복음에는 제3청원이 기록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을 가질 수가 있겠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왜 생략돼 있습니까? 어차피 같은 기도의 제목입니다.

1청원과,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2청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제3청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이 세 가지 청원이 각각 다른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무슨 기도의 제목이에요? 같은 기도의 제목이다. 이거예요. 똑같은 기도 제목이에요. 똑같은 기도의 제목을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하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고, 거룩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한다면, 그곳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이름은 무시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1, 2, 3청원이 전부 다 다 똑같은 기도의 제목인데, 유대인들의 습성이 뭐냐 하면,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하는 그런 특성이 있어요. 시를 보면, 항상 짝을 이루어서, 그렇게 다시 설명하고, 다시 설명하고 있잖아요? 이게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표현했다가 저렇게도 표현했다고 하는 그런 방법,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그렇게 설명을 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은 마치 주문처럼, 주문처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외어야만, 효과가 있는 주문이 아니에요. 주문은 뭐예요? 철자 하나 틀려도 안 되고, 발음 하나 들려도 안 되고, 악센트 하나 들려도 안 되고, 모든 게 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그 주문대로 뭔가 요술이 만들어져요. “아다브라카브라” 하면서 마술을 부렸는데, 나는 비둘기를 만들려고 그런 요술을 쫙 부렸는데, 비둘기가 안 나타나고, 쥐가 만들어졌어요. 왜 그랬어요? 악센트 잘못하면, 비둘기 만들려고 했다가, 쥐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왜? 주문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악센트 하나 틀리지 않고, 그 장단음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해야만, 그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게 주문이라고 하는 거죠.

하지만 주기도문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가 정신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정신에 따라서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 대로 달달달 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주기도문의 정신을 이해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를 배워서, 우리의 형편에 맞게, 우리의 상황에 맞게, 이 기도를 우리의 버전(version)으로, 우리의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

자. 아무튼 제3청원을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까요? 그것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요? 안 이루어져요? 아무 대답도 안 하지 말고, 틀린 대답을 해줘야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어요? 안 이루어지고 있어요? 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기도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예? 없잖아요! 아니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데, 달라고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달라고 기도하는 거, 아니에요? 없으니까, 달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예요? 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예요? 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인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무시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닌 방식으로 이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성경에 써 있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배운 게 뭐예요?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까? 네. 지난번에 이미, 지난 시간에 한혜실 권사님이 대답하셨어요.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냐? 아니냐?”라고 질문을 던진 것에 대해서, 이미 정답을 이미 얘기했어요. 하나님의 나라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인 거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아주 정말 복잡한, 애매한 상황이 지금 우리 상황 가운데, 우리 주변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 게 우리들의 현실인 겁니다.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그냥 떨어지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셔야만,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 땅에 떨어지는 겁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우연히 만나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끔 만들어주셔야만,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서 교회당으로 오게 된다고 한다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발걸음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은, 그 어느 것 단 하나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일어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만일,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당장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난다고 말하면 은혜스럽죠. 그런데 그 말이 은혜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은혜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거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죠. 악을 보면서, 지금 악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 악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냐?”라고 말할 때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그 옛날 유대인들을 600만 명씩이나 학살했던 히틀러의 그 잔악한, 그런 살인마적인 그런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거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하나님이 그런 나쁜 하나님이었느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함부로 이야기해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함부로 이야기하면 욕먹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 주변에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사고로 인해서 사람이 죽는다든가,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정말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든가, 수많은 고통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 허락하신 거다라고 얘기하면 그러면 열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열받는 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단 말이야? 열받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말을 함부로 그냥 쉽게 하시면 안 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것을 고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그러면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뜻, 이런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뜻,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의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4. 하나님의 뜻의 다양한 측면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한 3개 정도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분한다고 하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sovereign) 뜻”이라고 하는 걸로 우리가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런 주권적인 뜻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효과적인(efficacious, 일어나게 되어 있는) 뜻이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무너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주권적인 뜻이 막힐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효과적인 하나님의 뜻인 것이죠.

근데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무엇이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살고 병들고 등등, 아무튼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 everything,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꼭 이런 주권적인 뜻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보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적인(preceptive) 뜻입니다. 규례적인 뜻, preceptive will,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법칙으로 만들어 놓으신 그런 뜻이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거라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이런 규례적인 뜻 이런 하나님의 뜻이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슬퍼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니요. 불평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니에요. 그런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고, 살인하지 말라. 등등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서, 규례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나타났는가? 성경 속에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이 이 성경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인데요.

