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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에 주의하라(잠 16:18-24)

 오늘 또 잠언서의 말씀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특별히 오늘 잠언서 16장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네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몰락의 앞잡이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죠.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선봉이라고 하는 말은 선발대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선발대가 도착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오죠? 본진(本陣)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죠. 먼저 선발대를 보낸 다음에, 그리고 나머지 군사들이 함께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교만이라고 하는 선발대가 가면, 그러면 어떤 본진이 오는가? 어떤 군대가 오는가? “패망이라고 하는 그 결과가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교만하면 결국 망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만하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교만에 대한 경고를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벌써 여러 번 배웠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교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잠언서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또 나왔습니다. 또 나왔으니까, 지난번에 했으니까, 그냥 오늘은 안 하고 건너뛰고 지나갈까요? 그게 아니라, 자꾸 반복하는 데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 자꾸 반복해서 교만에 대해서 또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교만에 빠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또 한 번 상기시키고, 또 한 번 기억나게 해서, 우리가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그렇게 해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벌써 잠언서를 하면서, 교만에 대해서 벌써 수 차례에 걸쳐서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지만, 오늘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교육은 반복이기 때문에, 오늘 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 왔는데요. 제가 살아오는 과정 가운데 수많은 실패들을 생각해 보면서, 그때 내가 왜 실패했었을까? 왜 그때는 제대로 잘하지 못했었을까? 제가 망쳐버린 일들을 생각하면서, 복기(復棋) 해 보면 거기에는 항상 교만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모든 실패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여러 이유들 중에 가장 근원적이고,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는 그 중요한 그,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제 인생의 실패들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교만했을 때 무너졌고, 교만했을 때 망가져버리고, 교만했을 때 모든 것들을 실패했던,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망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망하고 싶습니까? 성공하고 싶습니까? 성공하고 싶죠. 망하고 싶지 않아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이러한 실패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의 문제를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최근에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로 진출한 김하성 선수가 수비를 가장 잘하는 선수들에게 주는 “골드 글로브”를 우리나라 선수로서 타게 되는 정말 획기적인 그런 일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는 분이 한 3~4명, 대부분은 모르시는데, 김하성 선수라고 하는 이 선수가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굉장히 잘했던 선수인데, 그렇게 잘했기 때문에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팀으로 들어가게 돼서 거기서 샌디에고라고 하는 팀에서 열심히 지금 활약을 해왔는데, 금년의 활약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타격도 좋고 수비도 좋고, 무엇보다도 뛰어난 것은 김하성 선수의 수비가 너무나도 뛰어나서, 그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수비를 잘하는 선수 9명 중에 1명으로 뽑힌 것이죠. 각 포지션마다 각 포지션마다 1명씩 선발하게 되겠는데, 김하성 선수가 당당하게 우리나라 선수 역사상 최초로 골드글로브를 수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골드그룹을 이 메이저리그에 가서 수상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까요. 한국에서 야구할 때는 볼이 오면 그 공이 옆으로 흘러가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항상 보통 가운데로, 이렇게 받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다고 그래요. 볼을 이렇게 받거나, 이렇게 받거나 하면, 볼이 옆으로 새 버리기 때문에 볼(ball)을 항상 앞에 해서 받는 것을 연습하면서, 그래서 한국에서 그렇게 받아 가지고 열심히 수비를 잘했던 선수가 김하성 선수입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에 갔더니 그곳에 있는 선수들의 타구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이렇게 자기 몸 앞에서 공을 받으려고 하면 이미 늦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볼이 저쪽으로 오면, 몸을 가서 받을 수가 없고, 팔을 뻗쳐서 공을 잡아야 되고, 이쪽으로 가면 이쪽 팔을 받아야 되고 해서, 미국 메이저리그에 간 다음에는, 자신의 수비 폼을 완전히 바꾸어, 그래서 이렇게 받아도 저렇게 받아도, 그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받은 다음에 재빨리 연결해서 타자를 죽일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을 열심히 한 결과, 결국 김하성 선수가 골드 글로브까지 타게 된 것이죠. 자기가 지금까지 몸에 익숙했던 그런 습관들, 지금까지 성공했던 그 방식들을 다 내버리고, “내가 아직 좀 더 배워야 되는구나” “아직 내가 좀 더 발전해야 되는구나”를 생각해서, 더 열심히 연습하게 되었는데, 그 열심히 연습하게 된 그 근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겸손인 거죠.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 더 연습을 해야 되고, 더 노력해야 되고, 내가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겸손한 마음 자세로, 결국 열심히 연습해서 골드 글로브까지 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서 제가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교만이 무엇일까? 교만이 무엇일까? 과연 나는 교만한가 교만하지 않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교만하십니까? 겸손하십니까? 예? 교만하십니까? 겸손하십니까? 그 대답은 무엇을 보고, 내가 교만하다? 무엇을 가지고 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판별할 수 있을까요? 감기에 걸린 것은 열나고, 콧물이 나고, 몸이 으스스하면 감기에 걸렸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내가 교만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교만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던 방식을 바꿀 수 있느냐? 바꾸지 못하느냐?”가 “교만한가? 교만하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그런 기준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식, 지금까지 경험에 의해서 이게 최고라고 생각했던 그 방식, 그러기 때문에 이 방식을 전혀 바꿀 수 없고, 내 스타일대로 내 방식대로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교만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교만한 거예요. 겸손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보고, 이게 최고인 줄 알았지만, 이 최고인 줄 알았던 이것이 최고가 아닐 수도 있구나.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것을 인정하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방식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단 하나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만하십니까? 겸손합니까?

