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장애물이 있는데요. 그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고통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 신앙을 버릴 것인가 양자택일을 하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핍박하게 될 때, 그런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할 것인가, 믿음을 제대로 잘 지킬 것인가가 크게 어려운 문제가 되었었고요. 뿐만 아니라 공산 치하에 있을 때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핍박을 당하게 되면 그런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제대로 지켜 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 고통은 우리에게 불같은 시험과 같아서 누가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 주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다 믿음이 좋은 것 같아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 같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누가 진짜 믿음인가, 누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고난을 당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불로 제련을 하면 온갖 불순물들이 다 빠져나가고 순금이 만들어지듯이, 핍박은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드러내 주는 그런 제련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장애물이 이런 고난, 고통,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가 편안하고 오히려 풍요롭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도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을 때, 편안할 때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도 많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다가도 그런 어려운 문제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그때는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믿음의 장애물은 어디에 있는가? 믿음의 장애물은 모든 것에 다 있습니다. 좋은 상황에서도 장애물이 될 수 있고 나쁜 상황에서도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굴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잠언 30장 7절에서 9절 말씀에 이렇게 아굴은 기도했죠.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여호와가 누구냐’ 하며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배불러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고, 오히려 가난해서 하나님을 모른다 하며 도둑질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그 위험이 두 가지 다 있기 때문에 아굴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마시고 그저 필요한 양식으로 주셔서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옵소서—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기도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난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고난이 피해지는 것인가요? 아니죠. 고난도 우리의 장애물인데, 그런 장애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냥 적당히 살래” 한다고 해서 적당히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함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크게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가난해질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부유해질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인데, 기왕이면 뭐가 좋을까요? 기왕이면 부유한 게 좋겠죠. 아무튼 그런 부유함이 쌓였을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애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만반의 대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 때에도 우리가 넘어지기 쉽지만, 부유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울 때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어느 때 넘어졌죠? 다윗의 경우는 평안할 때 넘어졌습니다.
다윗이 도망다니며 굴 속에 들어가 산적 두목과 같은 생활을 할 때,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다윗은 언제 하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가? 모든 전쟁이 그치고 이제는 왕위에 올라 편안한 시절에 다윗은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왕위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될 때 밧세바라고 하는 여인과의 잘못된 관계를 통해 큰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솔로몬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솔로몬이 얼마나 부강했는가, 솔로몬의 나라가 얼마나 화려했고 정말 대단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솔로몬은 엄청난 부를 누린 것이죠. 솔로몬의 지혜가 부귀와 영화, 강함까지 이어지게 된 겁니다. 세계 최대 강대국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부유할 때, 부강하게 되었을 때 타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솔로몬은 노년에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버리고 만 것이죠. 부유할 때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그런 믿음이 필요한데, 지혜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의 근본이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지혜로웠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가 지혜로웠던 것인데, 솔로몬의 말년에 지혜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몰랐어요. 솔로몬은 자신의 나라가 부강하다는 사실에 취해 버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갔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죠. 특별히 솔로몬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가?
300명의 첩과 700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해요. 천 명이나 되는 여인을 데리고 살았다는 것인데, 행복했을까요? “나도 그래 봤으면 좋겠다” 하는 분이 계십니까? 행복한 것이 아니죠. 특히 이 300명의 첩과 700명의 후궁을 데리고 있으면서 솔로몬이 했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시한 것이죠.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법칙—창세기에 기록된 것처럼—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그 법칙대로 사는 게 행복인 것이죠. 그것을 떠나면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고 아픔이고 절망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100% 어긋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요? 후궁을 들이면서 어떤 사람들을 후궁으로, 첩으로 받아들였습니까?
이방 나라의 사람들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말라—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 민족들이 들어와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이방 민족과 결혼하면 그들의 풍습,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절대로 이방 민족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죠. 이렇게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결혼을 통한 평화 조약을 꿈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인 동맹으로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관계를 맺으면 그 나라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 않겠다고 생각해, 자기 나라를 안전하고 부강하게 만들려는 정략적 결혼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떠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무엇을 믿지 말라—외세를 의지하지 말라.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외세와 손잡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갔고, 수많은 여성을 거느렸지만 결국 우상숭배의 길로 가버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솔로몬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죠. 솔로몬이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누가복음 12장 20–21절의 말씀을 솔로몬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솔로몬은 이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이죠.
많은 부를 쌓아 놓고 수많은 동맹을 맺어 놓고 이 세상의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 안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아굴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냥 적당히 살아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굴의 기도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아굴의 기도의 마음을 가진 자는 가난할 때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고, 아굴의 기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할 때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바울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빌립보서 4장 12–13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가난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짜증 내고 그랬을까요? 아니요. 바울 사도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했어요. 언제 감사했어요?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도 감사했어요. 자신의 모든 자유가 박탈되었습니다.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자유가 다 빼앗겼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착고에 채인 채로, 아무것도 없이 가장 낮은 곳에 들어간 그 순간에 바울은 절망하고 신세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찬송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바울 사도에게 후원금이 답지했습니다.
많은 물질이 와서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러면 바울 사도가 그 많은 물질을 보고 타락했을까요? 넘어졌을까요? 아니요. 그 많은 물질이 자기에게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그것들을 잘 활용해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복음 사역을 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했습니다. 많은 부가 있다고 할지라도 바울 사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업앤다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잘 살면서 행복하시다고 한다면 이것이 언제나 끝까지 갈까요?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욥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다 사라져 버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한 자와 물질을 의지한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질을 의지한 자는 물질이 사라질 때 마음이 무너져 버립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한 자는 어떤 고백이 나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요 거두신 자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죠.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부유함에 처할 수도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부유함이 내게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주실지는 아무도 몰라요.
우리 인생 가운데 업앤다운이 있을 텐데, 그 순간순간 조그마한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솔로몬처럼 많은 것을 가졌을 때 타락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그 부유함이 우리에게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고—그러나 우리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가난해도 거기에 적응하고 맞출 수 있고, 그 가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부유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부유함 속에서 감사하고 나누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에 따라 사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흔들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허락하신 그 상황 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지금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또한 이러한 일로 인해 내 믿음이 없어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