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의 돌, 기억의 돌, 에벤에셀(삼상 7:12)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고 금식할 때, 모든 것이 순탄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이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우레로 블레셋 민족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러한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그 돌을 에벤에셀, 즉 도움의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는 표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잘 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0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갈라진 홍해 바다 사이를 걷는 또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을 직접 체험했다면,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결단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말입니다. 또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기적을 체험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다는 점입니다.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보리 떡과 생선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체험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라면 결단코 예수님을 배반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가 사라져버립니다. 직장에 처음 출근하게 될 때, 우리는 직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사의 마음은 사라져버립니다. 성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고 감격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 하는 도중에 어느새 감사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에벤에셀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해줄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사실 그들 주변에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을 동행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생생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날에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특별한 음식을 그들이 섭취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진영 한가운데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 성막 안에는 언약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 사랑과 축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는지 잃어버리면서 좌절해버렸습니다. 일상화되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벤에셀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다시 바라보도록 도움을 주는 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벤에셀과 같은 것들이 등장합니다. 노아에게는 무지개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 심판 속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들을 보면서 후손이 그렇게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려나간 표식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을 날마다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옷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하고 새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꽃을 보고 공중의 새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에벤에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서울에 자취하면서 사는 아들의 집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다녀가시면, 아들은 어머니가 다녀가셨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립니다. 어머니가 다녀가신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들어가 있고, 방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김창완은 어머니와 고등어란 노래에서,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고등어를 보고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므로(롬 1:20), 우리들은 이 세상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내야 합니다.

에벤에셀은 위험한 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벤에셀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나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우상화되기 쉽습니다. 언약궤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궤 자체에 무슨 힘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그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서 환호하였습니다. 그 전쟁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약궤가 그들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수단이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니까 10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무슨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요 6:32).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모세를 보고 모세를 우상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돌 자체를 신성시할 가능성이 있어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그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도들은 그 십자가 자체가 무슨 대단한 것인 양 그 앞에서 기도하면서 복을 비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교단에서는 교회 강단에 십자가를 다는 것을 금하는 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런 위험이 있으니까 아예 아무것도 만들거나 설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위험성은 언제나 경고되어야 하겠지만, 에벤에셀을 세우는 것은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걸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은 쉽게 잊고, 기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들은 잊어야 합니다. 우선 내가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자랑거리들을 잊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바울 사도는 위대한 학자였고 권력자였고 당시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과거의 모든 자랑들을 잊어버렸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아직도 그런 자랑거리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아직 미성숙한 신앙인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과거에 누군가 나에게 잘못 했던 것들을 잊어야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는데(고전 13:5), 이 말씀의 의미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철저하게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을 잊었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마치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의 경우와 같습니다.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악하게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종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악하게 굴었습니다. 자신의 받은 사랑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니까, 나의 자랑거리들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의 자랑거리들이 생각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기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을 잊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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