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괜찮지 않습니다 (잠 16:25)

무엇이 진리일까요? 무엇이 진실일까요? 무엇이 거짓일까요? 무엇이 바른 길일까요? 무엇이 바르지 않은 길일까요? 무엇이 진실이죠? 무엇이 바른 길이죠? 정답은 진실이 진실이고, 바른 길이 바른 길입니다. 그냥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겠지만, 진실이 진실인 것이고, 바른 길이 바른 길인 것이죠. 거짓은 거짓일 뿐이고, 바르지 않은 길은 바르지 않은 길일뿐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이 진실인 것이죠. 바른 길이 무엇인가? 바른 길이 바른 길입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이것은 옳다고 생각을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어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진실은 항상 진실이고, 거짓은 항상 거짓이고, 바른 길은 항상 바른 길이고, 옳지 않은 길은 항상 옳지 않은 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평상시 착해 보이는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는 법이 없는 것이고, 악해 보이는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법은 없는 겁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는 게 아니고,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1등 언론사에서 보도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는 게 아니고,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게 아닌 것이죠. 노벨 과학상을 받은 아주 저명한 학자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 진실이 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단 총회에서 결정을 한다고 할지라도,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 진실이 되는 법이 없이, 항상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무엇이 진실이냐?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게 아니고, 진실이어야만 진실이 되는 것이고, 거짓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6장 25절의 말씀 딱 한 절만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잠언서 16장 25절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우리가 보기에 옳은 길 같아요. 우리가 보기에 그 길은 바른 길 같아요.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정답인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일 수 있다고 오늘 잠언서 16장 25절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사망을 향해서 가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이 길이 바른 길이라고 확신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저건 망하는 길인데, 분명히 저건 잘못된 길인데, 그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서도, “나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라고 확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확신 가운데 걸어가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강력한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는 법은 없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법은 없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요즘 많이 활기치고 있는 이단들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이단들이 어떤 이단들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뭐 전도관도 있었고, 예전에는 뭐 무슨 여러 가지 이단들이 많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이단들이 있고, 그런 그런 이단들이 많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리 가운데 서 있다고 굉장한 확신 가운데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늘 교회로 편지가 옵니다. “사랑하는 우리 이국진 목사님, 당신이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까, 신천지로 돌아오십시오.” 하면서 편지가 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는데, 사람인 한 교주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사람인 한 교주를 마치 선지자나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걸어가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가 그랬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마음 가운데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슨 확신이 있었나요? 교회의 공동체는 이것은 잘못된 공동체다. “예수는 순 엉터리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는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믿고 있던 그 확신에 따라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면서 성도를 잡아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핍박하면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박해하면서 그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최전선 가운데 앞장섰는데, 바울 사도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습니까? 내가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핍박하면서 다녔던 것이죠. 자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랬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그랬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행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바울 사도가 자기가 잘못됐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을 향해서 가는 도중에, 성도들을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바울 사도는 지금 다메섹을 향해서 가다가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얘기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하는 그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자기가 지금까지 확신하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잘못된 것이었고, 내가 틀린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그 교회가 바른 교회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결국 이 사람은 완전히 바뀌어서, 전에 자신이 핍박하던 그 신앙을 전하면서 자신의 그 삶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필경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또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우리가 혹시라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진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다 될 수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 가운데 내가 지금까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잘못인지 잘못이 아닌지 확인하지 아니하고, 점검하지 아니하고, 그냥 확신 가운데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확신 가운데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게 사망의 길이라고 한다면, 돌이켜서 바른 길로 가고 진리 가운데 돌아가는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옳았던 것이 결국에는 사망의 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이 잠언서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이런 사망의 길을 확신 가운데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걸 생각하셔야 돼요.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 지금까지 내가 확신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래서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늘 점검하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우리가 늘 확인하면서 진리를 발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인데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항상 이 말씀을 마음속에 묵상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맞는가?”