이러한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은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종종 어겨지고 있습니까? 예. 종종 어겨지고 있는 거죠.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 안 하잖아요? 정말 제가 황당한 것은, 감사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던 그 사람들이 모인 그 자리에 가면, 감사가 안 나고, 순 욕하고들 앉아 있어요. 항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을 순종하냐면, 순종하지 않고 어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면, 어겨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세 번째 뜻,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신(good) 뜻입니다. good will. 하나님의 선하신 뜻,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그런 뜻이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복 받기를 원하시고, 하는 그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뜻이죠. 그런데 그런 기뻐하신 뜻들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안 이루어지고 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그래서 1번, 1번 주권적인 뜻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하나님이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슬픔과 고통이 있고, 미움과 증오가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여러 여러 가지 나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들이 뜻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 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5. 제3청원에서의 하나님의 뜻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제3 청원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기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때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번.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일까요? 2번.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 3번. 하나님의 선하신 뜻. 어떤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겠습니까? 예? 마스크를 쓰니까, 안 들려요. 선하신 뜻 맞아요! 맞아요. 물론 우리가 여러 가지로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으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니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만약에 1번 뜻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안 이루어지니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그런 주권적인 뜻이 지금 다 이루어지고 있는데, 내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있거든요. “하나님, 이러면 안 되는데요. 하나님,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데요.”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스스로를 설득시키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기도하고,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설득하고, 하나님의 뜻에 내가 복종하는 의미의 기도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시기를, 이 잔이 내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기도는 무엇이냐면,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선하신 뜻은 아닐 수 있겠지만, 물론 선하신 뜻이긴 하지만, 그러나 죽어야 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선할 수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뜻이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내가 물리치고 싶지만,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그런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주여, 내가 그것을 수용하겠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순복의 다짐의 기도로 제3 정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8절 말씀에 어떤 기도의 제목이 어떤 말씀이세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얘기했는데, 그 얘기는 우리가 우리의 기도 제목을 항상 끝까지 밀어붙여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끝까지 내 뜻대로 밀어붙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복해 나가는 것이 아주 중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아무튼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제3청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복으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물론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마도 두 번째 규례적인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로 보는 것이 더 맞다고 봅니다. 김현순 권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이 땅은 어떤 땅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땅이잖아요? 의로운 자는 너무나도 고통을 당해도,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인데, 악을 행하는 자는 뻔뻔스럽게 악을 행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이 정말 모순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선한 사람들은 수고하고 애를 썼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결과가 없는 반면에, 그냥 놀고먹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이런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사탄의 지배가 지금 이 세상에서 자꾸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이런 불합리한 것들을 다 제거해 주시고, 정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제2청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그리고 첫 번째 청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주소서.”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과 일맥상통한 기도의 제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6.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제3청원에 보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서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라고 말할 때 ”하늘“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저기 저 위에 있는 하늘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하늘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그런 대상을 지칭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하늘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죠? 영적인 차원이죠. 하나님의 뜻은 지금 영적인 차원에서는 100%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 이 땅이라고 하는 건 뭐죠? 우리들의 현실을 말하는 거죠. 우리가 발 붙여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저 영적인 차원에서 천사들과 함께 있는 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이죠. 따라서 하늘은 영적인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땅은 가시적인 세계, 우리의 생존하는 영역 우리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고 하는 이 표현은 제3청원에만 걸린 것으로 한국말 기도문에서는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제3청원에만 걸렸다고 보기보다는 1, 2, 3청원에 다 걸린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번역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하나이다.“ 이렇게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를 3청원에만 국한시켜서 번역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원문의 순서를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뜻이 이루어지기를,“ 해놓고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라고 하는 부사구가 붙어 있는 거죠. 그러면 이 부사구가 맨 마지막 세 번째 청원에만 걸리는 게 맞습니까? 1, 2, 3청원에 다 걸리는 게 맞습니까? 헬라어도 마찬가지고, 히브리어도 마찬가지고, 반복될 경우에는 생략하는 게 원칙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청원에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청원에 다 걸린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한번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세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영적인 차원에서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영적인 차원에서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고, 영적인 차원에서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로 보는 것이 그것이 바른 관점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7.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군사의 기도

