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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와 룻 (룻 4:9-15)

지난 IMF 때의 일이었는데요. 어떤 집사님이 사업이 망하게 됐습니다. 사업이 IMF로 인해서 완전히 망하게 되고, 빚더미에 올라 더 이상 어떠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회의 땅 미국에서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면서 미국에 이주하게 됐는데요. 청소 일을 하면서, 생전 해 보지도 않은 험한 일을 하면서 그 미국 땅에서 그런 대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도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어느 정도 살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그 가정에 아주 엄청난 큰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하이웨이를 달리는 가운데 그 김 집사님과 두 아들이 죽게 되고 만 것이죠. 그래서 결국 그 가정에 아내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과부들만 남게 되어 버린 것이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한 그 상황 가운데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견뎌야만 하는 그런 가정이 있었습니다. 룻기의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룻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별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생하게 와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현대판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겠구나,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이 룻기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린 몇 가지 제도들, 몇 가지 규례들을 먼저 이해해야 룻기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형사취수’ 제도입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해서 결혼을 하게 된다는 형사취수 제도인 것이죠.

이 제도가 중동 지방에 있었던 제도인데요. 성경에 그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5절–6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오늘날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이지만, 구약 시대와 중동 지방에서 널리 이루어졌던 제도입니다. 그 취지를 생각해 본다면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의 목적은 어느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다른 가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였을 것이고, 또 하나의 목적은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에 이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사취수 제도는 도덕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여러 법 중 시민법이나 의식법은 오늘날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영원불변한 도덕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사취수 제도가 구약 성경에 등장한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 제도를 그대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두 번째로 이해해야 할 규정은 토지와 관련된 여러 규정들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토지 관련 법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에 하나님께서 각 토지를 분배해 주셨고, 각 지파와 각 가족마다 땅을 나누어 주셨는데, 이 땅들을 다른 사람에게 영구히 팔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 “또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곧, 토지를 주어 그 토지를 경작해서 먹고 살라고 하시면서 그 토지를 영원히 팔지 말라—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말라고 하신 것이죠. 그래서 물려받은 기업, 유산인 땅을 타인, 다른 가문에 팔아버리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힘들면 팔 수밖에 없잖아요. 빚을 지면 땅을 빼앗길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땅이 넘어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레위기 25장 25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곧 ‘되찾으라’는 겁니다. 땅을 팔아 넘어갔더라도 가까운 친족이 와서 그 땅을 다시 사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친족들이 그 땅을 되찾아 주지 않으면 영원히 빼앗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희년’ 제도가 있어서 매 50년마다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8절: “그러나 자기가 물을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즉 팔지 말아야 할 땅이 팔렸더라도, 친족이 되찾아 주거나, 설령 그게 안 돼도 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 돌아오는 법이 구약 시대에 있었습니다. 역시 이 희년법과 토지법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부 크리스천들은 성경의 희년 제도를 이 시대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시민법적·당시 문화적 규정이었고 신정국가 체제에서 운영되던 것이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도덕법은 아닙니다. 다만 그 정신—혼자만 잘 살지 말고 공동체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나만 잘 살자’는 아젠다로 싸우는데, 그러다가는 함께 망하게 됩니다. 함께 잘 살아야 모두가 산다는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제도들을 머리에 염두에 두고 룻기의 말씀을 읽어야 이해가 됩니다. 모압 땅으로 갔던 나오미, 그리고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룻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유다 땅에 돌아와서 잘 살 수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온 이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유다 땅으로 돌아왔지만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캄보디아 등에 갔다가 납치를 당해 돌아오는 일처럼, 유다 땅에 다시 왔어도 이 두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룻기를 읽어 보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놀라운 희망이 생기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룻은 동네를 다니며 이삭을 주워다가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냐 하면,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해 준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9–10절: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다시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은, 너희가 추수할 때 다 탈탈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와 거류민(이방인)을 위해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이방인을 배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들어와 사는 그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이죠. 그래서 아무 밭에나 가난한 자들이 들어가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었습니다(일부러 남겨 둔 부분도 있었고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가 가서 먹을 수 있도록 남겨 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룻이 나달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길가 열매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법의 정신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를 위해 너희 먹을 것을 나누라는 것이죠. 그 법 때문에, 다 잃고 남편도 없는 이 불쌍한 가정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 교회가 이웃 돕기 라면을 하려고 합니다. 매년 라면을 모아 주변에 전달해 왔고, 많은 교인들이 기쁨으로 동참해 주셨습니다. 간혹 부담스럽다는 반응도 들리지만, 옛날 나오미와 룻이 떨어진 곡식으로 연명했던 이야기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많든 적든—그것을 다 우리만 먹으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나오미와 룻 같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 박스가 부담되면 작은 금액이라도 좋습니다. 함께 참여합시다.

