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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삼상 1:9-20)

오늘은 사무엘서로 묵상하는 두 번째 시간으로, 한나가 하나님 앞에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울 때 여호와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다른 것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엎드리고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아플 때, 힘들 때, 고통을 당할 때 기도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 아픔을 완화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예를 들면 술을 마시면서 그 괴로움을 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 술이 많이 팔리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이 맨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술의 힘을 의지해서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좀 자신의 마음을 달래 보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 줍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정신이 마비가 되면서 고통스럽게 생각하던 그 문제들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잠시나마 술에 취해 있는 그 순간만큼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스러울 때 술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아멘입니까? 한상숙 시인이 쓴 「술 예찬」이라고 하는 시를 보면 이렇게 술을 노래했습니다. 술잔의 거품은 너와 내가 털어놓는 슬픔, 괴로움, 우울함 등 기억 못할 이야기로 횡설수설 담아져 잊기 위한 망각으로 한 잔, 해는 또 뜰 거란 희망으로 한 잔, 붉어진 얼굴만큼 가슴속엔 하얀 웃음 떠올려야 할 거라며 허탈한 웃음 속에 작은 희망 하나 건져 올리려고 긴 시간 불면으로 쓰린 속 움켜쥐었나 보다.

내가 술을 품었는지, 술이 나를 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몸 구석구석 혈관을 다독거리며 마음을 감싸 주니 외로움에 너만 한 친구 다 찾아봐도 없더라. 괜히 이 시를 듣고 술이 생각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술은 잠시 우리들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망각하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찾는 것은 마치 꿩이 도망가다가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구멍 속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꿩 사냥을 하게 되면 꿩을 쫓아가다가 꿩이 조그마한 구멍을 발견하게 되면 그 구멍에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고, 그래서 뒤에서 사람이 쫓아오는 것을 자신이 볼 수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을 때 사냥꾼은 그 뒤에서 그냥 잡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안 보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고, 술을 마시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고, 잠시 잊으면—마음의 수련을 하면—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잊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술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망각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술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에 예전의 문제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술을 의지할 것도 아니고 잠을 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방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한나가 마음의 괴로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통곡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해결자가 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실로에 와서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그 성막에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그 모든 일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는데, 제사를 드리는 것,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실제로 몸이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리는 것이, 오늘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원칙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면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서원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원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다짐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리켜 서원기도라고 하는데,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서 기도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기도의 유례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가장 최초의 서원기도를 생각해 본다면 창세기 28장에 나와 있는 야곱의 서원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바로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베델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 하나님께서 만일 저로 하여금 무사히 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면 오늘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베고 잤던 이 돌을 전으로 삼아 하나님께 재단을 쌓겠다고 그렇게 서원했고, 또 “내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했던 것이 성경에 나오는 서원기도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서원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기도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서원기도를 찾는다면 사사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입다의 서원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다는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면 가장 먼저 나를 마중 나오는 자가 있다면 그를—가장 먼저 나온 자를—번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하고 서원했습니다.

사사기 11장 31절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원하고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자신을 가장 먼저 나와 마중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지만, 하나님 앞에 했던 그 약속 때문에—서원 때문에—결국 그 딸을 번제로 드려야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로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만일 나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내가 이 아들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습니다”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그렇게 서원했는데, 사무엘상 오늘 읽은 1장 11절 말씀에 이렇게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머리에 칼을 대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이 서원은 자신의 아들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인데,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한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서원하며 기도했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도 때때로 서원하며 기도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 서원하며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서원하는 내용들이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과 약속—서원, 다짐—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도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할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이 서원기도와 관련해서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서원하는 것을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이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합격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성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자식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건강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원하는 것들을 말하면서, “대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것을 주신다면 저도 하나님께 이러한 것 정도는 희생하겠습니다” 하는 의미에서 흥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냐면, “하나님, 내가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세게 나가서 “하나님, 내가 10에 2조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씀드리기를 “하나님, 내게 물질의 축복을 주신다면 제가 교회당을 짓겠습니다. 내가 선교하는 일에 사용하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내걸기도 하고, “하나님, 나를 병에서 낫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이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신다면—이제 내가 이 세상의 일들은 다 때려놓고 이제는 목회의 길로 가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사모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사역자가 되겠다는 헌신의 기도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가서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의 동기를 여러 가지로 들어 보았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하나님, 병을 낫게 해 주신다면 내가 이제부터는 이 세상의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해서 신학교로 들어왔던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병에서 낫게 해 주신다면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그런 서원기도를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서원기도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겠다는 결단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결단과 다짐 그리고 헌신의 약속들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거래하거나 흥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거래와 흥정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필요가 맞아떨어질 때 성사되는 겁니다. 우리가 장사를 할 때 거래를 어떻게 합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구매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 돈을 주어서라도 그 사람의 서비스나 그 사람이 제공하는 물건을 얻겠다”는 마음이 있어 판매자와 구매자의 필요가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돈과 재화 혹은 돈과 서비스를 교환하면서 거래가 성사됩니다. 조금 비싼 것 같으면 깎아서라도, 그래서 서로 그 마음이 맞으면 흥정이 되고 거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받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드릴 수 있겠다고 한다면—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아쉬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아니, 감사하게도—하나님은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으신 하나님, 아무것도 부족하거나 무엇인가 더 있어야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시고 완벽하시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7장 24–2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제이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로 하여금 섬김을 받아야만, 무엇인가를 얻어 가야만 채워지는 그런 부족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고 온전하게 충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흥정하기를 원한다면—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한다면—그건 하나님과는 거래가 되지 않는 겁니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와서 사탕 하나 주면서 “내가 이 사탕 줄 테니 당신이 끼고 있는 반지를 주세요” 하면 주시겠습니까? 안 주죠. 왜냐하면 거래가 성사가 안 되는 거예요. 사탕, 먹고 싶지 않아요. 안 먹어도 돼요. 굳이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그걸 받고 이걸 줄 이유가 없는 거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꼭 있으면 좋겠다, 네가 그것을 꼭 줘야만 하겠다”라고 하실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필요로 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거래를 하거나 흥정을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서원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흥정하고 거래하기 위해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형식은 똑같아 보여도, “하나님, 이제는 내가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살겠습니다. 내 아들을 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은 같아도 마음의 자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한 마음은 흥정과 거래로 생각해서 “내가 이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태도이고, 다른 한 마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같아도 마음의 자세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얼마 전, 제가 사랑하는 어떤 후배 목사님이 저에게 부탁을 하나 했어요.

