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한나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엎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의 가정 가운데 아기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서원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했고,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제 아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차례가 되었을까요?
서원을 갚을 차례가 됐습니다.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으시는지 갑자기 당황스럽습니다. 기도하고 서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한나에게 아기를 주셨다고 한다면, 이제는 한나가 자신이 했던 그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일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할 때 다급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이걸 좀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서원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하면서 기도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고 나면, 기도하기 전에 가졌던 그 다급했던 마음,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어 달리던 그때의 그 심정들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내가 아무런 다급함도 없었고 간절함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살펴보면, 야곱은 바딴아람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저로 하여금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그리고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서원하면서 은혜의 충만한 저녁을 보내며 기도로 매어 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야곱이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딴아람에 가서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얻게 되고, 갈 때는 빈손으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어마어마한 물건들과 가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야곱이 전에 베델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그 기도의 제목들, 서원했던 것들을 다 갚았는가 하면—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하게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가 십일조를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는데, “이 베델에서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지만, 야곱이 베델에 가서 산 것이 아니라 어디에 가서 살았습니까? 세겜에 가서 살았어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다른 우상들도 그 집 안에 있는 상태를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정말 다급한 가운데 울며불며 기도하는데, 그 긴급한 문제가 다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런 기도를 했느냐는 듯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그 서원을 잊지 않고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 그대로 시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을 낳고 난 다음, 첫 번째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갈 때 한나는 같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서원제란 서원했던 것을 갚는 제사인데, 그때 한나가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서원을 갚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고, 서원을 갚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아직 사무엘이 갓난아기였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젖을 떼게 되면 이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한나가 첫 번째 매년제와 서원제 때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결국 이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젖을 떼는 것은 보통 언제입니까? 예, 한번 말해 보세요. 돌 지나고 뗍니까? 예, 저도 하도 오래돼서 다 잊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젖을 좀 일찍 떼지만,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여러 문헌 가운데 ‘마카비후서’ 7장 27절에 3년간 젖을 먹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과는 달리 수유 외에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엄마의 젖을 오늘날보다 더 오랫동안 먹였던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는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이전이지만 상황은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아이의 젖을 떼고 난 다음—아마도 세 살 정도 되었을 때—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드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22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는 지금 아직 올라가지는 않지만 올라가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그 서원을 잊지 않으면서 결국 이 서원을 갚겠다는 이야기를 엘가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했던 그 서원을 잊지 않았습니다. 만일 한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흥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아마도 금방 자신이 했던 서원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흥정의 목적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내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흥정했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마음이 바뀌어 버립니다. 하지만 한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흥정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헌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자식을 주셔도 그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결단으로 기도했다면, 그 기도의 제목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성이 많기 때문에,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라도 나중에 가서 자신의 헌신과 다짐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직분자로 세움을 받을 때—집사, 권사, 장로로 세움을 받으면서—하나님 앞에 다짐합니다. “하나님, 이 직분을 맡게 되었으니 이제는 말씀대로 철저히 살겠습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목사가 될 때도 마찬가지로 서원하며 임직을 받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 자존심을 내세우고, 내 주장을 하기 쉽고, 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힘들게 만드는 악역을 맡는 사람들로 변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하지만 한나는 잊지 아니하고, 젖을 뗀 후에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가 사무엘을 드립니다. 사무엘상 1장 26–28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니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자신이 했던 기도를 그대로 기억했고, 처음 하나님 앞에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을 나중에도 똑같이 기억하면서 그 서원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갚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이를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고, 어쩌면 가슴이 찢어지고 미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시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시편 15편에서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며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냐” 묻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4절에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라 했습니다. 한나의 마음이야말로 주의 성산에 설 수 있는, 주의 장막에 합당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이 아이를 놓고 가는 것,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그 때문에 약속을 무효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 서원을 갚는 대단한 믿음의 모습이 오늘 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그 서원을 갚는 것은 결단코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손해, 시간의 손해, 아이를 바치는 가슴 미어짐 등 너무나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미련하고 손해 보는 일 같아도 영적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한나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그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한나가 손해를 보았는가, 해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만일 엘가나의 집에만 있었다면 평범한 인간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바쳐져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어마어마한 지도자가 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손해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2장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은혜를 베푸사 사무엘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는 모든 것이 우리의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큰 축복이요 은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 있는 부모님들이라면 한 번쯤 “우리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 장녀를 사모의 길로 가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신학교에 가면 “부모님이 서원해서 왔습니다”, “제가 서원해서 왔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신학교에 와서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되었고, 한국교회에는 목사가 넘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 수가 과잉공급이라는 우려가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던 2017년을 지났지만)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개혁을 일으켰던 중세 말, 신부와 수녀가 넘쳐나던 시절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성직자 과잉의 그림자를 닮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목사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운 이들도 신학교를 거쳐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할 평신도 일꾼은 줄어드는데 목사 수는 넘치고, 그래서 사역지를 찾지 못해 다른 일을 하는 목사들이 많아졌습니다. 해마다 목사 안수 받는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한다 보니 10년이면 수만 명입니다. 그런데도 “왜 교역자 구하기는 어렵습니까?”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산업 현장의 ‘구직난·구인난’이 동시에 있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교육전도사, 갓 안수받은 젊은 부목사는 부족해 구하기 힘들지만, 30대 후반이 되면 사역할 교회가 급격히 줄어드는 역전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전직(轉職) 이야기도 많이 들립니다. 이 와중에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인격적 준비가 안 된 무자격자가 목회자로 배출되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 배경 중 하나가, 성도 다수가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했고, 그 압력 속에서 목회 진로를 택하게 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는 것’은 본인의 내적 부르심 확신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공동체)의 외적 인정과 검증이 뒤따라야 합니다. 정말 목회자가 되어도 괜찮은지 평가를 거쳐 길러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이 무너져 “내가 하겠다”면 배출되는 현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던져 볼 질문은 이것입니다. “목회자로 우리 아이를 바치겠다”고 서원했다면, 반드시 목회자의 길로 가야만 하는가?