룻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주웠는데, 하필 들어간 밭이 나중에 룻과 결혼하게 되는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룻기 2장 8–9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듣거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는 자기 경내에 들어온 룻을 ‘거지’라며 비난하지 않고,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죽으라 말하며 편의와 안전을 제공했습니다.

룻기 2장 14–16절에서도 “식사할 때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내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중략)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곡식을 베는 사람들이 뒤에서 낟알을 줍는 이들을 보면 “일 방해한다”며 쫓아낼 수도 있는데, 보아스는 오히려 배려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이기적·탐욕적으로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랑을 주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11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미워하거나 외면하는 게 마땅한 게 아니라, 사랑이 마땅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왜 이렇게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을까요? 그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고, 결국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장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형사취수 제도 때문입니다. 과부가 생기면 그 과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결혼해 주어야 하는데, 나오미에게는 아들이 더 이상 없었기에 나오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룻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보아스도 나오미의 친척이라 결혼 자격은 있었지만, 서열상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하나 있었지요. 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더 가까운 친척이 “내가 하겠다”고 하면 보아스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물러선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어떤 아이디어인가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다시 사주자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오미가 이 땅을 팔려고 하는데 네가 사겠느냐”로 번역되어 있지만, 문맥상 ‘이미 팔린 땅을 되찾아 주는’ 과거형 뉘앙스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는 시제가 단순(완료·미완료)하여 문맥으로 현재/과거/미래를 판단해야 하기에, 이 대목은 과거로 해석하는 편이 맥락에 맞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으로 갈 때 이미 자신의 땅을 다 넘겨 버렸고, 그 빼앗긴 땅을 가까운 친족이 사서 되돌려 주어야 하는 상황을 보아스가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가까운, 이름 없는 친척을 성문에 수많은 증인 앞에 세우고 말합니다. “네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니, 나오미가 잃어버린 그 땅을 네가 사서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랬더니 그가 뒤로 뺍니다. “내 재산상 손해가 될 수 있으니 못 하겠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족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보아스가 “그러면 내가 그 책임을 떠안겠다”며, 땅을 되찾는 일과—가까운 친족이 되었으므로—룻과 결혼할 권리까지 맡아, 결국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게 됩니다. 이것이 룻기 전체의 큰 줄거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는 장면, 그리고 아이를 낳는 장면입니다. 룻기 4장 11–12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으로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라다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많은 사람이 이 결혼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자 또 축복합니다. 룻기 4장 14–15절: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이 오벳, 오벳이 낳은 아들이 이새, 이새가 낳은 이가 누구죠? 다윗입니다. 한때는 “이제 소망이 없구나, 끝났구나” 했던 나오미와 룻이 인생 역전을 이루어 다윗의 조상이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룻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여인에 관한 말씀이 신명기 23장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에게 속한 자는 10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매우 놀라운 말씀입니다. 모압 사람은 영원히—들어올 가능성이 0.0001%라도—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압 여인 룻,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던 그가 보아스와 결혼해 유다 민족으로 편입되고, 결국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은총의 이야기가 룻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소망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룻과 같을지도, 보아스와 같을지도, 나오미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재정적으로 파탄이 났을 수도, 자녀 문제로 실패했을 수도, 가정사가 힘들어 어디 내놓기 어려울 수도, 건강 문제로 소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가운데 소망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옛날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예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미국에 유학 온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월세방을 구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죠? 한국에서는 ‘돈’이면 되지만, 미국은 돈이 있어도 안 됩니다. 신용점수가 있어야 합니다. 신용점수가 좋아야 집을 빌려 주고, 점수가 없으면 아무리 돈이 있어도 안 빌려 줍니다. 한국에서 갓 온 분께 무슨 신용점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이 말합니다. “연대보증인을 데려오세요.” 신용 좋은 사람이 함께 보증을 서야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교인 중 형편이 가장 넉넉한 장로·권사님 부부께 여쭈었습니다. “목사님이 방을 구해야 하는데 신용점수가 없어서… 혹시 연대보증을 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하루만 생각해 보겠다”고 하시더니, 다음 날 “변호사가 연대보증 서지 말라 하네요”라고 답하셨습니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연대보증해 주셨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지셨습니다. 늘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으로 죄를 짓는 우리의 허물을 주님이 품으시고 우리를 회복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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