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텔레비전에서 나온 뉴스를 하나 보고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연합뉴스 ‘무조건 간다’라고 하는 프로그램, ‘무간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치매를 앓고 있던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분이 추운 겨울날, 지난주예요. 요즘 영하의 날씨가 아주 심한데 집을 나가게 됐습니다. 휴대폰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교통카드도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치매를 앓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혼자의 힘으로 찾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자녀들이 너무나도 걱정이 된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SNS에다가 사정을 올렸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집을, 모든 걸 놔두고 나가셨는데 어디서 찾아야 될지 모르겠다고, 혹시 우리 아버지 보시면 좀 도움을 달라고” 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옷을 무엇을 입고 나갔는지를 설명하고, 그리고 만일 가신다고 한다면 인천 미추홀구나 아니면 종로구나 구로구나 성북구 정도로 가셨을 텐데 혹시 그 지역에서 사시는 분들은 눈여겨보셔서 좀 도움을 달라고 하는 글을 올렸는데요.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겠노라고, 한번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큰일 나잖아요. 영하의 날씨, 혹한의 날씨인데 7~8시간 동안 찾아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성북구에 있던 어떤 한 젊은 남녀 커플이 우리 동네라고 하니까 성북구에 올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까 한번 찾아보기로 한 거예요. 길을 나서는데 저 앞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길거리에 있는 안전봉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 다가가서 “할아버지 어디서 오셨어요?” 묻고 질문하는데 딱 그분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할아버지 잠깐 오세요” 하면서 인근의 카페로 들어가서 따뜻한 생강차도 사 드리고 손을 녹이게 만들고 하면서 경찰서로 신고해서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아주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훈훈해지죠. 그렇습니다. 치매를 앓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 집을 찾아간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이었는데 만일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추운 날씨에 큰 위험을 당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돕는 사람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는 찾아갈 수 없었던 그런 치매 어르신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그 어떤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영적인 불능의 상태에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에베소서 2장 1절의 말씀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는’ 누굴까요?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살리셨는데 우리가 누구였는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죠. 영적으로 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뭐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말씀에 보면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죽어서 나흘이나 된 이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 묻히게 되었는데요. 묻힌 것이 아니라 동굴 속에 매장을 한 것이죠. 동굴 속에 들어간 그 누워 있는 시체 나사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것을 알고 “예수님 나 여기 있어요. 예수님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 좀 꺼내주세요. 예수님 내가 여기 있으니까 문 좀 열어주세요. 내가 나갈게요.”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죽은 나사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는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덤의 문을 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옛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마치 빛이 있는 것처럼 “빛이 있으라” 말씀할 때 그 빛이 생겨났던 것처럼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는 말씀을 해 주실 때 놀랍게도 생명이 나사로에게 들어가게 되었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지 나사로가 무엇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가 누구냐 하면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서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냐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죽었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옆엣사람 보십시오. 아 그리고 한번 말해볼까요? “죽었었군요.”
성경의 관점에 의해서 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열심히 선을 쌓으라. 열심히 도를 닦으라.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보라. 공적을 쌓으면 되지 않겠느냐 수련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는 그 경지에 올라가지 않겠는가 도를 닦고 또 닦고 또 닦으면 그러면 언젠가는 목표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서 마치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죽어버린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없는 것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치매 어르신의 경우 누군가 도와주지 아니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예요. 하지만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 사람을 카페로 인도하고 몸을 따뜻하게 녹이게 만들고, 그리고 경찰에게 연결해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돕는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살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죽었고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에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에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죽음 가운데 살리셨고, 예수님을 살리실 때 함께 살리셨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서부터 6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살리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실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을 함께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겠죠. 그렇습니까? 종종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종종 이러한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결론을 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냐면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내 힘과 내 능력 내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는다”라고 논리적 극단으로 내밀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건가요? 옳은 이야기입니까?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종종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누구냐 하면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 집단이 있는데요. 그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 집단은 성경의 가르침,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논리적 극단에까지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옳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내에서도 그런 구원파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리기를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런데 이것이 비유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영적으로 볼 때 비유적으로 볼 때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고 이 비유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이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비유의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유를 들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돼요. 비유를 극단적인 결론에까지 이끌어가면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다”라고 하는 성경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 비유 들어보셨습니까?
