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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사명 (창 39:1-3)

오늘은 요셉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꿈을 꾸면서, 하나님께서 장래에 요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에 대해서 보여주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대한 인물로 만드시겠다고, 위대한 인물로 사용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러한 꿈을 요셉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펼쳐진 요셉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꿈의 그 계시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죠. 요셉을 시기했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달려들었고, 그래서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결국 요셉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정말 사랑의 보금자리요,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부모님의 집에서부터 쫓겨나서, 저 먼 타향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 다르고, 그런 외국에서 노예로서 삶을 살아가야만 했었습니다.


이렇게 먼 타국에 와서,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었던 요셉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 것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손흥민 선수의 이야기를 들어봤었는데요. 손흥민 선수는 축구를 하기 위해서 유럽으로 가서, 독일에서 이렇게 지내게 되었는데, 손흥민 선수가 고백하는 말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매일 밤마다, 울었다고 그래요. 왜 울었는가? 너무나도 힘들어서, 그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독일 땅에서, 그곳에서 인종차별도 경험을 하고,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곳에서 눈물을 매일매일 흘렸다고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그곳에 갔는가?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갔거든요. 미래의 꿈을 가지고 간 거예요. 미래의 꿈을 가지고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간, 그 독일 땅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계약을 맺고 간 것이 아니라, 잡혀서 억지로 끌려가서, 노예로서, 저 이방 땅 이집트의 땅에서 노예로서 살아가는 이 요셉의 형편은 정말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졌다고 한다면, 이런 처지에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까요? 어떤 생각이 많이 들겠습니까? 아마 절망하지 않았을까요? 신세를 한탄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 차지 않았을까요? 너무나도 슬퍼서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런 마음 그런 감정이 들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말씀을 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 노예로 팔려간, 그 보디발의 집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정말 성실한 삶을 산 것이죠. 요셉은 그 노예로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주인을 섬겼고,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주인이 인정을 했고,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셔서,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구나.”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증거들이, 그 요셉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된 것이죠.

