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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8 – 악에서 구하소서

1. 제7청원

주기도문 강좌 마지막 시간이 되어 있는데요. 오늘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몇 번째 기도 제목이죠? 7번째. 7번째 청원이죠? 그런데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만 있고, 누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주기도문에 대해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돼 있고,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 있는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에 있는 주기도문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르고 길이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고 하다고 하는 점을 맨 첫 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렇게 주기도문이 하나의 원형이 아니라, 이렇게 표현이 다르고, 길이도 다르고,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게 있다고 했습니까?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그랬습니까?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렇죠? 주기도문이 주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문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해야 하고, 인토네이션, 숨 고르기, 등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똑같이 재현해내야만, 그 주문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주문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까에 대한 그 내용을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똑같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겁니다. 서로 주기도문의 표현을 약간씩 달리해도 괜찮은 것이고, 우리들의 실제 기도에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반복하고 암송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기도문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의 기도문을 만들어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든 우리말로 표현한 그 기도문이 그 기도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기도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지, 주기도문을 그냥 외우고 반복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해가 되시죠?

어떤 영상을 보니까, 주기도문을 500번 암송하면, 매일매일 주기도문을 1천 번 암송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1,000번씩 하자. 5백 번씩 하자 하는 그런 영상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을 똑같이 정확하게 외우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은 주기도문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가르침인 것이죠. 주기도문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주문을 외우듯이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에 대해서 제대로 잘 배워야 되는 것인데, 종종 잘못된 가르침을 줄 수가 있는 거죠. “여러분, 주기도문을 하루에 오백번씩, 오백 번씩 해봐. 천 번씩 해봐. 그러면 기도가 이루어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아, 저건 순 엉터리구나.”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로 가르쳐 주신 게 아닌 겁니다.

2. 제7청원은 제6청원의 반복

두 번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표현이 마태복음에만 있고, 누가 복음에는 없다고 해서 문제가 안 되는 두 번째 이유가 무엇이냐면,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사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 표현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6청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는 제6청원과, “우리를 악에서부터 건져주세요”라고 하는 제7청원이 서로 다른, 전혀 다른 주제의 기도문이 아니라, 사실은 제7청원이 제6청원을 반복해서 말해주는, 반복하고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약간 강조점을 달리해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가 이제 종종 히브리 평행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잖아요? 히브리 평행법을 보면, 문장을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사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게, 우리 유대인들이 흔히 즐겨 쓰는 방식이고 했는데, 역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는 그 기도의 제목을 다른 히브리 평행법 식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이 “우리를 악에서부터 건져주세요”라고 하는 것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누가복음에 이 표현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악에서부터 건져 달라고 하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고,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예방적 차원의 기도,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라고 한다면, 악에서부터 건져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을 꺼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니까,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고, 하나는 긍정형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하나는 부정형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차이가 약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제6청원이나 제7청원이나 같은 의미의 기도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3. 악 – 포네로스

악에서부터 구원해 달라고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는데요. “우리를 악에서부터 구원해 달라”라고 했을 때, “악”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헬라어 “포네루”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한번 헬라어를 한번 보겠습니다. 헬라어를 잘 읽으실 줄 알죠? 한번 읽어볼까요? “아포 투 포네루” 어떻게 그렇게 헬라어를 잘 읽어요? 위에 써놨군요. “아포”라고 하는 것은 “어디 어디로부터”라고 하는 말이고요. “투”는 정관사예요. 정관사. 그리고 “포네루”라고 하는 것은 “악”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포네루”라고 하는 말을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악”(evil)으로 번역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악한 자”(evil one)라고 번역할 수 있어요. “악”하고 “악한 자”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악은 추상명사고, 다시 말하자면 지금 헬라어에서는 중성형이고, 중성형으로 됐을 때, 악이고, 악한 자라고 하는 것은 인격인 겁니다.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부터 악한 존재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이라고 하는 거에서부터 건져내느냐? 악한 사람에게서, 혹은 악한 자에게서 건져내느냐?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포네루”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중성형으로 볼 수도 있고, 남성형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헬라어가 남성 여성 중성 세 가지 성이 있는데 중성과 남성은 형태가 똑같아요. 그러면 이게 중성으로 사용되었을까? 남성으로 사용됐을까? 어떻게 알 수 있죠? 문맥을 보면 알 수 있는 거죠. 문맥에서 보면, “아, 이게 중성이구나” 문맥을 보면, “이게 남성이구나”라고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문에서 이 “포네루”라고 하는 이 단어는 문맥이 없어요. 그냥 갑자기 “악”이라고 하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중성으로 해석해도 되고, 남성으로 해석해도 되는 겁니다. 근데 중성으로 해석하면, “악에서부터 건져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 되는 거고, 남성형으로 해석하면 “악한 자에게서” 건져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이죠. 두 가지 번역 중에서 중성으로 번역하는 게 맞을까요? 남성으로 번역하는 게 맞을까요? 몰라요. 둘 다 다 가능성이 있어요. 둘 다 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둘 다 다 살펴봐야 되겠죠.