제가 아는 한 장로님(유능한 사업가)이 제게 물었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위해 서원하셨습니다. 장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요. 저는 사업에 달란트가 있고 장로로 신앙도 좋지만, 솔직히 목회자 자질은 없다고 봅니다. 사업을 그만두고 목회로 가야 합니까? 아니면 그 서원을 무시하고 지금 일을 계속해야 합니까?”
저는 “목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서원과 기도는 ‘절대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변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상태에서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판단력도 부족하고 욕심도 많고 죄성도 많은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 서원합니다. 그 서원이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할 절대 원칙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며 점점 그 뜻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되,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내 기도제목을 끝까지 밀어붙여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말씀을 묵상하며 뜻이 분명해지면 우리의 욕심과 판단과 생각을 그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 바른 관점입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 기도했지만, 주의 뜻을 알고 난 뒤에는 그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을 깨닫자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순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서원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에 따라 서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원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가운데, 뜻이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뜻에 맞추어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의 입다는 섣부른 서원을 하여 비극을 맞았습니다. 사사기는 ‘모범사례집’이 아니라, “왕이 없으므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타락상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모범이 아닙니다. “서원은 갚아야 한다”는 대원칙은 받아들이되,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욕심대로 한 서원은 안 갚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조시다가 집에 가서 “목사님이 서원 안 갚아도 된다더라” 하시면 큰일 납니다. 우리의 얄팍한 이익계산으로 서원을 쉽게 변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번 서원했으면 가능하면 지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도하며,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결단하고 나의 것을 희생해 가며 갚아야 합니다. 다만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입니다. 기도 가운데 우리의 서원이 바르지 않았다면 “하나님, 저희가 뜻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게 서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제 서원을 바꾸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저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면 무조건 그 여자와 결혼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결혼은 일방의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고, 상대의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이 당신과 결혼하라 하셨다”고 했는데, 상대는 그런 인도를 전혀 받지 않았다면 성사가 안 됩니다.
자녀에 대한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내가 서원해도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갚을 필요가 없다고 규정합니다.(민수기 30장) 서원은 내 마음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녀에 대한 서원이라면, 자녀도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부르심을 받아 “나도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의 평가도 “저 사람은 목회자 될 재능과 달란트가 있다”가 되어야 하며, 더불어 실제 시험·과정(신학교, 안수 등)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본인의 마음에도 없고 공동체의 인정도 없는데, 부모의 서원만으로 신학교에 갔다가 결국 못된 목사가 되어 교계를 흐리게 한다면, 본인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큰 해악입니다.
서원을 하려면 자기 인생을 놓고 하십시오. 남의(자녀의) 인생을 대신 서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이를 ‘목사·사모’로 만드는 것이 최고의 봉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가 목사가 되고, 사모가 되고, 장로·권사·집사가 되었다고 하면 우러러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느냐”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몸’입니다. 지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소중하거나 덜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목사가 되면 무엇합니까? 제사장이 되면 무엇합니까? 사무엘서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모욕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 악당이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욕보인 파렴치한 자들이었습니다. ‘악한 제사장’이라도 제사장이면 장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친 삶은 ‘직분’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어떤 직분을 갖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대로 바친 삶입니다. 목사·장로·집사·권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신실히 수행하며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백성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요, 제사장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직책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헌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하신 말씀처럼, 오늘도 “차라리 목사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장로·권사·집사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평가를 들을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직책이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도 ‘무엇이 되라’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게 하소서’가 옳습니다. 마지막 날 “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저는 목사였습니다, 장로였습니다”—라고 말해도, 주님은 타이틀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하게 살았는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드렸는지—그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삶은 고통입니다. 쉬운 삶이 아닙니다. 세 살이면 가장 예쁠 때죠. 그 3살짜리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뒤돌아서야 하는 한나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그때 사무엘이 “엄마, 같이 가”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한나는 하나님 앞에 아이를 바치고 돌아섭니다. 주님께 바치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니고,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고통의 길이고 슬픔의 길이고 고난의 길일지라도, 드릴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원하기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헌신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서원’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래 “너희를 구원하겠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나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지나쳤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아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크신 약속을 이루시고 희생하시며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 앞에 헌신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