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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admin

불꽃쇼와 향유쇼, 하나님의 허비

지난 3일 우리나라 최고층 빌딩 롯데타워에서 불꽃쇼를 펼쳤다. 11분간 펼쳐진 이 불꽃쇼를 직접 가서 보지는 않았지만, 동영상으로만 보더라도 굉장한 이벤트였음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 불꽃쇼를 펼치기 위해 쏟아부은 돈이 44억이란다. 그러니까 1분에 4억씩 쓴 셈이고, 1초에 667만원씩 쓴 셈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공짜 관람객들을 위해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소시민인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에 견줄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했던 향유쇼(?)였다. 불꽃쇼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향유쇼는 사람들의 코를 사로잡았다. 땀 냄새 음식 냄새가 섞여 있던 그 자리에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자 사람들은 그 냄새가 나는 곳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자그마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가격에 달하는 나드 한 옥합을 쏟아 버린 여인의 행동에 한마디씩 해 댔다. 어찌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허비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주변에는 당장 오늘 먹을 게 없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도 있는데, 향유를 이렇게 허비해 버리다니.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여인을 두둔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사랑과 감사를 보았다.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 어느 것도 아깝지 않았다. 사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여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복음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이 여인 이야기 뒤에 가룟 유다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은 30을 받겠다고 흥정하였다. 그에게 예수님은 은 30의 가치보다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서 묘한 대조가 보인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300데나리온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보다 은 30이란 돈을 손에 넣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람 목숨보다 돈이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의 탐욕을 가룟 유다에게서 볼 수 있다. 세월호 3주기가 다가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까짓 배 하나 건지고 미수습자 9명을 찾기 위해서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 것이 아깝다고 말이다. 하긴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미수습자 마지막 1명까지 찾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 하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경험하면서 우리 국민은 가장 필요할 때 정작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선거 때마다 국민에게 머리를 수그리던 지도자가 정작 국민들 필요에는 눈을 감아 버렸다는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다. 사람 생명보다 돈 몇 푼이 더 중요하다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이 지도자로 있다는 사실이 슬펐던 것이다. 예수님보다 은 30이 더 중요했던 가룟 유다를 닮은 지도자들 아닌가. 몇 년 전 보았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다. 미국 국방부는 아무 전략 가치가 없는 일개 병사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려고 8명의 대원에게 특별 임무를 맡긴다. 이 영화는 8명의 대원을 희생해 가면서 라이언 일병을 구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면 혼란스럽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다른 8명의 생명보다 더 살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 전략 가치가 없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희생정신은 감동적이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갈급했던 것은 한 국민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국가의 태도였다. 아쉽게도 국민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했고 정권 안정이 더 귀했다. 슬픔을 당한 자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버렸다. 철저하게 국가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우리도 국가로부터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미국 알링턴국립묘지에서는 24시간 경비대가 근무하면서 무명용사의 묘지를 지킨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한단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을 이제는 쓸모없다고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게서 이런 자세를 기대하는데,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정작 필요할 때 우리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증폭할 뿐이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국민 생명을 정말 소중히 여기며 보호해 주는 선한 마음의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한다. 가룟 유다처럼 사람 목숨을 그저 돈 버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대통령이 아니길 바란다. 물론 완벽한 대통령이 존재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성경 속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짜리 향유를 허비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피를 허비하셨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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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사랑한 목회자 박희천 목사

한국에서 자신의 전기를 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목회자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 전기를 보는 순간, 교만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실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유교적이지만 말이다. 사실 오히려 전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또한 그러한 전기를 통해서 후배들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목회자라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 전기는 아주 효과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박희천 목사님의 자서전이 나온 것이 정말 기쁘다. 내가 박희천 목사님을 만난 것은 총신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그때 많은 교수님들에게 배웠지만 내가 가장 존경했던 교수님은 김세윤 교수님과 박희천 목사님이었다. 김세윤 교수님의 강의가 내게 학문적인 관심을 일깨웠다면 박희천 교수님의 강의는 내게 목회자로서의 열정과 신실함을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나는 잠시 내수동 교회를 출석하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수동 출신인 셈이다. 하지만 박희천 목사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쉬웠던 차에, 박희천 목사님의 자서전을 만난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이 책을 받아들고선 앉은 자리에서 읽었다. 내수동 출신의 목회자들이 박희천 목사님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나오게 된 책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박희천 목사님이 직접 내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디모데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 이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길을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없이 부족한 내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내며 책을 읽어야 했다. 이렇게 목회를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너무나도 교만했고 너무나도 불성실했음이 드러나서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 몰랐다. 이 책만 읽어도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얼마나 더 부끄러울까? 이 책은 현대판 디모데서이다. 그 옛날 바울 사도가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을 썼던 것처럼, 이 책은 박희천 목사님이 겸손하게 써내려간 제2의 디모데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모든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사역을 하리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그리고 이 책은 목회가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 다시 꺼내 읽어야 할 책이고, 또한 목회 하는 가운데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때에도 다시 꺼내 일어야 할 책이다.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 역사에 성경을 정말 사랑한 두 명의 목회자가 있다. 한 분은 김진택 목사님이고 또 한 분은 박희천 목사님이다. 박희천 목사님은 늘 성경을 사랑했고 또 그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 아직도 그분이 신학교 강의실에서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옵니다.”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성경이 아닌 경영학 교과서를 먹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시 박희천 목사님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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