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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5:5-11)

지난주에 우리나라와 태국과의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요. 보셨습니까? 예. 축구 경기가 끝난 다음에, 어떤 사람이 SNS에다가 소감을 올려놓은 것을 봤는데요. “당분간 국내 경기는 안 봐야 되겠다.”라고 하는 소감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이번 주에 또 볼 것 같아요. 그분이. 

이번 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황선홍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를 소집하게 되었는데, 축구 국가대표 소집한 그 명단들을 보면 눈에 뜨이는 선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누가 눈에 띄었습니까? 이강인이요? 이강인도 눈에 띄고, 여러 선수들이 눈에 띄지만, 특별히 언론에 집중을 받은 선수가 있다고 한다면 주민규 선수입니다. 처음 들어보십니까? 주민규 선수라고 하는 선수가 있는데요. 이 선수는 지명도 받지 못해서 2부 리그의 연습생으로부터 출발한 선수였는데, 계속해서 열심히 축구를 해서, 결국 k리그의 주전 선수로 올라가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나라 k리그에서 득점왕도 차지하는 등 엄청난 발전을 이룬 선수가 주민규 선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내 k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득점왕도 차지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지 않았었어요. 이번에는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려나 해도, 발탁되지 않고 또 발탁되지 않고 했었는데, 드디어 황선홍 감독이 그 주민규 선수를 국가대표에 소집했고, 이번에 선발로 나서서 열심히 경기를 했는데, 잘하는 것 같은가요? 못하는 것 같은가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잘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국가대표로 뽑힌 나이가 33세 하고도 343일째 되던 날 뽑혔어요. 원래 축구 선수들은 몇 살이 정년기죠? 아주 활발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죠? 20대거든요. 30대 넘어가면, 에이징 커브(againg curve)가 생겨서 이제 이제 쇠락하는 그런, 그렇게 넘어가게 되겠는데, 놀랍게도 주민규 선수는 최고령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데뷔하는 그런 기록을 세운 것으로 뉴스에 회자되었고, 그래서 이번에 활동을 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서부터 박수를 칠 수가 있었습니다. 황선홍 감독이 이러한 주민규 선수를 뽑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왜 이 주민규 선수를 뽑았겠습니까?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죠. 주민규 선수가 탁월한 선수이고, k리그의 득점왕을 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황선홍 감독이 이 주민규 선수를 발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이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표 선수를 뽑는, 그래서 베드로를 뽑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발탁하시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를 부르신 이유, 베드로를 선발하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어느 장점을 보고서 선발한 것일까요?