만일 이것을 중성으로 생각해서, (이제 치워 줘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만일 이것을 중성으로 해석해서, “우리를 악에서부터 건져주세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내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나를 막아달라. 그런 의미가 되겠죠. 내가 악에 빠져서, 악한 일을 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우리들을 막아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심지어 교회당 안에서도 선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악한 일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우리가 할 수도 있는데, 주여, 우리를 악에서부터 건져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겠어요? 내가 그런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달라. “나를 건져 달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겠죠.

그 옛날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라고 하는 그런 요청을 받고, 그래서 발람 선지자가 그 말을 듣고 모압 사람들에게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나귀가 발람 선지자를 막고 가지 못하게 만들잖아요? 이와 비슷하게 우리를 악에서부터 건져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되는 거죠.

다윗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나발이라고 하는,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모욕하고, 그리고 양털 깎는 데 잔칫날에 아무것도 주지 않고 화를 돋우니까, 그러니까 군사들을 이끌고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을 죽이러 갔단 말이에요. 죽이러 갔는데, 마침 그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나타나서 음식을 공궤하면서, 말로 위로를 하면서, 그 다윗을 달래게 될 때,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한 거죠. 내가 화가 났었고, 내가 나발을 죽이려고 했는데, 내가 죽이려고 하는 나의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셔서, 내가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그런 일들이 많거든요. 내가 악을 저지르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우리가 그런 악을 행하지 않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그런 악에서부터 악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 되겠습니다.

시편 141편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에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의 입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의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달라. 악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건져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로 이해하시면 되겠고, 이런 기도를 우리도 해야 되겠죠.

언제 해야 돼요? 마음에 분노 가득할 때, 기도해야죠. 분노가, 우리가 분노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분노가 실질적으로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래서 우리가 죄악을 짓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우리들의 머리로 새가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막아요. 하지만 새가 날아가는데, 그것을 그냥 가만히 방치해 둬서,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서 둥지를 틀고, 새끼도 낳고 하도록 계속 우리 머리 위에 그 새가 둥지 틀고 하도록 내버려 두면 돼요? 안 돼요? 안 된단 말이지요. 분노하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나쁜 걸 보면 분노해요. 하지만 그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어서,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해야 되는 것이고,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거 보면 갖고 싶어요. 안 갖고 싶어요? 갖고 싶단 말이에요. 떡이네. 두 개 가져갈까? 생긴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럴 때 그런 생각이 날 수 있어요. 날 수 있지만, 생각을 접어야 되죠. 아무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죄에서부터 악에서부터 건져달라고 하는 기도가 이 기도의 제목이 되겠죠.

