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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17)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됐는데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오늘 특별히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해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골로새서 3장 1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죠. 너희들의 마음을, 너희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장악하게 하라”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 오늘 골로새서 3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장악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닌 다른 것들이 많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나는 생각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분노하는 마음, 또 원망하는 마음, 슬픈 마음, 불안과 근심과 염려의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들에게 백해무익한 감정들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앞에 있는 그 어떠한 상황들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완전히 쓰러지게 만들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감정이 바로 근심과 염려, 불안, 분노, 섭섭한 마음 등등, 여러 가지 나쁜 감정들이야말로 정말 영적인 바이러스와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여러 가지 나쁜 생각들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것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없앤다고 해서 없애지나요? 없어지지 않아요. 자꾸만 생깁니다. 자꾸만 생깁니다. 이것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겁니다. 어느 빈 컵에 공기가 들어가 있는데요. 그 공기를 따라보려고 하면 공기가 사라집니까? 사라지지 않아요. 항상 그 컵에 공기가 들어있는 것이죠. 아무리 뒤집어서 그 공기를 없애버리려고 해도, 그 공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공기를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물을 따르는 거예요. 물을 따라서 그 컵에 물을 채우면, 그 컵 안에 들어있던 공기는 다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여러 가지 나쁜 감정들과 생각들이 있을 때, 이것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강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채울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평안,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 말씀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평안이 이 세상에 주는 평안과 다르다는 겁니다.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인데요. 도대체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적인 평안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거기서부터 오는 평안함이죠.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을 때, 재물들이 많아지고 성공하게 되었을 때, 승리하게 되었을 때, 많은 것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조건 때문에 마음속에 기쁨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이런 말을 하죠.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모를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농사를 지어서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자, 그 수확을 창고에 채워놓고, 그 창고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야, 먹을 게 많구나. 걱정거리가 없구나. 내가 성공했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평안하게 평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평안의 단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러한 세상이 주는 평안함, 세상이 주는 평강의 단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주는 평안에 단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조건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공한 것 같은데 곧 실패해 버리고, 물질이 많은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성공하는 것 같았는데, 실패해 버리고 썩어질 수가 있고 도둑맞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세상이 주는 평안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떠한 것을 채웠기 때문에 오는 평안함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오는 평안함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 사이의 그 관계성 속에서 오는 평안함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바로 그 사실에서부터 오는 평안함인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끊을 수 있는 게 없는 겁니다. 이 세상의 물건은 사라질 수가 있고, 이 세상의 영광은 사라질 수가 있고, 많은 것들이 다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영원히 끊을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죽음이나 생명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물건에서부터 오는 평안함이 아니라, 그 물건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바로 그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그 평안함이란 흔들릴 수 없는 평안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좋은 일들도 있지만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겪을 때도 많습니다. 어쩌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평안함을 누릴 뿐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괴로워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분노의 마음들, 슬픔의 마음들, 염려와 근심들을 가지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들의 마음 가득 채워져서 주님의 평강으로 인하여 늘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안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골로새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채우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가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감사를 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찾아온다고 하는 것이죠. 감사를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릴 때,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찾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정말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점을 바꿀 때 감사가 가능한 것이죠. 예를 들어서 컵에 물이 반절 정도 채워져 있다고 한다면, 그 컵에 들어있는 물에 대한 관점을 두 가지로 가질 수 있을 겁니다. 한 사람은 “벌써 물을 반절이나 다 마셔버리고, 반절밖에 남지 않았네.”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사람은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물이 반절이나 남아” 있다고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죠. 똑같은 상황이에요. 다른 상황이 아니에요. 감사하는 사람과 불평하는 사람과 그 차이는 조건이 달라서, 감사와 불평이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조건이 달라서 감사할 수 있고, 조건이 달라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떤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사의 반대말이 원망 불평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어떻게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순간에 불평할 수 있을까요? 원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누구냐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평은 무엇이고 감사는 무엇일까요? 한번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감사인가? 어느 상황에서 감사가 가능한가? 내가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호의가 주어졌을 때, 감사가 나오는 것이죠. 내가 얻은 게 아니에요. 내가 쟁취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나에게 무엇인가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감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불평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불평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되고, 내가 당연히 누려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게 되면 불평하게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무엇이 다른가 조건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 감사가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는 겁니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조건이 달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격이 있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향이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언젠가 C.S. 루이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선처를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떻게 하는가? 내가 재판석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판단하는 것이죠. 누가 재판관이에요? 우리가 재판관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판단하는 겁니다. “하나님 왜 내 기도 안 들어줬어요? 하나님 잘못했어. 유죄”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거예요. 내가 당연히 받아야 되고, 내가 당연히 얻어야 되는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안 해줬느냐고 불평하는 것이죠. 내가 당연히 받을 만한 권리가 있고, 내가 이만큼 정말 완벽한 사람인데, 그런데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고,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고 내 삶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그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은 결국 내가 재판관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재판관인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가야 되는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당장 지옥에 처넣어도 우리는 단 한마디 항변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하고, 그래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도 아무 항변도 없이 그냥 내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한다면, 그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워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사람들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재판하고 내가 당연히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것이죠.    

