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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굴 속에서 만난 하나님(삼상 22:1-2)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아기스 왕의 궁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조국 이스라엘에서도 긴급수배 1호로 지정이 되어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블레셋에서 몸을 숨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찾아간 곳은 아둘람이라고 하는 토굴 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한 사람이 400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굴은 대단히 규모가 큰 동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동굴 속에서 은신하며 지내는 시간은 정말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는데, 자신의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답답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블레셋으로 갈 수도 없고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도 없어서 그저 동굴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은 정말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굴속에서 같이 지낼 수 있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은 어떻게 조달했는지, 물은 그 속에서 충분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벨하우젠이란 학자는 아둘람을 굴이 아니라 요새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해바다 근처 쿰란이란 동굴에서 유대교 분파가 집단으로 거주했던 유물들이 발견되므로, 400명이 굴속에서 있었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속에 있을 때 지었던 시가 시편 57편과 142편입니다. 그 가운데 142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구구절절 다윗의 고통이 배여 있습니다. 이런 고난의 시기에 다윗이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좌절하고 체념하고 살아간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둘람 굴에선 모든 것이 막혀버렸지만,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향은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굴이라 할지라도 입구가 열려 있어서 그리로 빛이 들어오기도 하고 공기가 들어오듯, 기도는 400명이 호흡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숨구멍이었습니다.

시편 57편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으나, 진정으로 도망한 곳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하나님 품 안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피하였기 때문에, 아둘람 굴은 가장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찬송가 438장 가사를 보면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다윗은 이제 성전으로 드러내놓고 다닐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사실 대문에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을 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있는 그곳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옛날 제사장들이나 오늘날의 거짓 목회자들은 성전이나 교회당만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편재하신 하나님을 한 장소에만 가두어두는 불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느 특정 장소 중심의 종교는 사실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는 곳, 그곳은 어디든지 성전이 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둘람 굴로 피신한 다윗을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을 그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다윗은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조차 양을 치고 있던 막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 나온 다윗을 호통친 것은 그의 형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온 집이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위로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두 다윗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윗에게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갈 때, 고난당한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을 훈련시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왕의 수업을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왕으로 세워져 가는 겁니다.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다윗은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란당한 자들을 위로하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달래어주는 왕으로서의 사역이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가 왕이 아니라, 사람들은 돕는 자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로 몰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다윗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히 4:15). 우리가 그분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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