4. 어떻게 악에서 건져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악에서부터 건져주십니까?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을 통해서 우리들의 양심을 두드리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우리를 회심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경우일까요? 바울의 경우겠죠.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그 길에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바울의 길을 막아버리는 그런 역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을 부르시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었고,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게 하시냐면, 우리들의 마음 분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죠. 그때 우리가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복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간청하는 동시에, 우리들의 다짐과 서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악을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겠어요? 없죠. 하나님 저를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악에서부터 건져주세요”라고 우리가 늘 기도한다고 하면, 우리가 악한 일을 의도적으로 할 수 있겠어요?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기도이면서 서원이면서 다짐인데,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릴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늘 양자의 소리가 들리거든요.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육체의 음성이 들리기도 하는데, 그 육체의 음성이 굉장히 강하게 들린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악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가 해야 되는데, 그게 바로 그런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통해서, 혹은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실 때, 우리가 악에서부터 돌이킬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면서 또한 우리가 다짐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5. 악한 자에게서 건져 주소서

두 번째로 “포네루”라고 하는 것을 “악”이 아니라, “악한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악한 자에게서 건져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악한 자는 누구를 의미할 수 있겠어요? 사탄 마귀를 이야기하는 거겠죠. 물론 나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악한 사람 예를 들자면, 세례 요한을 가두었던 헤롯 대왕이라든가, 그리고 성도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했던 로마 황제라든가,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하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사탄 마귀의 손에서부터 우리를 건져 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도 결국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지게 하는 그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탄의 유혹은 어떻게 우리들에게 옵니까?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을 악에 빠지게 만들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오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풍부함으로, 고난만 우리를 넘어뜨리는 게 아니라, 풍부함도 우리를 넘어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굴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잠언서 30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아굴은 이렇게 기도했어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부유해도 죄를 지을 수 있고, 가난해도 죄를 지을 수 있고, 건강해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우리가 병약해도 죄를 지을 수 있고, 모든 것들이 그렇게 사탄의 손아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건져내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탄의 손에서부터 건져내시는가?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건져내실까요?

우리들의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빠져나오게 하시는 거죠. 빌립보서 2장 1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무엇을 두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건져내시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냥 우리 목덜미 잡고 이렇게 끌고 가는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신다고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거룩한 소망을 주신대요. 거룩한 소원을 주신다, 그래서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나가게 만들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악에서부터 건져질 수 있는 것은, 악인에게서부터 건져지는 것은, 우리가 결단하는 겁니다. 우리가 결단하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결단해서 빠져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종종 우리 한국의 성도님들 가운데는 어떤 착각을 하시냐 하면, 나는 거룩하게 살고 싶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나, 우리 안에 사탄이라고 하는 존재가 들어가 버려서, “우리 안에 귀신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그래서 그 사탄을 우리들에게서 쫓아내기 위해서, 뭔가 능력이 많으신, 영력이 많으신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이 기도를 해서, “그 사탄을 쫓아내야 된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근데 사실은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어떤 비디오 클립을 하나 봤는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비디오 영상을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앉아 있는데, 아마 그분은 그 교회의 장로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장로님을 놓고, 목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그 목사님이 하는 얘기가 장로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탄을 쫓아내기 위해서 내가 기도해 줘야 되겠다는, 그러니까 이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내 마음속에 지금 사탄이 들어 있는데, 사탄이 나가게 해 주십시오.” 울부짖어서 막 기도하고 있고, 목사님이 또 하면서 막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면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장악하는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내 안 속에 쳐들어와 있는 게 아닙니다.

사탄은 언제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옵니까? 우리가 마음의 문의 열쇠를 사탄에게 줘야 들어와요. 내가 악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내가 나쁜 짓 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마음을 가지면서 사탄을 영접해야, 그래야 우리들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쫓아내는 방법은 간단해요.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가요. 그런데 나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 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어요.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우리 안에 사탄이 들어와 있으니까, 그것을 쫓아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악한 자에게서부터 우리를 건져내 달라고 하는 말은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에요.

종종 기도하다가 사탄 쫓아낸다고 두들겨서 죽인 뉴스 종종 듣죠? 제발 그런 데 가지 마십시오. 어떻게 쫓아내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신 그 주님의 소원에 따라 살려고 할 때, 그때 사탄이 우리 안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그러나 사탄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 가지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실 미신적인 관점일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잘못된 교회,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고 사실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미신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거라사의 광인과 같이 완전히 사탄이 장악을 해버려서, 정말 그렇게 장악된 경우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경우는 그렇게 사탄이 장악해버려서, 이미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돼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지. 나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내 마음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들의 의사와 반하여 사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사탄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가?