라고 하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익숙해 왔던 것, 내가 경험해 왔던 것, 내가 지금 관습적으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아무런 점검이 없이 그냥 밀고 나가다가, 멸망의 길로 가지 아니하도록,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되는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제 안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하는 말, 다른 사람들이 정반대로 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됩니다. 겸손하게 “내가 혹시라도 잘못될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이 옳지 않은지, 그 사람의 제안이 더 나은 제안은 아닌지 항상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가운데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죠. 정말 저 사람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정말 저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더 좋은 길로 갔으면 게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저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길로 가보면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제안들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제안을 들었을 때에 그냥 외면해 버리고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나는 못해. 나는 그건 할 수 없어.” 그냥 자신의 능력을 제한시켜 버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시켜 버리면서,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루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제가 얼마나 많이 만나봤는지 모릅니다. 정말 저 사람이 이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서 있으면 안 되는데, 저 사람이 이렇게 그냥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데, 좀 더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싶어서, 그 사람에게 이런 제안을 해보고 저런 제안을 해보고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많은 권고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을 듣느냐 하면, 말을 안 들어요. 아주 놀랍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변화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면 될 텐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굳어져버려 있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어. 나는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야.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 최고야. 그냥 나는 이렇게 살래 내버려 둬.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그냥 자신이 살아오던 그 삶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정말 기쁨이 없는 발전이 없는 그런 삶으로 계속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감옥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놓는 거죠. 내가 지금 다 생각해 본 겁니다. 내가 생각해서 나는 여기까지만 갈 수 있고, 나는 여기까지만 할 수 있고, 내 능력은 이만큼이고 자기 자신의 그 가능성을 이렇게 제한해 놓고, 그 울타리 속에 감옥 속에 들어가서, 전혀 발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여 듣고, 그게 아니라 그 담장을 뛰어넘으십시오. 거기서 그렇게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시도해 보고 저런 것도 시도해 보고 다른 더 좋은 길들이 있으니 시도해 보라고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더 먼 곳을 향해서 더 활기차게 나갈 수 있어야 될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특별히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확증편향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리고, 오로지 내 생각을 강화시키는 이야기들만 귀를 열어놓고 듣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들을 때도 어떻게 듣는가? 내 마음에 듣기 좋은 것만 듣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것에 맞는 이야기들만 계속 들으면서, 내 생각이 맞았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내가 원하는 생각들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자기 확증을 더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죠. 누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면 안 들어버려요. 정반대 쪽에서 이야기하면 아예 들으려고 생각도 안 하고 무시해 버리고, 전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다가, 결국 내가 확신하고 있는데,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이단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 이단 하나님의 교회에 빠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확신이 얼마나 강할까요? 우리 교회 교인들보다 확신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엄청난 확신 가운데 있어요. 그렇게 확신을 강하게 하고 있으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게 진리로 바뀌어버리죠?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안 바뀌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확신하고 있어도 진리는 진리고 거짓은 거짓일 뿐이지,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로 바뀌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사실 우리들에게 좀 혼란스러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자주 듣는 메시지는 무엇이냐 하면, 따져보고 의심해 보고 바른 길인지 점검해 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나요?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까?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믿고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많이 듣잖아요? 그죠? 강단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무슨 말씀을 해요? 믿어라. 믿고 의심하지 말고, 아멘 해라. 그래야 확신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라고 이야기를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는데, 오늘 잠언서 16장 25절의 말씀은 지금 내가 가는 그 길이 옳아 보이지만, 과연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라 사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을 보면서, 과연 내가 가는 그 길이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인지 진리로 인도하는 길인지 분별해야 된다고 하는 이 메시지는 교회 내에서 많이 듣지 못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진리”를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에요. 그 알맹이가 진리였을 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성경 말씀은 진리입니까? 예 진리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믿고 확신을 해야 되고 의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신천지 그 혹은 하나님의 교회 그런 이단들이 가르쳐주는 그 메시지가 전해진다고 한다면, 믿고 확신해야 됩니까?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까? 의심해야 됩니까? 의심해야 돼요! 그때는 거짓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되는 게 맞는 것이고, 진리에 대해서는 믿고 확신하는 게 맞는 거예요. 아무거나 믿고 확신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믿고 확신해야 되겠지만,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심하고 따져보고 정말 바른 길인가 재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씀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에는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말씀만 있는 게 아니고, 의심해 보라고 하는 말씀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 말씀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어라? 믿지 말라? 영을 다 믿지 마라! 영적인 이야기 한다고 다 믿지 말라.