베드로의 장점이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그 유익한 점이 무엇이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뽑았는가? 그 선발 기준이 무엇이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베드로가 말을 잘하기 때문에 선발을 했을까요? 아니면 베드로에게 리더십이 있어서 앞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갈 때, 교회의 리더로 세울 만한 그런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선발한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브레인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쓰면 앞으로 교회에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뽑았을까요? 아니면 한 번 충성하면 그 충성을 변하지 않는 정말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선발했을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해 나가시는 가운데 물질적으로 많은 서포트를 할 수 있는 그런 재력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뽑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이 베드로가 성경 말씀을 통달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학자요, 성경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앞으로 가르칠 때 많은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베드로를 뽑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하지만 이러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부르셨는데, 그 베드로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베드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평범한 어부였던 것이죠. 오히려 그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주셨을 때, 베드로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그날 밤에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그래서 낙망하고 그래서 더 이상 허탈한 가운데, 정말 아무런 소망도 없이 힘이 빠져 있던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베드로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밤새도록 고기를 낚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허탈했던 그 상황이 베드로의 현재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내놓을 것이 없는 실패한 인생인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 그야말로 너무나도 평범한 인생이 베드로의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베드로를 선택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황선홍 감독은 선수들을 선발할 때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 국가대표가 승리를 하고 또 승리를 해서, 그래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들을 또 선별하고 또 선별해서 국가대표를 뽑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뽑았단 말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선발하신 이유를 찾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꾼을 선발해서 최대의 성과를 남기기 위해서, 베드로를 뽑은 것이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고, 예수님의 목적은 최대의 성과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적은 베드로 자체가 목적이었던 거죠.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시고, 베드로에게 힘을 주시고 그의 인생, 지금까지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았고, 지금까지는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았던 그 베드로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그 베드로를 부르시는 모습이 오늘 누가복음 5장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그 옛날 베드로를 찾아가서 부르신 것처럼 오늘 저희들을 불러주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를 찾아오시는가? 주님께서는 누구를 선발하고 싶으신가? 김하성 선수와 같이 뛰어난 선수, 오타니 선수와 같이 뛰어난 선수, 손흥민 선수와 같은 그런 뛰어난 선수들만 골라서, 최상의 팀을 만들기 원하시는 그런 우리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회복시키시고 주님의 자녀 삼아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탁월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뛰어난 사람은 주님께서 뽑지 않으신다고 하는 그런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뽑으셨다고 하는 그 말은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부르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뛰어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주님께서 부르시고 더 나아가서 “나는 인생의 실패자야. 나는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어. 내 인생은 완전히 망해버린 것 같아.” 나는 그 어느 것도 내놓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해 주시고, 그래서 불러주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던 그런 인생을 향해서 오셔서 주님의 제자로 삼아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찾아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부르신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리고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놀라운 기적을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 깊은 곳에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깊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아까 그물을 내려봤던 곳이에요.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그곳에서 내렸어요. 그곳을 지나치고 그곳에는 던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물고기가 나올 만한 곳에서 그물을 열심히 던져보았고 또 던져보았지만, 거기서 아무런 물고기를 낚을 수 없었던 실패의 자리가 바로 그 깊은 곳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인데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다시 한번 그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놀랍게도 한 번도 고기가 나타나지 않았던 바로 그 스폿에서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혔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실패했던 그곳을 포기할 게 아니라, 그것을 또다시 파야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하시고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혹시 그렇게 결론을 내리시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요. “맞아.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했던 그곳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그곳을 공략해서 거기서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 우리도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그곳에서, 무너졌다고 그냥 마음을 접지 말고, 그곳을 파야 되고, 한 우물을 또 파고 또 파서 결국 파다 보면, 그곳에서 물이 나올 것이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한 우물을 파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빨리 접고 다른 곳으로 옮아갈 필요도 있는 것이죠. 한 우물을 파는 게 맞습니까? 이 우물 저 우물 파는 게 맞습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예요. 어떤 경우에는 한 우물을 팠기 때문에 거기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실패를 보고 여기가 아니구나 하고, 빨리 옮겨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을 때, 거기서 답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죠. 사람들마다 다른 것이고, 정답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해야 되는 것이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할 게 아니라, “한 우물을 파야 되겠다.” 그런 말씀을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교훈으로 얻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 더 이상 고기가 잡힐 것 같지 않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어서, 베드로로 하여금 영적인 진리를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서, 그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 것이지, 우리가 꼭 그 실패했던 자리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놀랍게도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자기가 어제 실패했던 밤새도록 실패했던 그 자리에 그물을 다시 던지게 되는데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까요? 도대체 그 베드로의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마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에 따라 그 그물을 던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상상을 해보자고 한다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믿지는 셈 치고” “믿져야 본전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던져보라고 하니까, 그냥 “그래. 던진다고 해서 뭐 손해 볼 거 있겠나?” “한 번 더 던져보자.”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그물을 던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말씀하시는데, 그 예수님의 말씀이 왠지 모를 파워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에 왠지 모를 강력한 힘이 느껴져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하는, 그런 마음을 그 신비한 힘을 주님에게서 느꼈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릅니다. 아니면 이 베드로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창피해서, 너무나도 비참해서, 여전히 바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그래서 한번 던져보라고 했을 때, 미련 때문에 한 번 다시 던져보게 된 것일까요? 베드로의 그 마음의 동기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자기가 이런 그물을 던졌을 때,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잡힐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고 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는데 거기서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가 잡힌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어부 생활하면서 이렇게 많이 잡힌 경우를 보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물을 끌어올리는데, 너무나도 무거워서 혼자 힘으로 끌어들일 수 없으니까,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다가 그물을 당겨야만 했었고, 그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너무나도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됐었고, 그리고 그 물고기를 양쪽 배에 다 실었는데, 그 양쪽 배에 실은 그 물고기의 양이 너무나도 많아서, 심지어 배가 가라앉을 지경까지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혔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보았을 때 베드로의 반응이 아주 놀랍습니다. 누가복음 5장 8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이 순간에 자기가 잡은 그 수많은 물고기를 보면서 환호하고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와, 내가 이런 엄청난 물고기를 잡았구나.” 너무나도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물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았어요. 이 물고기를 바라보고, 그래서 이 물고기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너무나도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한다면, 우리가 보여야 보이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기쁨과 반가움, 감격의 재회 이런 걸까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됐을 때 “주님 만나고 싶었어요. 기뻐요.” 그렇게 하게 될까요?