결국 주인이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은 그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모든 집안일을 다 맡기는 것으로 그래서 이 요셉을 아주 신뢰하면서 이 요셉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삶이 더 편해졌을까요? 더 힘들어졌을까요? 아마 더 힘들어졌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내가 해야 할 일만 했으면 됐는가 하면, 이제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고 한다면, 모든 일들을 다 관장해야 돼요.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여러 가지 엄청난, 그 책임감의 중압감, 그 엄청난 고통의 무게가 요셉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 어떻게 지내시는지 얘기를 하다 보면, 승진을 했다고 그래요. 학교 교사로 있다가 승진을 해서 장학사가 되기도 하고, 또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는 본인이 최고의 위치에까지 올라가서, 전체를 다 다스려야만 하는 그런 위치로 올라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너무 힘들어 죽겠대요. 밤 잠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너무나도 힘들어서, 목사님 이제는 수요일 날 예배 나오는 게 힘들 것 같아요. 너무 바빠요. 너무 어려워요. 그리고 너무나도 큰 무게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아마 이 요셉에게도 이를 더 열심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무거운 짐이 그 요셉에게 지워졌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요셉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 놀랍게도 요셉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주인에게 충성하고 일했다고 하는 게 오늘 성경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러한 요셉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늘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위치에 놓아주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자리에 인도해 주시든지 간에, 이것을 그냥 가볍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게,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될 삶의 자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 멘탈리티, 혹은 군바리 멘탈리티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 군대에서 배운 멘탈리티일 것 같아요. 저는 군대에 가는 것이 아주 소중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그런 의무인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이 나라를 지키고,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니까, 정말 신성한 의무를 지는 것이기 때문에, 국방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군대에 갔을 때 가질 수 있게 되는 한 가지 위험이 있어요. 한 가지 단점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군대에 가서 혹시라도 우리가 군대, 군바리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제대하면 아주 위험합니다. 군바리 멘탈리티가 뭡니까? 그것은 나서지 않는 거죠. 나서지 마! 나서면 힘들어! 앞에 나서지 마! 무언가 하려고 하지 마! 그냥 중간에 숨어서 시키는 것만 하고, 가능하면 나서지 않고, 가능하면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안전하다고 하는, 그런 군바리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제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게 다 옛날 얘기겠죠? 요즘 군대는 안 그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직장을 다니거나, 이 사회에서 살면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냐면, 내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싫어해요. 내가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고, 가능하면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일을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그런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에도, 좀 이해를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특별히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봤어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는데, 이 사람들이 결국 받은 게 뭐냐? 다섯 달란트를 더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게 뭐냐?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해가지고, 5개를 잘해놨더니, 주인이 보고, “야, 네가 화장실 상소 잘하는구나. 그럼 10개 청소해.” 하면서,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좋은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그런 사람을 실제로 제가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 군바리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게 된다고 한다면, 내가 더 많은 일을 하고, 내가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했는가? 노예로 끌려왔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잡혀왔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노예로서 삶을 살아야 된 그 상황 가운데서, 요셉은 신실하게 살았고, 주인에게 충성했고, 그가 있는 그곳에서 가장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요셉과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래서 인정받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가능했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그 요셉의 어떻게 그렇게 삶을 살았는지, 요셉의 마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만일 이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요셉처럼 이렇게 살 수 있는 그 비결이 무엇인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이것이 가능한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워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요셉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신데, 그 사랑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주셨다고 한다면, 우연히 온 것이 아니고, 재수 없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사랑하셔서, 내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내가 이곳에서 그냥 허투루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아시고, 나로 하여금 여기서 내가 이 일을 하는 걸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신실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전능하지만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이 많지만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그곳은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는 하지만, 악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 좋은 자리라고 말할 수 없겠죠.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무능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있게 된 그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실수로, 그 자리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주 의미 없이, 우리를 그 자리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우리를 보내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신실하게 이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실은 잘 이해할 수는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처넣으셨을까? 노예의 자리로 끌려왔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 것 이해가 되겠어요? 오늘날 내게 엄청난 사고가 일어납니다. 엄청난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을 우리가 만납니다. 그러한 일들을 만날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이 뭐예요? 하나님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하나님 왜 이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내게 이런 일을 벌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게 하신 그 자리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해 주신 그 사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통치 가운데, 세심하게 만들어진, 우리를 위해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어요.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 가운데, 왜 신앙을 저버리냐면, 이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내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났는데,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하면서,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우리 성도님들이 이야기할 때 굉장히 조심하셔야 돼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나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되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되는데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고 하는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모든 책임을 다 하나님이 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누가 잘못한 거예요?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신호를 안 지킨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잘못 운전한 우리의 책임이에요.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 하다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누구 책임이에요? 내 책임이에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잘못 판단했고 내가 잘못 움직여서 그래서 잘못된 결과가 나타난 거죠. 내가 무엇인가 소망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있는데 그것이 안 됐어요. 왜 잘 안 됐을까요? 내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아서 안 된 거예요. 내가 주변 상황을 잘 살펴보지 못해서 안 된 거예요. 비즈니스를 잘해보고 싶었지만 그만큼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구의 잘못인가? 사실은 우리의 잘못들인 것이죠.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요셉은 아무 잘못이 없나요? 잘못 있어요. 잘못 있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막 자랑했잖아요? 형들한테.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이렇게 노예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요셉의 가정 가운데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야곱이 아내를 4명씩이나 두었고, 그래서 배달은 형제들을 많이 낳았던 것부터 잘못이었고요. 뿐만 아니라, 부모가, 야곱이 이 요셉을 편해했던 것, 그건 잘못이잖아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면, 골고루 골고루 사랑해 주고, 정말 약한 자들을 향해서,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할 텐데, 이 요셉만 채색옷을 입히고, 이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하는 그런 제스처를 보내고, 요셉을 편애하게 될 때, 결국 이 아이들 사이에서 반목이 생기고, 증오가 생기고, 시기와 질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부모가 만든 것이죠.


요셉은 어땠습니까? 꿈을 꾸었으면 그 꿈을 속으로만 잘 간직해야지, 형들에게 막 자랑하면서 얘기해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더 미웠겠어요? 얼마나 더 분노가 치밀어 솟아올랐겠어요? 형들이 잘못하는 거 있으면, 아버지한테 가서 다 일러바치고, 얼마나 밉겠어요?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또 형들도 그들이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이 요셉을 팔아버리게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요셉이 왜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인 거죠. 우리가 잘못한 겁니다. 우리가 실수한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판단하고, 우리의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고,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파국으로 치닫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생기게 된 것이죠.

가정에 불화가 생겼으면 왜 불화가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못 살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나요? 아니요. 내가 더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말을 더 좀 더 조심하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서 함부로 이야기해 버리고, 함부로 화를 내버렸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거예요.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도닥여주고, 힘내라고, 괜찮다고, 믿는다고 이야기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우리 이 힘든 것을 같이 이겨내 보자고, 같이 이야기해야 되는데,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비난하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냐?” 하면서 비난할 때, 가정이 파국으로 치닫는 거예요.


