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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시는 하나님 (삼하 7:8-16)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께서 성경 말씀을 매일매일 읽는 훈련을 지금 계속해 오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읽고 계시죠? 이번에 서울로 뮤지컬 아바를 보러, 버스를 대절해서 올라가고 있는 도중에, 중간에 6시가 됐어요. 그랬더니 성경 통독 안내가 나오니까, 버스 속에서 바로 그 성경을 그 즉시 읽느라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그 시간에 성경을 읽겠다고, 이렇게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성경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서로서로에게 격려 잘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성경 잘 읽읍시다. 한번 얘기하십시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 같은 톡방 그룹 중에서 같은 그룹 중에서 성경을 읽다가 포기하신 분이 발생을 하고 있나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나요? 없습니까? 있습니까? 혹시 있을 수도 있어요 이번 주간이 성경 본문이 안 나가는 주간이거든요. 성경 본문이 안 나가는 주간인데, 그동안에 읽지 못했던 것, 이렇게 따라가면서, 한번 쭉 읽으시고, 그래서 다시 성경 읽는 일에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전 것은 잊어버리고, 다음 주부터 또 성경을 읽겠다고 한다면 다음 주부터 읽어도 됩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이번 주 간에는 성경 읽는 내용은 없겠지만, 서로 우리 톡방에 있는 분들께서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그 성경 읽기 다시 시작합시다. 사무엘 하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권면하면서 우리 전 교우가 성경 읽는 일에 한 가지로 동행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서로서로 격려해 주실 거죠? 예 감사합니다. 격려해 주시고요.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성경 읽는 가운데 간증하는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톡 그룹 중에서 내가 이번에 성경을 읽으면서 느꼈던 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거, 이런 것들이 있으면 우리 톡원들 중에서 한 분이라도 두 분이라도 이렇게 선발해서, 이렇게 간증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자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남성 팀장인 김현창 장로님과 또 여성 팀장인 우리 한혜실 권사님에게 말씀드리셔서, 그래서 성경 읽기를 통해서 느꼈던 거, 은혜받았던 것들,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됐다는 것들, 그렇게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분들 자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해서 사무엘상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무엘상의 말씀을 읽었는데, 그 사무엘상의 내용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원했던 왕 사울 왕을 세우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울 왕을 세운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울왕을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원했는데, 왕을 세워달라고 해서 사울 왕을 세웠는데, 그 사울 왕이 이스라엘 민족이 갈망하고 있던 것들을 채워줄 수 있었는가 하면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죠. 물론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원하던 것을 채워주는 면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기에 처했던 야베스 사람들을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끌고 가서,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의 마음 가운데는 “우리가 왕을 잘 뽑았다. 정말 이래서 왕이 필요했었다. 정말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너무나도 기뻐했었을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암몬 민족을 물리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좋은 역할도 했지만, 그러나 이내 사울 왕이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밑천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그 밑천이 드러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블레셋 민족이 골리앗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사울왕의 밑천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울왕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왕이 있어 봤자, 왕이 있어봤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왕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갈망하고 있는 것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갈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우리의 문제를 누가 무엇이 해결해 줄 것인가? 갈망하는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 우리는 돈에게 소망을 거는 겁니다. 돈이 우리의 문제를 좀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거는 것이고, 또 우리가 소망을 거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정당의 정치인이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소망을 걸게 되는 것이죠. 돈에 소망을 걸고, 권력에 소망을 거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식들에게 소망을 거는 것이죠. 우리 남편에게 소망을 걸기도 하고, 우리 아내에게 소망을 걸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완벽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내 밑천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돈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돈 때문에 우리의 삶이 피폐해져 버리고, 우리가 정말 고통 가운데 정말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아야만 하는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돈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 돈 때문에 때려치우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겁니다. 정치인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았는데, 구호는 잘 외치고 있고, 우리의 속을 긁어주는 속 시원하게 해주는 말들은 잘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전혀 자신들이 했던 공약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바꾸어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사울 왕의 실패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다윗이 등장한 것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 해답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등장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군대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돈이 많고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가면서 칼과 창에 전쟁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앞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거죠. 마지막 날에 다윗과 같은 구원자를 보내주실 그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윗 역시 해답이 아니었던 것이죠. 사무엘 하를 이제 고난 주간이 지난 그다음 주간에 우리가 사무엘 하의 말씀을 읽게 되겠는데요. 이 사무엘 하의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왕을 쓰러뜨려버리고 이제는 다윗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선한 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다윗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 다윗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걱정, 근심이 없게 된 것일까요? 다윗은 그러한 우리들의 갈망을 채워주는 것만 같았어요.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외세의 침입에 늘 불안해하던 사울 왕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 다윗 시대에는 주변 민족들을 다 정복해 버리고, 찬란한 민족을 이루는 정말 엄청난 그 나라를 이룬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기 때문에, 다윗 왕이 사울왕의 문제들을 다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도 우리가 기대하는 해답이 아니었던 것이 금세 드러나고 맙니다.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다윗이 보호자가 아니라 약탈자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은 백성을 보호한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아내를 빼앗아버린 것이죠. 그리고 그 아내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 죽여버린 것이죠.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들이 하는 일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약탈해 버리고 자신의 충신을 죽여버리는 그런 정말 배신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윗마저도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는 우리가 소망을 둘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마음을 인정하시기는 했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성전을 지을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줄 것이고, 그리고 너의 아들이 일어나서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나라를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할 거라고 하는 것을 약속해 준 것이 사무엘하 7장의 말씀입니다. 