성경에 보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거예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목격하고 난 다음에,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반응을 보였는데, 오늘 이 베드로의 반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이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는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주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밝은 빛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더럽고 내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만 같아서, 그 앞에서 감히 서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그렇게 간증하는 사람들이 종종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들이 엉터리이거나,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종종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하면서 또는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내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요. 대부분 가짜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가 없어요. 베드로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 거죠. 막 울고 회개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요. 종종 목회자들이나 혹은 어떤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게 되면서, 그것을 우리가 조심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나는 일반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 그래서 결국 그러한 관계 속에서는 우리가 영적인 착취를 당하기가 너무나도 쉬워요. 이단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이단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이단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음성을 들었다고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영적으로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혹시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무턱대고 따를 것이 아니라, 삼가고, 그런 사람들은 피하는 것이 영적으로 현명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목회자가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만 죄의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며, 주님께로 인도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들을 조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만났어요. 정말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래서 자신의 삶이 이제 완전히 변화되게 된 것인데요.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정말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때서야 비로소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이미 만났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는 그냥 선생님으로 만나게 된 것이죠. 선생님과 그냥 이야기했어요. 보통 사람 대하듯이 이야기했고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선생님 말씀에 따라 한번 던져보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대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정말로 깨닫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된 것이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믿음의 경험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고 계시는데요. 언제 찾아오고 계십니까? 예배를 통해서 우리와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만나주기를 원하시고,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와 만나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경험 가운데서 사고나 사건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만나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때마다 이 베드로가 처음에 그냥 예수님을 일반 사람 대하듯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면서 모른 척하면서 지낼 것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 가운데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보통 어떻게 외면합니까? 외면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초점 흐리기 권법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는 그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비껴 나가서, “은혜 받았어요.”라고 하는 말로 그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또한 피하기 권법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피하기 권법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은 꼭 우리 남편 들어야 될 말씀이네. 이 말씀은 꼭 우리 애들이 들어야 될 말씀이네. 아무개 집사가 들어야 될 말씀이네. 나에게 적용하지 않아요.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버리고 넘겨버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외면해 버린 채,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때로는 눈을 막고, 귀를 막고,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보다는 물고기에 집중하게 만들고 주님께서 주시는 빵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주님을 만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애써 외면할 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나가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 베드로를 부르실 때는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베드로와 말씀해 주시고 만나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혹은 병 고치는 것들을 통해서 그렇게 만나주시기를 원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마태를 부르듯이 레위를 부르듯이 말씀으로 불러주시기도 하고, 삭개오를 부르듯이 주님께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말씀으로 불러주시기도 하고, 사람들마다 각자의 그 상황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원하시는데,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 우리들을 만나주시길 원하고,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만나주실 것을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외면해 버릴 것이 아니라, 주저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놓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서울의 뮤지컬 아바를 보러 갔다 왔습니다. 정말 감동이 있고 재미있는 뮤지컬이었는데요. 이 뮤지컬 아바라고 하는 뮤지컬은 요나 이야기와 탕자 이야기를 짬뽕해 가지고 섞어서, 그래서 만든 현대식으로 각색한 뮤지컬이었는데, 참 참 귀한 뮤지컬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장면이 있냐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그 장면 가운데서 그 탕자의 형이 탕자를 향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이런 꼴로 아빠한테 갈 거야?”라고 하는 말이죠. 탕자가 지금 거지 신세가 됐어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요. 실패자가 됐어요. 그래서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그 상태에서, 이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그때 이 탕자의 형이 탕자를 향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아버지한테 돌아간다고? 아버지께서 너를 환영해 줄 것 같아? 그 모습으로 어딜 가? 가지 마.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얘기가 아니고 각색해서 만든 뮤지컬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죄를 보고, “너는 죄이니까 불가능해. 안 돼. 너는 실패자니까, 인생의 실패자니까 안 돼. 너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까, 안 돼.” 하면서, 다 불합격 딱지만 해버리고, 우리를 환영해 주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 것이죠.

좋은 의사는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입니까? 우리의 몸에 있는 질병들을 진단하고 그 질병들에 있는 그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는 게 좋은 의사잖아요? 암세포를 제거하고 염증을 제거하고, 문제 되는 것을 제거해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진단을 해봐서,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 완전하지 못하고 실패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고와 우리의 모든 아픔, 우리의 슬픔들, 근심과 걱정들을 주님께서 지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 전 선지자였던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미리 예언해 주신 말씀인데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이 성찬예식은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그 문제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서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음을 우리를 위하여 몸과 피를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을 참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가? 우리가 죄가 많을수록 주님 앞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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