왜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 가정을 잘못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나요? 그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아파할 때, 아이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주지 못하고,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고, 아이들을 칭찬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하고 책망하게 될 때, 아이들이 그 정말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환경들을 우리가 만들어준 것이죠.

그런데 그 놀라운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러한 우리들의 실수와 우리들의 잘못과, 모든 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지금 이 노예로 팔려오게 된 것은 자기 잘못이에요. 자기가 잘못된 행동한 거예요.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요셉을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물로 삼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깨달은 거예요.

비록 내가 잘못하고 이 자리에 왔지만, 비록 내가 팔려왔지만, 하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으로 이 순간에 신실하게 사역해 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서 비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이곳에 왜 오게 되었는가? 그 순간에 절망하면서, 가능하면 일을 피하면서, 대충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주셨다고 하는 믿음으로, 거기서 신실하게 일을 살아낸 줄로 믿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종종 어떤 이야기가 등장하죠? 재벌 회장님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을 말단 직원으로 취직시키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런 거 보셨습니까? 예 재미있죠. 그 이야기를 보면 말단 직원으로 취직한 아들이나 딸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2가지 종류로 나타날 거예요. 어떤 아들이나 딸은 “왜 아빠가 나를 이곳에 보냈어?” 하면서 신경질 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내가 뭐 이거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하면서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그런 자녀가 있을 겁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그렇게 나왔나요? 나중에 알려주세요.


그런데 어떤 아들, 어떤 딸은 말단 직원으로 가서, “아,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준 이유가 무엇인가? 몇 년 뒤에는 내가 이 회사를 인수받아서, 내가 경영권을 물려받아서, 이 회사를 운영해야 될 텐데, 정말 말단 직원의 고충부터 배우라고 하는 뜻이구나. 이 회사의 무엇이 문제이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우라고 하는 뜻이구나.” 그러면서 그곳에서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모습을 잘 관찰하면서, 거기서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에는 부모님보다도 더 뛰어난 그런 경영자로 서게 되는 그런 멋진 드라마도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에요? 1개 삼성의 회장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에요. 온 우주의 CEO예요. 그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CEO 되신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말단 직원으로 채용해 주셨어요.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이곳에 보내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생각을 가지면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지금 신실하게 일하고 수고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것을 알 때, 이것이 손해가 아니라,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신실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어떻게 받을 줄? “그대로 받을 줄” 알면, 우리가 수고한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그대로 받는다는, 그대로 받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어떻게 거두리라?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셉은 그대로 거두었을까요? 손해만 봤을까요? 그대로 거두었을 겁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감옥에 갇혔잖아요. 손해 본 건가요? 아니요. 요셉이 일을 하는 가운데, 먼저 요셉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있었을까요? 감사가 있었을까요? 행복이 있었을까요? 만일 군바리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할 수 없이, 억지로, 억지로 내가 맞지 않기 위해서, 내가 꾸중 듣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로 기쁨이 없을 거예요. 분노와 짜증과 괴로움만 있을까요? 힘들다고 하는 그런 자조 섞인 이야기만 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요셉의 마음으로 일하게 될 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될 때, 그 일이 기쁘고 즐거워요. 마치 누구처럼? 엄마처럼. 엄마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했을 때, 힘들어 죽겠어요? 행복해요? 안 행복한가? 행복해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로 수고하며 애쓰는 것이 그게 행복이요. 기쁨이에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할 때, 그것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아이들이 밥 먹는 걸 보면, 그게 행복하고,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그게 행복하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이,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될 때,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그 기쁨의 열매들이, 사실은 일하면서 내가 다 받게 되는 것이죠. 요셉이 그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그 요셉을 인정했고요. 그래서 가정에 총무를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섬기는 그 주인의 집이 날마다 날마다 형통하고 복이 넘치면서, 함께 복을 누리는 것이 모든 열매들을 함께 누리는 겁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이유가 더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편안하게 살고 있던, 요셉이 부모의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저 애굽 땅에 가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 위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종으로서 사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셔서,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한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게 하신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신실하게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엄마의 자리 포기하고 싶은 신 분 계신가요? 그런 분도 있어요. 저 새끼들을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엄마, 좀 엄마 자리 포기했으면 좋겠다고! 그냥 하는 소리죠. 그런데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자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있게 된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단 직원으로 채용해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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