네,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하는 그 표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듬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화살이 날아올 때 바위 뒤로 숨으면 우리가 안전하듯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라고 말씀하는 게 그게 비유의 표현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 극단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반석이니까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분이시고, 그리고 반석이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분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비유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이 듬직하고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이 감정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움직일 수도 없고 그냥 무덤덤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지만 시체와 우리들과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 있어요. 우리는 살아있어서 말도 하고 선택도 하고 생각도 하고 결단도 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시체와 다른 이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 구원이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냐 하면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인데 누구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 무엇을 통하여 무엇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됐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이 표현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헬라어로 어떻게 읽냐면 ‘디아 피스테오스’라고 하는 말로 읽을 수가 있겠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믿음을 통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들에게 받아졌는가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시고 일방적으로 선택해 주셨지만 그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 선물이 언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할이 아예 없는가라고 하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의 예를 들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가나안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아브라함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민족이 나오기는커녕 아들 하나 없습니다.
이 땅을, 가나안 땅을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가나안에 땅 한 평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웃기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한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하면서 거부할 수 있었지만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있을 때, 그 은총의 선물을 내가 받아들일 때 그 선물이 나의 것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그 은혜의 선물을 누가 받았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받은 것이죠.
그 당시 무시받고 욕먹던 세리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어도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따라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결단입니다. 여기 밭에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보화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내 것이 되나요? 아니요. 보화가 그 밑에 있어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 가만히 있기만 하는 사람은 그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겁니다. 보물이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알까요? 아무나 알 수 있어요. 심지어 누구도 알 수 있어요? 사탄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마귀도 알아요. 그래서 벌벌 떨어요.
하지만 마귀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며 사는 결단을 마귀는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 그 보물을 차지하는가? 그 보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리는 겁니다. 지금까지 내가 애지중지하고 있었던 자동차 팔아버려야 돼, 내가 지금까지 애지중지하고 있던 명예 팔아버려야 돼, 지금까지 내가 우상으로 가지고 있던 내 자존심 팔아버려야 돼,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팔아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그 밭을 내 것으로 사게 되었을 때 그 보물이 내 것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하는 결단인 것이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은총을 내 삶에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역할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할이 있다고 해서 자랑할 수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래봬도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어. 내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구원을 받았지”라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예화에서 치매 어르신이 집으로 가서 “얘야, 그래도 내가 이렇게 집에 돌아온 것은 내가 그 사람들이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거야”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나를 향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그 사람들의 은혜가 고맙다고 겸손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을 올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9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받아들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 번째는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이제는 거룩하고 진실하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죄악 가운데 있지 않고 더 이상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악하게 살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죠. 우리의 예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리 예전의 모습, 영적으로 죽었다고 했을 때의 모습, 허물과 죄가 있던 모습이었죠. 예전의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냐면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3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었다”라고 표현하는 거죠. 그런 상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 주셨다고 한다면 이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 거죠. 구원받기 전의 상태가 어떤 상태입니까?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것이죠.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것이죠. 그래서 진노의 자녀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야 돼요? 선한 일을 하면서 신실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구원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나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살리시니까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나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야 하면서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거룩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선한 일을 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셔서 이미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려내셨다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산 것이죠. 하나님께서 살리시니까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더 이상 살기 위해서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이 있어요, 없어요? 논리적으로 보면 없어요.
그런데 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무엇하며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다 받았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구원을 더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노력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렸기 때문에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사람들이에요. 이미 받은 사람들이니까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또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매일매일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향해서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예요.
정말 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탐욕과 욕심으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악을 행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내가 말 한마디를 할 때도, 내가 무슨 행동 하나 할 때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따뜻한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셔야 돼요.
매일매일 아침마다 저녁마다 매 순간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내 마음에 사탄이 들어 있어서, 죄악의 괴수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 있어서 사람들을 바라볼 때 깔보고 있고 무시하고 있고 경멸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있어서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입에서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경멸의 말이 나오고 무시하는 말이 나오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오고 사탄이 좋아할 만한 말들을 하면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걸 몰라요. 내가 그러고 있다고 하는 걸 모르고 있어요. 매 순간순간 우리는 점검해 보아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가? 그래서 내가 말하는 그 말 한마디가 정말 사랑의 말로 하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말을 하고 있는가? 사람을 존중하고 있는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말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내 마음 가운데 사람들을 깔보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나에게 있는가? 매 순간순간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나아가서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 저희들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저희들의 삶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