11절부터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서 들려주신 메시지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짓지 못하게 만드셨고, 그리고 그 대신에 다윗의 아들이 일어나서 성전을 짓게 하실 거라고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왕조를 든든하게 세우시고, 이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거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거기까지 약속하고 다윗이 죽는 다윗이 이제 통치를 마무리하는 데까지가 사무엘 하의 말씀인데요. 정말 이런 하나님의 약속처럼 열왕기 상에 가면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일어나 왕이 되었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솔로몬의 성전은 완벽한 것이었는가 하면, 완벽하지 않았어요. 금세 솔로몬은 범죄하고 타락해 버렸고, 그 성전은 영원히 계속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 민족이 침입을 해서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이 성전은 파괴되어 버렸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다윗의 왕조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했는데, 영원히 계속된 것이 아니라 바벨론 왕국에 의해서 망해버리게 되는 그 다윗 왕조가 끝나버리는 그런 불행한 이야기가 열왕기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오늘 우리가 읽을 사무엘하의 메시지에서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다윗에게 해주셨던 이 약속이 솔로몬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죠.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 오셨어요. 마태복음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면서 족보가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윗의 혈통에 따라 나셨고, 다윗의 마을이었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묻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들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할 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조를 잇는, 왕 되신 예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래서 무슨 일을 하냐면 성전을 짓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하면, 성전을 짓는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성전을 짓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 보이고 있는 성전을 파괴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래서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양과 소를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동전 바꾸는 사람들을 뒤엎어버리시고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종종 생각하기를 아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다”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이것은 성전을 청소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당시 성전이 어떻게 돌아갔는가? 성전의 시스템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 성전의 사람들이 가면 거기서 돈을 바꾸고, 사람들이 성전에 오면 거기서 양을 사고 소를 사고 하면서, 그 바꾼 동전으로 하나님께 성전세를 드리고, 또 양과 소를 거기서 사서 거기서 제물을 드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성전의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 성전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그런 제스처를 보여주신 것이죠.


그러한 모습을 보았던 바리새인들이 또한 성전을 지키고 있었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해주셨던 예수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부터 22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 버려라. 그러면 내가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했는데, 그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몸으로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죠.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죠. 더러운 인생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디서 만나는가 성전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게 만나는 창구예요. 더러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며 속죄죄를 드리며, 죄를 씻고 죄를 씻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장소가 성전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성전이 지금까지 타락해 버린 겁니다. 성전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서 들여지는 제물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싫어하셔서,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서 사람들을 만나주시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희생 제사를 드려, 우리를 죄 용서시켜 주시고,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그 성전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사무엘하 7장에 예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의 아들로서 성전을 지을 거라고 하는 그 예언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시는 그 역할을 감행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고, 이제는 우리가 더러운 죄악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우리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무엘하의 말씀이 누구에게서 이루어졌는가? 바로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이죠.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부터 2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놀라운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조를 잇는 온 세상의 왕이 되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떻게 입성하셔요? 오늘이 종려 주일인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입성하셔요?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말을 하시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내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며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서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호산나 누구의 자손이요? 다윗의 아들이여.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 다윗의 아들로서 왕위를 승계받아서 예루살렘, 그 다윗의 성에 들어가서 왕이 되시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그 장면이 이 호산나 찬송하는 그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특징이 하나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실 때 모습이 왕의 모습입니까? 거지 왕초의 모습입니까? 시원치 않은 모습이에요. 원래 왕의 모습은 어떻게 왕의 모습입니까? 말을 타고 황금마차를 타고 화려한 그 신하들과 함께 엄청난 위엄을 보이면서 삐까번쩍한 모습을 가지고, 성에 들어가 취임식을 하는 게 왕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는가? 소꿉장난하는 것 같아요. 타긴 탔는데 뭘 탔어요? 나귀를 탔는데, 나귀 중에서도 어떤 나귀 새끼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깔아준 겉옷을 그 위에 얹고, 사람들이 흔들어야 되는 나뭇가지를 환영을 받으면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게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왕권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의 왕은 어떤 왕입니까? 이 세상의 왕은 권력을 가지고 화려함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압제하며 통치하고 권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이죠. 오늘날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그 옛날 그 정치인들은 어떤 일을 보여주었는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압제하는 그런 군주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 오실 때는 어떻게 오셨는가? 섬기는 왕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데 우리를 위하여 발을 씻기기 위한 낮아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천한 모습으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그리고 정말 평범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더러운 것들을 다 씻겨내시면서 우리의 죄악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죠. 우리들의 병든 것을 고쳐주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고 먹을 것을 주시며,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시는 진짜 왕의 모습인 거죠. 이 세상의 왕들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압제하며 그러면서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는 그런 가짜 왕의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모습으로 겸손함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셔서, 살과 피를 다 흘려주셔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진짜 왕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무엘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실패했던 다윗에게서 누릴 수 없었던 참되신 왕, 겸손한 왕,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살려주신 그 왕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이 사무엘서 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주님을 더욱더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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