그 옛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가인은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때 가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리면서 왜 내 제사를 안 받았느냐고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예요? “네가 왜 얼굴이 변했느냐? 왜 네가 화를 내느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당연히 예배를 받아줘야 돼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갖다 줘야 돼요? 하나님에게 우리가 뭔가 맡겨놓은 게 있어요? 아니잖아요! 마치 우리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아요. 우리 어린아이들의 생각이 뭐예요? 우리 엄마 아빠가 자기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당연한 거예요. 매일매일 밥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아이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밤새도록 밤을 지새우면서 그 아이를 돌보고 사랑을 베풀어주고 모든 그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데 어느 날 “아빠, 이거 해줘.” “엄마, 이거 해줘.” 해서, 말 안 들어오면, 말 안 들어줬다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봐?” 하면서 화를 내버리고, 집을 뛰쳐나가는 그런 정말 우리의 아이들의 어리석은 모습처럼,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일상화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인 양 착각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빠, 엄마, 나를 잘 길러주기 위해서, 제가 100억 원을 내가 예치해 놨으니까, 잘 길러주세요.” 하고 맡겨놓고 태어났죠?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라, 아무것도 준 거 없어요. 아무것도 한 거 없어요. 하지만 엄마 아빠가 사랑으로 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 주고, 힘이 딸려서 못해주는 거 있으면,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신경질 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를 보면서 늘 감사하고 너무나도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사실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살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예요. 그런데 공기가 늘 있기 때문에, 그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우리들처럼,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베풀어주는 일상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처럼, 오늘 일어나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이 마치 은혜가 아닌 것처럼, 당연한 것을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지 아니하고 불평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알고 부르고 있는 손경민 목사님의 찬양 은혜라고 하는 그 복음 성가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에 놓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의 은혜였소.”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요.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걸어가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셔야 돼요. 이것도 은혜구나. 저것도 은혜구나. 내가 남편과 같이 사는 것도 은혜구나. 내가 지금 걸어갈 수 있는 것도 은혜구나. 내가 숨 쉬는 것도 은혜구나.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구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크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늘 우리는 감사를 잊고 살아가게 되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감사해야 되는 것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골로새서 3장 16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16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꾸만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가득하도록, 우리들의 생각을 장악하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꾸만 생각해야 된다. 다른 생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채울 게 아니에요. 분노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게 아니에요. 누군가 나에게 섭섭하게 했으면, 그 섭섭하게 한 일을 자꾸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누군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잘못한 것을 자꾸만 또 떠올릴 게 아니에요. 그런 건 어떻게 해야 돼요? 잊어버려야 돼요. 잊어버려야 돼요. 잊어버려야 돼요.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한다면 잊어버려야 돼요. 그걸 빨리빨리 잊어버리고 무엇으로 채워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가득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채워야 해요.    