지금까지 우리는 1 2 3 청원이 사실상 하나의 기도 제목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는데요. 이런 기도의 제목을 왜 우리가 기도하는가? 왜 이 기도를 하는 것이죠? 1, 2, 3청원 기도를 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군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구냐? 여러분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군병들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영적인 전투를 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의 힘만으로 못 싸우니까,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기도하는 것이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면,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마주하면서 싸우러 갈 때, 물맷돌 5개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싸우러 나갈 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한다면, 어떤 기도의 제목을 다윗이 했을까요? ”하나님, 내가 이 골리앗을 무찌르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무시당하고 있는 이 이름이 다시 영광스럽게 회복되게 해 주옵소서. 저 블레셋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가 저 블레셋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함을 보여주게 해 주옵소서. 이 세상을 지금 저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려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런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물맷돌을 가지고 블레셋에게, 골리앗에게 나아갔을 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 순간에 기도가 제일이니까 하면서. 금식 기도하러 기도원에 간 게 아니고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기도했다고 한다면 1, 2, 3청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상황이냐? 우리가 그런 상황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들에게 놓여 있는 그 전쟁이 무엇인가?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지금 우리는 평화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그런 전쟁 중에 있습니까? 예. 영적인 전쟁 중에 있는 거 알고 계셔요. 그걸 잘 알아야 돼요. 영적인 전쟁 중에 있어요.

우리가 영적인 전쟁 중에 있는데, 우리가 그 마귀와 싸워 이기려고 할 때, 내 힘의 의지 부족하니, 어떻게 기도해야 돼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영적인 전투를 해야 되는 거죠.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영적인 전투를 하는데, 내 힘과 능력으로 부족하니까, 어떤 기도를 해야 돼요? 주기도문에 기도를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해 주옵서. 내 인생의 영적인 싸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영적인 전투를 하라고, 영적인 전투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문으로 주신 겁니다.

8. 영적인 전투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러면 우리들에게 있는 영적인 전투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 11절부터 18절 말씀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우리의 영적인 전투가 있는 겁니다. 사탄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호시탐탐 노리면서 우리를 싸워서, 우리를 포로로 잡아가기 위한 전쟁을 계속 걸어오고 있는 것이죠. 계속 걸어오고 있을 때, 우리가 그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그 사탄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 이 주기도문이 필요한 거죠.

따라서 우리는 영적인 전투를 해야 될 사람들인데,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요? 마귀죠.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 권력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종교 권력자들은 그 옛날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처럼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많이 취하게 되는 경향들이 있는데요. 아무튼 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기득권 자리에 올라가면, 그럴 위험성이 언제든지 상존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종교 권력자들은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규정했냐면, 물리적인 싸움, 사람과의 싸움으로, 잘못 호도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엇이냐면, 바로 중세 시대 때 있었던,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무엇이냐면, 지금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가나안 땅에, 이슬람 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마음을 아파하면서, 그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아오자. 지금 회교도들에 의해서,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있는 이 가나안 땅을 우리가 다시 찾아오자. 그것이야말로 거룩한 전쟁, 영적인 전투, 성전(聖戰)이라고 생각을 하고, 유럽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을 동원해서, 그 이슬람 교도들과 전쟁을 벌인 것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렇게 이슬람 교도들을 무찌르는 것이 영적인 전쟁이 맞을까요? 영적인 전쟁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성지(聖地)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성지가 있지만, 기독교는 성지가 없습니다. 저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땅을 가보고 싶어요. 아직까지 한 번도 못 가봤기 때문에, 내년에 좀 가볼까, 지금 그냥 꾀를 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볼까? 제가 가보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거기서 살았기 때문에 성지이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성경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좀 더 잘 깨닫기 위해서, 그곳에 가보려고 하는 것이지, 거기가 성지이기 때문은 아니에요. 그곳이 거룩한 땅이 아니에요. 사실은 이 세상 전체가 다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런데 중세 시대 때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종교 권력자들, 교황들은 저 이슬람 교도와 싸워서,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전쟁, 영적인 전쟁이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런데 사실은 그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건 표면으로 내세운 목적이고, 실제 그 속셈이 뭐였어요? 속셈? 속셈이 뭐냐 하면, 저 인도, 파키스탄 이쪽에서 생산되는 후추를 유럽에서 수입해다가 먹었는데, 그 중간 길목을 회교도들이 이슬람교들이 장악하고서 막고 있단 말이에요. 후추를 뿌려야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아무튼 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후추라고 하는 정말 귀중한 식료품을 이슬람 교도들이 길목을 차단하고서, 수입의 방해를 하고 있으니, 돈을 벌지 못한 장사꾼들이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적인 열정을 동원해서, 회교도들을 물리치고, 장사를 잘하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을 감추어 두어서, 십자군 전쟁을 벌인 것이죠.

