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잠언서 19장의 말씀 중에서 6절과 7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잠언서 19장 4절과 더불어서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언서 19장 4절 말씀에는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 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친구들을 많이 둘 수 있겠는데, 가난하면 그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잠언서 19장 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잠언서 19장 6절을 다시 한번 보면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너그럽게 대하고, 여유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면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주고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인색하게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잠언서 19장 7절의 말씀에서도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서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간구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물질이 참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재물이 많으면 사람들이 환영하지만, 그러나 가난하면, 참 물질이 없으면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잠언서 19장 4절과 6절, 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냉정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아니할래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물질은 엄청난 파워가 있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지만, 그러나 그 물질이 없으면 사람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고, 부자에게는 재물이 많으면 사람들이 환영하지만 가난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 삶의 현실을 아주 냉철하게 표현한 말씀이 오늘 잠언서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이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교계의 현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계에서도 누가 인기가 있는가, 교계에서도 누가 환영을 받는가? 많은 물질을 후원할 수 있으면 환영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후원을 하지 못하는, 재정적인 능력이 별로 없어서 후원을 잘하지 못하게 되면 환영받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집회나 어떠한 세미나나 어떤 일들이 있을 때 누가 환영해지고 누가 초대받을 수 있겠는가, 누가 강사로 잘 불림을 받게 되는가? 강사로 가면서 많은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사람이 환영받는 강사입니다. 가끔 제가 교단의 행사를 위해서, 그리고 이번 주에도 신학교에 가서 개강 세미나를 하고 왔는데요. 제가 이렇게 종종 초대를 받는 일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우리 목사님이 굉장히 훌륭하셔서 초대를 받는구나”라고 생각하셨나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후원을 해 준다고 하니까 불러주는 것이고, 강사로 초대를 받으면 제가 대부분 다 거절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강사를 초빙하는 것은 후원을 해 달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계의 현실도 어떠한가? 누가 환영을 받는가? 많은 물질적인 후원을 해서 수련회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물질적인 후원을 하면 그 사람은 세미나 강사로, 수련회 강사로, 어떤 집회의 강사로 환영받는 강사가 되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후원해 줄 수 없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겁니다. 초대받지 못하는 현실이 어쩔 수 없이 교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냉혹한 현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좋지 못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누가 강사로 세워지는가, 누가 세미나나 수련회 같은 데에 자꾸 초대되는가? 정말 “저분은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그 메시지를 들어보아야 되겠다” 하는 사람이 초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후원을 많이 할 수 있는, 그런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초대되다 보니까—그것은 수련회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 방송국·라디오 방송국이든 텔레비전 방송국이든 역시 마찬가지인데—결국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초대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작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성경적으로 바른 사람들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재정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는 이유로 세워지다 보니 그런 세미나 강사를 통해서 좋지 않은, 잘못된 이야기, 성경적이지 못한 가르침도 자주 들려질 수 있는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우리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말 좋다”라고 그냥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사람을 통해 들려지는 메시지가 성경적인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는가, 성경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잘 전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능력들을 우리 성도들이 길러 나가야만 하는 것이고,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서 19장 4절과 6절과 7절의 말씀에서 들려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재물이 많으면 환영을 받지만, 그러나 가난하면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이 말씀을 이 세 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었는데요. 그럼 어쩌란 말이죠? 재물이 많아야 되겠어요? 재물이 많아야 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선은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는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살면서 재물을 잘 모으지 못하고 가난해지고, 그래서 핍절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됩니다. 물질에 관련된 성경적인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힘과 능력, 시간, 재능—그 모든 것들을 잘 사용하고 지혜를 사용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써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여야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인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어떤 성도들은 일하지 않는 겁니다. 수고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먹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게으른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바울 사도는 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면서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일하라. 12절 말씀 다시 한번 비춰줬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여기서 ‘조용히’라고 하는 표현은 ‘성실하게’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실하게 일하여 자기의 양식을 얻어 먹으라—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으로 너희가 먹으라고 바울 사도는 아주 엄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고 놀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먹지도 마라, 먹을 생각을 하지 마라”라고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적인 원칙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물질과 관련된 성경적인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고 땀을 흘려서 물질을 얻어야 하는 것이고, 먹을 것을 얻고, 우리가 쓸 것을 얻고, 수고한 만큼 그것을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첫 번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도리어 수고하여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하라. 이는 궁핍한 자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라.” 불로소득을 구하면서 일하지 않고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그런 도둑놈 심보로 살아가지 말고, 어떻게 하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열심히 일해서, 일한 만큼 물질을 얻어야 하는 것이고, 물질을 얻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물질을 얻어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까요?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헷갈리시죠. 당연히 부자가 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돈이 우상이 되어도 좋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이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 태양이 두 개가 뜨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주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돈을 주인으로 섬기든지—둘 중 하나이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돈을 다 내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돈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우상처럼 섬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돈을 우상처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돈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먹는 것이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돈도 좋아요. 좋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돈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언제인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먹는 것이 죄입니까? 잘못입니까?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죠. 당연히 먹어야 우리가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먹는 것이 죄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언제 죄가 되는 것이죠?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 것을 훔쳐 먹으면 죄가 되는 것.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먹으면 그 먹음이 죄가 되는 것이죠. 먹는 건 죄가 아닌데, 먹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면 그게 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 좋아요. 좋은 겁니다. 능력이 있고 사용할 수 있고 유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 돈이 좋아서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방법을 쓰는가? 