자, 그러면 사탄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가? 야고보서 1장 14절 말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우리가 욕심 때문에 사탄에게 마음의 열쇠를 넘겨준 겁니다. 우리가 분노했기 때문에 사탄에게 열쇠를 내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혹에 끌리게 되면, 결국 사탄에게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다짐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5절 말씀 가운데서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다”라고 우리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우리는 늘 어떤 일을 하든지, 이렇게 사탄에, 그 악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도 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절실하게 이 기도를 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또 다른 방법으로 본다면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을” 무엇으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제대로 무장해야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부터 18절 말씀,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떼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겁니다. 그게 악에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죠.

7. 송영이 원문에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송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송영은 뭐냐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는 표현이죠.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러는데, “대개”가 뭔가요? “대개”? 이렇게 정답을 미리 말씀해 줘 버리면… “대개”라고 하는 말이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약 100여 년 전에.

말은 변하는 겁니다. 단어의 뜻은 변하는 겁니다. 언어는 살아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꾸 변하고 새로운 언어들이 탄생하고, 옛날 의미들이 사라져 가고, 새로운 의미가 더 깊어지고 언어는 변화하는 겁니다. 종종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아무튼 변화하는 게 언어예요. “대개”라고 하는 말이 옛날에는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말이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기도를 하면서 송영을 붙이는 건 뭐냐면,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뭐냐?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있고, 하나님께 나라가 있고, 하나님께 권세가 있으니,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송영도 누가복음에는 없어요. 없죠. 누가복음에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있나요? 없나요? 마태복음에는 있는데, 지금까지 있는 사본들을 쫙 조사를 해보면, 마태복음의 초기 사본에는 없고, 후기 사본에는 있어요. 그러면 이게 원문에 원래 있었던 걸까요? 없었던 걸까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하는 말이 성경 원문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없었는데, 나중에 후기 사본에서 첨가된 것일까요? 제가 가진 성경을 보면, 6장 13절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가로로 쳐놓고, 각주를 설명해 줬는데, 뭐라고 설명해 줬냐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의 구절이 없음”이라고 설명해 놨습니다. 그런데 그 사본 중에서 아주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없어요. 이 구절이, 그런데 한 3, 4세기 5세기 뒤에 기록된 후기 사본에는 이 표현이 있어요.

그러면 이 표현이, 원문에, (원문은 지금 사라져서 없습니다) 원문에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네?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건 그 누구도 모릅니다. 원본을 못 봤기 때문에, 다만 추측하는 거죠. “아, 있었을 것 같다. 없었을 것 같다”라고 추측할 뿐이죠. 아마도, 아마도, 후대에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원래부터 있었을 가능성보다는 훨씬 더 많아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죠? 고대 사본에는 없고, 후기 사본에만 있다고 하니까, 고대 사본에 있는데, 후기 사본에 없으면, 있었던 게 나중에 빠졌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편한데, 후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원래 없었을까? 몰라요. 그건. 왜? 원본을 볼 수가 없으니까. 원본은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늘 기도할 때 송영과 함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송영 없이 기도한 적이 없다고 해요. 뭐라고 뭐라고 기도한 다음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아버지께 있습니다.” 또 뭐라고 말하고 기도한 다음에,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등등 이렇게 계속 송영을 붙여서 기도해 왔다고 그래요. 그 예가 어디에도 있냐면, 성경 여러 군데에도, 여러 군데, 여러 군데에 드러나 있는데, 디모데후서 4장 1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그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송영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8.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이유

따라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다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이 송영까지 함께 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른다 이 말이죠. 하지만 있었다고 보고, 있었다고 보고, 우리가 해석한다고 한다면, 이 송영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될 이유와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죠. 하나님께 무엇이 있다고요? 나라 권세 영광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한다 이 말이거든요. 근데 나라는 뭐고, 권세는 뭐고, 영광이 뭐죠? 이것은 각각 다른 세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나라, 왕국이, 왕국, 온 세계를 하나의 왕국이라고 본다면, 이 왕국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권세, 그 왕국을 다스리는 그 권세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영광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표현은 약간씩 약간씩 다르지만, 그러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듣지도 못하고 손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나라와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영광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죠.

