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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왕궁 (왕상 7:1-12)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야기를 살펴보았었는데요. 오늘은, 이제 성전을 다 건축한 솔로몬이, 이번에는 왕궁을 짓는 이야기를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궁도 지었는데, 왕궁은 몇 년 동안 지었다고 되어 있죠? 13년 동안 지었습니다. 성전은 몇 년에 걸쳐서 지었죠? 7년입니다. 아직도 그걸 기억을 하고 있다니, 대단합니다. 성전은 7년 동안 지었는데, 왕궁은 13년 동안 지었다. 거의 2배에 가까운 그 기간 동안 지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열왕기상 7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성전의 크기와 왕궁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될까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 왕궁의 크기는 가로가 50 길이가 100 높이가 30, 그러니까 성전과 비교하면 성전이 큽니까? 왕궁이 큽니까? 왕궁이 훨씬 크게 지은 거죠. 성전은 60, 20, 30이었는데 60, 20, 30이었는데 왕궁은 100, 50, 30이니까, 높이는 같지만, 길이는 약 2배, 너비는 약 2.5배로 완공을 훨씬 더 크게 진 거죠. 그러니까 성전의 그 부피보다 왕궁의 부피가 몇 배 정도로 더 컸을까요? 산수 잘하시는 분? 대략 5배 정도 큰 왕궁을 지은 겁니다. 성전의 크기보다 왕궁의 크기가, 그 들어가는 그 규모가 대략 5배 정도나 큰 왕궁을 지었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데 걸린 시간과, 그리고 그 규모가 왕궁을 짓는 데 걸린 시간과, 그 규모랑 비교해 본다면, 왕궁을 더, 훨씬 더 크게, 훨씬 더 긴 기간에 걸쳐서, 왕궁을 지었다고 하는 이 열왕기상 7장의 기록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배신감을 느끼셨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는, 정말 성전을 짓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성전보다도 더 큰 왕궁을, 그렇게 크게 지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아마 배신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로몬이 신앙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한 것 같았는데, 성전보다도 더 큰 왕궁을 지은 것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보니까, 성전에 그렇게 화려하게 백향목으로 지었던 것 같이, 성전에 지었던 것과 똑같이 왕궁도, 그렇게 화려하게 지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솔로몬의 진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성전을 짓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궁에 더 많이 그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기가 쉬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어쩌면 왕궁을 더 크게 짓고, 왕궁을 더 오랫동안 지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기능에 맞게, 그 활용도에 맞게 짓는 것이 그게 건축인 것이죠. 그러니까 성전에서는 무슨 일을 해야 됩니까? 성전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에, 제사를 짓는 용도로는 7년의 기간 동안에 이 정도의 규모로 성전을 지으면, 그 정도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왕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인가요? 왕궁은 솔로몬이 혼자 사는 곳인가요? 아니요. 솔로몬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모든 신하들이 와서 함께 있기도 하고, 거기서 정사를 논하기도 하고, 수많은 일들이 그 왕궁 안에서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어나는 그 규모보다, 왕궁에서 일어나는 규모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왕궁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왕궁이 당연히 커야 하는 것이죠. 성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이 더 큰 것은 맞는 거예요.

