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마음에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

분노는 내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 모든 분노는 내가 의롭다고 생각될 때에 솟아오르는 감정이다. 따라서 자신의 분노를 의로운 분노라고 하면서 애써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사람이 분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데도(약 1:20), 사람들은 자기 분노를 의로운 분노로 항상 위장하곤 한다. 그래야 자기 양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oxymoron)이다.

우리 중 누군가가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정당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는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쉽고 편한 반응일 뿐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고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1-5)

다윗은 자신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해야 할 것인지, 도망하지 않아도 되는지 알기 위하여 왕의 잔치에 가지 않았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잔치에 오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때 요나단이 대답했다. 가족의 제사 문제로 베들레헴에 가야 한다고 해서 보내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사울 왕은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사울 왕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부하 다윗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위하여 선물이라도 보내라고 하지 않았을까? 사울의 분노는 다윗이 나쁜 사람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사실 사울 왕이 악한 왕이었음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분노로 반응하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도와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창녀나 세리를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무시했던 바리새인들은 결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도 역시 영적으로 건강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처럼 보였고, 거룩함으로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결코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바른 반응이 아니다. 바른 반응은 그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나는 나의 죄악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만 그렇게 분노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로운 분노는 사실 나 자신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 잘못에 대해 크게 외치는 한 나의 잘못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다. 분노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기 죄를 바라보지 못하게 양심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분노는 다른 사람 영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을 파멸시킨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애통함으로 회복을 도모하고 있는가?

지난 5월 4일 부산 기장군에 있는 달산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달리기 시합에 6학년 학생 5명이 뛰는 도중에, 1,2위를 다투던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 때 1등으로 달리던 김도현 군은 달리다 말고 넘어진 친구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 아이를 부축하면서 5명의 아이들이 모두 함께 결승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자 그 모습에 감동한 학부모 도우미들이 이 아이들 모두에게 1등 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참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 넘어지면 그 넘어진 사람을 밟고 달려가서 1등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넘어진 친구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우고 함께 뛰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도덕적으로 넘어지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넘어지기도 하고, 인간관계 면에서 혹은 신앙적으로 쓰러질 때가 있다. 사람들 중에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인생의 길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누군가 넘어진다면, 우리는 다가가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악의 길을 걸었던 세리와 창기들을 바라보면서 비난을 퍼부어댔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의로운 분노를 발산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의분을 느꼈을 것이다.어떻게 거룩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이런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의로운 분노로 무장한 사람들은 돌을 들고 예수님에게 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다. 아니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우리들은 중간에 넘어져서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게 된 달리기 선수처럼 실격 처리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천국의 결승선으로 이끄셨다.  

원글링크: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4128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