그런데 종종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속이는 겁니다. 그 권세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있다? 사탄이 어떻게 속이죠? “나에게 있다”라고 속이는 거죠. 예수님에게 가서, 뭐라고 얘기했어요? 내가 이 세상 천하 왕국을 너에게 줄 수 있다. “나한테 경배하면 내가 준다”라고 속이고 자기한테 경배하라고 하는 거죠. 사탄이 늘 속이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뭐냐면, “아니야, 사탄이 그 권세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누가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날 사탄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속입니까? 사탄은 그 옛날 예수님을 속였던 것처럼, 우리를 비슷하게 속이는 거죠. 돈에게 권세가 있다. 이 세상 성공이, 우리들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한다. 대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등등. 좋은 남편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등등. 이 세상의 것들에 의지해야,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것처럼 사탄을 속이고 있는데, 그런데 이 기도는 그걸 거부하는 것이죠. 아닙니다. 하나님, 남편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이 세상에 그 어떤 명예나 권력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정치인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세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고백은 기도에 있어서 기도할 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고백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성경 원문이 아닌가?

혹시 질문 있으시면 질문을 해 주시면 답변을 성실하게 아는 한 해 드리고 모르면 연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잘 안 들려요? 원문이 없다고 했는데, 뭘 어떻게 했어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건 뭐냐? 그렇죠.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것을 예수님이 기록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말씀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한 20년 30년 정도 지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처음. 기록한 게 원문이겠죠. 처음 기록한 게. 그래서 이걸 기록을 했는데, 그 기록을 보니까 너무 좋아요. 근데 이게 몇 개예요? 하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돌려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베껴 쓸게” 해가지고 다른 사람이 베껴썼습니다. 배껴 쓰는데, 유대인들은 이 배껴 쓰는 거의 전문가들이었어요. 그래서 성경을 필사하는 것을 보면, 목욕 재개하고 그다음에 정말 정성스럽게 성경을 잘 배껴써서, 하나라도 글자가 틀리지 않게, 그냥 정성을 다해서 잘 배껴쓰는 그런 일들을 늘 해왔는데, 하다 틀리면 불태워버리고, 다시 쓰고 하는 식으로 이렇게 그런 것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튼 원문이 있어서, 그 원문을 보고 배껴 쓰고 또 배껴쓰는데, 이번에는 원문을 보고 뺏겼을까요? 사본을 보고 배꼈을까요? 사본을 보고 배껴 쓰고, 사본을 보고 배껴 쓰고, 사본을 보고 새롭게 쓰고, 사본을 보고 배껴 쓰는데, 그 사이에 원문은 소실되고 없어졌다 이 말이에요. 없어졌어요. 그런데 사본들만 지금 많이 있어요.