sbs 프로그램 중에 “골 때리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웃는 거 보니까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제가 유일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는데, 수요 예배 마치고 가서 꼭 봅니다. 골때녀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서, 공을 차다가 골이 먹히게 되면, 감독이든 선수들이 외치는 말이 있어요. 뭐라고 외치던가요? “빨리 잊어버려. 빨리 잊어버려.” 빨리 잊어버리라고 “골 먹혔던 거 잊어버려. 내가 실수했던 것 잊어버려. 잊어버리고 우리 늘 수 있어. 우리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직 시간 남았어.”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잊혀지나요? 안 잊혀져요. 내가 실수해서 골을 먹히고, 내가 잘못해서 골이 먹힌 그것이 내게 트라우마가 돼서 경기를 잘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내가 한 골 먹혔다고 하는 것을 잊을 때가 있어요. 언제 있습니까? 우리가 골을 넣었을 때 지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까 골이 하나 들어가서 1 대 1 균형을 맞추게 되면, 내가 골이 먹혔었다고 하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이길 것만 같아요. 갑자기 경기가 잘 풀리기 시작해요. 힘이 솟아올라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 이기던 팀은 동점이 됐는데, 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다운이 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역전당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축구라고 하는 게 뭐냐? 이거 멘탈 경기다. 어떻게 멘탈을 잡고서 싸우느냐가 정말 중요한 경기다. 근데 축구만 그러겠어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우리의 삶이 마찬가지 멘탈 경기죠. 프로는 누군가 누가 프로인가? 손흥민 선수나 황희찬 선수나 이런 선수들 이강인 같은 선수들, 그런 선수들은 저도 먹혀도 흔들리지 않더라고요. 그게 프로더라고요. 원하긴 우리 모두가 영적인 프로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빨리 잊어버려야 돼요.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하고 섭섭하게 하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망가져버리고, 그리고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했을 때,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한 골 먹혔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이 가득하게 채워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나 승리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승리해 주신 그 승리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서로가 서로를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가 서로서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있으면 늘 넘어져요. 혼자 있으면 늘 영적으로 잡아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죠. 밀림에 있는 얼룩말들은 약한 동물인데 그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무리를 지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서 혼자 있는 그 얼룩말은 맹수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함께 교회 공동체로 있는 이유가 그거예요. 서로 손 잡아주고 힘내 같이 하자 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생활을 같이 해야 될 필요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물론 그 말은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해서 선생 노릇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선생 노릇하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4절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재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이를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의 손을 잡아줘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같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자. 같이 감사하자. 서로 손을 잡아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도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거죠. 우리 아이들을 기를 때 아이들만 큰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기르면서 내가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같이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내년에는 우리가 성경 일독을 하려고 그래요. 주부에 살짝 광고를 이 밑에다가 적어놨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보셨죠? 이게 뭐냐 내년도에 우리가 성경 일독,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 일독을 하자. 하루에 4장, 5장씩 읽어가면서 성경을 쭉 읽어서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서로 그룹을 지어서 연령별로 카톡 그룹을 해서 요즘에는 옛날처럼 구역 예배로 모이기가 어려운 시대가 돼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옛날 방식으로 할 수는 없고 이제 새 시대 새로운 좋은 방법들이 있으니까, 카톡으로 서로 묶어가지고 성경을 서로 읽자. 나도 은혜받았다 하면서, 서로 서로 이렇게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내년 한 해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사는 우리 예수비전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기대가 되십니까?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떻게 해야 되는가? 감사의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16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감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말은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절망적인 말을 내쏟으면 그러면 결국 우리는 좌절하고 녹슬고 망가져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입술 가운데 찬송을 하고 감사를 하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들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이번에 감사 카드를 적으라고 했는데 적으라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적어보면서 생각하고 쓰면서 표현하면서, 그래서 우리 교의 마음이 더욱더 다져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시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찬양 올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17절의 말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감사하는 비결 또 하나가 뭐예요? 모든 일을 할 때,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한다고 늘 고백하는 겁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잘 될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교만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평상시에 늘 고백해야,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그 옛날 추수감사절을 만들었던 미국의 청교도들은 그 첫 추수 감사절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이 신대륙에 와서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와서 성공하는 게 쉽겠어요? 어렵죠.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성공됐겠어요? 망쳤죠. 수고한 것보다 적게 거두고, 기대했던 것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성적표를 자신들의 앞에 두었지만, 그러나 그 청교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했어요. 왜? 우리가 이 신대륙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감사하는 것이고, 이 대서양을 건너와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감사한 것이고, 이곳에서 이렇게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감사한 것이고, 우리를 도와줬던 원주민들, 인디언들,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고,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린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재판장의 위치에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멸망받아야 될 그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서 우리가 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며 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가운데 영광의 그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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