시대가 변했어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가장 좋았던 것, 지금까지 해왔던 그 모든 제일 좋았던 방식,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교만한 마음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식이 잘못될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상황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내 생각과 내가 판단해 오던 방식대로 지금까지 내가 해온 대로 그대로 밀어붙이게 되는 것이겠고요.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내가 했던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방식들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참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은 많은 것을 갖추고 있어요. 정말 모든 것들이 참 장점들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인데, 그런데 그 마음속에 교만함 때문에 망해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 자기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해왔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교만해져 있어서,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실패한 인생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들려주시는 잠언 16장 18절의 말씀을 분명하게 잘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만은 무엇의 선봉이에요? 패망의 선봉이에요. 거만한 마음은 무엇의 앞잡이예요? 넘어짐의 앞잡이예요. 근데 번역이 좀 너무 밋밋하게 번역이 됐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까, “뭐, 까짓 거. 넘어지지 뭐.”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아니라 몰락의 앞잡이예요. 파멸의 앞잡이예요. 망하는 거의 앞잡이란 말이에요. 교만한 마음, 거만한 마음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아주 위험한 요소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여, 겸손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 주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고, 그래서 증명된 것 같고, 그래서 최고인 것처럼 생각되는, 그 방식을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고, 어떠한 시대가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어리석은 교만한 자가 되지 말게 해 주시고, 정말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잠언서 16장 19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해서 마음을 낮추는 게, 교만한 자와 함께해서 탈추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대비가 조금 약간 애매해 보입니다. 그래서 “원문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원문을 살펴보았는데요.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 또는 온유한 자 또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는 것이 영혼이 함께 영혼이 낮아지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교만한 자와 함께해서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가난한 자와 혹은 온유한 자와 겸손한 자와 함께하는 함께하면서 영이 낮아지는 것이 더 좋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가 번역이 맞을까요 온유한 자가 번역이 맞을까요? 겸손한 자로 번역하는 게 번역이 맞을까요? 어느 게 더 적절해 보입니까? 겸손한 자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일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교만한 자와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겸손한 자와 영이 낮아지는 것이 훨씬 더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문장의 흐름상 적절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단어가 “아나빔”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가난, 온유, 겸손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교만한 자와 대칭되는 의미에서 겸손한 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근데 겸손한 자와 함께 영이 낮은 것이 좋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영이 낮다. 영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들의 영혼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종 생각하기가 쉽지만, 성경에 나오는 영이나 몸이나 이런 것들은 우리 인간을 말합니다.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비천해지는 것이, 그러니까 겸손한 자와 어울리면서 겸손한 자와 어울리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 교만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전리품을 나누고, 여러 가지 그 물질을 얻고 많은 재물의 이득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잠언서 16장 19절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재물을 가지는 것보다 재물이 없이 비천한 상태에 있는 것” 그러나 누구랑 함께 있다고 한다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다고 한다면, 교만한 자와 함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전리품을 나눠 갖고 하는 그렇게 있는 것보다 겸손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게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것이 1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겸손이 중요하다고 하는 말씀이죠. 그래서 겸손한 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 교만한 자와 함께하는 것보다 겸손한 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왜 겸손한 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을까요? 전염이 되니까. 우리가 교만한 자와 어울리다 보면 우리도 교만해지게 되고, 겸손한 자와 만나게 되면 우리도 겸손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겸손이 중요하니까 그 겸손해져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해주시는 말씀이 바로 16장 19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다 같이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교만이 멸망의 선봉이요 선발대요. 그리고 거만한 마음이 몰락의, 몰락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니까,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교만한 사람들과 어울릴 것이 아니라,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게 아니라,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더라도, 겸손한 자들과 어울리며, 겸손함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오늘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16장 20절 말씀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에 주의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씀”이 무엇일까요? 말씀에 주의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말씀.” 그러면 떠오르는 게 무엇이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말씀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다바르”라고 하는 히브리어 원어입니다.