그런데 사본을 옮겨 쓰는 과정 가운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배껴 쓴다고 한들, 완벽하게 똑같이 베껴썼을 수 있을까요? 좀 오류가 있을 수 있을까요? 베껴 쓰는 데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도 성경 필사하신 분들 보면, 한 절 건너뛰고 베껴 쓰기도 하고, 아니면 한 번 썼던 거 또 쓰기도 하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렇게 해서 베끼고 베끼고 하는 과정 가운데, 완벽하게 베낀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약간의 내용상의 차이가 있게 사본을 베낀 겁니다. 베꼈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성경 구절은 굉장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 아 굉장히 어렵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걸 우리 목사님이 설명을 해줬어. 그 뜻이 뭐라고. 그럼 뺏겼을 때 설명 들은 것 가지고 약간 이해하기 좋게 뺏겼을 수도 있겠죠? 등등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사본이 지금 수천 개의 사본이 지금 현재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그 사본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면서 도대체 원문이 어땠을까라고 이렇게 연구해서 원문을 추적해가는 거죠. 원문을 추적해 원문이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해가지고 만든 성경책이 헬라어 네슬 알란드 27판, ubs 4판 등등. 해서 또 sbl 성경 몇 판 해서, 그런 헬라어 그렇게 비교 연구해서, 아마도 이게 성경의 원문에 제일 가까운 것일 것이다라고 한 헬라어 성경 히브리어 성경들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그 학문이 굉장히 많이 발달이 돼서, 대체로 아 이것이 원문이었겠다고 생각되는 그 원문에 거의 학자들의 의견이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성경이 완전히 도무지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그게 몇 개 안 되고 대부분 99.99%는 다 똑같아요. 그런데 일부 몇 구절들이 약간씩, 이런 표현 이런 표현들이 다른 게 있단 말이에요. 그럴 때 과연 이게 이게 원래 것인가? 아닐 것인가 가지고 연구를 했는데,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런 사본 학자들이 아마도 이것이 성경 원문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해서 성경을 내놓은 겁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그 송영 부분은 고대 사본에 없는 사본들이 대부분이고, 그 송영 부부는 후대 사본에 많이들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가로로 쳐놓고, 고대 사본에는 없다고 각주를 써놓은 거죠.

질문 2: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없는가?

“예수님으로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 표현을 해야만, 기도가 기도로서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각에는 늘 어떤 생각이 있냐면, 꼭 주문의 개념으로 늘 기도를 생각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주문할 때 꼭 어떠한 말을 집어넣어야 주문이 되듯이, 기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표현을 집어넣어야, 그게 기도 정당한 기도가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많이 갖고 있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표현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빼먹어도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괜찮아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빼먹어도, 기도가 그거는 빵점짜리 기도야. 하나님께서 안 들어줘 하는 게 아니에요.

부모님들이 애들한테 뭐 할 때, “아빠, 나 빵. 빵.” 그러면 “주세요 해야지.” “주세요.” 그러면 “잘했어”하고, 딱 딱 주잖아요? 하나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안 하면 안 줘. 그렇게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기도는.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예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직접 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해도, 실제로 그런 주님께서 구원하신 능력을 믿지 않는다든가, 아무튼 불신하는 관계라든가, 그런 상태에서 기도한다고 하면,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말을 빼먹어도,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라고 한다면 문제가 안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표현은 꼭 넣어야 될 것은 아닌데, 왜 우리가 넣느냐? 그걸 기억하기 위해서 넣었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름을, 그걸 넣는데, 그게 하나의 율법주의가 돼 버리고, 그래 버리면 안 되는 것이죠.

외국 사람들은 그냥 기도하고 아멘 그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반절, 빼먹고 기도하는 사람이 한 반절, 그렇게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아요.

두 번째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도신경 할 때도 눈 감고 하기 때문에, 사도 신경도 기도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근데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니고,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거예요. 그냥 고백. 그러니까 거기는 기도문이 아니고, 사도 신경은 그러니까 거기는 뭐 굳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말이 들어갈 이유는 없을 것이고,

질문 3: 원문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없느냐?

재밌죠? 평상시 뭐 이게 쓸데없는 질문처럼 보이는 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네. 또? 원문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없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질문이 떠오르냐면, “원문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원문인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거잖아요? 그걸 던져주셔야 돼요. 여러분들이 갖고 사용하는 자는 원본 자입니까? 사본 자입니까? 다 사본 자예요. 원본 자는 그 세계 그 공식 그 기준이 되는 그 하나, 딱 하나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거에 따라서 우리가 자를 만듭니다. 그 자를 만들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어요.

중국제를 하면 어떻게 돼요? 수치가 안 맞을 수 있어요. 수치가 안 맞을 수 있는데, 그러나 99.9999%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를 신뢰하고 매매하고 거래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죠? 하나님의 말씀도 원문은 없지만, 그러나 99.99% 다 원문에 일치한다고 보시면 되겠고요. 간혹 가다가 어떤 구절들이 조금 다를 수는 있으나, 그것들은 우리가 이것이 원문이라고 하면, 어떤 뜻일까? 이것이 원문이라고 하면 어떤 뜻일까? 서로 이렇게 같이 가능성을 두 가지를 다 열어놓고,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려움이 있거나 난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 4: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번역이 왜 두 개인가?

