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무디게 하는 방법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상반된 욕구가 있다. 성경에서는 이런 상반된 욕구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고 구분한다(갈 5:17). 한편으로는 선한 욕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게 되어 있다. 대체로 이런 선한 일들은 힘든 것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놀라운 기쁨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악한 욕구가 있다. 악한 욕구는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켜주는 욕구인데, 대체로 이런 악한 일을 할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선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힘든 것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것에는 기쁨이 따르기는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해내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비아냥거림 받는 것을 참아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를 참아야 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을 극복해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권고한다. 또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고전 13:4). 뿐만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라고 권고한다. 이 모두가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말씀들이다.

선을 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악을 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가 악을 행할 때 우리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으로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켜야만 한다. 때로는 애써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또 외면함으로써 양심을 무디게 만드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양심을 무디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선과 악을 규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한 우리의 행한 바에 따라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운 것이니까, 간단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할 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쉽게 악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을 무디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오래 참는 것이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그냥 견디면 된다. 마음이 쿵쾅쿵쾅 거리고 가책을 느낄 때, 애써 외면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 된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정당한 것이다”라고 외치면 더욱 악을 행하기 쉬워진다. 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영국의 위대한 문필가 C. S. 루이스가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흔히 아이들의 그런 행동을 ‘심통 부린다’고들 하지. 하지만 어른들이 그런 짓을 할 때는 수백 가지 근사한 이름들을 붙여 놓는다네. 복수, 명예 훼손, 자중심, 비극적 위대함, 정당한 자존심 따위의 이름들 말일세.”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을 교묘하게 이름을 붙여서 정당화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사울 왕이 그랬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아말렉의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사울 왕에게 명령하셨지만, 사울 왕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전리품 중에서 가치가 별로 없어 보이는 것들은 없애버렸지만, 아각 왕을 살려두었고 양과 소 중에서 좋은 것들은 남겨두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남겨둔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신앙적이며 멋있어 보이는 대답인가?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 왕을 향해서 책망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가야바 제사장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자신의 악함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포장한 바 있다(요 11:49-50). 가룟 유다는 자신의 탐욕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포장한 바 있다(요 12:6). 우리는 무슨 그럴 듯한 말로 우리의 악을 포장하는가?

우리들은 그럴 듯한 표현으로 우리의 악을 포장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포장을 보고 우리들에게 동조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조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불행일 뿐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는 가죽을 벗겨내야 한다. 하나님은 경고하셨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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