사기를 쳐서 돈을 얻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돈이 우상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남의 돈을 편취하는 것, 도둑질하거나 꿔서 갚지 않거나 남의 돈을 그냥 편취하는 방법을 쓰는 것—돈이 우상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뇌물을 수수하는 것, 속임수로 돈을 버는 것,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그 모든 것들은 다 돈이 우상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 자식과 너희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이, 부모님과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죠. 이 돈도 우리가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너무 좋은 나머지—스포츠가 너무 좋은 나머지 우리 편이 이기는 것이 너무 좋은 나머지—반칙을 쓰고 심판에게 뇌물을 주며 잘못된 방식으로 경기를 한다면 그게 잘못된 것과 같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경우는 언제인가? 돈을 우리가 버는 데 잘못된 방식,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면 그 돈은 이미 우리에게 우상이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마디로, 언제 돈이 우상이 되는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우상이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괜찮은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부(富)**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수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나가 씨를 뿌리고 밭을 매고 물을 주고 풀을 뽑고—여름 내내 수고한 다음 많은 수확을 얻는 것, 그것은 복된 일이지 죄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최선의 노력을 다해 장사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은 복된 일이지 악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과 재능과 지혜를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 얻을 수 있을 만큼 가장 많은 것을 얻는 것—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계를 얻기 위해 천막을 만들고 수선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무소유적인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무소유라고 하는 삶이 가장 고상하고, 우리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고상한 단계의 삶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게 가장 고상하고,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최고의 경지라고 성경은 절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무소유를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없는 게 아니라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구절들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야기는,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무소유의 메시지를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한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려면”이라고 질문했을 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다음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신 것을 들으면, 마치 무소유의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적인 최고 수준의 단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죠. 성경 어느 한 구절, 한 부분만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무소유라는 것은 자신을 비워 영적인 최고의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까? 그냥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보냈다가 나중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보내셨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겨 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엄마, 아빠로서 우리 자녀들을 잘 길러야 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선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그저 돌아다니면서 남들이 시주해 주는 것이나 얻어먹고 다니며 의미 없이 살다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렇게 지내다 가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인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목표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부자가 되고, 아무튼 우리가 물질을 지혜롭게—“너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 하신 잠언의 말씀처럼—개미에게 배워서 “정말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잘 일하고, 잘 저축하고, 잘 투자하고, 잘 해서 물질을 많이 얻으면, 부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몰려들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능력들을 다 외면해 버린 채 게으르고 책임감 없는 인생,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살다가 가난하게 되어서 아무도 나를 환영해 주지 않고, 아무도 내게 오지 않고, 오히려 도망가 버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고—이 잠언서의 교훈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부자예요? 부자가 아니에요? 노력했는데 부자가 안 됐어요.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꼭 그런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가난한가? 게을러서 가난한 것 같지는 않아요. 보면 정말 열심히 살아요. 정말 부지런히 살아요. 그런데 부지런히 산다고 해서 모두가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게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우리가 부자가 아닌데, 그래서 다 나를 환영하지 않고 다 나를 떠나가 버리면 어떡하죠? “이런 비참한 인생이 내가 되어 버렸나? 나는 돈도 없고 나는 가난하고 큰일 났다.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 않는가.” 그렇게 절망적으로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서 19장 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언 19장 6절에서 너그러운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성경에서 보는 부자가 어떤 사람을 부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자가 누군가요? 부자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인가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부자인가요? 그래요.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고 마음이 너그러워야 부자인 거예요. 누가 가난한 거예요? 돈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게 아니라,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 가난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거예요, 잠언서에서. 그러니까 누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겠죠. 많지 않아도 콩 한 쪽 나눠 먹을 수 있잖아요. 풍부하지 않아도 마음이 너그러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부자가 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무엇인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워서 이웃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고, 손 한번 잡아 줄 수 있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 조금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런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부자인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환영받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인색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해 주었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자는 농사를 지었는데 아주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됐습니다. 풍년이 든 거죠. 많은 곡식을 얻게 되었을 때 이 부자는 생각했습니다. “이 많은 곡식들을 어떻게 할까? 창고를 더 크게 짓자.” 그러면서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여러 해 쓸 물건들을 쌓아 놓고 마음속으로 기뻐했어요. “이제 살겠다. 내가 이만큼 거두었으니 이제는 됐다. 이제는 행복하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자.” 그게 이 부자의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그 부자를 향해 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2장 20–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부자는 물질이 많아서 부자였지만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웃에게 부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졌어도 부자가 아니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 인색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돈이 많아져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너그러움을 장착할 수만 있다면—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내 주변의 사람들을 향하여 너그러움을 장착할 수 있다면—그게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한번 권면하면서 축복합시다. “부자가 되십시오.” 기분이 좋습니까? 부자가 돼야 돼요. 인색할 게 아니라 너그러워져야 돼요. 왜 우리는 너그러워져야 합니까? 왜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왜요? 환영받기 위해서?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고 나를 친구 삼아 주고 나를 환영해 주니까요? 그게 아니고, 그건 결과이지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야 될 이유, 마음이 너그러워질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부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 망하게 되었을 때 인색하게 우리를 내팽개쳐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여셔서 너그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우리 위해 기꺼이 내어 주신 그 너그러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은 거예요. 로마서 10장 12절의 말씀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으니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향해 인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부요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부요해야 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시다. “주여, 저희들도 부자가 되게 하옵소서.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워서—마음이 풍부해서—사랑의 은혜가 우리 주변으로 흘러가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더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