네 장로님, 지금 합동 측 하고 통합 측 하고 주기도문 내용이 다르죠. 다른 이유가, 우리 성경책에도 보면, 두 가지가 돼 있어요. 주기도문,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옛날 주기도문, 옛날 사도신경, 그런데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우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게 같이 맞아야 되는데, 안 맞으면 이게 큰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문이 아닙니다. 주문이. 틀려도 돼요. 서로 다르게 해도 돼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언제 번역됐냐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번역된 거란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번역이 우리가 보기에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대개” 이런 거. 사도신경에서는 뭐가 좀 이해가 안 될 수가 있겠어요?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공회”가 뭐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교통이 뭐지? 이해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통합측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통합 측 감리교 이런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어려운 구닥다리 번역하지 말고, 좀 이해할 수 있게 새로 번역하자. 이해할 수 있도록 편하게 만들자 주의가 통합측 감리교 이런 쪽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새로 번역을 했어요.

합동 측은 뭡니까? 에이 바꾸지 말자. 괴롭다. 한 번, 한 번 외운 거. 바꾸려면 힘들다. 옛날이 좋다. 그게 합동 측 아닙니까? 마인드가? 그러니까 그냥 옛날 거 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두 개가 됐어요. 참, 편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두 개가 돼버려.

도로명 주소가 생겨버렸잖아요? 지번 주소 있다가 도로명 주소가 생겼어요. 더 어려워요. 도로명 주소인지, 지번 주소인지, 헷갈려 죽겠어요. 뭐 늙으면 죽으란 얘긴지? 근데 목적은 뭐냐? 편하게 하려고 만든 거예요. 편하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어려워 죽겠어요. 이게 아이러닌데, 전 세계가 도로명 주소를 쓰고 있습니다. 도로 찾고 번호 쫙쫙쫙쫙 있으니까, 길 찾아가는 데, 너무 편해요. 어느 도로로 갔다가, 어느 도로에서 빠져서, 몇 번째 번호 집 찾는 게, 그렇게 쉽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 처음 갔더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돼 있으니까, 길 찾는 게 너무 쉬운 거예요. 어느 길로 갔다가 어느 길로 갔다가 어느 길로 갔다가 몇 번. 그냥 알려줘도 돼요.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 한국에서도 도입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누가 번지수 보면서 운전해요? 다 네비가 가라는 대로 가지, 네비가 있으니까, 도로명 주소 있으나 없으나,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아무튼 이걸 만들어 놔서, 두 개가 생겼단 말이에요.

옛날에 우리 평수 썼단 말입니다. 평수 쓰고, 근 쓰고 그랬단 말이에요. 미터법으로 바꿔놨어요. 그래서 한 근 600g, 한 평 3.3제곱미터 합니다. 두 가지로 써요. 두 가지로. 늘 두 개씩 얘기해야 돼. 도대체 쉽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많은 아무튼 이제 여담으로 이렇게 빙빙빙빙 재밌으라고 돌아갔는데, 그래서 두 개가 생긴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고 읽으면 되죠. 오늘은 새로 번역된 걸로 한번 합시다. 그러니까 옛날 거 알고 있는 사람은 새로 번역된 거 보고 암송합시다. 새로 오늘은 옛날 걸로 합시다. 하면 돼요.

저는 저도 합동에서 지금 50년을 살았잖아요. 50 몇 년을 살았잖아요. 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설명해주면 되는 거. 굳이 바꿔서, 찬송가 부를 때마다 힘들고, 성경 읽을 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단어 있으면 이게 무슨 뜻이라고, 옛날에 그랬더라. 대개가 왜냐 하면 뜻이 다 알려주면 되잖아. 근데 또 바꿔놔서 성경책 또 사야 되고, 찬송가 또 사야 되고, 크게 바뀐 것도 없구만, 또 또 바꾸고 또 노래 불러야 되고,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합동 측 그 dna가 흐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농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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