그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보다, 자신을 위한 왕궁을 위해서,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더 큰 일을, “이 왕궁에 신경 썼다”라고 그렇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그 안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적절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이, 영육이원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영과 육의 이원론, 성과 속의, 거룩할 성(聖), 세속할, 더러울 속(俗)자의, 성과 속의 이원론에 빠져서, 무엇이 중요한가? 영적인 일이 중요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서 겨우 하는 것이고 해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영육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육 이원론에 빠져서, 영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영적인 일에 정말 헌신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사람이고,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선, 그건 가치 없는 것이고, 세속적인 일이고, 그것은 믿음이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폄하해 버리는 경우가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 많이 있게 되겠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함과 동시에,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그 사명을 따라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건축 두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하나는 어떤 프로젝트인가? 성전을 짓는 일이었어요. 그 성전을 7년 동안에,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최상의 성전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솔로몬의 믿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왕궁을 짓는 일은 그럼 무엇인가?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고, 왕궁을 짓는 것은, 그저 솔로몬 개인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별로 가치 없는 세속적인 일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솔로몬을 누구로 세워준 거죠? 왕으로 세웠어요? 제사장으로 세운 게 아니라 솔로몬은 왕인 거예요.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도 중요했지만, 솔로몬에게 있어서 그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게 중요한 솔로몬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 왕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왕궁이라고 하는 것을 잘 지어놓고, 그 안에서 신하들이 잘 모든 일들을 국사를 논하고, 모든 것들을 다 정리해서 한 나라를 제대로 잘 다스리기 위한, 그런 이 왕궁도 제대로 짓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솔로몬 왕궁에서는 하루에 먹는 그 음식의 양이 얼마만큼이었는가 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4장 22절에서부터 2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30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60 고르요, 살진 소가 10마리요, 초장의 소가 20마리요, 양이 100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이걸 누가, 혼자 다 먹었어요? 솔로몬이 다 먹었습니까? 아니요. 살진 소, 엄청나게 무슨 무슨 소, 양, 새, 사슴, 이 모든 몇십 마리 되는 이 짐승들을 하루에 다 먹어 치웠는데, 솔로몬 혼자 다 먹은 게 아니에요. 누가 먹었어요? 솔로몬의 참모들이 먹는 거예요. 솔로몬의 궁정 안에서 일하고 있는 신하들, 병사들,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루에 먹는 양이 그만큼 어마어마했다고 하는 것은 솔로몬의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그 인원들이 정말 많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음식물을 먹었던 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치의 요소가 있을 수 있었겠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좀 줄이고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비난하려면 비판하려고 한다면 비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관리가 많았었던 것이고, 하나의 나라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당시에 강대국이라고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강대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음식물이 필요했었던 것이고, 음식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음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엌이 우리 교회 부엌만큼만 있으면 될까요? 아니요. 부엌이 얼마만큼의 큰 부엌이 있어야 되겠을까요? 아마 우리 본당보다 더 큰 부엌이 있어야 되지 않았을까요? 더 큰 부엌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그런 부엌도 있고, 모든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하나의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들을 움직여야 했던 것이죠.

따라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왕궁을 지은 것은 그것은 이기적인 일이고, 그것은 비난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솔로몬이 왕으로서의 그 기능을 해 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건축이 왕궁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왕궁은 누가 지었어요? 솔로몬이었는데 솔로몬의 아버지인 다윗은 왕궁을 지었을까요? 안 지었을까요? 다윗도 왕궁을 지었어요.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도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왕궁을 지었어요. 먼저 왕궁을 짓고, 그다음에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짓지 못하게 하셔서, 그냥 재료만 준비한 것인데요.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나요? 세속적인 사람이었나요? 다윗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 다윗도, 성전을 짓기 전에 왕궁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왕궁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무엘 하 5장 11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그랬던 것이죠. 그러니까 다윗도 외국의 근로자들을 불러들여서, 다윗의 왕궁을 짓는 일들을 한 것이고, 그것이 성전을 짓기 전에, 그 왕궁을 지었지만, 그것은 이기적이거나 나쁜 일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왕으로서의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한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영적인 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잘 되어 나가는 것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고,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것처럼, 우리 교회 성도들도, 각자 나름대로의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약적인 관점에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삶이 성전인 것이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삶, 하나님 앞에 사는 그런 성전을 짓는 삶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서 다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 거룩한 삶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것만이 소망이 아니라, 또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왕궁을 잘 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는 것만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상시의 삶 가운데서도, 이런 분야 저런 분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앉게 해 주신 그 자리에, 있게 해 주신 분야가 있는데, 그 분야에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그 옛날 솔로몬이 왕궁을 잘 지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서도 사역들이 잘 이루어져서, 회사가 커나가기도 하고, 또한 가게가 잘 되기도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직장에서 잘 모든 일들을 잘 수행하기도 하고, 모든 역할들을 잘 감당하는 그런 복된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간절한 소망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 오늘 성경을 읽었던 박명원 형제가 카페를, 저기 이서, 저기 어디죠? 