그 장사꾼들은 물론 당시 천주교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즉 성당의 주요한 성도들이었고, 헌금도 많이 했고, 종교 권력자들과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그 장사꾼들의 생각과 종교 권력자들 교황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 주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자고 하는 그런, 목적은 그런 목적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것은 십자군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 아니라, 사실은 탐욕적인 전쟁이었고, 장사꾼들의 손에 놀아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을 당한, 안타까운 교회사에 있어서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사건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는 안 일어날까요?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어떤 집단과 어떤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거룩한 영적인 전쟁이라고 포장되어 선전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적 가치를 위해서 싸우고자 싸우라고 이야기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한 사악한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러한 정치적 이득 때문에 순진한 성도들을 동원하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오늘날에도 재발하고 있는 것이죠. 종종 그런 사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가 되지만, 분별력이 없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 하는데, 분별력이 없어서 따라가기도 하고, 그리고 성도들도 제대로 잘 모르고, 영적인 전쟁이 마치 사람과 싸우는 것이, 그래서 잘못된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영적인 전쟁이라고 오해해서, 그래서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참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치적인 어느 한 편을 위해서 편들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요. 정말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싸우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적이지 못한 그런 면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편에 대해서는 침묵해요. 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목적이 다른 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목적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이 세상의 것을 탐하는 목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여기에 순진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넘어가고 있고, 21세기 십자군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병사로서, 영적인 전쟁을 하라고 말하고, 그리고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이 주기도문을 기도하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기도의 제목은 정말 ”영적인 싸움“이에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이 땅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내 마음의 내부에서 있는 싸움인 것이죠. 누가 우리의 대적인가? 대적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다윗의 경우인데요. 다윗은 도망 다니는 가운데 사울을 만났습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만, 정말 그 사울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씩이나 만나게 됐습니다. 그때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빨리 저 사악한 사울을 죽여버리고, 이 싸움을 끝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울 왕에 의해서 엉망진창이 된 이 나라를 완전히 끝내버리고, 다윗이 왕이 되어서, 그래서 이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또한 다윗의 마음속의 충동을 통해서, 사탄은 우리들을 자꾸만 사울을 죽이라고 하는 충동질을 해오는 겁니다.

그때 다윗은 그러한 싸움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나, 사탄이오.“라고 하면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는 항상 양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내가 거룩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죠. 다윗은 그러한 요구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하는, 그 내면의 사탄의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악마를 이기는 것이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기도문의 기도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이겼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대제사장들과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칼을 빼어 들며 저항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그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사탄의 유혹,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는 사탄의 유혹, 그런 유혹 내면의 유혹들과 싸워서 예수님께서는 이겼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넘어뜨리는가? 마치 거룩한 목적인 것처럼 가장해서 우리 이웃들과 싸우게 만듭니다. 우리 성도들끼리 싸우게 만들고, 교회끼리 싸우게 만들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될 이웃 주변들과 싸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쟁취해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듯이, 그 뜻이 이 세상에서? 특별히 어디에서? 내 마음속에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마음을 무너뜨리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싸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 예배의 현장에서 이 나라에서 선교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기도의 제목들이 있어야 할 것이죠.

9. 4,5,6,7 청원에 대한 예고

오늘은 여기까지고 그다음에 이제 다음에는 4, 5, 6, 7 청원을 하게 될 텐데요. 4, 5, 6, 7 청원은 무엇이냐? 이제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할 때, ”보급품 좀 조달해 주세요.“ 보급품 좀 조달해 주세요. 우리의 싸울 힘이 없습니다. 보급품 좀 전달해주세요. 그런 영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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