저에게 부탁하기를 “목사님, 제가 어디에 지원을 하려고 하는데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추천서를 좀 써 주실 수 있을까요?” 해서, 제가 그 목사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성의껏, 아주 잘 써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답장을 해 왔습니다. “목사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목사님께서 추천서 써 주신 것—목사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제가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이건 흥정이 아니에요. 감사에서 나오는 표현, 감사하기 때문에 나오는 다짐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 만일 나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한나의 마음이 거래와 흥정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지—오늘 본문만으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깨달을 수밖에 없고,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흥정하는 자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도 바치겠다”는 결단의 마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그것이 참된 기도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보여 주셨어요.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는 그 순간에 마음이 괴롭고 슬펐습니다. 부모를 떠나 멀리 타향살이하러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는 길을 가는 가운데 걱정이 많이 듭니다. “도대체 내가 이 방랑의 길을 언제 마치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과연 이 험난한,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혹시 죽지는 않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광야 길을 가다가, 베델이라는 곳에서 잠을 잘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그 야곱과 함께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거예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셨고 이삭과 함께하셨는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나와도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니—은혜를 깨달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정말입니까? 나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진짜입니까?

정말로 나와 함께하시고 내 인생 가운데 동행해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진짜입니까?” 정말 그 약속이 참이라면, “하나님,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내가 베고 누웠던 이 돌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재단이 되게 하겠고, 내가 얻는 소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이렇게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야곱은 서원하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고 예배하는 자, 섬기는 자, 헌신하는 자로 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목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 나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로 인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흠도 점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더럽고 추한 인생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묵상하면—기도하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고, 또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들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아들을 주신다면, 이제는 죄악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들을 주셔도 그 아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로 서원하며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흥정하는 태도로 “하나님, 우리가 용서해 줄 테니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용서해 주셨다면, 이제는 우리도 용서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기도하면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을 체험했다면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그래서 하나님 앞에 미리 감사의 표현이 나오는 겁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아들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엘리가 이 한나를 향해 “평안히 가라” 할 때, 한나가 돌아갔는데—사무엘상 1장 18절—“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아직 아들이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아직 임신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았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브닌나가 있고, 여전히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있고,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는 상황—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기도한 후에 돌아간 한나의 마음에는 근심이 없이 편안함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말이 위로가 되고 확신이 되었는가—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 말을 듣고 평안히 갔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은혜의 체험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엎드리며 울부짖으면, 가장 크게 받게 되는 축복이 있다고 한다면—그것은 ‘응답’보다 더 큰 축복—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도의 가장 큰 축복이 응답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기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고, 더욱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수도 있고, 때로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시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응답하시든—한 가지 확실한 것: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도 있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물의 가치 때문이라기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기쁜 것 같아요. 안 그렇습니까? 과일 한 상자—요즘 과일을 ‘내 돈 주고’ 사 먹지 못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물론 있겠지만). 과일을 얻어 기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서 마음을 전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의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서원의 목적은, 내가 가진 조그마한 것을 하나님 앞에 적당한 흥정거리로 내놓고—하나님께서 그게 너무 탐나셔서 대가로 무엇인가를 주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던 죄의 담장이 무너지고, 예수님의 보혈을 밟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고 감사해서 “하나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서원’이 있는—그런 귀한 기도의 체험들이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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