미래병원 가는 그 입구 쪽에 카페를 하나 지었다고 해서 가봤는데, 카페가 세상에 교회보다 더 커요. 그걸 보고 배가 아팠을까요? 아니요. 보니까 솔로몬 왕궁도 더 커요. 그걸 보면서 야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참 이곳에 와서, 참 마음의 편안함을 누리고, 쉼과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을 많이 서빙하고 도와주는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쉼을 얻고 또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서비스를 잘해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마음속에 잘 생기더라고요. 또 우리 교회 성도님들 일하는 그런 직장에 가보면, 야, 여기가 참 잘 돼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치료도 좀 잘 받았으면 좋겠다. 잘 나았으면 좋겠다. 우리 선생님들이 계시면, 우리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고, 또 우리 아이들이 좋은 길로 인도받았으면 좋겠고, 우리 교회 성도님이 일하고 있는 그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정말 잘 따뜻하게 잘 길러졌으면 좋겠고, 모든 영역에서 잘 되기를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인 면에서만 잘 되는 것이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잘 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하고, 영광 돌리는 것만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어요?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어요? 아니요. 무엇을 통해서도? 먹는 것을 통해서도, 마시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들의 일상의 삶을 통해서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의 이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주신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하면서,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신앙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도, 사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욕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사를 잘 드리면,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아니에요. 사울이 드렸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던 제사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왔던 제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고, 가인의 제사도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드리는 그 금식, 기도, 구제, 이런 것들이 그냥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해서, 영적인 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고, 세속적인 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 아니에요.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릴 수도 있고,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총신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세계적인 석학인 눗슨(Robert Donald Knudsen) 박사가 우리 총신대학에 와서 강연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변증학자인 눗슨 교수가 그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는데요. 그분이 오셔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쭉 하고 난 다음에,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손을 들고 질문했어요. “교수님, 제가 신학생으로서, 신학생으로서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 , 도대체 학문과 경건을 어떻게 밸런스를 맞춰야 될지,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던진 질문의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공부하는 학생인데, 경건에 내가 열중한다고 한다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하는, 이런 영적인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된 것인데, 이 한정된 시간 부분에서, 내가 경건 분야의 열정을 내기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만큼 경건이 아닌, 학생으로서 공부해야 되는 그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학생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잘하기 위해서, 공부에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교회 봉사도 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영적인 일도 좀 줄어들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는데, 우리 한정된 시간 안에서 교수님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좋겠습니까? “학문과 경건, 경건과 학문, 이 밸런스를 어떻게 맞춰나가는 게 그게 좋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눗슨 박사님께서 대답하기를, 뭐라고 대답했냐면,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해 주신 것이죠. 뭐라고 대답을 해주냐면, “학문을 하는 것을 경건한 방법으로” 하라는 거예요. 경건과 학문이 서로 상반된 게 아니라, 내가 아는 그 학문의 영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의 방법으로 하라. 지금까지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이분법적으로 늘 생각하면서 지내왔는데, 그 교수님이 와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경건의 자세로, 경건한 학문을 하라고 하는 그런 대답을 해줬을 때, 아주 엄청난 충격적인 그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성경적인 가르침이에요. 성경적인 가르침.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송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기가 쉬운데요. 그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이 직장에서 한 아이를 돌본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이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최선을 다해서 돌봐주는 것,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직장에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학생이라고 한다면,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으로 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정치를 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그런 정치를 하고, 내가 재판장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바르게 서도록, 그렇게 정직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일이 될 것이고, 내가 교사라고 한다면 공무원이라고 한다면, 그 분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의 전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셉처럼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 앞에 하듯이, 주인에게 하는 것이 주인에게가 아니라, 주께 하듯이 하는, 정말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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