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 세상에 수많은 거짓된 가르침이 있고, 그리고 그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를 영적으로 착취하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사망의 길로 이끄는 거짓 선지자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들에게 거짓 선지자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을 하고 옵니까? 양의 털을 쓴 진짜처럼 하고 우리들에게 오고 있기 때문에, 정말 진짜처럼 모습을 가진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조건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분별해서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메시지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메시지인가? 분별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하면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되지만, 그러나 그 전해지는 메시지가 성경 말씀과 정반대의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한다면, 의심하고 배척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게 된다고 한다면 인도하는 맹인이나 따라가는 맹인이나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늘 우리는 항상 이것이 진리로 인도하는 길인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인지, 분별하는 가운데 참된 믿음 제대로 분별하여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그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가다가 생기는데요. 내년에는 우리 교회가 전 교인이 성경 일독을 하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연령별로 그룹을 다 짜서 서로 성경을 읽고 격려하면서, 그래서 성경 읽도록 하기 위한 계획을 지금 세워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제대로 잘 받아들여야 그게 우리들에게 영적인 유익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관점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그리고 그 성경이 나의 기존의 생각과 맞으면 받아들이지만, 내 생각과 맞지 아니하면 거부해 버려서, 결국에는 우리를 교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은 전혀 변화시키지 아니하면서, 그냥 성경을 우리가 입맛에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은 취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확증 편향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전에 했는데요. 그 확증 편향에 걸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소식들이 들리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막 받아들여요. 그런데 자기랑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그것들은 다 거부해 버려요. 근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게 성경을 읽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그 성경 말씀의 수술대 앞에 우리 자신을 수술시키면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 생각을 바꾸어 나가고, 성경 말씀에 따라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야 될 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 마음 가운데 방패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방패를 딱 하나 가지고 있어서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무슨 말하려면, 그 방패로 딱딱 쳐내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내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꾸만 밀어내는 거죠.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성경 말씀을 자꾸만 거부해 내게 된다고 한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그 길은 패망의 길 죽음의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기를 우리가 옳은 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바른 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패망의 길 죽음의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이것이 바른 길인지 옳지 않은 길인지 분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의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이 무엇입니까?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면, 그러면 그 물이 동할 때 환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그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든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히 깨끗하게 낳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소문을 듣고 수많은 환자들이 모여든 거죠. 그 소문이 거짓일까요? 진실이었을까요? 거짓입니다. 뜬소문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지, 실제로 물에 그런 능력이 있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모여 있는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 베데스다 연못은 나를 치유해 줄 수가 있다. 그래서 환자들이 다 몰려든 거예요. 환자들이 한 명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몰려들어서 저 베데스다 연못이 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데스다 연못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겠습니까? 아니요. 수천만 명이 그렇게 믿고 있는다고 해서,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치유의 물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치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베데스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죠. 예수님에게 나아갔을 때,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고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베데스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 5장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일 가운데도 이런 비슷한 잘못된 길들이 있는 것이죠. 베데스다와 같이 바른 내 병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잘못된 그런 신화들이 이 세상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라고 하는 모두가 다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좋은 대학에 가면 그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을 거라고 하는 그런 소문들, 성공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거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가 다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데 정작 그 길을 걸어가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정말 그 길이 생명의 길인 줄 알고 열심히 살아봤지만 결국 건강 잃어버리고 가족이 힘들어지고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하는 그런 결과만을 가져오고 피폐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 모습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게 됩니까?      

그 옛날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행복해질 거다.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의 눈이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그 말에 많은 사람 아담과 하와가 속아 넘어가서 그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죠. 그것이 나를 살릴 수 있는 바른 길이고 생명의 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 길은 결국 하나님에게서부터 쫓겨나는 길이오,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는 그런 패망의 길이었다고 하는 것이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진리의 길 가운데 서고, 생명의 길 가운데 서고, 진리를 확신하고 진리를 의지하는 가운데, 그 믿음을 가진 가운데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혹시라도 잘못된 생각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잘못된 길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 옳은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