보면 그것에 말씀에 “따발” “다바르”라고 하는 바로 여기에 있는 이 단어인데요. 이 “따발”이라고 하는 단어는 “따발”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말씀”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주목하는 자는 좋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번역해도 되고, “그것에” “사건에” “물건에” 주목하는 자는, 그것에 주목하는 자는 “좋은 것을 발견할 거다”라고 번역도 가능한 말이 바로 오늘 19장 20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다발”이라고 하는 게 말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어떤 “그것”(thing)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가운데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는 것이죠. 무엇에 주목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게 되는가?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번역도, 해석할 수도 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말”에 주목하는 사람이 “좋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고, 또 하나는 어떤 “사건”이나 “일들”을 그냥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고 주의하면서 심사숙고하면서 처리하고, 일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사람이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 세 가지 의미로 번역이 다,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뒤에 있는, 그런데 뒤에 있는 걸 보면, 뭐라고 나와 있냐면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뒤에 있는 말하고 연결시키면, 우리가 맨 처음 생각한 게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깊이 생각하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도 해야 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일을 하는 것이 그게 복된 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이게 좋다고 하면, 거기 따라가고, 저게 좋다고 하면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정말 내 생각에 이렇게 되면 망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자가 그게 복된 자이고 그게 승리하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에요?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대라는 말씀이에요.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러다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완전히 바보, 천치 취급 당하면서 사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며 사는 거 아니야? 누가 나를 한 대 때리면, 10대는 때려줘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래도 길을 피고 살 수 있을 거 아니야? 보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들한테 가르치기를, “누가 너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려.” 막 그렇게 가르치는 부모님들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안 살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완전히 망해버릴 거 아닐까?”라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것이죠.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이 이 세상에서 망하는 길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된 길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장 2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느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고 인정을 받겠지만, 그렇죠? 지혜로운 사람, 똑똑한 사람 사람들이 명찰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입이 선한 자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학식을 더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배움을 갖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주게 한다. 누가 그런 깨달음을 준다고요? 명철한 자가 그런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론 명철한 것이 전제조건이 돼야 되겠지만, 모든 명찰한 자가 그런 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입이 선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주고 깨달음을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원어가 있나요? 봅시다.) 그런데 입이 선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입이 선하다. 원문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어요. 입술의 달콤함이 배움을 더할 것이다. 더한다고 하는 말이 “요셉”이에요. 요셉. 요셉이라고 하는 아들의 이름이 “더하다”라는 뜻이잖아요? 요셉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어요. 입술의 달콤함이 배움을 더하게 할 것이다. 한국말 성경에는 선한 입술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히브리어 원문은 “입술에 달콤함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배움을 가지게 만들어줄 거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죠? 말을 할 때 어떻게 말을 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달짝지근하게 얘기하라 이 말이에요. 달짝지근하게 말을 들으면 행복하게 느껴지도록 얘기하란 말이에요. 아 듣고 싶어. 단 거 자꾸 먹고 싶듯이, 누군가에게 하면, 그 말을 듣고 싶고, 그 사람하고는 더 이야기하고 싶고, 더 그 사람하고 말하고 싶고 하게, 그런 지혜롭게 말의 달콤함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라. 이 말이에요.

어떤 사람은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저 사람하고는 내가 얘기하기가 싫어. 그런 사람 있죠. 저 사람, 또 얘기해? 도망가고 싶어. 그런 사람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말의 달콤함이 없고 말이 있으면 아무리 지혜의 말을 가지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말의 달콤함이 있으면, 내가 가진 그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서, 그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그 사람에게 배움이 생기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말의 지혜가 없어요. 대부분의 경우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립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말을 하고 성도들에게 말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자녀가 잘 되기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고, 우리 교우들이 잘 되기를 원해서 말하는 것이고, 우리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해서 말하는 것인데, 말의 지혜가 없어서, 말에 가시가 돋쳐서, 말하는 것마다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말하는 말마다 정말 의기소침하게 만들어버리고, 말하는 말마다 화나게 만들어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리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그 말로 명찰한 말로 이야기를 해준들, 그 말이 듣는 사람에게 지혜를 줄 수 있는가? 그 배움을 가지게 할 수 있는가? 아무런 배움도 주지 못한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그 말들은 죽이는 화살이 되어서 그 사람을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그런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포장을 잘해서, 그 말을 정말 받아들이기 원하게끔 말을 줘야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우리가 선물을 할 때 선물 어떻게 선물하십니까? 사과를 선물하고 배를 선물하고 소고기를 선물하고 어떤 제품들을 선물하고 할 때, 그 선물을 할 때 어떻게 선물해요? 달랑 사과 이렇게 들고 가서 먹으라고 줍니까? 그게 아니라, 과대 표장을 하는, 과대 표장 이쁘게, 상자를 맛있는 상자를 싸고 그거 가지고 안 되겠습니까? 황금색 보자기로 싸고, 묶고, 그래서 전달해 주는 거예요. 그 사과 열어보면 먹을 거, 몇 개 없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포장지가 너무 좋으니까, 받을 때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요. 소고기를 선물하는데, 소고기 신문지에 둘둘둘 말아가지고 먹으라고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소고기에다가 쫙 윤기를 입히고, 거기다가 뭐 이런 포장도 막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아주 이쁜 박스에다가 해서, 황금 뭐 무슨 종이들 막 붙이고, 그래 가지고 아주 멋있게 딱 해서 파는데 소고기 값은 얼마 아닌데, 포장값까지 해가지고 몇 배로 비싸게 팔아가지고, 전달하는데, 그걸 받으면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포장이 이뻐야 되거든요. 포장이 나쁘면, 쓰레기봉투에 담아두면, 아무리 좋은 것도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이 말이라고 하는 그 선물을, 우리는 그 말의 선물을 왜 줍니까?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고,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고,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그 말인데, 그 말을 포장을 안 한 채, 아니 포장은커녕 그냥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어버려서, 결국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감사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쁘고 분노하게 만들고,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만들어버려서,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되는 어리석은 일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떻게 하면 말에 꿀 같은 말이 나올 수 있죠?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말에 달콤함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달라지죠? 우리들의 말이 어떻게 하면 달라지죠? 방법이 없습니까? 장로님, 방법이 뭐예요?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어요? 잘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거예요. 한번 말하기 전에 또 생각하고, 내가 이 말을 하면 기분이 좋을까? 나쁠까? 내가 이 말하면 받아들일까? 안 받아들일까? 내가 이 말을 하면 관계가 좋아질까 나빠질까? 내가 이 말을 하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할까? 화를 낼까? 내가 이 말을 하면 과연 유익할까? 유익이 아닐까? 내가 이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고, 어떤 반응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생각해 봐야죠. 생각해 보고 움직여야죠. 그 어떤 일을 할 때, 생각해보지 않고 하면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우리가 말에 재주가 없기 때문에, 말재주가. “나는 말재주가 없어” 그러면서, 그냥 말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래서 우리들의 말을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고 또 다듬어서, 말이 달짝지근한 말이 나오도록, 말의 훈련을 해서 내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어떻게 하며?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그랬으니까, 말을 천천히 말하면 될까요? 애들 속 터져요. 그러면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서 지혜롭게 말하라고 하는 말씀일 줄로 믿습니다.

16장 22절에서부터 24절까지의 말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한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술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한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달콤한 말이에요. 한번 자기 그 아내에게 우리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여보, 내 말이 달콤해? 달콤했어?” 한번 물어보세요. 쓰다고 그러면 그럼 고민해 보세요. 고민해 보세요.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합니다. 사실 제 말이 너무나도 쓴 말이 많았어요. 너무나도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상처를 입히고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는지 몰라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악한 삶을 살 때가 너무나도 많기에,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다시 나가서,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저희들을 말갛게 씻겨주시고, 저희들의 입술에, 입술을 씻겨주시고, 생각을 씻겨주셔서, 정말로 우리들의 입술 가운데서 꿀송이와 같이 단 말들이 전해져서,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지혜와 지식들이 전달되게 하시고, 배움이 되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잘 들어서 나도 지혜롭게 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날마다 날마다 발전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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